[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⑯] “우리 후손들, 반일종족주의 극복하고 자유시민 되어야”

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 완결편 ... 이영훈 “우리 대한민국의 지성사회가 실로 적지 않은 위기에 봉착했다”

하동훈 기자 jaja36882@gmail.com 2020.08.05 22:25:51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은 지난 2019년 6월 20일 16회차 마지막 동영상 강의(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를 통해 같은해 2월 15일부터 시작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동영상 강의 전체를 마무리했다.

이 교장은 “제가 12번 강의를 하고, 주익종 교사가 3번 강의를 하는 사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기존의 통념에 대한, 어떤 대담한 도전이 나름대로는 이뤄졌다고 생각한다”면서 종강 소회를 밝혔다. 실제 이승만학당의 관련 동영상 강의에는 매 강의마다 많게는 1만 여명의 시청자들이 6, 70여개의 긍정적 댓글을 다는 등 뜨거운 반응이 이어졌다.

미래세대의 ‘종족주의’ 극복을 위한 강의


하지만 종강을 앞두고도 정작 위안부에 대해 연구하거나 운동을 이끈 단체들은 지난 4개월간 이승만학당의 강의에 대해 아무런 반응도 내놓지 않았다. 이승만학당의 강의 내용이 위안부 단체들이 그간 내세워온 명분,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 반박하고 있음에도 그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위안부 단체들이 아무런 반응이 없는 이유와 관련, 이영훈 교장은 “우리의 강의 내용이 불충실 했다기보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진보와 보수 간 감정이 종족주의적 형태로 대립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한마디로 말해 우리 한국사회는 역사인식, 정치의식에 있어 심하게 분열돼 있는 상태”라고 덧붙였다.

이 교장은 일본 문제와 관련해 한국 사회의 분열적 상태를 ‘종족주의’란 단어로 설명했다. 종족주의란 한 사회가 몇 개의 씨족이나 종족을 단위로 분열해있는 상황이다. 그는 종족주의에 대해 “상호간에 무관심 혹은 적대의식이 있는 가운데 객관적 논변이 성립하지 않는 사회 행태를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후손들, 다음 세대들은 이런 종족주의적 감정을 극복하고 서로간의 의견의 차이를 편안한 얼굴로 공동의 해답을 모색해 나가는 자유시민으로 성숙해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위안부 문제, 마른하늘에 벼락같이 생겨난 문제 아냐

이 교장은 지난 강의들을 요약하며 ‘위안부 문제란 일본군이 맨땅에 위안소 건물을 짓고 지나가는 처녀나 소녀를 납치해서 집단 강간한 것’란 기존 통념을 넘어서서, 하나의 역사적 사건이 발생한 어떤 긴 전사를 자신이 추적했음을 설명했다.

이 교장은 기생제도를 예로 들었다. 그는 “조선시대에도 군위안부라고 부를만한 하층 신분의 여성을 대상으로 한 지배신분에 의한 성의 약취가 있었다”라고 지적했다. 공창제는 조선시대에서부터 이어져 일본이 시행했다. 공창제는 처음엔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들을 위한 매춘업 차원에서 존재한 것으로, 1930년대 이후 조선인들도 여기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민간의 공창제 매춘업은 주로 빈곤 계층, 가난과 가정 폭력에 노출된 빈곤계층의 여성들이 종사했었다. 호주 혹은 가부장은 주선업자들이 제공하는 전차금(前借金)에 자신의 가족을 팔아넘겼다. 이런 제도는 어떻든 가부장이 전권을 갖고 있었던 당시 시대적 상황에서 불법이 아니었다. 이 교장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공창이란 하나의 후방 부대가 있다면, 일본군 위안소 제도는 그런 공창 중 일부를 전방으로 동원하고 편성한 것”이라면서 “본질적으로 공창과 위안부, 둘은 차이가 없다고 설명했다.

위안부 제도는 일제의 지배가 끝난 후에도 계속됐다. 이 교장은 “해방 후 위안부 제도는 일제치하보다도 훨씬 더 양적으로 팽창했고 위안부들의 생활 실태는 더더욱 열악해졌다”고 지적했다. 1942년도에 전국의 공창제 매춘업에 종사하고 있는 여자는 남북한을 합쳐 9500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해방과 함께 공창은 사창으로 변모했고, 이후 1966년도 당시 남한에서만 33만 명이 매춘에 종사했던 것으로 분석된다. 이는 당시 20대 여성의 8% 에 달하는 수준이다.

이 교장은 “거대한, 해방에 따르는 혼란과 전쟁에 따른 파괴, 빈곤이 이미 활성화된 대중매춘사회의 전개와 더불어 많은 여인들을 사창으로 들어갔다”면서 “성매매를 전업으로 하는 여인들을 여전히 위안부라고 불렀다”고 설명했다. 

그는 “위안부 제도는 1960년대까지도 한국사회에 그대로 존속했으며, 하루 유객수, 노동의 강도, 노동의 실태, 소득 실태, 포주와의 관계 등 일제 때의 그것과 비교해 좋았었다고 이야기 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그는 “(사창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위안부라는 말은 나중에 없어졌지만, 사실상의 위안부 제도가 심지어 1990년대, 2000년대 초까지도 존속했다”고 덧붙였다. 

박유하 교수의 ‘제국의 위안부’


이 교장은 박유하 세종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의 저서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 2013)를 둘러싼 논란에 대한 설명으로 강의를 이어나갔다. 이 책은 일본군 위안부들의 삶에는 다양한 케이스가 있기 때문에 단 하나의 이미지로만 그들을 규정하고 관련 문제를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교장은 “이 책은 출간된 직후에는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도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역사적 모순을 총제적, 심층적으로 해부했다는 호평을 받았다”며 “국내의 좌파, 진보로 불리는 언론에서도 호의적인 서평이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고 말했다.

초반에는 분명 호의적 반응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바뀐 사회 분위기 속에서 박유하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로 인해 위안부 9명으로부터 허위사실 적시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해야 했고 결국 2017년도에 2심에서 벌금 천만원 유죄를 선고 받아야 했다. 현재 박 교수는 대법원에 상고한 상태로, 대법원은 3년째 선고를 미루고 있는 상황이다.

박유하 교수에게 소송을 제기한 소송대리인들, 나눔의집, 기타 단체들은 ‘일본군 위안부는 순결한 소녀들이었으며, 어느날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납치됐고, 위안소란 장소에 끌려 들어가서 집단강간을 당했다’는 주장을 이어나가고 있다. 위안부 문제는 기본적으로 일본군에 의한 전쟁범죄라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그들은 박유하 교수가 저서를 통해서 ‘위안부가 자발적이건 강제적이었건 간에 어떻든 ‘매춘’으로 볼만한 일을 하였으며 보수를 받았음은 사실이라고 한 것’, 그리고 ‘이른바 소녀상이 상징하는 14, 15세의 소녀들, 단발머리 소녀들이 군에 의해 납치된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 것’에 불만을 품고서 지식인의 입을 틀어막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이영훈 교장은 “박유하 교수는 저서를 통해서 당시 제국의 신민이었던 조선인 출신의 위안부의 심리, 또 위안부 제도가 갖고 있는 여러 복잡한 측면을 드러내려고 했을 뿐”이라면서,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 제목이 바로 그런 뜻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박 교수에게는 일본군이 창설하고 운영한 위안부 제도를 미화하거나 관련해 일본군의 책임을 면제하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것이 이영훈 교장의 설명이다.

법원은 ‘제국의 위안부’의 내용 중에서 총 34군데를 수정하게 했다. 하지만 박유하 교수는 법원 뿐만이 아니라 자신을 비판하는 법학자, 사회학자, 문예비평가 등이 자신의 저서에서 특히 ‘매춘이라는 글자를 지우라고 함으로써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지금도 존재하고 있는 매춘 산업에 종사하고 있는 여인들에 대한 차별의식을 노골화하고 있다고 항변하고 있다. 매춘부라면 오히려 일본군에게 당해도 좋다는 식 ‘가부장적인 폭력적 심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다. 

위안부 문제로 드러난 한국 지성 사회의 척박한 수준

이영훈 교장도 박유하 교수의 이런 입장에 맞장구를 쳤다. 그는 ‘제국의 위안부’ 문제로 박유하 교수가 고초를 겪고 있을 때 한국에서 진보를 자처하는 역사가 가운데 박교수를 위해 공개적으로 변론해준 사람이 없었다”고 개탄하면서, 책에 쓴 표현을 함부로 지우라고 하는 것은 그 일제시대와 동일한 파시스트적, 전체주의적 발상을 갖고서 ‘이런 기억 외에 다른 기억을 가질 자유는 없다’, ‘그런 기억을 갖고 있다면 반민족적이다’고 하는 것이며, 이는 한 연구자의 연구의 자유, 표현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 교장은 정대협 등이 이끌어온 한국 위안부 운동의 폭력성 문제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그는 “위안부 생활에 대한 고백을 강요하고, 얼굴을 노출시키고, 시위현장에 끌고 다니는 것, 그것은 한 사람에게는 고작 2, 3년에 불과했던 위안부 인생을 폭로하게 만듦으로써 그들의 70년, 80년 인생 전부를 지워버리게 하는 것”이라면서, “이런 위안부 운동단체의 폭력적인 운동방식을 즐겨 수용하는 한국인들의 심성의 태세가 바로 그 자체가 종족주의적 폭력성이라고 꼬집었다. 

이 교장은 “위안부 문제로 인해서 한국의 지성사회는 사실상 해체됐다, 또 한국의 외교도 사실상 마비됐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위안부 운동가 몇 명이 외교부 꼭대기에 앉아서 외교부의 대일정책을 좌지우지 해왔다”면서 “이는 하나의 정상적인 국가의 지성과 외교라고 할 수가 없다”고 개탄했다. 

이 교장은 “이러한 두려운, 걱정스런 마음으로 저는 이 강의를 쭉 진행해왔던 것이고, 종강을 위해 박유하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이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됐다”면서 위안부 문제 관련 강의를 마무리하는 소회를 밝혔다. 

마지막으로 이 교장은 “저희들이 했던 강의는 이 달 말쯤 ‘반일 종족주의’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라고 소개하며 강의를 마쳤다.



위안부 진실을 폭로한 책, 일반 시민들의 지지받으며 베스트셀러로 등극

한편, 이 교장이 당시 곧 출간된다고 언급한 책 ‘반일 종족주의’는 2019년 7월 10일에 발매됐다. ‘반일 종족주의’는 발매가 되자마자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사회과학 서적으로는 이례적으로 10만부가 팔리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반일 종족주의’는 이후 ‘반일 종족주의 일한위기의 근원(反日種族主義 日韓危機の根源)’이란 타이틀로 2019년 11월 15일 일본에서도 발매됐다. 발매 당일부터 이 책은 12월 마지막 주까지 일본 아마존 북, 라쿠텐 북스 등 인터넷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다. 일본에서는 40만부 가량이 판매된 것으로 알려졌다. 

‘반일 종족주의’는 올해 5월 16일, 후속작인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이 발매되면서 거듭 화제를 모으고 있다.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는 노학자의 외침에 대한민국 일반 시민들이 열띤 호응으로 화답하고 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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