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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검열한 ‘감동드라마’그 너머에 있던 진실

‘디어 평양’ ‘굿바이 평양’ 의 양영희 다큐멘터리 감독이 말하지 못했던 것


재일동포 2세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이기도 한 양영희 감독이 한국에서 공개한 영화 두 편이 있다.‘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이다. 이 두 영화는 일찍이 ‘위대한 조국 건설’의 꿈을 안고 북송선을 타고 북한으로 건너간 오빠들을 만나기 위해 평양을 왕래하며, 홈비디오 카메라로 ‘평양의 오빠가족’과 ‘오사카의 부모님’ 모습을 담은 한 편의 가족 앨범이기도 하다.

제주도 출신으로 오사카에서 조총련의 고위 간부를 지내고 있는 아버지의 의향과 조총련 사회에서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세 명의 오빠는 차례차례 ‘귀국사업’에 따라 북으로 건너간다. 아직 어려서 일본에 남겨 둔 막내 여동생(양영희 감독)에게는 ‘너도 훌륭한 어른이 되어 나중에 북으로 오라’는 말을 남긴 채.

어린 여동생이 오빠들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11년이 지난 후. 냉전의 비극은 그대로 양 감독의 가족에도 영향을 미쳐, 오빠들은 북에서 생활하면서 잠시 동안의 일본 귀국도 허락되지 않는 상황에서 살고 있었다. 만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일본의 가족이 평양으로 오빠들을 만나러 가는 방법뿐. 몇 년에 한번 오빠들을 만나러 가서 보게 되는 조카들, 그리고 비디오로 찍어 온 오빠 가족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움을 달래는 늙은 부모의 모습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까지가 한국 언론에 주로 알려진 영화의 내용이며, 보도된 기사 내용들이다. 이 영화를 보고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가족의 소중함, 멀리 떨어져 있어도 이어지는 끈끈한 가족애, 분단이 만든 비극, 냉전의 산물을 고스란히 떠안고 가는 한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 정도가 아닐까? 실제 많은 영화평이나 관객들의 리뷰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양 감독의 영화는 철저히 ‘검열’을 받은 영화이다. 평양에서 오사카로 돌아올 때 북한 당국에 의해 테이프의 단 한 장면도 빼지 않고 ‘체크’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영화의 내용에 따라 오빠 가족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기 때문에 보여주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은 지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영화와는 달리 좀 더 진솔한 이야기가 나와 있는 것이 양영희 감독이 펴낸 한 권의 책이다.

영화가 말하지 못한 사연들

양영희 감독이 펴낸 ‘오빠는 평양에서 죽었다(兄さんは平で死んだ)’(2009)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일본의 유명 저널리스트 사타카 마코토(佐高信)와의 대담집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영화나 인터뷰에서 보여주지 못한 많은 사연들이 소개되어있다. 그리고 그 사연들은 영화에서 느끼는‘안타까움’이 아니라,‘절망’과‘비탄’이 담겨있는 단장(斷腸)의 내용들이다.

오빠들이 북으로 건너가는 계기가 된 ‘북송사업’은 한국과 북한의 자존심 싸움과 비슷한 것이었다. 체제의 우월성을 대내외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북한은 재일동포들을 선동하여 귀국사업을 서둘렀는데, 이 때 그 수단이 된 것은 조총련과 조선학교였다. 김일성은 공개적으로 일본정부에 대해 ‘인도주의를 위해 일본정부는 당연히 귀국사업을 허용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조총련과 조선학교는 북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기라도 하듯 능력 있고 뛰어난 젊은이들에게 환상을 심어주고 그들의 감성에 호소하여 차례차례 북으로 보냈다.

이때 조총련의 고위간부인 양 감독의 아버지도 아들들을 북으로 보내게 되는데, 그 과정에는 조선학교 교사들의 집요한 설득과 조총련의 대대적인 선동이 있었다. 조총련의 의장 한덕수는 전국의 조총련 지부를 순회하며 “일본에서 차별받지 말고, 차별이 없는 공화국으로 가서 조국을 위해 일하자”고 젊은이들에게 호소했다. 당시는 그것이 선(善)으로 보이던 시대였다. 양 감독의 말에 따르면 “오빠들이 거부하기 힘든 분위기였다”라고 한다.

아들들을 사지(死地)로 보낼 사람은 없다. 양 감독의 아버지 역시 아들들을 북을 보낸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하지만 아들들을 보내놓고 30년 동안 일본에 남은 가족들 역시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다. 30년 동안 하루가 멀다 하고 생활용품, 의약품, 돈을 소포로 보내며 노심초사하는 세월을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송금과 소포가 끊어진다는 것이 오빠들에게 있어서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아들과 오빠에 대한 걱정 때문에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30년이 된 것이다.

어느 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양 감독은 큰오빠의 말투가 갑자기 느려지고, 대화가 어긋난다는 느낌을 받는다. 작은오빠에게 ‘큰오빠가 약간 이상하다’는 말을 하자, 작은오빠는 숨겨왔던 큰오빠의 ‘증세’를 말해준다. 큰오빠는 우울증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대답에 놀란 양 감독이었지만, 오빠들과 평양에 있는 한 식당에 갔을 때 큰오빠의 충격적인 모습을 보게 된다. 맥주를 몇 잔 마신 큰오빠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좋아하는 교향곡을 부르며 지휘자처럼 팔을 휘두르며 지휘를 시작한 것이다. 발광(發狂)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여동생은 울음을 터뜨리고,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한다. 오빠들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놀란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계속 우는 여동생에게 작은 오빠가 남긴 한마디는 더욱더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찌른다.

“영희야, 울지 마라! 울고 싶은 건 우리라고!”

결국 큰오빠는 부모님이 있는 오사카로 돌아오지 못하고, 우울증에 걸려 평양에서 눈을 감는다.

영화보다 슬픈 현실

영화 ‘디어 평양’이 국제적인 지명도를 얻으며 크게 화제가 되자, 북한 당국은 양영희 감독의 입국을 제한한다. 양감독은 이어서 공개된 ‘굿바이 평양’ 역시 좋은 반응을 얻어 단숨에 유명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었지만, 자신의 영화가 평양에 있는 오빠 가족들에게 피해를 준 것은 아닌가 걱정하면서도 조카 선화를 다시 만나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평범한 고모이기도 하다.

양 감독이 제작한 두 편의 영화는 한 편의 잘 다듬어진 ‘감동드라마’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에 나오는 소재는 전부 북한의 검열을 통과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인적 독백이 나와 있는 책‘ 오빠는 평양에서 죽었다’에는 영화에서는 보이지 않던, 한 가족을 수 십 년 동안 고통스럽게 만든 ‘드라마’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 드라마는 바로 현재진행형의 ‘인질극(人質劇)’이기도 하다.

(* ‘오빠는 평양에서 죽었다’는 국내 출간돼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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