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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의학 비판의 원조, 정약용

대의(大醫)의 길을 걸어간, 의학(醫學)의 개조(開祖), 다산 정약용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글 읽기를 좋아해서 7세에 벌써 한시(漢詩)를 지었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다산은 21세 되던 1783년 세자 책봉 경축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하여 조정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선생은 후일 홍문관(弘文館)과 규장각(奎章閣) 관직에 있을 때 고기가 물을 만난 듯 규장각에 빼곡히 진열된 장서(藏書)들을 마음껏 탐독할 수 있어 즐거웠다고 토로하였다.
(註 : 증광시(增廣試) :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 시행하는 과거시험)

다산은 31세(1792)에 화성 성역을 설계하고 거중기(擧重機)를 발명 하였고, 36세(1797)에 마진(痲疹-홍역 성홍열 등 열성 발진 질환)에 관한 의서 ‘마과회통(麻科會通)’을 저술하였다.

요한(Johan)이라는 세례명이 말해주듯 다산은 후일 천주교의 모진 박해(辛酉邪獄,1800)와 노론(老論)의 시기질투로 인하여 18년이라는 긴 세월로 이어지는 유배생활 속에서도 한의학 비판서라고 할 수 있는 의령(醫零)을 비롯 촌병혹치(村病惑治) 를 저술하였고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저술(500여권의 책)을 남겼다.

이렇게 모든 학문을 통섭(統攝; Consilience)한 그에게 사가(史家)들은 그의 이름 뒤에 조선의 저술가, 조선의 문신, 조선의 실학자, 조선의 과학자, 조선의 철학자, 조선의 시인, 조선의 정치가, 조선의 공학자라는 칭호(稱號)를 부여하기를 주저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다산이 의학에 관하여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어떤 업적을 남겼나 검토해 보고자 한다.

다산이 살았던 시대의 동서 의학사상의 흐름과 배경

현대의학(現代醫學)이 태동(胎動)되기 전이었던 서양의학(西洋醫學)은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BC 460~약BC370)에서 갈레누스(Claudius Galenus, AD129~199)로 이어져 2500년 동안이나 지배해왔던 사체액설(四體液說)을 주류의학으로 신봉하고 있었기에 ‘내진(內診)을 하기 전에 반드시 손을 씻자’고 주장하던 産科 의사 이그나스 젬멜바이스(Ignaz Semmelweis, 1818~1865)는 동료 의사들로부터 따돌림 당하여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며 3번이나 옮겨 다녀야 했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조지 워싱턴도 과다한 사혈로 사망했듯이 사혈(瀉血, bloodletting)이 주 치료법으로 성행하던 시기였다.

(註 : 사체액설(四體液說 : 흑담즙, 황담즙, 점액, 혈액 이 네 가지가 상호간에 불균형으로 질병이 온다는 설)

다시 당시 조선으로 돌아와 보면‘중화(中華)의 빛’이라고 까지 숭앙 받던 대 사상가 양차오(梁启超, 1873~1929 )가 ‘미신의 총 본산’이라고 맹비판한 음양오행(陰陽五行)을 바탕으로 하여 환자를 진단하여 치료하고 있었고, 두창(痘瘡:천연두)은 귀신(천연두 神)때문이라고 믿어 두창(痘瘡) 퇴치와 치병(治病)을 위해 무당을 궁궐에 불러들여 굿을 하던 시절이었다.

(註 : 천연두를 마마라 하는 것은 천연두 신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서 높여 부르는 천연두신의 존칭이며 동의보감에도 ‘太乙救苦天尊 (태을구고천존)이란 주문을 일백 번 암송하면 그 효험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신통방통하다(念太乙救苦天尊一百遍妙不可言)’ 라고 적고 있다.)

이런 사술과 관념적 의학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던 시기에 살았던 선생은 이런 미신적이고 관념적이며 사술적인 의술은 배격하고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실증할 수 있는 것만을 고집하며 애민사상(愛民思想)으로 유의(儒醫)의 길을 걸어간 분이었다.

선생은 어릴 적에 천연두(天然痘)에 걸렸으나, 왕족 출신의 명의 몽수(蒙叟 이헌길(李獻吉)의 치료로 생명을 구했다. 선생은 훗날 많은 어린이를 살린 이헌길(李獻吉)의 그 훌륭한 의술과 인품에 감동받아 이헌길(李獻吉)의 생애를 다룬 ‘몽수전(蒙叟傳)’을 집필하고 후일 그의 ‘마진방痲疹方)’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시켜 마과麻科)를 두루 섭렵(涉獵)하여 회통(會通)한 대작 마과회통(麻科會通, 1797)을 저술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산은 이 책 서문에 서문과 같은 내용에서 보듯 생명의 은인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을 담았다.

“근세에 이몽수(蒙叟 라는 분이 있었는데, 사람됨이 뛰어났으나 명성을 얻지 못했고, 사람을 살리기에 뜻을 두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중략~ 내 이미 몽수(蒙叟 로 말미암아 살아났으므로 그 은혜를 갚고자 하였으나 어떻게 할 만한 일이 없었다. 그러다가 몽수(蒙叟 의 책을 가져다가 그 근원을 찾고 그 근본을 탐구한 다음, 중국의 마진에 관한 책 수십 종을 얻어서 상하를 자세히 풀어보고 조목마다 상세히 알아보았다. 다만 그 책들의 내용이 모두 산만하게 뒤섞여 조사하고 찾기에 불편하였다. 마진은 그 병의 속도가 매우 빠르고 열이 대단하므로 순식간에 목숨이 왔다갔다하니 세월을 두고 치료할 수 있는 다른 병과는 다르다. 이에 잘게 나누고 유형별로 모아, 눈썹처럼 정연하고 손바닥을 보듯 쉽게 하여 병든 자로 하여금 책을 펴면 처방을 얻어 번거롭지 않게 찾도록 하였다. 이를 무릇 일곱 차례 초고를 바꾼 뒤에 책이 비로소 이루어 졌으니 아! 몽수(蒙叟 가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아마 빙긋이 웃으며 흡족하게 생각할 것이다.”

또한 다산은 송나라 명 정승 문정공(文正公) 범희문(范希文)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내가 글을 읽고 도를 배우는 이유는 천하의 인명을 살리기 위해서이다. 그렇지 않으면 황제(=黃帝內經)의 글을 읽어 의학의 심오함을 깊이 연구할 것이니 이 역시 사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라는

이렇게 ‘옛 사람의 뜻을 세움이 이와 같이 자애롭고 크다’ 라고 한 것을 보면 문정공(文正公)의 말이 가슴에 깊이 새겨진 모양이다.

이상의 여러 경험이 자극이 되어 다산 선생은 정치에 나아가서는 사람을 살리는 정치를 하고 - 직접 의업을 생계로 하지는 않았지만 - 물러나서는 백성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는 정신으로 의학에 정진하며 일생을 살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의학과 의술이 단지 자신의 병이나 가족 이웃들을 돌보는 것에서 한 차원 더 나아가 일반 백성을 대상으로 하고 당시 의학 전반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백성을 살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살았던 다산 선생은 당시 조선을 휩쓸던 마진(麻진;홍역, 성홍열, 두창 등)치료를 위해 중국과 조선의 마진 의서 63권(중국 57권, 조선 6권)을 수집해 검토하고 7차례나 수정 보완하여 집대성한 마과회통(麻科會通) 을 저술하였고, 말년에는 종두법 도입에 혁혁한 업적을 남겼다. 이를 한국의학사 연구의 개척자인 미키 사카에(三木榮)는 ‘조선종두사(朝鮮種痘史)’에서 우두법(牛痘法)의 경우 정약용이 단독 최초임을 밝혔으며, 일본(1841)보다 십 수년이 앞선 것이었다.

(註 : 마과회통(麻科會通 : 12권8편으로 원증편(原證編), 인증편(因證編), 변사편(辨似編), 자이편(資異編), 아속편(我俗編), 오견편(吾見編), 합제편(合劑編), 본초편(本草編)으로 구성됨.)

그 외에도 백성을 사랑하고 사람을 살리는데 정성을 쏟아 부은 근거로는 그의 저서 중 의서에 관한 것 이외의 목민심서(牧民心書, 愛民六條), 경세유표(經世遺表) 등 다른 저술에서도 백성을 치료하고 구휼(救恤)해야 하는 방법이나 조선의 국가 의료기관인 내의원(內醫院),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 등의 체제나 운영비 조달을 위한 대안을 제시하였다. 또 1809년과 1814년 기근 후 전염병이 돌 때와 1821년 처음 조선에 콜레라가 들어왔을 때에도 많은 공을 세웠다.

뿐만 아니라 선생의 의학수준도 상당하였으리라 짐작하게 하는 증거들도 많이 있는데, 흠영(欽英)의 저자 유만주(柳晩柱, 1755~1788)의 일기에 정약용은 의서 황제내경 소문(素問)을 깡그리 외우고 있었다는 것,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금 너희 종형제가 5~6명이 된다 하니 ‘내가 만일 하늘의 은혜를 입고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면 오직 5~6명을 가르치고 훈계해서 모두…의약의 이치를 꿰뚫게 하여….’” 라고 한 편지 글귀나,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정 다산은 의학에 정통하였다.’ 라고 언급한 황현(黃玹)의 말이나, 노론의 눈에 박힌 가시 같은 존재로 여겨져 왔던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순조(純祖,1834)와 그의 아들 익종(翼宗,1830)의 임종에 의약동참(醫藥同參)하였던 것만 봐도 그의 의학수준은 어의에 버금가는 의술을 갖추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註 : 의약동참(醫藥同參):어의가 아니면서도 임금의 질병을 치료하는 과정에 의학에 높은 지식을 겸비한 인물을 동참시키는 일)

다산 정약용 선생의 한의학을 어떻게 바라다 보셨나?

다산 정약용 선생은 ‘與猶(여유)’라는 자신의 당호(堂號)에 걸맞지 않게 그의 저서‘의령(醫零)’과 다산시문집에 실린 맥론(脈論)에서 한의학 이론을 전 방위로 비판하였다.

(註:여유(與猶)란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말로 ‘겨울의 냇물을 건너듯 사방이 두려운 듯, 참으로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경거망동하지 말라(與兮若冬涉川 猶兮若畏四隣)’는 뜻, 여(與)는 의심이 많은 동물, 유(猶)는 겁이 많은 원숭이를 가리킴)

다산 선생은 자신의 저서 의령(醫零, 1802~1818)에서 종래의 오행상극이론(五行相剋理論), 이를테면 금(金)의 기운은 화(火)의 기운이 이기고, 화(火)의 기운은 수(水)의 기운을 이긴다는 식의 논리가 짜맞추기에 급급한 터무니 없는 이론이라고 비판하였다(六氣論 2,3).

그 외에도 사시부조화이론(四時不調化理論) 즉 이전 계절의 잘못 때문에 다음 계절에 온병(溫病)이 생긴다고 보는 병리이론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註 : 의령(醫零,1802~1818?)의 목차 : [육기론(六氣論,1~3), 외감론(外感論,1~3),이증론(裡證論, 1~2), 허실론(虛實論), 탄산론(呑酸論), 비풍론(非風論), 제량론(劑量論), 시령론(時令論), 근시론(近視論), 인면창론(人面瘡論), 반위설(反胃說), 전약설(煎藥說), 잡설(雜說, 1~7)]에서 종래의 오행상극이론(五行相剋理論))

다산 선생이 비판한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 나쁜 기운이 피부부터 오장까지 침입해 병을 일으킨다는 질병전변이론(疾病轉變理論),

<> 오장육부와 12경락이 서로 상응한다는 표리이론(表裏理論),

<> 오장의 상태가 얼굴빛으로 나타난다는 장상이론(藏相理論),

<> 오장 사이의 허실을 따지는 허실이론(虛實理論), ,

<> 약의 다섯 가지 맛인 오미가 각기 좋아하는 장기로 찾아 든다는 약리이론(藥理理論),

<> 맥의 상태로 각 장부의 병을 알아낸다는 맥상이론(脈象理論),

선생은 '이상의 이 모든 것들이 증명할 수 없는 헛된 관념에 불과하다' 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近視論에서는 근시나 원시는 동의보감에 쓰인 것처럼 양기나 음기가 부족해서 일어난다는 것을 부정하고 수정체의 굴곡에 의한 것이라는 현대의학적 해석을 하며 음양이론을 반박하였고 맥론(脈論)에서 맥경(脈經)의 저자인 왕숙화(王叔和)의 촌구맥법(寸口脈法)을 비판하면서 ‘진맥(診脈)으로 오장육부(五臟六腑)의 상태를 알아낸다는 주장은, 마치 한강 물을 떠보고 이는 어느 지류의 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 나는 이 주장을 수긍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고 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다산 정약용선생은 시쳇말로 ‘한까의 원조(元祖)’였다

물론 일부 한방에 경도된 학자들 중에는 선생이 동양의 육기론(六氣論 : 風,寒,暑,濕,燥,火-六淫이라 한다)를버리고 서양의 사체액설(四體液說)과 같은 한(寒), 열(熱), 조(燥), 습(濕)을 주장했다 하여 정약용선생을 근대적인 인물로서 정약용이 아니라 어설프게 서양의학을 전통의학에 적용시켜 보려다 실패한 정약용의 모습’을 발견했다고 하며 깍아 내리기도 하지만, 그와 반대로 의학과 의학만을 다룬 최초의 눈문(1978) ‘의•약학자로서 다산과 사상 및 업적’에서 홍문화(洪文和)박사는 ‘의령(醫零)에서 예기(禮記)와 내경(內經)마저 통박하는 의론을 싣고, 미신과 불합리를 타파하고 역학적, 예방의학적, 사회의학적, 실증의학적, 임상의술의 특징을 보인다’는 것을 주장하였다.

놀랍게도 다산의 의학저서 마과회통(麻科會通)에서 종전의 미신과 술수적 치료법을 철저히 배격하고 철저한 고증과 실증을 통해 분류한 질병 진단치료 전과정의 분류체계를 보면 현대의학의 텍스트를 배껴다 놓지는 않았나 의심이 갈 정도로 보는 이의 눈을 의심케 하는 훌륭한 저작물을 남겼다. 이런 다산의 의학에 대한 태도나 최초로 종두법을 소개한 사실만으로도 오늘을 사는 우리는 조선 의학계의 선구자이며 과학적(科學的) 의학(醫學) 즉 현대의학(現代醫學)의 개조(開祖)로 그리고 대의(大醫)의 길을 걸어가신 다산 선생의 애민사상(愛民思想)과 그가 남긴 업적을 높이 평가하는데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주 : 한의사 홈페이지에는 “맥진은 그 구성 자체가 매우 정교한 과학이론을 토대로 하고 있어 현재의 증상뿐만 아니라 원인(原人)의 추론, 병변(病變)의 진행정도(進行程度), 추후(追後)의 예상(豫想)까지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진단법법(診斷方法)이다”(대한한의사협회 홈페이지 한의학 정보-한의학 교육 자료-한의학의 원리- http://www.koma.or.kr )라고 되어 있다.


참고문헌

1. 정약용의 의령(김대원)-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석사논문,1991

2. 동서교섭과 근대한국사상(금장태) 1984.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3. 의∙璿隙米關�다산과 사상 및 업적-다산학보 제1집, 1978년(홍문화)

4. 耕世劑民의 魂神, 茶山의 詩文-金智勇 저

5. 麻科會通, 麻科會通序-민족문화추진회 번역본, 서울대 천연과학연구소편

6. 조선의 의학사(김두종) 등

7. 호열자, 조선을 강타하다(신동원) 등


글쓴이 : 남복동 (창원산재병원 산업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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