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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86 선배의 좌충우돌 (두번째)

개인, 사회, 국가의 미래와 관계된 역사관 문제에 대하여


사랑하는 좌충 군과 우돌 군에게...

좌충 군, 우돌 군, 오늘부터 공부를 시작하여 보지. 오늘은 역사관에 대하여 공부할 거야. 공산주의에 대한 설명으로 들어가기 위한 전초단계이니까 한번 들어봐.

먼저 하나의 질문을 던져볼게. 역사란 무엇일까? 한 마디로 설명하기 쉽지 않을 거야. 보통 연대기표 같은 것들을 많이 떠올리지? 몇 년도에 무슨 사건이 일어났다는 식의 단순 서술적 암기자료들 말이야. 우리 중고등학교 때 외우느라 골치들 많이 썩어 봤잖아? 그럼 질문을 하나 더 던져볼게. 그 연대표에 나와 있는 사실들이 모두 팩트일까? 이 질문은 즉, “역사란 “팩트”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일까.”라는 것이야. 이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No”야.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을 E. H. Carr가 했지. 그 이야기는 역사라는 것은 결국 과거에 발생한 객관적 팩트에 대한 현재 역사가의 주관적 해석이라는 말이야. 즉, 역사에는 반드시 바라보는 관점, 역사관이 존재한다는 것이야. 역사가의 역사관에 따라 주관적으로 “해석된” 부분이 바로 우리가 지켜보는 역사라는 말이지.

역사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말해볼게. 개인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역사관을 어떻게 가지느냐에 따라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달라져. 그 시야에 따라서 인생을 살아가게 되지. 즉, 역사관은 개인의 인생관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어. 다시 말하여, 역사관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되지.

더 나아가서, 한 사회가 공통된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 역사관은 그 사회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거야. 그 사회의 나아갈 바를 정하는 데에 반드시 역사관을 통한 투영이 이루어지게 돼.

그렇게 보면, 머리가 말랑말랑한 초등학생들에게 어떠한 역사관에 기반을 둔 교육을 시킬 것인가가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매우 중요한 논의임을 알 수 있어. 이 부분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높으신 양반들께서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하고 계실까? 우리나라는 역사 교과서 편찬에 있어서의 역사관 문제가 골치 아프다는 이유로, 역사관 선정을 일반 출판사들에게 맡긴 나라야. 표준적인 역사관이 없는 나라이지.

이런 나라가 국민의 총화단결을 이끌어낼 수 있고, 그에 기초한 통일된 비젼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한국의 분단 문제는 결국 이념 문제이고, 이념 문제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되는 곳이 역사적 해석의 문제인데, 이 문제가 골치 아프다고 해서 놓아둔다면, 분단 극복과 통일이 가능할까?

그래서 가장 골치 아픈 문제이지만, 가장 먼저 들여다볼 수밖에 없는 문제가 바로 역사관 문제라는 거야. 오늘은 이 문제에 대한 썰을 풀어볼거야.

일반적으로 인류사를 지켜보면, 끊임없는 권력투쟁과 전쟁의 아비규환으로 보일 뿐, 특정한 진보의 패턴이 보이지 않는 것이 사실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역사는 완만하고 점진적인 진보의 발자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야. 즉, 역사상의 모든 사건들을 통할하는 역사적 진보의 목적성이 존재하고, 역사적 개별 사건들은 그 목적을 향하여 진행된다고 보는 것이지.

물론 처음부터 이와 같은 목적성 중심의 사관이 있었던 것은 아니야. 역사관 자체도 역사의 진행과정 속에서 발전을 거듭하여 왔어. 이제부터 유사 이래로 발생한 다양한 역사관의 유형들을 하나씩 뜯어 볼 거야.

첫째, 가장 원시적인 형태로 순환사관이 있어. 동양인들과 고대 그리스인들이 가지고 있던 사관이지. 봄/여름/가을/겨울이 변하듯 역사도 순환적으로 변한다고 생각하는 관점이야. 지속적으로 변화는 하지만, 특정한 방향이나 목적성은 없다는 것이지.

동양에서는 왕조의 흥망을 천시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였어. 이전의 왕조가 덕을 잃어 하늘로부터 버림을 받은 경우, 천명에 따라 전 왕조를 폐하고 새로운 왕조로 개혁하는 행위를 역성혁명이라 불렀어. 역성혁명에 의하여 천명을 등에 업은 새 왕조가 덕을 잃을 때까지 통치행위를 계속하는 거야. 이 패턴이 왕조에 왕조를 더해 가면서 반복되지만, 무언가가 발전한다는 개념은 없어. 다만 모든 것이 “천명”이라는 한 마디로 표현이 되지.

그리스인들도 비슷한 면이 있었어.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나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저술한 투키티테스는 역사적 사실을 백과사전식으로 기술할 뿐, 역사의 의미와 목표를 명시하지는 않았지. 동양에서 “천명” 한 마디로 모든 인과적 설명을 끝내듯, 서양에서도 “운명”이라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이 귀결되었어.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정치체제에는 일종의 사이클이 있다고 기술하였어. 하지만 그 사이클이 생기는 원인은 이야기하지 않았지.

아리스토텔레스는 저서 “정치학”을 통하여, 혁명을 통한 정치체제의 대체에는 이유가 있다고 하였어. 어떤 정치 체제도 인간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으므로 불만이 생기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끝없이 정권교체가 반복된다는 것이지. 어때, 동양의 역성혁명론과 유사한 부분이 보이지 않아? 다만, “천명”이라는 말이 “인간의 만족도”라는 개념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동양이나 서양이나 정권교체의 반복 현상만을 기술하였을 뿐, 그것이 어떠한 발전을 가져온다는 진보성에 대한 고찰은 전혀 없었던 것이지.

둘째, 순환사관을 극복한 사관으로 섭리사관이 있어. 역사의 발전 가능성과 목적성의 개념이 추가된 것이지. 이 사관은 기독교의 세계전파와 더불어 발생하였어. 기독교에서 역사란 인류의 창조와 타락에서 시작하여 신이 인류를 심판하여 구제함으로써 끝나는 유한한 과정이야.

이러한 기독교 사관을 체계화한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야. 그는 그의 저서 “신국”에서 역사를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의 신국과 악마 편의 지상국 간 투쟁의 역사로 보았어. 마지막에는 신국이 승리하여 영원한 평화를 얻는다는 것이지. 신의 섭리를 중심에 둔 목적성 사관인 셈이야.

섭리사관은 특정한 목적을 중심으로 한 최초의 사관이라는 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져. 이후 서구의 모든 사관들은 기독교 섭리사관의 틀에 내용만 합리주의적 정신으로 채워 넣은 경우가 많아. 실질적으로는 모두 섭리사관을 계승하였다고 보는 것이지. 심지어는 공산주의의 유물론 사관도 큰 틀에서는 여기서 파생한 것으로 볼 수가 있어.

다음으로 나타나는 사관이 정신사관이야.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이지. 르네상스 이후 과학적 방법론의 발달과 더불어 이러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해. 역사는 인간정신의 진보에 따라 필연적이고 직선적으로 움직인다는 것이지. 신의 섭리보다는 자연이 제공한 일관된 보편적 법칙에 의하여 지배된다고 보는 것이야.

인간정신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려는 가장 진지한 노력은 독일의 칸트에 의하여 이루어져. 그는 역사의 의미와 목적을 최종 자유의 실현으로 보았어. 인간 정신의 진보라는 관점에서 보편사를 서술하려 하였지. 이러한 움직임은 헤겔에게로 이어져. 그에 의하면 세계사는 정신의 자기실현이야. 그는 이성이 세계를 지배한다고 보았으며, 그와 같은 이성을 세계정신이라 불렀어.
 



다음으로 생철학의 사관이 있어. 딜타이, 짐멜 등이 주창하였지. 그들은 이성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는 합리주의적 정신에 반기를 들었어. 싱싱하게 살아있는 생 자체를 통하여 역사를 설명하려 하였지. 여기서의 생이란 인간적인 체험을 말하며, 합리성에 의한 로고스적인 면보다는 오히려 비합리적인 파토스적(감성적 측면)인 면이 많다고 보고 있어. 생의 체험이 객관적으로 표현되어 나타난 것이 종교, 철학, 예술, 과학, 정치, 법률 등의 인간의 문화체계라는 것이지. 이러한 생의 성장의 흐름이 바로 역사이라고 주장하는 것이지.

인류가 진보한다고 생각하는 이러한 관점들은 20세기의 시작과 더불어 두 번의 참혹한 세계대전,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 출현, 핵무기와 환경파괴 등으로 인하여 비판받기 시작해. 그러면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문화사관이야. 인류의 역사가 문화라는 살아있는 유기체에 의하여 움직인다는 생각이야. 탄생하고 성장하고 언젠가는 “멸망한다”는 것이지. 슈펭글러는 세계대전이라는 현상이 유럽 문명의 몰락 단계에서 발생하였다고 해석하였어. 현대사의 비극적 사건들을 한 문명의 몰락 단계의 현상으로 정리하려 한 것이지.

지금까지의 사관들은 신/이성/생/문화와 같은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역사를 움직이는 핵심이라는 생각들을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새로운 사관이 등장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유물사관이야. 이들은 기존의 사관들에서 좋은 요소들을 따와서 말을 묘하게 변조하여 정반대의 의미를 가지도록 만들었지.

예를 들어, 역사의 종말과 인간의 구원이라는 유한 목적성을 지닌 기독교적 섭리사관으로부터 공산주의 지상낙원이라는 최종 목적성 개념을 도출하였어.

변증법을 통한 이성의 진보(이 개념은 추후 설명할거야.)라는 헤겔의 역사관으로부터, 변증법이라는 개념을 따왔어. 하지만, 그들의 변증법은 의식의 발전을 중심삼고 보는 헤겔과는 달리, 외적 사회 현실의 발전을 핵심으로 삼고 있어. 즉, 사회 현실이 변화함에 따라 인간의 의식도 변화한다는 생각이지. 사람의 생각이 현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생각을 지배한다는 것이야.

이것은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정신이 아니라 물질적 힘이라는 유물사관의 기본적 테마로부터 도출된 것이지. 물질이 우주의 근본이고, 정신은 단지 물질로부터 진화한 것이며, 사물의 발전은 물질 간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대립 투쟁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이론이야. 역사 발전의 원동력은 종교장이들이 말하는 정신 나부랭이가 아닌 물질적 생산력의 발전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이지. 이와 같은 발전의 원동력은 생산계급 간의 투쟁이며, 이 투쟁이 극대화되어 지배계급의 변화가 발생하고, 이것이 바로 역사 발전이라는 것이야. 계급투쟁이 최종적인 단계에 이르게 되면, 노동자와 농민 계급에 의한 지배가 이루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이들이 꿈꾸는 공산주의 지상낙원인 것이지.

어때, 멋지지 않아? 신/이성/생/문화 등의 무형적 요소로부터 역사가 발전하였다는 이론은 뭔가 추상적이고 이해하기가 힘든데 비하여, 유물론적 사관은 과학적이고 구체적이고 이해도 쉬운 것 같아. 실제로 우리 주변을 둘러보았을 때, 현실과도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아. 우리 주변에는 온갖 투쟁들이 난무하잖아?

그 투쟁들의 핵심은 알고 보면 경제력이고, 경제관계에 있어서의 투쟁은 결국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간의 계급투쟁으로 귀결되고 말이야. 너무나 현실과 맞아 떨어지잖아? 거기다가 최종적으로는 못 가진 자들이 지배계급이 되는 지상낙원이 된다는 이상적 비젼을 보게 되면, 입이 벌어지지. 못 사는 사람들, 못 배운 사람들, 뭔가 억눌린 약자들이 이제 자신의 한을 떨치고 제대로 나설 명분이 생기는 거야.

그런데, 여기까지의 생각에 미치게 된다면, 결국 유물론적 공산주의에 어느 정도 동조하게 되는 거야. 이상하지? 지금까지 내가 한 말들이 틀린 말은 없는 것 같은데, 그 추론의 결과가 인류가 용도 폐기하여 버린 공산주의 사상에 연결된다는 것이 말이야.

특히 이 글을 읽고 있는 좌충 군은 의아한 부분이 많을 거라 생각해. 좌충 군 보기에는 유물사관에서 주장하는 것들이 그다지 틀린 말이 없어 보이거든. 좌충 군 본인이 평소 가지고 있는 소신들과 통하는 부분이 많을 거야. 좌충 군 자네는, 한국이라는 사회를 수구 재벌 세력들이 지배하고 있고, 이 사회 속에서 못 배우고 못 사는 사람들은 항상 속고 착취당하며 살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

뿐만 아니라, 그들 약한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자신의 책무라고 생각하고 있어. 그것이 자신이 생각하는 소신이요 정의라는 생각이지. 이런 말하기 참 미안하네만, 자네의 생각을 한마디로 요약할게. 정확히 “유물론적 공산주의 사상에서 파생된 생각”이야.

자네가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 자네의 탓만은 아니네. 누군가 자네에게 그와 같은 사고방식을 불어넣어 준 사람이 있을 것이야. 그리고 실제로 그와 같은 “선동”(자네는 이 단어를 인정하지 않겠지만 말이야.)이 먹혀든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의 구조가 그만큼 취약한 면이 있다는 것이야. 즉, 피지배층의 억울함과 불만이 상당하고, 그 문제를 국가가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 측면은 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와 같은 “선동”이 옳은 것도 아니고, 자네가 거기에 “선동당한” 것 또한 절대 잘한 일이 아니야. 나나 우돌 군도 한 때는 선동에 넘어간 일이 있으나, 지금은 정상으로 돌아온 상태야. 즉, 이건 뭔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지. 아직 선동에 넘어간 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빨리 자신의 생각을 되돌이켜 보아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야.

좌충 군은 오늘 나의 말들에 대하여 불만이 많겠지만, 더 구체적인 논쟁과 설명은 다음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아.

오늘 논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아. 우리는 역사관이 무엇이고 유사 이래로 어떠한 역사관들이 있었는지를 알아보았어. 그리고 가장 현실적이며 합리적으로 보이는 역사관이 뜻밖에도 공산주의자들의 유물사관이라는 것을 확인하였지.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이거야. 현재까지 공산주의자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선동당하여 왔고, 오늘날 우리 주변에도 자주 머리를 들고 나타나는 좌파들의 선동이 대중들에게 먹히는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야. 사회학의 정수라 하는 역사관 문제를 가장 명쾌하게 풀어놓은 것이 공산주의 이론이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인문학자들이고, 이들의 이론을 대중들이 거부하기 쉽지 않은 구조이지. “정의”, “약자를 위한 논변” 등의 감성적 수사와 함께 유물사관 논리를 펴는 경우, 많은 경우, 논리적 반박을 하기가 힘들어져.

그러니, 아직 선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좌충 군이나 벗어는 났지만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못하는 우돌 군이나 어찌 보면 우리 시대상에서 볼 때 매우 전형적인 군상에 속한다고 봐야지. 이 편지들은 우리 시대의 해법을 제시하는 양 아직 버티고 서 있는 유물사관의 핵심적인 잘못들이 무엇이고, 그것을 우리는 어떻게 타파 극복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야. 오늘은 일단 맛배기만 보았다고 생각하면 돼.

그럼 다음 시간까지 잘들 지내도록 하게. 특히 좌충 군, 너무 상심하지 말고 끝까지 함께 가세나.



2015년 7월 12일
나라를 사랑하는 젊은 후배들에 용기를 얻는 삼팔육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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