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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86 선배의 좌충우돌 (세번째)

현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두 역사관, 마르크스적 역사관 기독교적 역사관


친애하는 좌충 군과 우돌 군에게...

좌충 군과 우돌 군, 지난 시간에는 이 세상을 바라보는 가치관에 절대적 영향력을 미치는 역사관에 대하여 배웠어.

오늘은 오늘날의 세상을 뒤덮고 있는 두 가지의 역사관을 집중 조명할 거야. 지난 시간에 여러 가지 역사관의 하나로 배웠었던 기독교사관과 유물사관이 바로 그것이야. 물론 최근 들어 두 가지 사조는 뚜렷한 퇴조의 경향을 보이고 있어.

리처드 도킨스 등에 의하여, 과학의 발전을 중심으로 한 무신론적 가치관이 일어나면서, 기독교적 가치관은 많은 의심을 받고 있어. 공산주의는 “공산주의 실험은 끝났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로, 20세기 말 완전히 붕괴하였고, 지금은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찾기 힘들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지배하는 다양한 역사관들이 이 두 가지 사조로부터 파생 혹은 강한 영향을 받았음을 반박하기는 힘들지.

특히 우리나라는 “한집 건너 교회”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전히 강력한 기독교 세력이 존재하는 나라야. 기독교인 수가 요즘 줄어드는 추세라고는 해도, 천주교까지 합치면 여전히 막강해. 그뿐이야? 휴전선 너머에는 같은 핏줄을 나눈 사람들이 여전히 공산주의 체제를 수호하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지.

우리는 한반도에서 기독교적 사관과 공산주의 사관이 직접적으로 맞붙어서 으르렁대고 있는 전근대적 현실을 여전히 목도하고 있는 것이야. 이와 같은 케케묵은 이념의 덩어리들을 지양하기 위하여, “제3의 길”을 이야기하는 학자, 정치인들은 부지기수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길이 안 나오는 이유는, “제3의 길”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이 두 가지에 정통한 사람들이 아니어서 그런 것이야. “제3의 길”은 기존의 두 가지 길에 대하여 제대로 아는 사람이 이야기하여야 해. 그런데, 기존의 길에 대하여서도 모르는 어중이떠중이들이 나와서,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고 적당히 떠벌이는 형국이 되고 있어. 그들이 말하는 “제3의 길”은 기존의 길들을 적당히 짜 맞춘 기존의 길보다 못한 솔루션일 가망성이 많지.

우리가 분명히 인정하여야 할 것은 기존의 두 가지 길이 인류가 오랜 기간 엄청난 지성과 정력을 투입하여 만들어 낸 결정체라는 사실이야. 그것에 대하여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면서, 기존의 것은 무조건 구태이고, 내 것은 새로운 것이니까 선택하여 달라고 하는 것은 정말 허접한 정치적 구호에 지나지 않아.

우리는 두 가지 사관에 대하여, 일단 그것들을 충분히 인정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이러한 단점이 있기 때문에 새로운 관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할 것이야. 새는 한쪽 날개로만은 날지 못하지만, 양쪽 날개만 있다고 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오늘날 제3의 길을 이야기하는 정치인들 마냥 양 날개를 이리 기우고 저리 기운다고 새가 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양쪽 날개를 “움직이는” 것은 머리와 몸통이야. 우리가 통일을 대비하여 할 일은 허접한 양 날개 조합체를 만들어서 좌충우돌하는 일이 아니라, 머리와 몸통을 똑바로 세움으로써 양 날개를 정확하게 작동하여 날아가게 하는 일이야. 이 부분에 대하여서는 추후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야. 우선은 양 날개에 대하여 정확히 충분한 공부를 하자고.

우선 기독교 사관에 대하여 알아볼 거야. 그 전에, 그 상위개념인 유신론 사관에 대하여 포괄적으로 정의를 해 보자고. 오늘날은 유신론하면 일신교와 동의어로 사용되기는 해.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인격적인 신성을 믿는다는 개념으로, 일신교 외에도 다양한 유형이 있어.

첫째로 초기 원시 사회에서 가장 보편적이었던 믿음은 다신교였어.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 그 흔적이 남아있지. 다수의 인격신이 존재하며 각 분야마다 전문적인 신이 존재해. 두 번째는 단일신교야. 다수의 신이 존재하지만, 자기가 속한 부족이나 민족의 신과 같은 하나의 신에게만 충성을 바쳐야 한다는 신앙이야. 세 번째, 범신교는 자연 혹은 우주 전체가 바로 신이라는 신앙이야. 마지막으로, 가장 고등적인 신앙 형태인 일신교는 인격적/도덕적으로 지고한 존재하는 단 하나라고 하는 것이야. 기독교/이슬람교 등, 오늘날 지구상에 가장 널리 퍼져 있는 신앙 형태야.

유대교는 원래부터 일신교라고 보기는 힘들어. 처음에는 단일신교로서 “야훼”라는 부족 신으로부터 출발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기원전 6-8세기에 아모스, 이사야, 예레미아 등의 예언자들에 의하여 일신교 개념이 나타났다고 보여. 이와 같은 일신교 전통을 제대로 이어받은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이지.

기독교를 포함한 일신교 사관의 특징은,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모든 사건의 원인을 단일한 원인으로부터 설명한다는 것이지. 어떠한 사건이든지, 인간이 알 수 없는 초월적 존재의 심층적인 판단에 의하여 발생한다는 것이야.

세상이 특정한 목적성을 염두에 두고서 굴러간다는, 이 사관은 엄청난 매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 유일 존재가 세상을 제어하고 있다는 사고방식이 언뜻 보면 비합리적이어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수리 원칙이 이 세상을 제어한다는 과학적 사고와 연계가 되거든. 근대 서양에서 오늘날의 세상을 지배하는 다수 과학적 발견들이 나오게 된 것이 우연은 아니라고 봐.

(물론 과학적 발견들이 신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과정에서 나왔다는 것도 맞는 이야기지만, 일원론적 사고방식이라는 근본 토양은 신 중심 사고로부터 나왔다는 생각이야.)

이 사관에 정확히 반대되는 이론이 바로 유물론이야. 세계의 실재를 물질로 보는 견해이지. 이와 같은 견해가 공산주의로부터 시작한 것은 아니야. 사실 그 뿌리가 깊어. 고대 그리스철학까지 소급되거든. 탈레스 등은 우주의 근원을 물, 불, 공기, 원자 등으로 생각하였지.

유물론적 사관은 유대교/기독교의 맥을 잇는 헤브라이즘에 반대되는 헬레니즘적 전통으로 이어져. 중세 봉건 시대에 잠시 죽어 있다가, 르네상스를 통하여 부활한 후, 다양한 철학을 잉태하게 되지. 헤겔 좌파의 대표인 포이에르바하는 세계정신을 주창한 헤겔의 이론을 정반대로 뒤집어 정신은 자연으로부터 나왔다는 유물론을 만들어.

마르크스의 유물론은 포이에르바하의 영향을 크게 받게 되지. 그에게 관념세계는 변질된 물질세계의 반영에 지나지 않아. 인간의 정신적 활동에 의하여 세계가 형성된 것이 아니라, 사물 내부의 모순이 발전의 계기가 되어 필연적 자기운동을 통하여 현실세계를 낳았다는 것이야. 정신도 결국은 물질의 변증법적 발전에서 나타난 산물이라는 것이야. 동물로부터 인간이 탄생하였고, 인간 정신도 결국 진화가 된 것이라고 하는 다윈의 진화론과 일맥상통하지. 실제로 마르크스는 진화론의 열렬한 추종자였다고 해.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양적 변화는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는 말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정신의 발생과정이라고 봐.

유물론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단순히 세상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세계를 변혁시키려 한다는 점이야. 노동자 계급에게 그들의 사명을 일깨워 주고, 자본주의 사회를 무너뜨려 계급의 해방을 성취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것이지.

그러면, 이제 이 두 가지 사상체계를 서로 비교해 볼 거야. 그들은 각각 인간 조직체를 가지고 있고, 조직원들의 충성을 요구하며 교리뿐 아니라 교리의 실천에 대해서도 일정한 권위를 주장해. 기독교에 교회가 있듯 공산주의에는 공산당이 있지. 그뿐 아니라, 내부에 종파가 있어서, 자신들이 창시자의 진정한 교리와 사상을 따른다고 생각하지. 모두 인간의 삶 전체를 밝혀주는 본질적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시공을 초월하여 정당하다고 단언하고 있어. 조직원들에게 이론적인 동의 뿐 아니라 그에 부합하는 행동까지 요구하지.
 



하지만, 두 이론은 매우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어. 기독교는 모든 존재를 창조하고 지배하는 인격체로 신을 상정하고, 신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하지. 역사적 인물 예수의 삶을 통하여 신이 인간을 구원하려 하였다고 해. 각 개인은 독생자 예수를 믿음으로써 죄 사함을 받아야 하며, 교회 안에서 중생하여야 한다고 해.

마르크스는 이 믿음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종교란 현실적 사회 문제로부터 관심을 돌리기 위한 “인민의 아편”이라고 정죄해. 신은 존재하지 않고, 우주는 그 자체로서 존재하며, 모든 것이 물질의 과학적 법칙에 의해 결정된다고 봐. 개인의 삶에서 진정한 변화는 사회의 근본적 변혁에 의하여서만 이루어진다고 하지. 자본주의 사회는 공산주의 체제로 전환되어야 하며, 역사발전의 법칙에 의하여 이러한 변화는 필연적이라는 거야. 각 개인은 이 혁명 대업에 동참하여야 하는 시대적 과업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것이지.

어때? 서로 상반되기는 하지만, 매우 평행하고 상사적인 구조를 띄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아? 기독교 이론의 “신”의 자리에 마르크스는 “물질”을 집어넣었고, “믿음을 통한 구원”의 자리에 “혁명 대업 동참을 통한 역사적 중심 존재화”가 들어간 것이지. “지상낙원” 대신에 “모두가 행복한 공산주의 사회”를 집어넣었고 말이야.

이제 역사관의 관점에서 섭리사관과 유물사관의 유사성을 지켜볼 거야. 두 가지 역사관 모두 역사의 본질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 섭리사관은 인간의 타락으로부터 인류 죄악사가 출발하였다고 생각하지. 이에 비하여 유물사관은 인간이 동물계에서 분리됨으로써 역사가 출발하였다고 봐. 최초의 사회는 원시공동체사회였다고 하지. 섭리사관은 역사를 하나님에 의한 구원의 역사로 보며, 유물사관은 계급투쟁사로 보는 거야.

기독교에서는 이 세상은 신의 뜻과 부합하지 않으며 신과 인간의 관계는 타락으로 인하여 끊어졌다고 봐. 마르크스는 인간이 이상적 삶의 조건에 대한 잠재력은 있으나 자본주의 사회조건으로 그 힘을 발휘할 수 없는 소외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보지.

기독교와 마르크스는 역사의 본질과 방향에 대한 서로 완전히 상반되는 이론을 제시하지만, 역사를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힘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는 일치해.

섭리사관은 역사는 신의 섭리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고 주장해. 신은 자신의 뜻을 역사하기 위하여 역사상의 사건들을 이용하지. 반면, 유물사관에서 역사를 움직이는 근본 힘은 생산력의 발전이야.

섭리사관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신국과 악마를 따르는 자들의 지상국이 싸워서 마지막으로 신국이 승리한다는 역사적 법칙을 제시하지. 반면, 유물사관에서는 유물 변증법을 적용하여 다양한 유물사관의 법칙을 이야기해.

예를 들어, “인간은 사회생활을 통하여 일정한 생산관계를 맺는다.”,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일정한 발전단계에 대응한다.”, “생산관계가 토대이고 의식은 상부구조이다.” 등과 같지. (생산관계, 생산력 등의 용어 정의와 설명은 이후 편지에서 이야기할 거야.) 마르크스는 역사에는 역사를 진보시키는 패턴이 내재해 있어서, 필연적인 발전이 일어난다고 봐.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발전하였듯, 자본주의는 공산주의로 발전할 것이라는 주장이지.

섭리사관은 종말에는 천변지이가 일어난다고 해.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하지. (정말 비과학적인 주장이지?) 그 날에 최후의 심판이 벌어져 신을 따르는 자들은 축복을 받고, 악마를 따르는 자들은 불 속에 내던져진다고 해.

유물사관에서는 종말에 자본주의의 빈곤, 억압, 예속, 착취가 극에 이르고 경제파탄과 사회혼란이 일어난다고 해. 폭력혁명으로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을 타도함으로써 인류의 전쟁사는 끝이 난다고 하지. 마르크스주의에 의하면 모든 전쟁은 계급 간의 투쟁으로부터 기인하므로, 이후로는 전쟁이 없는 평화 세상이 된다는 것이야. 그러면서 개인적인 문제였던 인간의 소외 현상도 끝이 나고, 인간은 진정한 자신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지. 결국은 국가라는 개념도 소멸하고 진정한 자유와 평화의 왕국이 건설된다는 것이야. 그들이 말하는 이른바 “능력에 따라 노동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사회” 말이지.

이상으로부터 유추 가능한 것은, 두 가지 사상 모두 현세로부터 고난 받는 사람들의 고민과 염원이 담겨 있다는 점이야. 세상살이가 왜 이렇게 힘들까? 원래 세상사는 것이 이렇게 힘든 것일까?

이와 같은 고민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원래는 그렇지 않은 이상적 세상에 대한 동경과 이상적 세상이 파기된 원인 탐구, 이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 제시가 이뤄지게 되지. 그것을, 보이지 않는 원인 존재로부터 탐구하여 나아간 것이 섭리사관이고, 보이는 물질로부터 탐구하기 시작한 것이 유물사관이지. 인류가 정말로 자신들의 지혜를 다하여 만들어낸 두 가지 결정체야.

이 두 가지 해결책은 20세기를 거치면서 심각한 타이틀 매치를 겪게 돼. 세상의 왕좌를 가리는 게임이 1세기 가량 벌어진 것이지. 결국은 유물사관이 자체적 모순에 의하여 스스로 무너진 형국을 띠게 되었어.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섭리사관이 승리를 거둔 것일까?

그렇다고 보지 않아. 오늘날과 같은 과학 중심의 세상에서, 신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은 고리타분하다고 매도되기 십상이야. 기독교가 세상을 지배하던 유럽과 미국에서는 십자가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지? 섭리사관도 결국 이겼다고 볼 수 없는 상황이 진행되고 있어. 결국은 세상을 지배하던 두 사관 중 어느 누구도 이기지 못한 채, 제3의 해결책을 기다리는 입장에 처하게 된 것이지.

자,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두 사관이 어떠한 약점이 있었기에 진정한 승자가 되지를 못하였고, 우리가 찾아야 할 제3의 해결책이란 무엇일까 하는 점이야. 이 부분부터는 다음 시간에 좀 더 이야기를 해 보자고.

어때, 재미있지? 난 항상 자네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눈망울을 상상하면서 글을 쓴다네. 다음 시간에 더욱 풍성하고 재미나는 이야기들로 만나자고. 그럼 그 때까지...



2015년 7월 19일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할 수 있는 젊은 세대의 출현에 마음 설레는 삼팔육 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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