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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혐오’ 영화 아가씨, 건질 건 ‘그림’ 뿐

어설픈 페미니즘, 남성을 왜곡해 여성에 아부하는 불편한 영화, 여성 남성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영화

(※ 주의 : 글에 스포일러가 많이 포함돼 있습니다. 영화보실 분들은 패스~)

개봉 전부터 파격적인 동성애 장면이 입소문을 타면서 화제를 모았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가 ‘곡성’ 이후 한국영화의 티켓파워를 이어가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1일 개봉한 이후 5일 동안 누적관객수 182만을 넘어 6일 200백만 관객동원이 확실시 되고 있다. 역대 19세 이상(청소년관람불가) 관람 영화로 개봉 첫 주 최고 누적 스코어 신기록을 달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아가씨는 184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한 레즈비언 스릴러 ‘핑거스미스’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박찬욱 감독의 해석으로 새롭게 탄생한 영화이다. 박 감독 특유의 장식적인 예술미가 돋보인다.



하지만 그 뿐이다. 단적으로 평하자면, 이 영화는 ‘남성혐오’를 그린 매우 불편한 영화이다. 그것도 페미니즘을 이해하는 ‘척’ 하는 어설픈 남성 페미니스트의 시각으로 같은 남성을 조롱하고 하등동물처럼 그린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고 여성을 완전히 이해한 영화로도 보기 어렵다.

귀족 아가씨 히데코(김민희)와 하녀 숙희(김태리)의 동성애 장면은 남성중심적 시각을 벗어나지 못했다. 정사장면은 남녀 간의 그것과 다르지 않는 통속적 관념을 따랐고, 두 사람이 자신들을 지배하던 남성들의 현실에서 탈출해 자유를 찾은 후, 마지막으로 펼쳐지는 정사 장면은 남성의 성취향을 겨냥했다.

히데코와 숙희가 서로를 보듬는 동지애나 사랑, 아니면 억압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담는다던가 하는 정서가 깃든 것도 아니었고, 육체적으로 서로를 욕망하는 장면도 아니었다. 박찬욱 감독 특유의 탐미주의와 장식적 아름다움만 느껴질 뿐 에로틱하지도 않다. 그런 점에서 히데코와 숙희가 빠진 두 여자 주인공 김민희와 김태리의 육체의 굴곡만 두드러졌다. 또한 그런 이유로 공허하다.



단지, 타자, 남성들이 바라보는 여성 육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한 장면이었을 뿐이다. ‘여자들끼리 성행위는 어떻게 할까?’ 영화를 보는 이런 남성 관객들의 호기심과 눈요기를 채워줬을 뿐이다. 특히 그 장면은 히데코가 돈 많은 귀족신사들 앞에서 읽어주던 음란서적 속에 등장하는 장면의 실연이었다. 영화는 내내 여성 간의 동성애를 이해하는 척 했지만 단지 ‘척’이었을 뿐이라는 점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히데코와 숙희가 서로에게 끌리게 된 개연성도 매우 떨어진다. 원작이 핑거스미스라는 것이 ‘아가씨’ 개연성 부족의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원작까지 알고 아가씨의 설득력 부족을 ‘알아서’ 보충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히데코가 어릴 적부터 자신의 후견인인 이모부 고우즈키(조진웅)에 의해 야한 이야기를 담은 책 낭독 훈련을 받으면서 갖게 된 남성혐오가 동성애의 직접적인 이유가 될 순 없다는 거다. 히데코는 그동안 거쳐 간 많은 하녀 가운데 왜 숙희에게 끌리게 됐는지, 이미 남자를 아는 숙희는 왜 히데코에게 빠졌는지 설명이 없다. 음란서적에 탐닉한 이모부와 어머니의 부재, 따르던 이모의 자살 이런 것들이 동성애의 직접적인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숙희의 동성애는 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귀족 아가씨에 대한 연민과 동정, 자신이 아가씨를 속이고 있다는 죄책감이 곧바로 동성애로 연결되는데, 관객들은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여성이 여성에 대한 지극한 연민과 이해, 동지의식이 동성애의 기초라고 해도 아가씨는 그런 점에 대한 친절한 설명이 없다. 박찬욱 감독이 여성 동성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사회문화적으로 유행처럼 번지는 동성애 바람에 편승한 것이라고 밖에 이해되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 영화의 문제는 이렇게 어설픈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남성혐오를 부추기고 있다는 점이다. 남성을 일방적으로 비하한 혐의가 짙다는 점에서 페미니스트 영화감독 변영주씨의 표현을 빌자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

언론이 쏟아놓은 아가씨에 대한 리뷰 상당수가 히데코의 후견인 고우즈키의 변태성욕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고우즈키를 변태성욕자로 보기도 애매하다. 고우즈키는 춘화도 등 음란서적을 수집해 비싼 값에 팔기 위해 경매에 부치는 일을 하는 일종의 직업인이다. 자신의 아내 즉, 히데코의 이모와 조카인 히데코에게 낭독을 시키는 것도 그런 직업을 가진 가족사업의 일환으로 볼 여지가 있다.

물론, 조카에게 어릴 때부터 야한 소설을 낭독시키거나 아내에게 강요해 자살까지 이르게 한 점은 학대의 징후가 뚜렷해 보인다. 하지만 고우즈키가 춘화도나 음란서적에 등장하는 각종 성적 기구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를 변태성욕자로 몰아세우기는 어렵다. 그가 조카에게 손을 댔다는 의심을 할 직접적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낭독일에 몰려드는 귀족신사들에게 청각적 상상력뿐 아니라 시각적 호기심을 채워주는 도구로 이용했음직한 기구들을 갖고 있다는 것이 그가 변태성욕자로 몰릴만한 ‘혐의’로 보긴 어렵다.

고우즈키와 음란서적 낭독을 듣는 귀족신사들은 요새로 치면 ‘야동’ 판매자와 구매자다. 야동을 찾아보는 남성들은 그럼 변태성욕자고 마조히스트, 새디스트일까? 그들이 여성혐오자들일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의 대다수 남성들이 아마 거기에 포함될 것이다.

그런데 아가씨는 야동을 보는 남자는 변태로 취급하고 혐오하는 그런 왜곡된 남성관을 가진 일부 여성의 남성혐오의 시선으로 만들어졌다. 고우즈키가 그런 측면에서 상징적 남성이라면, 히데코를 꼬시는 백작(하정우)은 물욕에 눈이 어두워 여자들을 등치고 이용대상으로만 삼는 나쁜 남성을 상징한다.

두 여자를 속이려던 백작은 역으로 속는 멍청한 남자이고, 한 달 일한 월급을 고급 와인 한잔에 털어 넣는 허세와 과시욕에 눈먼 속물로 그려진다. 막판 고우즈키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던 백작이 마지막 순간 “그래도 내 XX는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식의 독백은 남근주의로 상징되는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를 조롱하고 냉소하는 페미니스트의 시각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남성에 대한 이해도 여성에 대한 이해도 없는 아가씨에서 건질 것은 ‘그림’ 외에는 그다지 없어 보인다. 특히, 남성을 혐오하는 일부 극렬 페미니스트의 인식대로 그린 아가씨는 남혐을 조장하는 영화라는 비판을 받아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동성애를 상업적으로 이용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도 않아 보인다.

아니, 어쩌면 박찬욱 감독의 정치적 편견과 신념이 남성 여성이 아닌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방해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영화판 그 바닥의 분위기에 편승한 건지도 모른다. 아가씨를 본 뒤 남는 공허함과 찝찝함, 불쾌함은 그래서다. 정신질환을 앓는 환자의 살인을 여혐살인으로 몰고 가던 언론의 광기를 스크린에서 다시 확인하는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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