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보 및 독자의견
후원안내 정기구독 미디어워치샵

폴리틱스워치 (정치/사회)


배너

혁명세력에 부역하였다가 목이 잘린 오를레앙공과 김무성 남경필의 유사점

프랑스 혁명의 단초를 연 것은 기회주의적 귀족들이었다. 평민을 편들어 이익을 챙기려다가 모조리 단두대로 보내졌다.

※ 본지는 앞으로 조갑제닷컴(http://www.chogabje.com)의 역사, 외교, 안보 분야의 우수 콘텐츠들을 미디어워치 지면에도 소개하는기회를 갖기로 했습니다. 본 콘텐츠는 조갑제닷컴 회원토론방, 필명 '47 로닌'님의 글입니다.



프랑스 혁명 시기 오를레앙공은 권력과 인기를 노리고 왕실을 흔들고 혁명세력편에 섰다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대통령 흔들기에 여념이 없다가 이제는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는 김무성씨 등의 운명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은 원래 ‘귀족들의 혁명’으로 시작되었다. 물론 ‘혁명’이라고 해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확대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귀족들의 봉건적 특권을 강화하기 위한 ‘반동’이라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1780년대 후반에 이르러 프랑스는 심각한 재정위기에 처해 있었다. 미국독립전쟁 등이 주요 원인이었다. 재무총감 네케르는 엄청난 적자상황을 분식회계로 모면해 보려다가 들통이 나서 추방되었다. 후임인 칼론은 국가가 파산지경임을 직시하고 각종 봉건적 세제의 개혁을 추진했다. 여기서 핵심은 그때까지 폭넓은 면세혜택을 받아왔던 봉건귀족들에 대한 과세였다. 귀족들의 의회격인 명사회는 당연히 반발했다. 이들은 신임 재무장관 깔론느의 비위사실을 빌미로 그를 추방했다. 후임은 브리엔이었다. 브리엔은 명사회와 고등법원의 허가를 얻어 국채를 발행하는 한편 귀족에 대한 과세, 신교도의 공민권 회복, 지방삼부회 무력화(無力化)와 새로운 지방의회 소집 등 광범위한 경제-사회개혁을 추진했다.


기득권세력들은 일제히 반발했다. 법복귀족의 아성인 고등법원은 브리엔이 제안한 일련이 개혁정책들을 불법이라면서 새로운 세금을 부과할 권리는 1614년 이래 한번도 소집된 적이 없는 삼부회(성직자, 귀족, 평민의 세 신분으로 구성된 프랑스의 신분제 의회)만이 갖고 있다고 판결했다.


여기에 불을 지른 사람이 있었다. 바로 국왕 루이 16세의 사촌으로 유력한 왕위계승권자였던 오를레앙공 루이 필리프2세(1870년 7월 혁명 후 프랑스왕위에 오른 오를레앙공 루이 필리프의 아버지)였다. 오를레앙공은 프랑스 국토의 5%를 영지로 가진 강력한 봉건영주로, 루이16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하면 왕위 계승서열이 가장 높은 인물이었다. 그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던 다이아몬드목걸이 사건 때에는 왕실을 비난하는데 앞장섰고, 자신의 궁인 팔레 루아얄을 개방해 계몽주의자-자유주의자들과 어울렸다. 덕분에 그는 인기를 얻어 ‘평등공(平等公)’이라는 별호까지 얻었다. 하지만 그는 본질적으로 가진 게 돈밖에 없는 허랑방탕한 인물인 주제에 왕위를 노리고 끊임없이 왕실을 흔드는 경박한 포퓰리스트에 불과했다.




오를레앙공은 4억2천만 리브르의 차입금 등록을 명한 루이16세의 명령을 불법이라고 항의했다. 격노한 루이16세는 오를레앙공을 파리로부터 추방하고, 그의 고문관들을 투옥했다. 파리고등법원은 루이16세의 조치를 불법이라고 선언했다. 루이16세는 봉건귀족들의 아성으로 변한 고등법원을 개혁하기 위해 국왕전권재판소를 설치하고 소금재판소, 징세재판소 등을 폐지했다. 파리고등법원 등 전국의 고등법원들은 국왕에게 항거해 전국 법원에 파업을 선동하고, 삼부회와 지방삼부회의 소집을 요구했다. 전국 각지에서 소요가 발생했다. 성직자들과 귀족들도 이에 동참했다. 그로노블시에서는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고등법원 청사를 점거하고 국왕에 의해 해직된 판사들을 복직시켰다. 사실상의 반란이었다. 전국적으로 소요가 계속되면서 경제위기, 재정위기는 가중되었다. 결국 루이 16세는 브리엔을 파직하고, 네케르를 재무총감으로 복귀시켰다.


오를레앙공, 법복귀족, 성직자, 귀족들은 정치개혁이나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국왕에게 반항한 것이 아니었다. 오를레앙공은 왕실을 흔들어 왕위를 얻으려 했고, 법복귀족, 성직자, 귀족들은 국왕의 권위에 타격을 가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했다. 프랑스의 문필가 샤토브리앙은 “낡은 국가체제에 가한 최대의 타격은 귀족의 손으로 가해졌다. 귀족들이 혁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오를레앙공을 비롯한 기득권 귀족세력들은 자신들의 승리를 만끽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상상도 못했던 ‘대혁명’의 문을 여는 위험천만한 불장난이었다.


"그렇다. 귀족이 먼저 불을 질렀다. 귀족들은 그 불이 절대왕정을 태워버리고 왕의 권력을 자기들에게 돌려준 다음에는 저절로 꺼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그들은 역사의 흐름을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역사적 감각을 결여한 어리석은 무리였다. 자기들이 지른 불이 절대왕권을 태우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자신들마저 다 태워 버릴 부르주아혁명으로 번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다. 그들은 열기를 뿜으면서 개막되는 개혁을 잃어버린 봉건권의 회복으로 간주하고 있었으나 파트리오트(애국자)라고 불리는 부르주아 개혁가들은 그 개혁을 일체의 과거를 태워 버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노명식, '프랑스 혁명에서 빠리 꼼뮨까지 1789-1871'(까치))


1789년 5월 삼부회가 소집되었다. 중세적 신분제 의회인 삼부회에는 원래 제1신분(성직자)회, 제2신분(귀족)회, 제3신분(평민)회가 각기 집단으로 한 표씩을 행사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평민(제3신분)들은 각각의 의원들이 동등하게 한 표씩 행사하자고 요구했다.


6월12일 평민회가 자체 회의를 열자 제1 신분(성직자) 소속의 자유주의 성향 의원 3명이 평민회 합류를 선언했다. 이어 16명의 성직자가 추가로 평민회에 가담했다. 6월17일 19명의 제1신분 출신 의원들을 포함한 평민회는 자신들을 ‘국민공회’라고 선언했다. 6월 19일에는 제1신분회의가 149 대 137로 ‘국민공회’ 가담을 선언했다. 다음날 국왕이 회의장을 폐쇄하자 이들은 인근 테니스코트에 모여 헌법제정시까지 결코 해산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이것이 유명한 ‘테니스코트의 서약’이다. 결국 루이 16세는 6월 27일 제1신분, 제2신분 의원들 모두에게 국민공회에 참여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한편, 비밀리에 군대를 동원해 정국를 뒤집으려 했다. 하지만 상황은 이미 루이16세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국민공회는 국민군이라는 이름 아래 무장부대를 편성했다.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했단 라 파예트 후작이 국민군 사령관이 됐다. 7월14일에는 무장폭도들이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했다.


이후의 역사는 주지하는 바와 같다. 1789년 8월 국민공회는 봉권적 특권의 폐지와 인권선언을 발표했다. 미국독립혁명의 영웅 노아유 원수의 손자인 노아유 자작은 봉건적 특권 폐지를 앞장서서 주장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들도 한번 번지기 시작한 혁명의 불길을 잡지는 못했다. 민중들은 걸핏하면 폭동을 일으켰고, 그때마다 수백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1792년 1월 16일 국민공회는 투표로 루이16세의 처형을 결의했다. ‘전(前) 오를레앙공’ 루이 필리프(평등공)도 국민공회 의원의 한 사람으로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했다. 루이 16세는 닷새 후에 기요틴(단두대)에서 목이 잘렸다.


루이16세의 처형에 경악한 유럽의 왕조국가들은 연합군을 결성해 프랑스를 침공했다. 공화국의 생존이 걸린 비상상황 아래서 프랑스는 공안위원회가 지도하는 전시(戰時)체제에 들어갔다. 국내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제압하기 위해 공안위원회는 쉬지 않고 단두대로 정적들을 보냈다. 어제의 애국자, 혁명가가 하루아침에 반혁명분자, 첩자로 낙인찍혀 목이 달아났다. 이것이 ‘공포정치’이다. 혁명 초기 혁명에 동조했던 옛 귀족들도 여기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그 중에는 왕실 흔들기에 누구보다 앞장섰었고, 루이16세의 처형에도 찬성했던 ‘전 오를레앙공’ 루이 필리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뒤무리에 장군의 쿠데타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죄로 1793년 5월 체포되어 그해 9월 처형되었다.



봉건적 특권 폐지를 앞장서서 주장했던 명문 귀족 노아유 자작의 경우 할머니인 노아유 원수 미망인, 어머니, 아내가 한 날 한 시에 단두대에서 목숨을 잃었다. 노아유 원수의 형제와 누이도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국민군 사령관, 국민공회 부의장으로 혁명 초기에 활약했던 라파예트 후작은 급진파의 득세에 놀라 미국 망명을 시도하다가 오스트리아군에 체포되어 5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그나마 그는 프랑스의 적인 오스트리아에서 옥살이를 한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제1신분 의원들이 국민공회에 합류할 때 앞장섰던 탈레랑 페리고르는 공포정치 기간 중 미국 망명생활을 해야 했다 (그는 이후 귀국해 프랑스 외무장관으로 나폴레옹시대를 거쳐 왕정복고 후까지 살아남았다).


프랑스혁명 시기 방계 왕족(오를레앙공)이나 귀족들, 그리고 성직자들은 처음에는 루이 16세의 왕권강화에 맞서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거나 확장하려 했고, 나중에는 혁명세력에 부화뇌동해 새로운 정치적 질서에 참여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이 지른 불은 결국 그들 자신도 태워버리고 말았다. 그들이야말로 레닌이 말했던 ‘쓸모 있는 바보들’의 원조(元祖)였다.
 
그런 바보들이 요즘 부쩍 늘었다. 최순실 사태의 여파로 박근혜 정권이 흔들리자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는 김무성 전 대표, 새누리당을 탈당한 남경필 경기도 지사, 김용태 의원, 그리고 탄핵에 동조한다는 40여명의 새누리당 의원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 중에는 아버지 덕에 수백억원대의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도 있고, 재산에 더해 지역구까지 물려받아 편하게 정치한 사람도 있다. 대한민국의 정체성(正體性)을 지키기 위한 노력에 힘을 보탠 적이 없으면서도, 온갖 포퓰리즘적 제안을 내놓아 대중에게 아부하는 정치를 해 온 자들이었다. 기회만 되면 ‘제왕적 대통령제’운운하면서 대통령을 흔들었던 자들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이 궁지에 몰리자 촛불을 들고 광화문거리에 나서더니, 당을 탈당하는가 하면, 이제는 대통령 탄핵에 앞장서고 있다. 왕실의 일원이면서도 끊임없이 왕실을 흔들어대다가 반체제세력과 손을 잡고 결국은 루이16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던 오를레앙공 루이 필리프와 얼마나 그렇게 닮았는가?
 
사이비 교주 최태민과 그 일족에게 영혼이 포획되어 국정을 이 지경으로 만든 박근혜 대통령을 두둔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는 대한민국 보수애국세력을 실망시켰고, 배신했다. 나도 그에 대해서는 더없이 화가 난다. 좌파 지식인 백낙청의 꼬붕인 김상률 같은 인간을 최순실 라인이라는 이유로 이념전쟁의 사령탑인 교육문화수석비서관 자리에 앉혔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는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으로서의 책무를 게을리 하고 보수적 가치를 실현하기는커녕 보수를 벼랑으로 몰아넣은 데 대해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궁지에 몰리니까 등을 돌리는 김무성, 남경필, 김용태씨 같은 사람들도 꼴보기 싫기는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까? 오를레앙공처럼 행동했던 그들에게는 아마도 오를레앙공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김무성-남경필씨가 광화문에 촛불을 들고 나섰지만, 그들에게 환호하는 시민들은 없었다. 지난 11월15일 경북대에 강연하러 갔던 김무성씨를 맞은 것은 "당신도 근혜씨랑 친했잖아요" "탄핵이라는 큰 그림 그리지 말고 노후를 그리세요" "그냥 같이 손잡고 나가세요"라는 비아냥거림이었다. 그는 모교인 한양대에서도 강연을 취소당하는 망신을 당했다. 인터넷에서 ‘김무성’이라는 검색어를 치면 ‘부역자(附逆者)’라는 말이 함께 뜬다. 그가 이제 어떤 정치적 제스처를 취하든, 그는 박근혜 정권과 공도동망(共倒同亡)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얘기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더 의미심장하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지지도는 4~5%대로 빠졌지만, 문재인씨의 지지도가 눈에 띠게 올라가지는 않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의 실패에 대해 보수들이 속상해 하고 있지만, 그들이 좌파세력을 지지할 리는 없다. 이들은 보수의 가치를 체현(體現)할 수 있는 인물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면서 이들은 이런 동란의 시기에 제 자리를 지키지 않고 전열(戰列)에서 이탈한 자들을 마음 속 블랙리스트에 올려놓을 것이다. 좌익세력으로부터 ‘박근혜 정권의 부역자’로 찍힌 그들은 애국보수의 눈에도 이미 ‘좌익세력의 부역자(附逆者)’가 되어 버렸다.


좌우 모두로부터 부역자로 낙인찍힌 그들은 이미 정치적으로 기요틴(단두대)에 목을 들이 민 것이나 다름없다. 그들의 머리 위에 칼날을 떨어뜨리는 역할은 다름 아닌 성난 보수유권자들이 맡을 것이다. 정권과 인기에 눈이 멀어 부박(浮薄)하게 행동하면서 배신의 길을 걸었던 오를레앙공이 기요틴에서 목이 잘린 것처럼, 다음 총선에서는 지금 전열에서 이탈한 새누리당 배신자들의 정치적 생명도 끝장날 것이다.


배너

배너

배너

미디어워치 일시후원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현대사상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