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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5년 11월 27일, 대한민국 사법은 진실과 원칙을 지키는 수호자가 아니라 정권의 시녀(侍女)로 전락한다.


11월 24일 김영삼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법정에 세우기 위해 5.18 특별법을 수용하고자 한 3일 후였다. 내란죄에 대한 공소시효를 무력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드디어 공소시효를 무시하고 소급입법을 금(禁)한, 이른바 민주주의를 짓밟는 민주화 세력의 역설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전두환 노태우 변호인단은 사퇴하기에 이른다. 이는 이미 재판의 결론을 내려놓은 정치재판이자 기교재판이었고, 그 어떤 변론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법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소위 민주화라는 언어로 국민을 속이던 사이비(似而非) 민주주의자들에 의해서 대한민국의 사법은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었고, 나라는 마침내 IMF 비극 속으로 들어간다. -


 

전두환 대통령에 대한 법정세우기는 김영삼의 증오와 모종의 음모에서 출발한다. 김영삼 역시 역대 대통령들처럼 비자금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고 전두환 노태우에 이르는 구(舊) 정권의 도움을 받아 대통령이 된 사람이었다.


그러나 김영삼은 그의 통치기간 혹은 죽을 때까지 전두환을 ‘전직대통령’이라는 언어적 대접조차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 김영삼이 은혜를 배신하고, 전두환을 법정에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요약해 본다.


1993년 김영삼은 대통령 취임 후부터 전두환 노태우를 단죄하기로 결정한다. 1993년 5월 김영삼 대통령은 5.13 특별담화'에서 '12.12 사태'에 대해서는 '쿠데타적 하극상'이라고 규정했으며, '문민정부는 5.18 연장선에 있는 민주정부'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5.18을 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한다.


하지만 김영삼은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만큼은 ‘역사에 맡기기’기를 희망하였고, 전 대통령들을 처벌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한 발 물러선다.


그러나 1993년 7월 19일, 12.12 당시 신군부 세력에 의해 지휘권을 강탈당했던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과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22명은 전두환·노태우 등 34명을 군 형법상의 반란 및 내란 목적 살인 혐의로 검찰에 고소한다. 여기에 더하여 1994년 5월 13일, 5.18 사건의 피해자 3백 22명이 전두환·노태우 등 5.18 관련 책임자 35명을 내란 및 내란 목적 살인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한다.


이에 1994년 10월 29일 검찰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는다.


“12.12는 명백한 군사반란 행위였다. 그러나 이 문제는 불필요한 국력 소모를 야기할 우려가 있다.”면서, 12.12 사건에 대해 기소유예 처분을 한다.


이어 1995년 7월 18일 검찰은 5.18 사건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신군부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강경 진압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양민이 사살됐고 비상계엄 확대·정치인 체포와 연금·정치 활동 금지·국보위 설치와 운영 등은 전두환의 정권 장악 의도에 따라 기획·입안해 추진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성공한 쿠데타(내란)를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로 수사 내용과 관계없이 반란죄 및 내란죄 등의 여부를 판단하지 않았고 관련자들을 불기소 처분을 한다.


이는 정치권, 학계, 시민사회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는다. 같은 해 10월 19일 박계동 민주당 의원의 노태우 비자금 폭로로 인해 노태우가 구속된다.


노태우 비자금 사건 폭로 이후 김영삼은 11월 24일 마침내 5.18 특별법 제정을 수용할 것을 시사(示唆)하는 성명을 발표한다.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한 헌법 소원 3건이 헌법재판소에 제기되었고, 1995년 11월 27일 헌법재판소는 5.18 내란 사건 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 사건에 대한 평의회를 열고, 검찰의 '공소권 없음'은 부당하다고 밝혔다.


1995년 12월 15일 헌법재판소는 결정 이유에서 성공한 쿠데타도 형사 처벌될 수 있음을 밝혔다. 1995년 11월 말 신군부 인사의 새로운 혐의가 드러나자, 검찰은 12.12 및 5.18 , 비자금 사건에 대한 재수사에 나섰다. 12월 3일 검찰은 사전 수속 영장을 발부받아 전두환을 안양교도소에 수감한다.


1995년 12월 21일 국회에서 5·18 특별법이 제정되어 전두환·노태우의 대통령 임기 동안 실질적으로 12.12 사건, 5.18 사건 소추가 불가능했다는 점을 확인하기 위해 공소시효 정지 규정을 두었다.


1996년 1월 23일 검찰은 전두환 노태우 등의 관련자들은 5.18 사건에서의 내란죄, 내란목적살인죄의 혐의로 구속 기소가 되었다. 같은 해 2월 2일부터 28일까지 검찰은 12.12 사건, 전두환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사건 등의 관련자들을 다시 기소했다.


죄수번호 3124번 전두환:


1심: 전두환 사형

2심: 전두환 무기징역, 추징금 2205억원

3심(대법원): 전두환 무기징역, 추징금 2205억원

대법원에서 확정된 전두환의 죄목이 무려 13가지였다.

1. 반란수괴

2. 반란모의참여

3. 반란중요임무종사

4. 불법진퇴

5. 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

6. 상관살해

7. 상관살해미수

8. 초병살해

9. 내란수괴

10. 내란모의참여

11. 내란중요임무종사

12. 내란목적살인

13.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뇌물)


1심 법원은 12·12 군사 반란 및 5·17 내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유혈진압 혐의에 대해 전두환을 내란 및 반란의 수괴로 판시, 사형 판결을 내렸다. 2심에서는 전두환에 관한 형은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그리고 대법원은 두 전 대통령 및 다른 피의자들이

"반란수괴·반란모의참여·반란중요임무종사·불법진퇴·지휘관계엄지역수소이탈·상관살해·상관살해미수·초병살해·내란수괴·내란모의참여·내란중요임무종사·내란목적살인·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뇌물)"과 같은 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판결, 확정했다.


이로 인해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에 의거해 전두환, 노태우는 기본적인 경호 이외의 전직 대통령에 대한 모든 예우를 박탈당한다.


그러나 1997년, 김대중은 전두환을 사면(赦免)한다. 무려 2년여에 걸친 정치쑈가 끝난 것이다. 훗날 이 정치쑈는 정권의 필요에 따라 등장과 퇴장을 거듭한다. 그리고 전두환에 대한 국민적 조롱과 모욕, 증오가 이어진다. 그 증오는 자식들에까지 이어지는 연좌제로 진화한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 사법부가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사부재리의 원칙이 무시되었고, 심지어 소급입법까지 적용시킨 악의적인 판결이었다. 사법의 명예에 치명타를 준 것이다.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 라틴어: ne bis in idem )란, 판결이 내려진 어떤 사건(확정판결)에 대해 두 번 이상 심리·재판을 하지 않는다는 형사상의 원칙이다. 그러니까 처벌이 약하다고 해서 다시 처벌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이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더 잔인한 것은 전두환에게 적용된 소급입법이다. 내란 사건의 공소시효는 15년이다. 이에 대한 법리논쟁이 일자 김영삼은 소급입법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법은 권정달 같은 이는 제외하고, 오직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에게만 적용되었다.


그리고 김영삼은 나라경제를 망친다. 국가경영에 혼신의 노력을 쏟아부어도 어려운 판에, 전직대통령잡기나 하고 있던 응보(應報)를 받은 것이다. 그 소름끼치는 IMF시대를 경험해본 국민들은 이 처참한 시대를 통해 민주화세력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것이다.

2017. 10. 23일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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