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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육군특별지원병,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육군특별지원병 ... 식민지기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는 ‘제국의 첨병’이었지만, 해방 이후에는 새로운 조국 대한민국에 진충보국하는 ‘조국의 간성’



일제시대 육군특별지원병이란 1938~44년 식민지 조선에서 시행된 특별지원병제에 의해 양성된 조선인 출신의 일본군 병사를 말한다. 

종래 한국 근현대사는 일제시대 육군특별지원병을 일제의 광범위하고 철저한 강제동원의 피동체에 불과했고, 피와 살을 받쳐 일본과 천황을 위해 충성했던 민족의 반역자로 간주해왔다. 

하지만,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조선인이 육군특별지원병을 지원한다는 것은 죽기 아니면 살기의 사생결단이었다.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자신의 권리와 생명마저 일본에 내맡기는 그렇게 무기력하고 타율적인 존재였는가.   

1938년 2월 일본 육군성은 칙령 제95호‘육군특별지원병령’을 공포하였다. 특별지원병제는 당시까지 일본 병역법 적용에서 배제되었던 조선인을 대상으로 지원병역을 부여하는 일본 식민지 최초의 군사동원이었다. 

지원자 조건은 만 17세 이상, 보통학교 졸업 이상, 신장 1.6미터 이상의 조선인 남자라면, 누구나 응모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원자 전원이 육군특별지원병으로 선발되는 것도 아니었다. 도지사, 조선총독부, 조선군사령부가 실시하는 신체검사, 학과시험, 면접시험이라는 3차에 걸친 엄선주의 선발 전형을 통과해야 했다. 





육군특별지원병제는 정원 1만 6500명에 대해서 지원자 80만 3317명으로 약 49대 1의 치열한 경쟁율을 기록하였다. 이들 지원자의 대부분은 ‘보통 이상의 생계를 영위’하는 중농층 가계의 차남들이었다.

중농층은 전근대 양반 출신의 상류층과 달리 출세 지향성이 강한 상민 출신이었고, 가계 경제력 확충과 함께 자식들의 근대교육에도 힘써 왔던 역동적인 조선인 계층이었다. 조선인 출신 지원자 중에서도 약 72퍼센트를 차지했던 한반도 이남 출신 청년에게 육군특별지원병은 향촌사회의 신분차별로부터 탈출이자, 신분세탁을 위한 입신출세의 지름길이었다. 그래서 혈서지원은 물론이고 수년에 걸친 재수지원도 주저하지 않았다.  

제2차 조선총독부 전형시험을 통과한 합격자는 이른바 ‘황국신민의 도장’으로 불리던 육군병지원자훈련소(지금의 육군사관학교 화랑대)에 입소하였다. 6개월에 걸친 입소생의 생활은 오전 6시부터 오후 10시까지 학과교육, 정신교육, 내무생활로 짜여진 촘촘한 그물망이었다.

육군병지원자훈련소는 몸과 마음으로 충군애국을 실천하는 병영생활의 복사판이자, 비국민을 국민으로 포섭/개조하는 이른바 ‘국민 만들기의 공장’이었다. 여기서 이들은 근대사회에 적응하는 시간, 신체, 언어의 엄격한 규율화와 함께 능력주의에 기초한 ‘군대적 평등성’을 경험하였고, ‘정강한 제국의 첨병’으로 단련되었다. 

1939년 5월 중일전쟁에 참전한 육군특별지원병은 당초 예상과 달리 발군의 군사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이들의 중일전쟁 참전은 상무정신으로 충만한 조선인의 군사적 자질과 조선인의 국민됨을 시험하는 역사적인 무대였다. 

1943~45년 이들은 뉴기니아, 버마, 필리핀 등 아시아태평양전쟁에도 동원되었다. 특히, 조선군 제20사단 소속 육군특별지원병은 부산항으로부터 약 6000키로미터가 떨어진 머나먼 뉴기니아 전선에 파병되었다. 이들은 일본인 전우와 함께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열대밀림, 해발 3~4000미터의 고산지대, 광활한 습지대를 누비며 고군분투하였다. 이들은 보급마저 끊겨버린 극한의 전장환경과 생물학적 한계를 돌파해야 하는 처절한 생존투쟁의 와중에서 스스로를 악마화시키는 철저한 인간성 파괴를 경험하였다. 

육군특별지원병은 중일전쟁과 아시아태평양전쟁을 거치면서 전문적인 군사지식과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투철한 국가관, 군인관, 사생관을 내면화하였다. 이들은 일본인 병사들보다도 더 용감하고 더 장렬하게 전사해서 조선인의 기개와 배짱을 보여 주고자 임전무퇴의 정신으로 전쟁에 임하였다. 이러한 정신과 결단이야말로 가족과 동족을 지켜는 일이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해방 이후 이들은 1946년 이래 군사영어학교 등 다양한 군사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초급장교로 임관하였다. 전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장창국 장군의 증언과 같이 이들은 ‘명령에 대한 절대적 복종, 임무 완수의 강한 책임감과 충성심’으로 무장한 ‘제대로 된 상무집단’이었다. 




한국전쟁기 이들은 최일선 부대장으로 병력과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의 남침기도를 저지·분쇄하는데 발군의 군사적 역량을 발휘하였다. 전쟁의 전체 흐름마저 바꾸어 놓은 영웅들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조국 대한민국을 지켜내는데 추호도 망설임도 없었다. 대표적인 인물은 춘천대첩의 임부택 장군, 이화령의 불사신 함병선 장군, 낙동강 전선 기계-안강 전투의 송요찬 장군 등이었다. 이들의 용전분투는 한강 방어선과 낙동강 방어선 구축 그리고 유엔군의 참전을 위한 절체절명의 시공간을 확보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그래서 이들은 1950~60년대 대한민국 육군 60만 대군을 호령하는 육군참모총장, 합참의장, 국방장관으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이들은 식민지기 일본에 충성을 맹세하는 ‘제국의 첨병’이었지만, 해방 이후에는 새로운 조국 대한민국에 진충보국하는 ‘조국의 간성’이었다.     

이들은 20세기 ‘전쟁의 시대’에 태어나 나폴레옹처럼 위대한 군인이 되고자 일본군에 투신하였다. 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일본 신민이었고, 그것도 참정권과 병역의무도 결여한 2등 국민이었다. 

이들은 ‘망국노’라는 편견과 차별을 극복하면서 ‘제대로 된 상무집단’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1948년 신생 대한민국 건국과 함께 국제 공산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냈고, 한강의 기적으로 회자되는 대한민국 성취의 기초를 닦은 장본인들이었다. 

이들은 오늘날 한국 일각의 반일종족주의가 강조하는 ‘반민족행위자’였는지 모르지만, 1945년 해방 이후에는 자유인의 공화국 대한민국의 자유와 인권을 수호하는데 희생과 헌신을 마다하지 않았던 ‘진정한 애국자들’이었다.  

/ 정안기(경제학 박사 · 서울대학교 객원연구원)


[ '식민지시대 육군특별지원병, 그들은 누구인가' (17차 국가경영포럼 / 정안기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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