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자생물학 Essay] 13. 유무관념에 의한 생명현상의 혼란과 의식체계의 오류

궁극의 만물이론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이고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이돈화 gi1982@naver.com 2018.05.13 17:19:25

[편집자주] 미디어워치는 입자생물학자이자 생명과학 철학서 ‘라이프사이언스’(해조음 출판사)의 저자인 이돈화 씨(블로그주소 http://blog.naver.com/gi1982)의 생명과학 철학 에세이들을 특별 연재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사람의 시각적인 인식작용에서 1초에 24장 이상의 사진이 눈앞에 지나가면 연결된 영상으로 인식되듯이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느끼는 이 모든 것이 비슷한 작용으로 인식(요별)되며, 이와 더불어 생체의 모든 신호전달체계는 기관조직에 따라 다르지만, 1초에 수만 번 이상 작동하면서 본래의 연결된 영상으로 착각하는 인식작용에 더하여, 사람의 생각을 유무(有無)의 통상적(通常的) 관념으로 이끌어, 의식체계에서 일체를 ‘있고 없음’의 양변(兩邊, Two extreme views of annihilation and eternalism)으로만 분별하게 하는 유무이변(有無二邊, The two extremes of existence and non-existence)이 형성되도록 한다.

따라서 뜰 앞의 잣나무가 항상 그 나무인 줄 착각하고, 눈앞의 모든 현상이 분명하고도 분명하여, 항상 존재하는 절대적 실제상황이라는 유무의 관념에 얽매여 벗어나기가 힘든 것이며, 이러한 유무의 고정관념 위에서 출발한 존재론적인 서양철학은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의 생각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종교적인 입장과 과학적인 입장으로 견지(堅持)되어, 지금까지도 세상의 모든 시시비비(是是非非)의 원인을 제공하고, 과학적 한계를 실재(實在, reality)라는 개념 위에서만 설정하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의식체계에 의한 생명현상의 오류를 수선(修繕)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서조차 바로잡기 힘든 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인 유무의 관념이며, 이에 의지한 ‘있다는 한 생각’이 무의식의 저장고(貯藏庫)인 유식론상(唯識論上)의 함장식(含藏識, The fundamental or storehouse consciousness)을 형성하는 근본이 되어 생사를 일으키고, 의식적 유전현상인 윤회(輪廻, The cycle of transmigration, Birth and death or the cycle of rebirth)라는 현상을 지어낸다.

유무의 관념은 사람이 평소에 자주 눈을 감고 생각하거나 생각을 한곳에 모아 정신을 집중하지 않아, 생각이 항상 과거와 미래, 먼 곳과 가까운 곳이라는 시공간적 상(視空間的 相)과 일체의 분별상(分別相, discriminating form of a material and conceptual)을 그려냄으로써 드러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눈을 감고 자주 몽상(夢想, thinking of dreamlike)에 잠기거나, 대상과 상황을 눈앞에서 명확하게 인식하여 판단하지 않고, 막연하고 애매모호하게 생각하고 인식하는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육신의 감각기능과 인식체계의 기능이 떨어지면 의식체계가 혼란을 일으켜 치매(癡呆, dementia or schizophrenia)에 걸리기가 쉬우며, 이는 생명체의 의식체계가 물질구조인 몸을 의지하여 육체의 에너지를 빌어 발현하고, 또한 계통적 지위에 따른 형체적 특성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발현됨을 의미한다. 즉, 나무가 사람의 생각을 내지 못하고, 사자(獅子)가 사람의 생각을 내지 못하며, 일체의 생명체는 각자 의지한 몸의 생체에너지에 합당한 의식체계를 발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통적 지위에 따라 발현되는 의식체계의 기능적인 수준도 달라지게 된다.

또한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나타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수행자들도 수행에 의하여 의식체계에 의지하여 형성한 자아(自我, Self or ego: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성립된 존재적 가아이며, 이를 항상 지각하는 존재적 위치가 공소空所이다.)라는 가아(假我, The false ‘I’)를 벗어나, 의식체계를 떠난 본래의 직관적 주체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야기되는 여러 가지 정신적 혼란을 방지하고, 잘못된 수행의 결과에 빠져서 안주(安住)하는 위험을 예방하기 위하여, 언제나 눈을 뜨고 염의(念意, mindfulness and mind-mirror)를 눈앞에 두어, 염념불리(念念不離)하여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공간적인 상(相)을 끊고, 지금(只今, Right this minute or place, The very spot) 눈앞의 지각처(知覺處, The cognitive and mindful base)인 당처(當處=只今)에서 혼신을 다하며, 유무를 비롯하여 일체의 분별상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여기서 말하는 염념불리는 찰나찰나(刹那刹那, 1초에 72번씩)에 일어나서 염념상속(念念相續, from thought moment to thought moment)하는 끊임없는 생각의 이어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 일어난 생각이 일념상응(一念相應, Association or response in a thought-moment)하여 간단(間斷, Interruption)없이 항상(恒常, The permanency and eternity)하는 것을 말하며, 일념(一念, A concentration of mind)이 간단없이 항상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정지되고, 동시에 시간과 함께 동반하는 공간마저 요동(搖動)하지 않는다.(여기에서는 일념에 의지하여 있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이 멈추고 공간의 요동이 멈추었을 뿐, 시공간의 장벽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일념이 항상하여 간단이 없기 때문에, 생각 생각이 이어가는 틈이 없어 일체의 번뇌망상(煩惱妄想, Defilement and illusion arising from ego)과 분별하는 사량이 끼어들지 못하며, 시공간을 떠나 상응(相應)하는 일념 그대로가 거울이 되어, 눈앞의 일체대상과 현상을 비추어(회광반조) 알 뿐이다. 그러므로 일념이 상응하여 간단없이 항상하는 곳에 시공의 요동이 사라지고, 그 상응하여 의지한 일념마저 여읜 완전한 무념(無念)에서야 비로소 진공(眞空, The true emptiness)이 펼쳐지며, 무념이 항상하여 회광반조(廻光返照, Introspection)하는 곳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그 한 마음이 난 바 없이 난다.)하는 것이 곧 진공묘유(眞空妙有, Wondrous being of true emptiness)이다.

그런 연유로 “팔만대장경에 새겨진 모든 글자를 하나로 합친 형상은 마음 심(心) 자 한 글자가 되고, 그 뜻하는 바는 빌 공(空) 자 한 글자로 귀결되며, 마음마저 공한 심공(心空)의 자리는 유무이변을 떠난 중도지견(中道智見)이 되어 진공묘유가 발현하는 근본이 된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체(一切)는 유심조(唯心造)이고, 유심조는 ‘응무소주 이생기심’을 바탕으로 하며, 이것이 진공묘유의 진면목(眞面目, The origin natural true mind)인 것이다.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존재하는 현상우주에서 존재하는 모든 물질입자들 사이의 결합상수나, 입자들의 질량과 전하, 핵력과 중력 등 다양한 현상(現象)적인 물리상수들은 현상계(現象界) 생명체들이 현상(現象)적인 시공간에서 생명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최적의 값으로 짜여지고 조절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현상계에 존재하는 인간들의 모든 수리적 개념이 유무의 존재론적 관념에서 ‘있다는 생각에 대한 의식체계상의 무의식적인 본능적 합리성’을 바탕으로 하는 편향된 무대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며, 한 점 찍어 존재하는 존재론적인 유무(有無)만 알 뿐, 한 점을 거두어들여 유무를 떠난 공(空)과 그 진공(眞空)에서 현현(顯現)하는 진공묘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주에 속해 있는 관측자는 우주의 파동함수를 붕괴시킬 수 없다.”라는 소위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의 문제점이 생겨나는 것이며(역시 현상우주의 빛으로는 현상우주를 벗어날 수 없다.), 또한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만법귀일萬法歸一 일귀하처一歸何處)”하는 답 없는 물음이 성립되는 것이다.

원자의 세계에서 보어(Niels Henrik David Bohr, 1885-1962)는 전자를 궤도 위에 올려놓았고, 하이젠베르크(Werner Karl Heisenberg, 1901-1976)는 보이지 않는 궤도를 무시하였으며, 슈뢰딩거(Erwin Schrodinger, 1887-1961)는 파동방정식에 의하여 전자의 궤도를 다시 복원하였고, 다음으로 보른(Max Born, 1882-1970)은 원자의 세계에서는 전자는 확률로 존재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러나 관찰할 때와 관찰하지 않을 때라는 유무법의 존재론적인 입장에 입각하여, 각각 “입자와 파동으로 존재한다.”라는 전자의 존재에 관한 보어의 상보성 원리(相補性 原理, Complementarity principle)와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 Uncertainty principle)의 융합점은 결국 해결하지 못한 채, 슈뢰딩거의 고양이(Schrodinger’s cat)라는 문제점만을 남기고, 초끈이론(Super string theory)이라는 또 다른 애매모호한 이론으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며,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이 꿈꾸던 물리학의 궁극이론이라는 만물이론(萬物理論, Theory of everything)은 아인슈타인의 영원한 꿈이 되어 사라졌다. 이는 그들의 이론이 분명하게 존재한다는 유무의 관념을 벗어나지 못하여 “한 마음 생각을 떠나 변화하면 있음이요, 한 마음 일으켜 변화하지 않으면 없음이다.”라는 절대공(絶對空)의 입장인 중도지견에서의 진공묘유를 미처 알지 못하여, 한 점 찍어 발원하고 찍은 점 하나가 유동(流動)하여 시공간이 벌어져, 공간이 시간을 함유하고 시간이 공간을 의지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은 공간을 이동시키고, 공간의 유동은 시간의 흐름을 유발하는 ‘진공이 있음이고 있음이 진공’인 진공묘유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의식체계에 의지하여 인식하는 실존적 현상에서는 생각의 차원을 달리할 때마다 그 현상하는 양상은 천차만별(千差萬別, infinite variety)이며, 그렇기 때문에 현상적 차원의 만물이론은 의식적 사량분별에 의한 개념과 관념적 법칙일 뿐이며, 궁극의 만물이론은 ‘진공묘유’이고 ‘일체유심조’이다.


※ 본 칼럼은 입자생물학자인 필자(이돈화)의 拙著 ‘라이프사이언스’(해조음 출판사) p.117-121의 내용을 수정ㆍ보완한 것입니다.

이돈화 gi198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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