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잇=강원준 기자 | 요즘 지하철이나 거리 어디를 가도 풍경은 비슷하다. 고개를 숙인 채 스마트폰을 한 손에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화면을 쉼 없이 위로 올리며 숏폼(Short-form) 콘텐츠에 몰입한 이들이 가득하다.
주요 소셜미디어(SNS) 기업들은 이를 놓치지 않고, 이 ‘1분 내외의 전쟁터’에 먼저 그리고 더 많이 깃발을 꽂기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최근 업계에 따르면, 인스타그램은 한국과 인도 등 주요 국가에서 앱 접속 시 첫 화면에 친구의 게시물(피드) 대신 숏폼 서비스인 ‘릴스(Reels)’를 전면에 내세우는 개편을 실험 중이다.
지난달 기준 월간 활성 이용자 수(MAU) 30억 명을 돌파한 인스타그램은 이러한 가파른 성장세의 핵심 동력으로 릴스를 꼽는다.
유튜브의 공세도 만만치 않다. 유튜브는 모바일 앱 홈 화면 상단에 자사 숏폼 서비스인 ‘숏츠(Shorts)’를 우선 배치하며 이용자 체류 시간을 극대화하고 있다.
지난 2020년 출시된 유튜브 숏츠는 2023년 기준 월간 사용자 20억 명, 일일 조회 수 700억 회에 육박하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웠다. 챗GPT 개발사 오픈AI까지 AI 기반 영상 공유 SNS 시장에 뛰어들며, 바야흐로 ‘도파민 경제’의 정점을 향해 달려가는 형국이다.
하지만 이 자극적인 영상의 홍수 속에서 흥미로운 역행 현상이 감지되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가장 디지털 친화적인 세대라 불리는 Z세대를 중심으로 책 읽는 모습이 멋지다는 ‘텍스트힙(Text Hip)’ 트렌드가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텍스트힙은 글자(Text)와 멋지다(Hip)를 결합한 신조어로, 독서하는 모습이나 감상 깊은 문장을 SNS에 인증하며 자신의 지적 취향을 드러내는 문화를 뜻한다.
1분 내외의 범람 속에서 피어난 ‘텍스트힙(Text Hip)’의 역설
국내에서는 몇 년 전부터 유명인들이 책 읽는 모습을 보여주고 Z세대가 이를 따라 책을 구입하면서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연예인이나 인플루언서의 행동과 취향을 따라가려는 욕구가 독서 열풍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대표적인 예로 걸그룹 아이브의 멤버 장원영은 2024년 5월 유튜브 방송에서 “사람들은 마흔에 읽지만 저는 스무 살에 읽고 싶었다”며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를 언급했다. 이후 해당 도서의 판매량은 전월 대비 2배 급증하며 2024년 상반기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1위까지 올랐다.
또 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400만 관객을 돌파한 가운데 역사적 배경이 된 조선 6대 왕 단종과 조선 왕실 역사에 대한 관심이 도서에도 이어지고 있다.
온라인 서점 예스24에 따르면, 이 영화가 개봉한 지난달 4일 이후 한 달간 영화의 배경이 되는 조선의 임금 ‘단종’의 키워드로 도서 판매량이 전년 동기 대비 2565.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전소설 ‘단종애사’를 필두로 어린이 역사서와 조선왕조실록까지 다양한 장르의 도서 판매가 함께 늘며 영화 흥행이 독서 열풍으로 확산하는 모양새다.
이처럼 셀럽의 취향이나 영상 콘텐츠가 독서로 이어지는 현상은 매우 고무적이다. 짧은 영상에 익숙한 세대가 숏폼의 자극을 넘어, 긴 호흡의 텍스트가 주는 밀도 높은 즐거움을 발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화가 주는 ‘뜨거운 감동’이 잠시 머무는 것이라면, 책을 통해 그 이면의 역사와 맥락을 파고드는 행위는 ‘내면의 단단한 지층’을 쌓는 일과 같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질문을 던져야 한다. 단순히 유행을 따르는 것을 넘어, 왜 지금 이 시점에 유독 ‘종이책’이라는 아날로그적 매체가 다시금 각광을 받는가 하는 점이다.
기술은 전례 없는 속도로 진화하고 있으며, 특히 인공지능(AI)은 인간의 지적 노동을 대신해 모든 정보를 요약하고 편집해 주기에 이르렀다. AI가 모든 정답을 단 1초 만에 ‘딸깍’하고 내어주는 시대, 왜 청년들은 다시 고리타분해 보이던 ‘종이책’을 집어 들었는가?
공부가 아닌 ‘놀이’가 된 독서 : 취향을 넘어 문화가 되다
이러한 ‘텍스트힙’ 현상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유행에 그치지 않는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실시한 ‘2025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에 따르면, 성인 전체 독서율이 하락세를 보이는 와중에도 20대를 중심으로 독서율이 상승하는 이례적인 흐름이 포착됐다.

2024년 9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1년간 한국 성인의 종합독서율은 38.5%로 2023년 조사와 비교해 4.5%p 하락했다.
연간 종합독서율은 지난 1년간 교과서나 만화 등을 제외한 일반도서(종이책·전자책)를 1권 이상 읽거나 (오디오북을) 들은 사람의 비율을 뜻한다. 10년 전인 2015년 조사에서 67.4%였던 종합독서율은 격년 단위 조사에서 가파르게 하락해 올해 처음 40%대 아래로 추락했다.
이번 조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단연 20대(만 19~29세)의 약진이다. 20대의 연간 종합독서율은 75.3%를 기록하며 성인 전 연령대 중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는 2023년 조사보다 0.8%p 증가한 수치로, 같은 기간 성인 전체 독서율이 4.5%p 감소해 38.5%까지 떨어진 것과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기성세대가 책을 멀리할 때, 오히려 ‘디지털 네이티브’인 청년들은 활자 속으로 걸어 들어간 셈이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디지털 독서로의 빠른 전환이 자리하고 있다. 20대의 전자책 독서율은 59.4%로 종이책 독서율(45.1%)을 크게 앞질렀다.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를 통해 언제 어디서든 텍스트를 소비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은 것이다. 여기에 오디오북 이용률 역시 20대에서 10.9%로 전 연령대 중 가장 높게 나타나며, 텍스트를 소비하는 방식이 더욱 입체적으로 변모했음을 보여준다.
더욱 흥미로운 점은 독서를 바라보는 태도의 변화다. 성인이 독서를 하는 이유로 ‘책 읽는 것이 재미있어서(20.3%)’라는 응답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2019년과 2021년 조사에서 ‘지식과 정보 습득’이, 2023년 조사에서 ‘마음의 성장(위로)’이 1순위를 차지했던 것과 비교하면 매우 의미 있는 변화다.
이제 독서는 딱딱한 공부나 의무적인 자기 개발이 아니라, 영화나 게임처럼 일상 속 즐거움을 주는 하나의 ‘놀이’이자 콘텐츠로 재정의되고 있다.
‘딸깍’하는 시대의 역설: AI가 복제할 수 없는 ‘사유의 공정’
그런데 화려한 ‘텍스트힙’의 이면에 냉철한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단순히 세련된 책 표지를 SNS에 전시하고, 나의 지적 취향을 드러내는 패션 아이템으로 책을 소모하는 것이 과연 내면을 성장시키는 ‘질적인 독서’로 이어질 수 있겠느냐는 점이다.
독서는 단순한 정보의 습득이 아니라, 문장 사이의 맥락을 스스로 축적해 나가는 고통스럽고도 희열 넘치는 행위다.
AI가 인간의 언어 체계를 완벽히 복제하고 ‘생각의 결과물’을 단 1초 만에 쏟아내는 지금, 우리에게 남겨진 진짜 숙제는 바로 그 결과물에 도달하기까지의 ‘생각의 과정’이다.
한 권의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수백 년에 걸쳐 쌓인 인류 사유의 지층을 직접 통과하는 일이다. 이 지루하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만 우리는 비로소 정보의 홍수 속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어떤 판단이 옳은지 가늠할 수 있는 나만의 ‘기준’을 갖게 된다.
AI가 아무리 정교한 문장을 생성하더라도, 그것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재구성하는 힘은 결국 인간 내부의 ‘사유의 축적’에서만 나오기 때문이다.
AI가 요약해준 지식 속에서는 독서의 본질인 ‘여정’이 사라진다. 출발도, 방황도 없이 곧바로 목적지에만 도착하는 셈이다. 그러나 진정한 독서는 타인의 정신 속으로 깊게 들어갔다가 다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와 그것을 확장하는 창조적 경험이다. 타인의 요약본이 아닌, 스스로 텍스트를 씹어 삼키는 ‘사유의 근육’이 지금 더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차가운 이성의 성배를 찾아, 다시 책장을 넘길 시간
정답이 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는 용기, 그리고 자기 내면의 목소리에 오롯이 귀 기울이는 시간은 오직 책을 펴는 행위를 통해서만 확보될 수 있다.
텍스트를 매개로 다양한 시선과 견해가 공존하고 수용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타자를 환대하는 문화를 자연스럽게 익힌다. 결국 독서야말로 AI 시대를 주도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담보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생존 전략인 셈이다.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는 구독자 310만 명의 유튜브 채널 ‘침착맨’에 출연해 “여전히 책이 최고의 지성의 성배인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책은 우리를 좋은 의미에서 차갑게 만들어주고, 영화는 우리를 뜨겁게 만든다. 그러나 이성은 기본적으로 차가운 것이다. 교양에 관한 한 영화는 책을 영원히 따라가지 못할 것이다. 이성의 속성 자체가 물 쪽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의 말처럼, 영상이 주는 뜨거운 감동도 소중하지만, 우리 삶의 기준을 세우는 차가운 지성은 오직 텍스트라는 여정을 통해서만 완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의 ‘텍스트힙’ 열풍은 그 동기가 무엇이든 반가운 신호다. 과시를 위한 시작이었을지라도, 일단 책을 손에 쥐는 순간 사유의 문은 열리기 때문이다.
이번 주말, 거창한 담론이 아니어도 좋다. 각자의 관심사에 맞춰 책 한 권을 골라보는 것은 어떨까. 영화 ‘왕과 사는 남자’를 감명 깊게 보았다면 비운의 왕 단종의 일대기를 다룬 역사서를, 경제적 자유를 꿈꾼다면 워런 버핏의 투자 철학이 담긴 책을 집어 들어보자.
AI가 모든 정답을 1초 만에 내놓는 시대에 역행하여, 굳이 종이 한 장을 넘기는 그 ‘느린 행위’야말로 당신의 세계관을 가장 우아하게 구축하는 방법이다.
스마트폰의 전원을 잠시 끄고 종이책의 질감을 느껴보기를 권유한다. 그 차가운 이성의 성배 속에 당신만의 정답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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