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칼럼

대학생 인턴 기자의 캐리어 없이 시작된 파란만장 도쿄 여행기(1)

인싸잇=이다현 기자 ㅣ 졸업 전에 언제 또 학기 중에 해외여행을 가겠냐는 생각으로 도쿄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3중 전공을 동시에 끌고 가는 막학년 대학생 인턴 기자에게 그건 반쯤 핑계이고 반쯤 진심이었다. 팀 프로젝트 마감과 기사 마감이 겹쳐 돌아가는 일상을 잠시 뒤로 미루고, 도쿄에서 어학연수 중인 13년지기 친구를 보러 가겠다는 약속을 지키러 떠날 결심을 했다. 여행지에서도 해야 할 일은 후지산의 높이만큼 쌓여 있었지만, 설렘과 기대감이 그 무게를 조금은 덜어줬다.

 

파워 J 기질답게 떠나기 전부터 도서관에서 도쿄 여행 책자를 뒤지고, SNS에서 유명하다는 장소들을 미리 정리해 친구와 동선을 짰다. 그런데 여행의 진짜 백미는 결국 계획의 틈새에서 일어난다. 이번 도쿄에서도 예측 불가한 일들이 꽤 있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아날로그를 고수하는 나리타 공항에서 시작된 인내의 시간

 

인천공항은 QR코드 찍고 여권 스캔하면 순식간에 통과다. 하지만 나리타 공항은 달랐다. 키오스크나 무인 시스템이 거의 없었고, 장난감처럼 보이는 분홍색 기계 앞에 직원이 한 명씩 서서 하나하나 수작업으로 검수했다. 사진 촬영이 불가해서 기록으로 남기지는 못했지만, 도착 후 수속을 마치는 데만 꼬박 1시간 반이 걸렸다.

 

주변에서 들리는 한국어는 전부 “1시간 반이 말이 돼?”라는 불평이었다. 솔직히 기자도 그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디지털화 속도와는 별개로 자신들의 방식을 고집하는 이 나라의 문화가 더 궁금해졌다. 어쨌든 도쿄에 왔으면 도쿄의 법을 따르는 수밖에. 다행히 긴 인내의 시간 끝에 밖으로 나오자 며칠 전까지 비예보가 있었던 것이 무색하게 날이 화창했다.

 

대학생에게 택시는 사치였기에 나리타공항에서 저가 버스 티켓을 끊어 긴자역으로 향했다. 버스 창문 너머로 도쿄 시내가 서서히 눈에 들어오기 시작할 즈음, 친구가 긴자역에 마중 나와 있었다. 약 1년 만의 반가운 재회였다.

 

코인락커 사건: 여행의 첫 복병

 

 

보부상 기질이 있는 기자는 4박 5일치 짐을 꽤 큰 캐리어에 욱여넣었다. 긴자역 코인락커에 맡기기로 했는데, 여기서 첫 번째 사건이 터졌다. 현금으로 결제하면 나와야 할 QR코드(락커 반납 시 찍어서 여는 방식)가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았다.

 

CCTV라도 돌려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일단 어학연수 중인 친구의 일본어 실력에 편승해 고객센터에 전화했다. 문제는 친구가 전화 쓸 일이 거의 없어 해외 로밍을 해두지 않은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국제 전화로 연결해야 했고, 어렵게 일본어로 상황을 설명하던 그 짧은 통화에 3000엔이 증발했다. 설상가상으로 수리 담당자와 시간을 조율하려는 찰나에 전화가 끊겼다. 더 이상 소중한 낮 시간을 코인락커 앞에서 허비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자리를 떴다. 그게 크나큰 실수였다. (이유는 뒤에 서술한다.)

 

히비야 하야시야신베이: 말차 한 잔에 담긴 에도의 시간

 

골칫거리는 일단 묻어두기로 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러 도쿄 미드타운 히비야로 향했다. 2018년 미쓰이 부동산이 조성한 이 복합 상업 시설은 인근 히비야 공원의 자연을 건물 안으로 끌어들이는 구조로 설계됐다. 역사적인 히비야 극장가의 분위기를 계승해 곡선형 외관을 채택했고, ‘극장 공간 도시’를 디자인 컨셉으로 삼아 높은 천장과 아트리움이 인상적인 공간이다. 6층 루프탑 정원에서는 히비야 공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2층에 자리 잡은 히비야 하야시야신베이(Hibiya Hayashiyashinbē)는 에도 시대부터 이어온 말차 전문점이다. 나중에 찾아보니 유튜브 ‘할명수’에서 박명수가 직접 추천한 곳이기도 했다. 세련된 도심의 공간 안에서 전통 방식 그대로 내린 말차를 마실 수 있다는 점이 이 가게의 독특한 매력이다. 실제로 기모노를 차려입은 중장년층 손님들도 여럿 보였고, 교토의 전통 말차 집에 온 듯한 분위기가 났다.

 

 

우리는 더위를 식히고자 시원한 말차라떼와 호지차라떼, 말차 치즈케이크와 말차 푸딩을 시켰다. 푸딩은 대나무 잎에 감싸서 나오는데, 말차 맛이 진하고 쌉싸름한 것이 일품이었다. 말차치즈케이크는 꾸덕하면서도 자기주장 강하게 퍼지는 말차 향이 마음에 들었다.

 

 

달달한 말차 디저트로 오전의 피로를 달래고 나서, 하야시야신베이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는 긴자 아트 아쿠아리움 미술관으로 향했다. 긴자라는 동네 자체가 쇼핑과 문화의 중심지여서 미술관을 찾아가는 길에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미술관은 긴자 미츠코시 신관 9층에 위치해 있다. 그렇게 크지는 않지만 지하로 내려가면서 아쿠아리움 전시를 보는 구조라 입장하는 순간부터 약간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들어서자마자 “이게 수족관인가, 미술관인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화려한 수조와 아트 작품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어서, 입구에서부터 이미 사진 찍고 싶은 장소가 가득했다.

 

 

전시의 테마는 자연과 미술의 융합이다. 물고기와 해양 생물을 중심으로 한 미술 작품들이 관람객에게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하는데, 조명과 반짝이는 유리 안에서 각기 다른 아트 피스들이 물속에서 살아 숨 쉬는 느낌을 줬다. 수조의 물고기들이 마치 예술 작품의 일부처럼 자연스럽게 떠다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빛을 활용한 전시였다. 다양한 종의 물고기들이 빛을 받아 반짝이면서 전시물과 결합되어 있었고, 네온 컬러로 빛나는 물고기들과 아크릴 조각이 어우러지는 장면은 마치 다른 세계에 들어온 듯한 감각을 줬다.

 

어두운 공간에서 발광하는 조명 속에서 수족관과 미술 작품이 만들어내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인터랙티브한 요소가 잘 결합된 전시 공간이었다. 터치스크린으로 물고기 종류나 각 작품에 대한 설명을 직접 찾아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좋았던 건 분위기였다. 관람객이 많지 않아 차분히 사유하며 작품을 즐기기 좋았고, 촬영이 자유로운 공간이라 원하는 만큼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물고기들이 천천히 떠다니는 모습을 보며 ‘물멍’을 즐기기도 했고, 일상 속 스트레스가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나올 때는 기념품 숍에서 물고기 모양 귀걸이와 액자 등 아기자기한 아이템들을 구경했다. 소소한 선물을 고르는 재미도 있었다.

 

코인락커 사건 2막: 사흘 뒤에야 구출해낸 캐리어

 

 

여행 첫날 저녁 8시에 긴자역으로 돌아가 코인락커 문의처에 다시 연락해보니, 절망적이게도 담당 직원이 이미 퇴근한 상황이었다. 다음 날 오전에야 캐리어를 꺼낼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런데 다음 날은 도쿄 디즈니씨 일정이 잡혀 있었고, 오전에 오랫동안 시간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캐리어를 꺼낸 건 3일 차 아침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도쿄도 사람 사는 곳이라 생활에 필요한 것들은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불필요한 지출이 생겨 억울하고 급한 업무를 처리해야 할 노트북이 캐리어 안에 있어 답답했지만, 옷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여행 기념 쇼핑으로 해결했고 나머지는 자비로운 친구 덕에 넘길 수 있었다. 코인락커에 현금을 넣을 때는 QR코드가 즉시 출력되는지 반드시 확인하고, 그 자리를 뜨지 않을 것. 이번 사건이 남긴 쓰디쓴 교훈이다.

 

 

하루의 마무리는 운영한 지 50년이 넘었다는 몬자야키·오코노미야키 전문점이었다. 노부부가 이끄는 작은 식당에는 테이블이 딱 세 개뿐이었다. 대각선 맞은편엔 일본인 커플, 옆에는 네덜란드에서 온 가족. 국적도 언어도 달랐지만 들어서자마자 모두가 웃으며 반겨줬다. 덕분에 첫날 밤 저녁이 더 맛있었다.

 

 

처음 먹어보는 몬자야키는 먹는 방법부터 배워야 했다. 아주 작은 뒤집개로 철판 위의 것을 긁어먹는 방식인데, 낯설지만 재미있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오코노미야키가 입에 더 맞았지만, 일본에 온다면 몬자야키는 꼭 한 번 먹어볼 것을 권한다. 무언가를 처음 해본다는 감각이 여행의 가장 직접적인 즐거움 아닐까.

 

도쿄 첫날의 풍경을 이렇게 늘어놓다 보니, 아직 4일이 더 남았다. 디즈니씨, 우에노, 시모키타자와, 시부야까지. 첫날은 예상치 못한 사건들에 치이면서도 이 도시가 무엇인지 겨우 감을 잡기 시작한 날이었다면, 그다음 나흘은 그 감각을 조금씩 확인해 나가는 시간이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께 묻고 싶다. 도쿄, 혹은 일본이라는 단어가 여러분에게는 어떤 장면으로 먼저 떠오르는지.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도, 이미 다녀온 사람에게도, 아직 가보지 못한 사람에게도 각자의 도쿄가 있을 것 같다. 좌충우돌 도쿄 여행기는 2부에서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