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잇=이다현 기자 | 도쿄의 마지막 행선지는 우에노와 시모키타자와였다. 우에노역에서 내리면 우에노공원 안에 도쿄국립박물관, 국립과학박물관, 도쿄도미술관, 국립서양미술관, 우에노동물원까지 줄지어 있어 1년 내내 관람객으로 붐비는 공간이다.
시간만 넉넉했다면 하루를 통째로 잡고 여유롭게 박물관과 미술관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여행 계획을 세울 당시 욕심이 앞서 가볼 곳이 많았기에 일정이 촉박했다. 마침 모네를 포함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는 말에 미련 없이 국립서양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술관 앞뜰에 들어서는 순간 교과서 속 조각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로댕의 대표적인 작품들이 야외 정원에 건물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었다. 다섯 점은 로댕, 한 점은 그의 제자 앙투안 부르델의 《활을 쏘는 헤라클레스》다. 활시위를 한껏 당겨 화살을 놓기 직전,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부푼 순간을 잡아낸 작품이다.
앞뜰의 주인공은 단연 《지옥의 문》이었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서 착상을 얻은 높이 5미터가 넘는 대작으로, 우리가 흔히 아는 《생각하는 사람》도 원래는 이 문 위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던 한 인물에서 떨어져 나와 독립한 것이다.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된 채 야외에 서 있는 게 의아했는데, 애초에 옥외 전시를 전제로 빚어진 작품들이라 그렇다고 한다.
도쿄 국립서양미술관의 본관은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해 1959년 준공됐다. ‘근대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가 제창한 5원칙, 즉 필로티 구조·옥상정원·자유로운 평면·수평창·자유로운 파사드가 이 건물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1층을 기둥으로 띄운 필로티 구조, 중앙에서 자연광이 쏟아지는 ‘19세기 홀’, 기하학적이면서도 기능적인 콘크리트 외관. 2016년에는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작품: 근대 건축 운동에 대한 현저한 공헌’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그림을 보러 갔다가 건물 자체가 전시품이 되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1층에는 피카소의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눈·코·입이 제자리를 벗어나고 신체 비례가 뒤틀린 그림들. 처음 교과서에서 봤을 때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그림들이었다. 그런데 실물로 보면 이상하게 자꾸 시선이 가고 그림 앞에 서서 오래 고민하게 된다. 피카소의 입체주의는 하나의 시점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전통 회화의 관습을 거부하고 여러 각도에서 본 대상을 동시에 한 화면에 펼쳐낸다. 낯설고 불편하게 느껴지는 건 우리 눈이 익숙한 방식으로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창조의 모든 행위는 파괴에서 시작된다”는 피카소의 말을 그의 작품 앞에 서고 나서야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내부에서 가장 오래 머문 공간은 로댕과 모네의 작품이 나란히 걸린 2층 전시관이었다. 좋아하는 화가의 그림을 인쇄본이 아닌 실물로 마주하는 일은 언제나 조금 다른 공기를 만들어낸다. 붓 터치의 두께와 물감의 질감이 화면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이 사람이 이걸 직접 그렸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실감된다. 인쇄본으로는 도달하지 못하는 그 감각이 작품을 온전히 향유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아닐까.
도쿄 힙스터들의 성지, 시모키타자와
오전에 지적 허영심을 잔뜩 채우고 오후에는 도쿄의 성수동이라 불리는 시모키타자와로 향했다. 도쿄 세타가야구 북부에 자리한 이 동네는 시부야·신주쿠 같은 관광 중심지와는 결이 다르다.
오다큐선과 게이오 이노카시라선이 만나는 교통 요충지이지만, 역에서 내리면 대형 쇼핑몰 대신 좁은 골목과 독립 상점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인디 음악, 빈티지 패션, 개성 있는 카페. 도쿄에서 ‘힙하다’는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동네다.
도착하자마자 허기를 해결하러 구글지도 평점 4.2점을 자랑하는 유명한 스프 카레 집에 들어섰다. 시모키타자와는 카레 축제가 열릴 만큼 카레로 유명한 동네라고 한다. 밥은 중간 사이즈, 맵기는 3단계로 주문했다. 국물이 깔끔하면서도 깊었다. 채소는 하나하나 따로 익힌 듯 씹는 맛이 살아 있었고, 닭고기는 결대로 부드럽게 풀렸다. 담백한 것을 원한다면 야채 카레 스프를, 고기 맛을 원한다면 돼지고기가 들어간 카레 스프를 추천한다.
배를 채우고 나서 본격적으로 빈티지 거리로 들어갔다. 반경 10미터 안에 빈티지 옷가게가 몇 개인지 세다가 포기할 정도로 빈티지 가게들이 줄줄이 있다. 1980년대 플리스, 1990년대 나일론 점퍼, 처음 들어보는 영국 밴드의 티셔츠. 평소 구제 옷을 좋아한다면 눈이 돌아갈 구성이다. 친구와 서로 어울릴 것 같은 여름 반팔 티셔츠를 하나씩 골라 들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숙소로 돌아갔다.
“나중은 나중이고, 지금은 지금!”
도쿄를 떠나는 날 아침, 친구가 지내는 셰어하우스 근처 공원에서 마주한 풍경이 이번 여행에서 가장 오래 남는 장면이 됐다. 벚꽃시즌이 끝난 5월 초 일본 곳곳에서는 고이노보리(鯉のぼり)를 볼 수 있다. 어린이날(5월 5일)을 앞두고 아이들의 건강한 성장과 행복을 기원하며 잉어 모양의 깃발을 바람에 띄우는 풍습으로, 에도 시대 무가(武家)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알록달록한 잉어들이 하늘에서 살랑살랑 헤엄치는 것처럼 보인다.
해맑은 아이들의 웃음소리, 짹짹 우는 아침 새소리, 개울가에 흐르는 물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휘황찬란한 시부야 거리도 도쿄타워도 디즈니씨도 아닌, 이 평온한 외곽 마을의 공원 풍경이 이번 도쿄 여행에서 가장 아끼는 기억의 책갈피가 됐다. 되돌아보면 여행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건 화려한 무언가가 아니라, 그냥 바삐 지나쳤다면 포착하지도 못했을 일상 속 장면이었다.
우리는 평범한 것들에 쉽게 무감해진다. 그 반짝거림은 애써 들여다보지 않으면 금세 흐릿해지기 때문이다. 기적도 중복되면 평범해지기 마련이고, 보통의 하루를 들여다보면 특별하고 감사한 일투성이다. 긍정의 감각은 애써 느끼려 하지 않으면 쉽게 무뎌진다. 그래서 우리에겐 이런 장치들이 필요하다. 다정한 이야기, 마음 귀퉁이를 아릿하게 만드는 풍경 같은 것들 말이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도쿄의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한 남자의 단조로운 하루를 두 시간 내내 따라간다. 사건도 서사도 없이 반복되는 일상. 그런데 그가 점심마다 올려다보는 나뭇잎 사이의 햇살은 매일 조금씩 다르다. 영화는 마지막에 ‘코모레비(木漏れ日)’라는 단어를 설명하며 끝난다. 흔들리는 잎사귀 사이로 비쳐 드는,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빛이라는 뜻이다.
영화 속 그가 조카에게 건네는 대사도 같은 곳을 가리킨다. 나중은 나중이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도쿄에서 보낸 닷새가 꼭 그랬다. 공원에서 들은 새소리도, 그날 아침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던 햇살도 다시 오지 않을 한 번뿐인 순간이었다.
지나치는 작은 아름다움들이 온 하루를 가득 채우기를 바란다. 이 여행기를 발견해 주신 독자 여러분의 오늘도 기적 같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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