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싸잇=강용석 | 5공 정권이 막을 내린 1987년. 그해 추위가 몰아치던 12월 16일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일 부정선거 논란이 있었다. 필자의 또래라면 이것이 당시 선거 과정에서 ‘3김 씨’의 단일화 무산만큼이나 파장이 적지 않았던 이슈이기에 여전히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시 서울 구로구 선거구에서 선관위 관계자들이 투표 시간 종료 전 투표함을 트럭에 옮겨 싣고 이를 은닉하려 한 게 시민에 의해 발각됐다. 해당 투표함은 미봉인 상태로 빵과 과일상자 사이에 숨겨져 있었고, 시민들은 “부정선거”라고 소리치며 구로구청 선관위 사무실에서 소란이 일었다.
당시 스마트폰도 SNS도 없었던 시절이지만, 선거 다음 날 시민들은 이 소식을 듣고 구로구청으로 몰려왔고 문제의 투표함 주위를 둘러싸고 부정선거를 외치며 납득할 만한 해명을 요구했다. 이어 시민들은 구로구청을 사실상 점거해 농성에 돌입했다. 심지어 당시 한 시민은 분신함으로써 부정선거에 항의했다.
필자도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투표함을 지키고 부정선거 해명을 요구하기 위해 구로구청에 몰려온 시민들은 6000여 명에 달했고, 선거가 치러지고 나흘이 지난 12월 20일까지도 부정선거 시위가 지속됐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 문제의 투표함에 대한 개표가 지연되면서 노태우 후보의 대통령 당선 발표도 유예됐다. 결국 당시 해당 투표함을 개봉하지 않은 채 투표용지를 전부 무효 처리하는 것으로 사태가 일단락됐다.
이로부터 약 39년이 지난 2026년 6월의 오늘, 그때 구로구청에서의 시민들의 목소리가 재현되고 있다.
지난 6월 3일 치러진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의 사상 초유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에 시민들이 거리에 뛰쳐나왔다. 집회에는 남녀노소를 따질 것도 없이 민주주의 근간인 선거를 망쳐놓은 이번 사태에 분노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87년 구로구 사태 때와 다르게 시민들의 거센 항의에도 불구하고, 선관위는 경찰의 엄호를 통해 문제의 투표소에 보관된 투표함을 선관위가 옮겨 개표를 마쳤다. 다만 나흘 만에 논란이 진정된 당시와는 다르게, 이번 사태는 닷새를 넘겨도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특히 과거 사태와 다르게 청소년과 20·30세대가 이번 항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시민들은 “부정선거 척결”과 “재선거” 그리고 “선관위 해체”를 외치고 있다. 그러면서 이번 사태에 대한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 선거제도 개선 등을 요구하고 있다. 87년 12월 16일 구로구청에서 울려 퍼진 시민들의 목소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때나 지금이나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인 선거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치르자는 것이다.
그런데 일부 정치권과 언론에서는 이번 사태를 ‘음모론자들의 선동’으로 몰고 가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정성호 법무부 장관은 6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통해 “사태의 혼란을 틈타 일각에서 또다시 준동하고 있는 부정선거 음모론과 이들 극단세력의 불법적인 폭력·위협 행위에 대해서는 깊은 우려를 표한다”며 “일부 극단세력은 참정권을 회복하려는 다수 국민들의 합리적이고 정당한 요구에 이미 수차례 허위로 증명된 자신들의 망상과 음모론을 교묘히 뒤섞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를 마치 부정선거 음모론자들이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다는 의미로 들린다. 여당조차 재선거를 비롯해 사전선거 폐지 등 선거제도 개편 관련 주장에 선을 긋고 이를 부정선거 음모론과 결부하려 하고 있다.
우선 유튜브와 SNS상에서 올라온 수많은 영상을 통해 확인할 수 있지만, 투표용지 부족 사태가 일어났던 잠실7동 제2투표소를 비롯해 현재도 관련 집회가 이어지는 올림픽공원 핸드볼경기장 어느 곳에서도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정치인과 유명 인사를 비롯해 불법적인 폭력을 행사하거나 위협하는 일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 시민들이 선동되지도 않았고, 설령 그런 일이 있다면 자발적으로 제지하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필자도 집회 현장을 직접 찾아갔지만 대부분 평화적이며 주변에 최대한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집회를 이어갔고, 심지어 인근 주민들도 집회에 동참했다.
오히려 시민들에 폭력을 행사한 건 얼굴을 마스크와 선글라스로 가린 정체 모를 일부 경찰들이었다. “극단세력의 불법적인 폭력·위협 행위”라는 정 장관 발언의 출처가 대체 무엇인지 궁금할 뿐이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를 그저 선관위가 부실하게 선거를 치른 것으로 축소하며, 부정선거를 외치는 이들을 음모론자로 치부하거나 잘못된 주장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지난 5일 이번 선거 관련 논란으로 대국민 사과한 노태악 선관위원장이 현재까지 ‘부실선거’ 등을 이유로 몇 번이나 국민들에 고개를 숙였는지 혹시 기억하는가.
2022년 5월 ‘소쿠리 투표’와 2023년 5월 선관위 고위직 간부 자녀 특혜 채용, 지난해 대선 과정에서의 사전투표 용지 반출 등 이미 3번의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로 사과했다.
그들은 그저 부실이라고 하겠지만, 부실이 이렇게 반복되면 시민들은 그걸 부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독재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전대미문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이지 않은가. 또 그 투표용지 부족이 현 야당 측인 보수정당 지지자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에서 상당수 발생하지 않았는가.
초등학교 반장선거도 투표용지가 부족하면 투표와 개표를 중단하고 재투표를 한다. 그럼에도 전국단위 선거에서 시민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음에도 선관위 마음대로 투표도 투표함 이송도, 개표도 떡 주무르듯 하지 않았는가. 이게 과연 부실로 축소할 일인가. 명백한 부정에 해당하지 않는가.
87년 구로구 사태 때도 그랬다. 시민들은 있을 수도 없는 투표함 무단 이송과 은닉을 목격하고 부정선거를 외쳤다.
당시 20대 대학생이자 운동권으로 활동했고, 지금 권력을 잡은 필자의 선배들도 그때 사태를 두고 부정선거를 외치며 구로구청으로 뛰어가지 않았는가.
그때 당신들은 부정선거를 말해도 되는 것이고, 지금 20·30세대들과 시민들은 반복된 부실과 숱한 의혹에도 부정선거를 외치면 안 되는 것인가. 이들 청년들의 이번 집회와 항의를 음모론자들의 선동 결과로 결코 폄훼할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 ‘책임회피’ ‘꼬리 자르기’ 하지 말라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4일 청와대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이번 투표용지 부족 사태를 두고 “민주공화국에서 무엇보다 철저해야 할 선거 관리에 납득하기 쉽지 않은 허점이 발생했다”며 철저한 책임 규명을 당부했다.
그런데 여당을 비롯해 일부 언론은 이번 사태가 선관위의 행정적 잘못일 뿐 대통령 책임으로 연결하지 말라는 목소리는 내고 있다. 한 극좌 인사는 방송에서 선관위가 독립 헌법기관인 만큼, 대통령이 나서서 선관위원장을 압박하거나 이번 일에 대한 사후 처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또 극좌 언론으로 알려진 한 매체는 이번 사태가 대통령의 권한 밖 일이라며 “대통령이 책임지라”는 취지로 주장한 국민의힘을 비판하는 기사를 올렸다.
이들에게 되물어보고 싶다. 당신들이 그렇게 독립된 헌법기관을 존중해서 대통령 선거법위반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한 대법원장을 끌어 내리려 하고, 감사원장 탄핵 추진에 국정조사를 명목으로 감사원을 압박한 건 기억이 나지 않는가.
무엇보다 1960년 3월 15일, 역사적으로 ‘3·15 부정선거’로 알려진 당시 사건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과 관련 없는 ‘부통령 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부정 행위를 책임을 지겠다며 자진 하야했다.
당시 일을 계기로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생기긴 했지만, 그만큼 선거는 민주주의의 근간인 만큼 여기서 생긴 문제는 대통령이 나서서 책임을 지고 해결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번 일에서 마치 독립된 헌법기관을 존중하는 것처럼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평소 여당과 함께 대법원장과 감사원에 하던 대로 선관위를 엄하게 대한다면, 아마도 국민들이 덜 어색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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