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진 칼럼] 좌파 문화권력이 자초한 역풍... “영화는 영화로 봐 달라” 변명 안 통하는 이유

좌파 문화 패권의 이중성, 선택적 표현의 자유가 부른 역풍

인싸잇=심규진 | 2014년 발표된 페이스북 실험은 감정이 전염된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연구진이 이용자 약 69만 명의 뉴스피드에서 긍정적인 게시물의 노출을 줄이자, 이용자들이 쓰는 글에서도 긍정적인 표현은 줄고 부정적인 표현은 늘었다. 부정적인 게시물을 덜 보여주자 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타인의 감정은 화면에 머물지 않았다. 그것을 읽는 사람의 언어로 옮겨갔다.

 

 

영화 「암살자(들)」 논란에서도 주목할 것은 분노의 전염이다. 다만 영화에 대한 반감이 광고와 배우에게 번졌다는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하다. 이번에는 상대 진영의 분노와 응징 방식이 진영의 경계를 넘어 되돌아왔다. 보수 관객들은 이제 자신들이 겪었던 방식으로 항의하고 있다.

 

그 전례가 스타벅스 사태다. 지난 5월 스타벅스는 5·18 기념일에 ‘탱크데이’라는 텀블러 판촉 행사를 진행했다. ‘책상에 탁’이라는 문구도 사용했다. 부적절한 기획이라는 비판이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부적절한 표현과 의도적인 역사 모독은 같은 판단이 아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이를 광주 희생자와 시민들의 투쟁에 대한 모독으로 규정했다. 도덕적 책임을 넘어 행정적·법적·정치적 책임까지 요구했다. 더불어민주당도 국민 앞에 사죄하라고 촉구했다. 상품명을 사용한 마케팅은 대통령과 집권당의 언어를 거치며 공동체의 가치를 부정한 행위가 됐다. 회사는 사과했고 대표는 경질됐다.

 

대통령의 분노는 일반 소비자의 불만과 무게가 다르다. 행정권을 가진 사람이 법적·행정적 책임을 거론하면 기업에는 국가권력의 압박으로 들린다. 표현의 의도와 책임의 범위를 따질 자리에 최고 권력자의 도덕적 판정이 먼저 들어선 것이다.

 

불똥은 고교 야구장으로 튀었다. 광주일고와의 경기에서 ‘스타벅스 가야지’, ‘탱크데이’ 등의 구호를 외친 배재고 야구부에 전국대회 6개월 출전정지가 내려졌다. 재심에서 1개월로 줄었지만, 학생 선수에게 대회 출전은 진학과 진로가 걸린 문제다. 조롱성 응원을 꾸짖고 교육할 일과 팀 전체의 앞날을 묶는 일은 구분했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사회가 학습한 방식은 분명했다. 표현에서 역사적 모욕을 읽어내고, 그 해석을 근거로 책임을 추궁하며, 압박의 대상을 주변으로 넓히는 방식이다. 직접적인 역사 서술이 아니어도 연상과 맥락을 통해 모독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전례였다.

 

이제 같은 질문이 충무로로 돌아왔다.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소재로 한 「암살자(들)」에 역사 왜곡과 고인 모독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출연 배우 유해진의 버거킹 광고에는 항의가 몰려 댓글 기능이 차단됐다. 이동진의 영화 리뷰는 비공개로 전환됐다. 제작진은 특정 인물을 사건의 배후로 규정하지 않았으며 극적 가설을 역사적 사실로 제시하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는 설명이 앞선 논란에서는 충분한 방어가 되지 못했다. 마케팅 문구에는 숨은 뜻을 추궁하고, 학생들의 구호에는 역사적 맥락을 적용했던 사회가 영화 앞에서만 창작자의 의도를 존중하라는 요구를 쉽게 받아들이겠는가.

 

“영화는 영화로 봐 달라”는 말이 설득력을 잃는 이유다. 그렇다면 마케팅은 왜 마케팅으로, 응원 구호는 왜 응원 구호로 보지 않았는가. 실존 인물과 실제 죽음을 다룬 영화에는 넓은 상상력의 면허를 주면서 상품명과 경기장 구호에는 엄격한 역사적 책임을 물었다면, 그 차이를 설명해야 한다.

 

모든 표현을 맥락 없이 보자는 뜻이 아니다. 맥락을 적용하는 기준이 누구에게나 같아야 한다는 뜻이다. 자신이 느낀 모욕은 객관적인 책임의 근거가 되고, 상대가 느낀 모욕은 예술을 이해하지 못한 탓이 된다면 표현의 자유는 원칙이 아니라 진영의 특권이다.

 

페이스북 실험이 이런 정치적 보복의 인과관계를 입증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감정이 타인의 표현에 영향을 받는다는 발견은 이번 사태를 읽는 출발점이 된다. 여기에 공격 방식의 학습이 더해졌다. 보수 시민 일부는 상대가 사용했던 분노의 언어와 압박의 수단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있다. ‘당신들이 하던 일을 우리도 하겠다’는 것이다.

 

이 반응을 모두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그 반응을 낳은 전례를 지운 채 보수 관객의 불관용만 꾸짖을 수도 없다. 역사적 연상을 곧 모독의 의도로 단정하고, 도덕적 분노에 정치권력의 무게까지 실었던 대통령과 집권당에는 그 기준이 사회에 남긴 책임이 있다. 누가 먼저 빌미를 제공했는지를 묻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문화계 역시 그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영화가 금기를 깨고 권력에 맞설 때 대중은 그 도전에 호응했다. 그러나 저항의 경력은 영구적인 면책특권이 아니다. 유명 감독과 배우, 제작사와 배급망을 가진 문화계는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주류다. 자신의 상상력은 보호받아야 하고 관객의 불편함은 교정돼야 한다는 태도는 예술 정신보다 권력의 오만에 가깝다.

 

이번 역풍이 드러낸 변화는 분명하다. 관객들은 더 이상 작품의 내용만 묻지 않는다. 누가 무엇을 표현할 때 자유를 보장받는지도 묻는다. 어떤 분노는 정의로 승인하고 다른 분노는 무지로 처리해 온 문화적 권위가 심판의 대상이 된 것이다.

 

보수도 여기서 멈춰 생각해야 한다. 상대의 이중성을 드러내는 것과 상대의 강압을 복제하는 것은 다르다. 비판과 불매는 관객의 자유다. 협박과 인신공격, 국가권력을 통한 표현의 봉쇄까지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먼저 빌미를 준 책임을 묻더라도, 그것이 뒤따르는 모든 보복의 면허가 될 수는 없다.

 

선택적 표현의 자유가 낳는 가장 큰 폐해는 자유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는 데 있다. 원칙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상대의 행동을 기준으로 삼는다. ‘저쪽도 했으니 우리도 한다’는 논리가 공론장을 지배하면, 자유는 사라지고 응징의 기술만 남는다.

 

「암살자(들)」이 마주한 것은 영화 한 편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다. 좌파 문화 권력이 선택적으로 옹호해 온 자유에 대한 불신이다. 자신들의 분노로 타인의 표현을 재단해 왔다면, 이제 자신들의 작품도 같은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영화는 영화”라는 말을 다시 설득력 있게 만들고 싶다면, 먼저 타인의 표현에도 그만큼의 여지를 인정해야 한다. 자신에게만 허용한 자유가 역풍을 맞는 순간, 상상력이라는 말은 해명이 되지 못한다.

 

□ 심규진 스페인 IE대학교 조교수 약력

 

정치 문법을 문화 전쟁의 관점에서 재구성하며, 우파의 문화적·정치적 복권과 승리를 이끄는 담론을 제시하는 커뮤니케이션 및 미디어 연구자다. 호주 멜버른대학교, 싱가포르 경영대학교(SMU) 등 세계 유수의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싱가포르 교육부 미디어개발국 및 스페인 과학혁신부의 지원을 받아 국제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학사, 미시간 주립대학교에서 석사, 미국 시러큐스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국제 커뮤니케이션 학회(ICA)에서 최고 논문상을 수상한 바 있다. 또한 지역민방 청주방송과 미디어다음에서 기자로 활동했고, 여의도연구원 데이터랩 실장, 국방부 정책자문위원 등을 역임하며 학문과 실무를 아우르는 보수 우파의 브레인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현재 유튜브 채널 〈국민스피커 심규진 교수〉를 통해 정파적 이해에서 자유로운, 독립적 민심과 데이터 기반 정치 평론이라는 대중적 실험에 나서고 있다.

 

▶ 유튜브 검색: @kyujinshim78

저서로는 『하이퍼젠더』,『K-드라마 윤석열』, 『새로운 대한민국』(공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