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7년 봄, 만 17, 18살 때,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서 밭두렁 길에서 쑥을 뜯고 있던 중 40세 정도의 조선인의 남자가 『 나를 따라 오면 신발도 주고 옷도 주겠다.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식당에 데려가 주겠다』라고 말을 걸었다. 집이 가난하여 신을 만한 신발도 없었고, 근근이 허기를 면하는 생활을 하였기에 유혹에 응하여 따라가기로 결정했다”“『 부모에게 인사하고 가고 싶다』고 간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야 한다』며 손에 끌어갔다. 할 수 없이 울면서 이끌려갔다. 남자의 앞으로 걸어가게 하여, 약 1시간 후에 어느 여관에 당도하였다. 방은 밖에서 열쇠를 걸어 잠궜고, 비슷한 나이의 여자애들이 14, 15명 정도 있었고, 나를 어디로 무엇 때문에 데려 가는지 몰라서 울었다. 다음날 일본군 군인 3명이, 열차에 태우고 3일 걸려 상하이역에 도착했다” (판결문의 표현을 기본으로 일부 요약)
한마디로, 이순덕 씨는 일본인이나 일본군에 의해 납치된 것이 아니었다. 법원에 제출한 본인의 진술서에 따르면 이순덕 씨는 가난 등의 배경 속에서 낯선 조선인 남자, 곧 인신매매 중개업자에 의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일본 신문 산케이는 이순덕 씨의 부고를 전한 한국 신문 한겨레의 왜곡보도를 번역으로 확인한 후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전한다.
“17세 때 『 쌀밥에, 좋은 옷도 입을 수 있다는 일본인의 말에 속아 』 일본군에 끌려가...”(4월 5일 한겨레 전자판) “ - 산케이신문 번역
위안부 본인의 재판부 제출 진술 내용조차 완전히 뒤집어놓은 한겨레신문의 명백한 곡필이었던 것이다. 이는 일본인에 대한 인종주의적 증오를 유도하는, 가히 나치 시대의 독일 언론에서 볼법한 왜곡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 일본의 성의나 사죄는 일체 평가하지 않아
산케이는 이어서 정대협이 운영하고 있는 '전쟁과 여성 인권 박물관'의 문제에 대해서도 짚었다.
“‘소녀상’이라고 하는 것은 재발방지를 위해서 만들어진 기념비입니다. 그것을 가해자 측이 철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요시미 요시아키는 한국에서는 양심적 지식인으로 평가받지만 일본에서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왜곡 저술로 악명이 높은 인사 중 하나다. 요시미 요시아키는 자신의 위안부 관련 저작을 날조라고 지적한 이와 소송전까지 갔지만 결국 패소했던 전력도 있다.
(관련기사 : 위안부 연구 선구자 日 요시미 교수, 명예훼손 소송 1심 패소(종합))
일본 총영사관 앞에 설치된 위안부 동상, ‘지킴이’의 배후는 과연 누구인가
산케이는 이어서 부산의 일본 총영사관 앞에 설치된 위안부 동상 문제에 대해서도 다뤘다.
산케이는 곧이어 그 ‘교육’이 어떤 교육인지를 3·1독립운동기념일 당시 집회에서 발표된 성명 내용을 확인한 한국의 관계자를 통해 알게됐다고 한다. 산케이는 “총영사관 인근 공원에는 학생들 약 1,000명이 모여 한일 합의 파기와 함께 한일 안보 분야의 정보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군사정보포괄보호협정(GSOMIA)폐기, 남북통일을 호소했다”며 “모두 한일 이간을 노리는 북한의 의도에 따른 주장이다”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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