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김동호 작가님이 과거에 개인 블로그에 올리셨던 글을 김 작가님의 허락을 얻어 미디어워치가 새로이 재정리해 공개하는 것입니다. |
물론 해당 형사재판의 고소 주체는 ‘표면적으로는’ 위안부 할머니들이다. 또 고소 내용도 ‘표면적으로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명예와 관계된 것이다.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를 찬찬히 읽다보면 박 교수에 대한 고소 주체는 사실상 정대협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독자들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같은 진보좌파 진영 지식인조차 생각이 다르고 관점이 다르다는 이유로 거침없이 탄압하고 있는 정대협의 권세가 과연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제국의 위안부’를 출간한 뿌리와이파리 출판사는 현재 이 책의 PDF 버전을 무료로서 전문(全文)을 공개하는 결단을 내렸다.
조그마한 민간출판사로서는 정말 용기있는 결단으로, 도대체가 말도 안되는 형사재판에 회부된 박유하 교수에게도 필경 큰 힘이 되는 일일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니 독자들이 ‘제국의 위안부’를 직접 읽어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나 필자는 일종의 미리보기 차원에서 여기서는 ‘제국의 위안부’의 몇몇 군데를 발췌하여 소개해보겠다.
아래에서 여러 군데에 길게 직접인용을 했으나 가급적 들여쓰기된 직접인용 부분을 꼭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아래의 본문 중에서 붉은 글씨는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가 삽입한 설명이다.
[서문 중에서 -
(전략)
불편한 일을 굳이 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가 그 모습을 외면하는 사이에, '식민지배는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그 모습들을 왜곡해서 보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에 나선 이들의 대부분은 극도의 '혐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그들의 혐한감정은 특히 이 10여 년 동안 서서히 커져왔다. 그리고 그들의 혐한은 1990년대 초 이후의 역사 문제 갈등에서 한국인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고 언제까지고 비난만 한다는 생각에서 오는 부분이 크다. 그리고 문제는 그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아도 그런 그들의 '감정'을 공유하는 이들이 일본 사회에 급격히 늘어나는 중이라는 점이다. 이제는 혐한파뿐 아니라 한국을 잘 알고 좋아했던 이들조차 이렇게 말한다. "더 이상 한국과 소통하기 힘들다고 느낀다."(지한파 교수) "그동안 일본에게 한국은 특별한 존재였다. 그런데 한국은 일본의 그러한 마음을 알아주지 않으니, 알고 보니 짝사랑을 한 셈이다. 이제 그만 그런 감정을 버리고 한국을 보통 나라로 대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외교관) "나는 한국을 좋아하는데, 한국인들은 거짓말까지 하면서 일본을 욕하고 언제까지고 일본을 용서하지 않으려 한다. 이젠 한국이 싫어지려고 하는데, 어쩌면 좋은가?"(대학생)
말하자면 한일 양국은 20여 년의 역사 문제 갈등을 겪으면서 심각한 소통부재 상황에 빠져버렸다. 외교채널조차 가동되지 못한 지 일년이 넘었고, 현재 두 나라 국민은 상대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 갈등의 중심에 위안부 문제가 있고, 그들은 한국이 세계를 향해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일본의 명예를 훼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다시 한 번 원점으로 돌아가 위안부 문제를 생각해보기로 했다. 이미 8년 전의 책에서 나는, 일본이 '위안부 문제'에 관해 나름대로 '사죄와 보상'을 했다는 사실, 그리고 일부 위안부들이 그 '사죄와 보상'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대해 쓴 적이 있다. 하지만 지원단체(정대협)는 '그 사죄와 보상'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지금 우리가 일본의 사죄와 보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그 때문이기도 하다. 그 판단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위안부 문제가 이렇게까지 심각한 국가 문제가 된 이상 이 문제에 대한 판단을 지원단체(정대협)나 소수의 연구자들에게만 맡겨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이제까지의 20년 동안에는 오로지 소수의 관계자들(정대협)의 생각이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국의 태도를 결정지었고, 결과적으로 이들의 의견이(정대협의 의견) 한일관계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물론 '소수'라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게 되겠지만, 그들의(정대협의) 판단이 전부 옳거나 진실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 동안에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지원단체의(정대협의) 의견에 어느 누구도 이의제기를 하지 못했다. 그러나 단언컨대 현재의 방식으로는 위안부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아마도 한국의 교과서는 '결국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관해 아무런 사죄나 보상도 하지 않았다'고 쓸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일 수가 없다. 그런 이상, 나는 다시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건 그저 좋은 한일관계를 지향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동안 양국의 이해를 위해, 나아가 동아시아의 상호 신뢰회복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노력해온 이들이 쌓아올린 신뢰의 탑이 적대와 대립의 언어만이 난무하는 가운데 무너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갈등을 조장하는 담론들이 마음 여린 이들을 상처 입히고, 마음을 닫도록 만드는 것을 팔짱만 끼고 보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정대협의 이름을 서문에서 계속 거론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박 교수는 '지원단체'라고 일단 지칭하고 있으나 본문을 보면 그것이 '정대협'을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일본 정부가 일정 수준의 사과와 보상을 하였음에도 정대협의 all or nothing 식의 비현실적이고, 극단주의적인 태도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권을 도리어 침범하고 사태를 악화시켜 왔음에 대해 박유하 교수는 조심스러운 언어이기는 하지만 분명한 자신의 뜻을 알리고 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1993년에 일본의 내각관방장관 고노 요헤이의 '고노 담화'와 역대 수상의 사과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위안부 관계 조사결과 발표에 관한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 (한국어 위키백과)
[이른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정부는 재작년 12월부터 조사를 진행해 왔으나, 이번에 그 결과가 정리되었으므로 발표하기로 하였다.
이번 조사 결과, 장기간에, 또한 광범한 지역에 걸쳐 위안소가 설치되어 수많은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위안소는 당시의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영된 것이며,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는 구 일본군이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이에 관여하였다. 위안부의 모집에 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 경우에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이 있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하였다는 것이 명확하게 되었다. 또한, 위안서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태 하에서의 참혹한 것이었다.
또한, 전장에 이송된 위안부의 출신지는, 일본을 제외하면 조선반도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당시의 조선반도는 일본의 통치 하에 있어, 그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하여졌다.
결국, 본건은 당시 군의 관여 하에서,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준 문제이다. 정부는 이 기회에, 다시금 그 출신지의 여하를 묻지 않고, 이른바 종군위안부로서 허다한 고통을 경험당하고, 심신에 걸쳐 씻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올린다. 또한, 그런 마음을 우리 나라로서 어떻게 나타낼 것인가에 대해서는, 유식자의 의견 등도 구하면서, 앞으로도 진지하게 검토해아 할 것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이런 역사의 사실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역사의 교훈으로서 직시해 가고 싶다. 우리는, 역사 연구, 역사 교육을 통해, 이런 문제를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며, 같은 과오를 결코 반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의를 다시금 표형한다.
또한, 본 문제에 대해서는, 본국에서 소송이 제기되어 있으며, 또한 국제적으로도 관심이 모여 있으며, 정부로서도, 앞으로도, 민간의 연구를 포함해, 충분히 관심을 기울여 가고 싶다.]
아래는 '제국의 위안부' 본문 중에 나오는 '아시아여성기금' 관련 대목인데 아마 대다수 한국 사람들에게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 일본과 다른 아시아 국가 사이에 이런 일도 다 진행되었었나, 하게 되는 생소한 내용일 것이다.
[제3부. 냉전 종식과 위안부 문제
1. '위안부 문제'의 발생과 경과 중에서
아시아여성기금이 한국 이외의 다른 모든 나라와 합의를 이룬 부분에 대한 지적.
하지만 같은 해에 기금은 '위안부' 한 사람당 200만엔의 '보상금'과 '총리의 편지', 그리고 한 사람당 300만 엔까지 7억엔 규모의 의료 복지 사업을 실시하겠다고 발표했고, 8월부터 '보상사업(償い事業)'에 들어갔다.
1997년에는 한국에서도 보상이 실시되었지만 격렬한 반대운동이 벌어졌고, 그런 가운데 보상금을 받겠다는 의사를 밝힌 7명의 前 '위안부'들이 일본 수상의 사죄편지와 보상금을 받게 된다. 인도네시아는 '고령자 사회복지 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지급하기로 했는데, 그런 식으로, 피해국에 따라 구체적인 보상 형태는 조금씩 달랐다.
(중략)
같은 기간 기금은 한국 이외의 나라들과는 합의를 이루었고 2002년 말까지 필리핀, 대만, 한국의 285명에게 보상금 지급을 완료하고 2003년 봄에 사업을 종료하고 기금을 해산한다. 그동안 '한국인 위안부'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판을 진행했는데, 1965년의 한일협정에서 개인보상 의무는 끝났다는 이유로 대부분 패소하게 된다.(야마구치 지방재판소에서 이끌어낸 간푸 판결은 유일한 승소 케이스였다).
(중략)
이후 몇 년 동안 일본에서는 위안부 문제가 사회적으로 주목받거나 다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이 동안 한국 정부는 한일회담 문서를 공개하고, 1965년의 한일협정에서 개인에 대한 보상을 정부가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위안부'들을 비롯한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에게 일본의 보상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급하기로 했다. 이들은 정부나 자체단체의 생활보조금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렇지만 한국인 '위안부'들과 지원단체는 그 후에도 일본 정부와 세계를 상대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은 일본의 사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세계적인 문제'로 간주되고 있지만 다른 나라는 사죄를 받아들였으므로, 현재의 '위안부 문제'란 실은 이 몇십 명의 위안부와 지원단체가 주체가 된 '한국인 위안부' 문제이기도 하다.]
고노 관방장관 담화와 하시모토 수상 이래의 역대 수상의 사죄 편지를 통한 사과와 정부가 출자한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한 배상이 진행되었던 것은 필자도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다.
하지만 2003년까지 일본군 위안부가 관련된 다른 모든 나라(필리핀, 대만, 인도네시아, 네덜란드 등)는 일본의 사죄와 배상을 받아들이고, 이후의 위안부 관련 문제는 오로지 한국만의 문제였다는 것은 그 동안 한국 언론 등에서는 전혀 알려오지 않은 일로, 앞서 얘기했듯이 필자도 박유하 교수의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3. 여야가 합의한 아시아여성기금
(전략)
말하자면 '아시아여성기금'이란 그런 상황에서 전후청산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무라야마 정부가 차선책으로 만든 것이었다. 당연히 아시아여성기금은 보상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우파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일본의 진보, 보수 양쪽의 비판을 받으며 사업을 실시했던 것이다.
아시아여성기금은 각의양해에 의해 설립이 결정되었는데, "각의양해에는 전 각료의 합의가 필요했고, 반대파의 설득이라는 정책 결정에 따르는 난관은 의원입법과 다를 게 없다. 관료들에 의한 사전의 '물밑작업'에 따라 각의에 의안이 올라갈 때에 전 각료의 합의를 얻어야 하게 되어 있으며, 각의는 서명만 하는 것이 보통"인데 "자민당의 경우 모든 정책은 당내의 정무조사회에서 심의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며, 거기에서의 결정은 만장일치를 원칙으로 하고 있"어서 "자민당 각료뿐 아니라 반대파 의원의 합의도 얻지 않으면 각의양해에는 도달하지 못"(쓰치노 미즈호.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의 정책과정에 관한 일고찰- 액터 분석을 중심으로')하는 상황 속에서 이루어낸 일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자민당 의원의 숫자가 세 배나 되는 국회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입법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던 상황에서 '국회'를 제치고 '정부'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 '기금'이었다. 다시 말해, '기금'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책임을 지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다만 그 주체가 국회가 아닌 정부였을 뿐이다.]
정대협이 아시아여성기금의 보상을 거부한 주된 명분은 그것이 정부 차원의 공식적인 보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 입장에서는 한일협정을 통해 '개인적인 보상' 문제는 어차피 법적으로 종료된 상태다.
박유하 교수에 따르면 당시의 일본 정부는 위안부에 대한 보상이 필요가 없다는 우파들의 비난을 굳이 무릅쓰고 전 각료의 합의를 통한 '각의양해'를 통해 아시아여성기금의 설립과 자금 지원을 인가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당시 일본에서 가능한 한 최선의 '공식적인 보상'이 아니었겠는가? 아시아여성기금의 보상에 지출된 금액은 일본 정부에서 무려 90% 이상을 지출하였고, 나머지는 일본 국민들의 자발적 기부로 채워졌다.
한편 아시아여성기금의 돈이 ‘보상금’이나 ‘배상금’이 아닌 '위로금'이라서 자존심이 상해 받을 수 없다는 주장도 있었는데, 박유하 교수가 소개하는 일본 진보좌파 지성의 거두인 와다 하루키 교수의 말에 따르면 일본어 '쓰구나이 償い'의 의미에 대한 오해가 있었다고도 한다.
[5. 위로금인가 속죄금인가?
와다 하루키 교수의 말
"기금이 쓴 '쓰구나이償い'라는 말은 '보상'이라는 말과 구별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영어로는 보상은 compensation, 償い는 atonement라고 번역되었습니다. atonement라는 말은, 종교적인 단어로 속죄, 죄를 씻는다는 의미를 갖는 영어입니다. the를 붙여 대문자로 the Atonement라고 쓰면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의미합니다. 영어로 설명을 들은 필리핀과 네덜란드가 아시아 여성 기금에 대해 다른 곳보다 더 이해해준 것은 이 부분과 관련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한국어로는 보상도 償い도 다르게 번역할 수 없어서 똑같이 '보상'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중략)
일본은 '법적 의무'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도의적 의무'를 다하려고 했다. 하시모토 류타로 수상이 편지에서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또 그들이 '법적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 것은 실은 '사죄와 보상'을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1965년의 한일협정을 통해 '법적 책임'은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사죄와 보상'을 다한 모범국으로 인식되는 독일의 '기억, 책임, 미래 재단'의 보상도, 와다가 지적하는 것처럼(앞의 글), '도의적 책임'을 지는 보상금이었다.
와다에 의하면 필리핀과 네덜란드에는 피해자를 찾기 위한 공고를 낼 때 atonement라는 영어가 사용되었는데, 그 단어의 의미가 오해없이 받아들여진 듯 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보상'이라는 말조차 기피되었고, 일본의 비판자들과 똑같은 오해와 공격이 나오게 된 것이다.
(중략)
말하자면 '기금'을 둘러싼 공격과 대립은 하나의 단어를 둘러싼 '해석'의 싸움이기도 했다. 그런데 앞서의 '마이니치 신문' 광고에 실린 네덜란드의 '도의적 보상 청구 재단'은 일본 정부에 대한 요구사항을 '모든 피해자들에 개인보상을 함으로써 고통과 손해를 보상하는 일'이라고 쓰고 있다. '쓰구나우'란 그런 단어다. 말하자면 한자에서도 알 수 있듯, '보상'의 뜻이자 '속죄'의 의미를 갖는다. 아니, 사실 '쓰구나우'는 와다 교수가 설명한 것처럼 '보상'보다 '속죄'의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기금을 완전한 '민간기금'으로 이해한 이들은 일본 정부가 전달한 '쓰구나이킨償い金'을 단순한 '위로금'으로 격하했다. 한국 사회에서 '보상은 없었다.'는 이해가 주류가 된 것은 그런 경과를 거친 결과였다. 그러나 '도의적 책임'을 지는 뜻으로 건넨 그 돈이 일본 정부와 국민들의 '속죄'의 마음이 담긴 보상금이라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일본은 기금의 사업이 끝난 지금도 일부 '위안부'들에게 사후 지원을 하고 있다(특정비영리활동법인 C2SEA). 이 단체의 팸플릿에는 "혼자 쓸슬히 세상을 떠나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습니다. '위안부'가 되었던 분들에게 보살핌을. 가르는 바다=이어지는 바다, 동아시아와 일본-지금, 과거를 돌아보며 만드는 미래"와 같은 문구가 보인다. 그러나 그런 사실 역시 한국에는 알려지지 않는다.
필리핀의 경우는 지원단체가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당사자들의 의견을 존중해서 국민기금을 지급받았다. 네덜란드의 경우는 연합국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전후처리에 대한 조약에 의거해 추가보상을 받지 않고 수상의 편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그리고 그 편지를 받은 이들의 감상은 이들이 기금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어 박유하 교수의 정대협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이 나온다. ‘제국의 위안부’에서 박유하 교수는 정대협이 위안부 할머니들을 어떻게 이용하고, 또 어떻게 그들이 원하는 노선을 따르는 위안부 할머니들만을 부각시켜왔는지 고발한다.
‘제국의 위안부’ 이전에 한국의 제도권 언론 및 출판 분야에서 정대협에 대한 이런 직접적인 비판은 나왔던 바가 없다. 사실 지금도 드물다. 그렇기에 박유하 교수가 시범케이스로 형사재판에 회부됐을 것이다.
[6.위안부/지원단체(정대협)의 분열과 당사자주의의 모순
한국에서는 국민기금의 사업 실시 첫해였던 1997년에 7명이, 그리고 현재까지 총 61명이 보상을 받았지만, 지원단체(정대협)는 기금을 반대했기 때문에 기금과 위안부를 연결하는 공식 창구가 없었다. 그렇지만 초기에 받은 이들은 지원단체(정대협)의 격한 비난을 받았고, 한국 정부의 보상금 지금에서 제외되었다. 기금을 받은 이들이 있다는 사실이 아직껏 알려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런 비난이 있었기에 당사자들이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재 일본대사관 앞에서 벌이는 수요시위에 참여하는 이들 중에도 기금을 받은 이가 있다고 기금 관계자는 말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지원단체(정대협)와 격하게 대립하는 위안부들도 있었다. 그들은 지원단체(정대협)가 자신들을 이용하여 권력을 얻었고(실제로 지원단체(정대협) 관계자들 중에는 상을 받거나 장관이 되거나 국회의원이 된 이가 많다), 자신들을 '앵벌이' 시키고 있다고까지 주장한다. 자신들의 재판을 지원하고 헌신적으로 돌봐준 이들은 한국의 지원단체(정대협)가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것이다(인터넷 신문 '시티뉴스'에 실린 심미자 할머니의 증언).
그러나 살아생전에도 사회를 향해 한껏 목소리 높여 외쳤고 죽음을 앞에 두고 그 외침을 CD에 담아 공증해 인터넷 언론매체에 남기기까지 한 그녀의 한 맺힌 '유서'도 우리 사회에 널리 알려지는 일은 없었다. 그런 상황은 이 할머니의 주장의 정당성 여부를 떠나.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우리 사회의 언론이 지원단체가 보호하는 위안부 이외의 위안부에게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기금'의 보상금을 받고 일본의 사죄를 받아들인 '위안부'가 61명이나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린 것도 일본의 지역신문이었다.
정대협은, 기금을 부정하고 일본에 '입법'을 요구하는 이유는 위안부들 자신이 '입법'을 원하고 기금을 부정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저 '당사자'의 뜻을 존중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지원단체가 말하는 '당사자'들이란 어디까지나 지원단체의 생각에 따르는 이들에 한정될 뿐이다. 말하자면 '당사자'는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지원단체가 의견을 달리하는 위안부들의 존재는 우리 사회에 거의 알려지지 않는다.
또 사실은 '정대협' 역시 하나가 아니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정대협만 주목을 받고 있지만, 위안부를 지원하는 단체는 서울에서 정대협이 발족한 이후에도 생겼고 그중에서도 부산의 정대협은 서울 정대협의 발족 당시부터 함께 활동한 김문숙 관장이 사재를 털어 위안부의 일본에서의 재판을 지원하고 자료를 풍부하게 갖춘 전시관('민족과 여성 역사관')까지 지었다. 서울 정대협은 국가 전체의 주목과 지원을 받아왔지만 부산 정대협은 언론의 괸심이 서울에만 쏠렸기 때문에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고 2012년 가을에는 재정난에 처해 전시관이 폐쇄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김문숙 관장은, 과거에 기금에 반대했지만 지금은 그때 받아들였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기금을 여전히 비판하는 서울 정대협의 주장을 비판한다.
말하자면 위안부도 하나가 아닌 것처럼 지원단체도 하나가 아니다. 위안부들이 기금을 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기금을 수용한 위안부가 있다는 사실이나 기금에 대해 더 이상 비판적이 아닌 지원단체도 있다는 사실은 알려질 필요가 있다.
(중략)
하지만 성공 가능성이 희박한 '운동'을 20년 동안이나 계속하면서 병들고 나이든 위안부들에게 '한국의 자존심'을 대표하게 하는 것은 과연 '당사자'의 뜻을 존중한 일이었을까? 그녀들을 노구에 채찍질하며 길거리에 나서는 '투사'로 만든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이 아니었을까? 이미 한 번 국가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원치 않는 길을 가야만 했던 그들에게 그런 식으로 '올바른 민족의 딸'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또 하나의 '민족'의 억압이 아니었을까?
한 개인으로서의 '위안부'의 또 다른 기억이 억압되고 봉쇄되어온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일본 군인과 '연애'도 하고 '위안'을 '애국'하는 일로 생각하기도 했던 위안부들의 기억이 은폐된 이유는 그녀들이 언제까지고 일본에 대해 한국이 '피해민족'임을 증명해주는 이로 존재해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위안부'들에게 개인으로서의 기억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녀들은 마치 해방 이후의 삶을 건너뛰기라도 한 것처럼, 언제까지고 '15살의 소녀 피해자'이거나 '싸우는 투사 할머니'로 머물러 있어야 했다.
피해자임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우리 사회의 그런 욕망은, 일본 군인에 대한 사랑도, 자신을 판 부모나 조선인 업자나 '주인'에 대한 미움도, 그리고 해방 후에도 50년 동안 이어진 차가운 '한국인'의 시선도 잊고 소거시킬 수 밖에 없다. 오로지 일본이라는 국가에 대한 원한만을 되살리기를 그녀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20여 년간 이어진 '위안부 문제'란 지원단체를 비롯한 한국사회의 그런 욕망과 기대가 우선시되면서 '당사자'들의 '지금, 이곳'에서의 고통은 잊혀진 문제이기도 하다.
실제로 기금의 수령 여부를 둘러싸고 당사자들은 심각한 분열과 후유증을 겪었고, 건강을 해친 한 할머니는 본인이 다른 이에게 수령을 거부하도록 강하게 촉구한 일이 건강 악화의 원인인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하나후사 에미코). 그것은 분명 국가의 또 다른 억압이었다.
기금을 반대했던 이들은 위안부 안의 분열과 지원자(정대협)와 위안부의 분열이 '국민기금' 탓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기금에 대한 이해가 처음부터 부정적이었기에 하는 말이다. 실제로는 기금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기금을 만든 (일본) 정부에 대한 지원자들(정대협)의 이해 부족이 위안부들을 분열시켰다.]
이어지는 내용들은 정대협으로선 정말 뼈아픈 지적들인데, 물론 정대협은 이 내용들을 갖고서는 박유하 교수에게 고소는커녕 반론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모두 사실이니까.
필자가 알기로는 아래 내용들은 진보좌파 내에서도 이미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있는 상황이다. 정대협은 필경 그 흐름을 끊어놓고 싶었을 것이다.
[한국 지원운동의 모순 (정대협 활동에 대한 박유하 교수의 비판)
1.서울 정대협 운동의 공과
'위안부'가 없는 '위안부 소녀상'
2011년 12월에 서울의 일본 대사관 앞에 서게 된 소녀상은 일본의 사죄와 보상을 인정하지 않는 정대협이 생각하는 '위안부' 상의 결정판이다.
소녀상은 분명 성노동을 강요당한 '위안부'를 상정하는 상일 텐데, 성적 이미지와는 무관해 보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다. 말하자면 대사관 앞에 서 있는 것은 위안부가 된 이후의 실제 '위안부'가 아니라 위안부가 되기 이전의 모습이다. 혹은 앞에서 살펴본 위안부의 평균 연령이 25세였다는 자료를 참고한다면, 실제로 존재한 대다수의 성인 위안부가 아니라 예외적인 존재였던 위안부만을 대표하는 상이다. 그런 의미에서는 대사관 앞 소녀상이 실제 위안부를 상징하는 상일 수는 없다. 그러나 소녀상은 마치 '위안부'의 대부분이 소녀였던 것으로 생각하도록 만들고, '소녀 위안부'의 기억을 강화시켜 나간다.
소녀의 단발머리는 그녀를 단정한 학생처럼 보이도록 만든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학교교육을 아예 혹은 조금밖에 받지 못한 이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도 소녀상은 실제 조선인 위안부와는 거리가 있다.
소녀가 맨발을 드러내놓고 있는 것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갑자기' 끌려갔다는 것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주먹을 쥐고 쏘아보는 듯한 강렬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은 '강제로 끌려간' 데에 대한 '분노'의 표시이다. 말하자면 소녀상은 '저항하는 위안부'일 뿐 일본군과의 또 다른 관계는 드러내지 않는다. 혹은 그 분노가 '일본군' 이외의 존재를 향하는 것을 수도 있다는 것도 드러내지 않는다.
소녀상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저항하고 싸우는 소녀'의 모습이야말로 한국인이 자신과 오버랩시키고 싶어하는 아이덴티티로 이상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소녀상이 한복을 입고 있는 것은 실상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지만, 리얼리티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위안부'를 바람직한 '민족의 딸'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실제 조선인 위안부는 '국가'를 위해서 동원되었고 일본군과 함께 전쟁에 이기고자 그들을 보살피고 사기를 진작한 이들이기도 했다. 대사관 앞 소녀상은 그녀들의 그런 모습을 은폐한다.
그러다 보니 소녀상은, 그녀가 때로 가족을 위해 나섰던 희생정신도, 아들이 아닌 딸이 팔려가기 쉬웠던 가부장제하의 피해자성도, 그녀들을 '강제로 끌고 간' 우리 안의 가해자들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래서 소녀상은 일본에 저항해 목숨을 잃은 유관순을 아주 많이 닮아 있다.
소녀상이 저항하는 모습만 표현하는 이상, 일본옷을 입었던 일본이름의 '조선인 위안부'의 기억이 등장할 여지는 없다. 그들의 또 다른 생활과 기억, 일본 군인을 간호하고 사랑하고 함께 놀며 웃었던 기억을 가진 '위안부'는 그곳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곳에는 군인을 자신과 같은 운명에 떨어진 가엾은 존재로 간주하고 동정했던 위안부도 물론 없다.
소녀상에는 '평화비'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그러나 용서의 기억을 소거한 눈은 원한에 찬 눈으로 그녀를 보는 이들에게 일본에 대한 '적대'에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 따라서 '일본보다 조선이 더 밉다'는 위안부들 역시 그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곳에는 '조선인 위안부는 없다'.
그녀들이 해방 후 돌아오지 못했던 것은 일본 뿐 아니라 우리 자신 때문이기도 했다. 즉 '더럽혀진' 여성을 배척하는 순결주의와 가부장적 인식도 오랫동안 그들을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한 원인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있는 것은 단지 성적으로 더럽혀진 기억만이 아니다. 일본에게 협력한 기억, 그것 역시 그녀들을 돌아오지 못하도록 만든 것이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더럽혀진' 식민지의 기억은 '해방된 한국'에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사관 앞 소녀상은 협력과 오욕의 기억을 당사자도 보는 이도 함께 소거해버린 '민족의 피해자'로서의 상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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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한, '피해자' 소녀들이 일본옷을 입고 일본 이름을 가진 '일본인'으로서 '일본군'에 협력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똑같은 손으로 그녀들을 손가락질할지도 모른다. 위안부가 되기 전에 그렇게 어린 '소녀'를 내몬 '손' 또한 우리 안의 또 다른 손이기도 했다는 것은 잊은 채로.
'조선인 위안부'란 조선인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저항했으나 굴복하고 협력했던 식민지의 슬픔과 굴욕을 한 몸에 경험한 존재다. '일본'이 주체가 된 전쟁에 '끌려' 갔을 뿐 아니라 군이 가는 곳마다 '끌려' 다녀야 했던 '노예'임에 분명했지만, 동시에 성을 제공해주고 간호해주며 전쟁터로 떠나는 병사를 향해 '살아 돌아오라'고 말했던 동지이기도 했다. 그들은 '한복'을 입은 댕기머리 조선인이기도 했지만, 일본옷을 입고 일본머리를 한 청초한 '야마토 나데시코'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조선인 일본군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의 모순'을 가장 처절하게 살아낸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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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가 대표하는 '식민지' 체험은 '기념'되고 현창되기에는 너무나 많은 모순을 안고 있는 체험이다. '위안부'가 '유관순'일 수 없는 것은 그 점에 있다. 물론 일제가 만든 시스템과 인프라를 향유한 이들 역시 마찬가지로 모순을 내포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다시 말해 식민지화란 구성원 누구나가 분열증을 앓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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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대협은 세계를 향한 운동에서 위안부를 홀로코스트와 비슷한 위치에 놓으려 하지만, 그건 그 차이를 무시한 일이다.
소녀상으로 대표되는 '위안부'에게 종용한 것은 실제로는 우리 자신은 일상 속에서는 잊어버리고 무관심하게 지내는 일, 즉 '민족의 딸'로 존재해 주는 일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지 못하고 있는 역할을 그녀들에게 맡기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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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의미에서는 소녀상은 위안부 자신이라기보다는 정대협의 이상을 대변하는 상이다. 다시 말해 소녀상은 '그때의 조선인 위안부'라기보다는 '20여년의 데모'로 운동가가 된 위안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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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게 입은 피해를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대사관 앞 소녀상은 절반의 진실을 나타낼 뿐이다. '조선인 위안부'란 조선인으로만 남아 있을 수 없었던 식민지인이었기에, 하나의 기억만을 가질 수는 없는 존재였다.
그런데 소녀상은 이제 한국 안의 다른 장소(통영, 공주 등)로, 그리고 미국에까지 확산되는 중이다. 미국에 설립된 위안부 기림비는 '강제로 끌려간 20만 명의 소녀'란 문구를 담고 있다. 그런한 그 비는 '위안부'에 관한 대한민국의 '공식 기억(실제 일어난 사실이 아닌)'을 표현한 것일 뿐 위안부 자체를 표현한 것은 아니다. 미국에 위안부 기림비를 세운 것은 일본을 압박하는 방식으로 선택된 것이지만, 우리가 하나의 기억만을 내세울수록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이들은 또 다른 기억만을 상기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각자의 기억만 고수하는 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은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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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소녀상은 '평화'를 말한다고 하지만 그 상이 일본의 굴복만을 요구하는 한 저항은 커질 수 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소녀상은 언제까지고 평화 아닌 불화만을 만들어낼 것이다. 실제로 2011년 겨울 소녀상이 세워진 이후의 한일관계가 극단적으로 불화로 치달았던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소녀상은 우익 뿐 아니라 한국에 호의적이었던 양심적인 일본인까지도 한국에 등을 돌리거나 무관심해지도록 만들었다. 소녀상은 문제 해결을 오히려 저해하고 있을 뿐이다.]
이어서 박유하 교수는 본격적으로 정대협이 휘두루는 민족권력 문제를 다룬다. 아래 부분은 어떻게 보면 이 책의 하이라이트 중에 하이라이트라고도 할 수 있다.
[정대협의 힘과 민족권력
앞에서 언급한 심미자 할머니는 유언장에서 정대협을 격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그녀는 일본 정부가 인정한 유일한 일본군 위안부였고 1992년에 결성된 무궁화자매회라는 이름의 일본군 위안부 단체의 회장이었다. 그런데 이후 자신들의 단체를 '북한공작원 정대협이 발길로 차 쫓아' 냈다고 말한다. 그는 정대협이 위안부를 해외에서 '수입'해서 수요시위에 동원해 '앵벌이' 시킨다면서 2004년에는 '정대협 나눔의 집 모금행위 및 시위 동원 금지 가처분 신청'가지 했다. 그리고 정대협이 자신들을 이용해 출세했으며 정대협 출신 국회의원이 하지도 않은 위안부 관련 활동을 했다는 '거짓 의정보고'를 했다고 주장한다. 피를 토하는 듯한 이 절규가 어디까지 신빙성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그렇게 일찍부터 정대협과 갈등을 겪었고 세상을 향해 호소하기도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공론화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본인에게는 엄청난 시련이었을 과정이 우리 사회에 조금도 알려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녀-당사자와 정대협-지원단체 간의 힘의 차이를 말해준다. 실제로 위안부 문제가 한국 사회에서 커다란 관심과 함께 그에 따른 힘을 얻으면서 정대협은 권력화되었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서 이제까지 지원단체(정대협)과 그들과 함께하는 위안부를 이긴 이는 없다. 위안부를 '공창'이라 말했다는 식의 곡해가 원인이 되어 정대협의 비난을 받았던 한 교수는 결국 나눔의 집에 가서 사죄했고, 위안부 사진집을 만들려 했다고 비난받은 여배우도 역시 나눔의 집에 가서 필름을 불태우고 무릎꿇고 사죄했다. 그렇게 '정대협의 생각'과 다른 말을 하는 이들은 단순히 비판받는 정도를 넘어 위안부와 지원단체(정대협)'가 대표하는 '민족에 대한 사죄'를 해야 할 만큼 정대협은 어느새 '민족'을 대표하고 있었고, 그 힘은 절대적이었다.
정대협의 운동 결과로 한국에서는 '사죄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이미지만 정착되었지만, 사실 일본은 2012년에 다시 한 번 추가조치를 하려고 한 바 있다. 2011년 12월 교토에서 열린 한일정상회담에서 이명박 대통령의 강력한 요청을 받은 이후의 대응에서다. 2012년 봄, 일본은 수상의 사죄와 추가 보상과 대사의 위안부 방문으로 구성된 안을 제안했다.
['수상 사죄와 보상 타진, 한국 난색 표하며 합의하지 않아.'
사이토 쓰요시 관방장관이 4월에 방한했을 때, 한국 대통령부에 대해 종군위안부 문제의 해결책으로서 노다 요시히코 수상에 의한 사죄와 보상 등을 타진했다는 사실이 11일에 밝혀졌다. 한국 측은 일본 측에 위안부 지원단체의 의향을 물을 것을 요청하는 등 난색을 표해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최근인 2012년에 일본 민주당 정부가 이전의 고노 담화와 수상 사과 편지, 아시아 여성 기금에 이은 추가적인 수상 사죄와 보상을 타진했으나 정대협의 눈치를 본 이명박 정부가 난색을 표하며 정대협 의향을 물을 것을 요청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는 이야기 ) '홋카이도 신문 2012.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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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양국 정부는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부정했지만, 일본 정부로서는 (추가적인) 보상 자체를 반대하는 이들이 비판할 것을 의식해서, 한국 정부로서는 입법 해결이 아닌 해결안을 정부가 받아들였다고 (정대협으로부터) 비판받을 것이 두려워 부정했을 것이다.
그런 제안이 나온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고위급 각료가 민주당 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청와대 관계자는 일본 측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는 '일본 측에 위안부 지원단체의 의향을 물을 것을 요청하는 등 난색을 표'했다는 데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정대협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불과 6개월 전에 정부 차원에서 일본 정부에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라고 요구했던 한국 정부가 정작 일본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지원단체 뒤로 숨었던 것이다.
이 사태는 2012년 3월에 이명박 대통령이 위안부 문제를 '인도적 조치' 방식으로 해결할 수도 있다고 말한 데에 대해 정대협이 성명을 통해 비난했던 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은 3월에 이어 6월에도 '인도적 조치'로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이때 외교부는, 한국 정부는 '입법 해결'을 바라고 있고 대통령의 뜻도 그렇다고 해명하기까지 했다. 2011년 여름에 나온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떠밀려 일본에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고 나섰던 외교부가, '인도적 조치'를 말한 대통령이 정대협의 비판을 받게 되자 대통령이 아닌 정대협의 편에 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태는 정대협 자체의 힘이라기보다는 대한민국 국민과 언론 대부분이 정대협의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상황이 만들어주는 힘이다. 다시 말해 이런 사태를 만드는 것은 우리 자신이기도 하다. 이 20년 동안 정대협이 제공하는 정보 이외에는 다른 정보를 보려고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던 결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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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가 배려받고 보호받아야 할 '약한 자'를 대표하는 존재가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위안부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정대협은 이 20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다. 정대협 관련 인사가 장관이나 국회의원이 될 수 있었다는 것도 그것을 말해준다. 그렇게 정대협의 힘은 어느새 대통령도 이길 만큼 강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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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5월의 일본의 제안은 '위안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고노 담화와 수상 사과 편지, 아시아 여성기금 설립이 첫번째 기회)였다. 앞으로 일본이 다시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 기회가 마지막 기회였다고 말해야 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당시 일본 정부는 원전 문제와 오키나와 문제와 증세 문제로 사면초가 상태에 놓여 언제 내각이 해산될 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내각이 바뀔 경우 자민당과의 연립정권이 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으니, 그 경우 민주당보다 이 문제에 강경한 자민당 연립정권에서 민주당 각료가 그 자리에 머누른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그리고 실제로 이후 자민당이 정권을 잡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찍부터 이의제기를 해 온 아베 전 수상이 다시 수상이 되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대협과 정부는 당시에,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위안부 문제가 영원히 해결되지 못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당시의 일본의 움직임은 거부되고 나서야 보도되었으니, 정부가 일본의 생각을 당사자들에게 전하고 의향을 묻지 않은 것은 결정적인 실책이었다. 그렇게까지 정부가 정대협을 의식한 것은 정대협에 반하는 일이 곧 국민감정에 반하는 일로 인식되어 비판받을까 두려워서였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정대협의 생각' 이외의 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게 된 것은 언론과 관련 학자들이 '정대협의 생각' 이외의 생각을 국민들에게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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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일본 정부는 사죄했고, 2012년 봄에도 다시 사죄를 제안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정대협이 주장하는 국회입법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없다. 그 이유는 1965년의 조약, 그리고 적어도 '강제연행'이라는 국가폭력이 조선인 위안부에 관해서 행해진 적은 없다는 점, 있다고 한다면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사례여서 개인의 범죄로 볼 수 밖에 없고 그런 한 '국가범죄'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점에 있다.
기금을 받은 위안부들이 무시된 건 정대협이 생각하는 '정의'에 굴복한 것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혹은 돈이 필요해서 받아들인 현실적 '타협'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경계심과 저항은 일찍이 '제국'에 저항했던 좌파로서는 당연한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반제국'의 의미를 가졌던 저항이 그곳에서는 어느새 민족권력화되어 있었다. (정대협 자체가) 스스로가 '국가'가 되어 개인의 의지를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위한 것으로 간주되어 온 국민의 호응을 얻었지만, 실제 운동의 주도권은 분명 좌파가 가지고 있었다. 정대협이 90년대 이후 일본의 좌파와 연대하고 북한과 긴밀히 연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제국'에 저항한 세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는 민족의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 -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의미를 가지는 좌파가 어느새 국가의 얼굴을 하고 위안부를 억압하게 된다. 2000년대 이후 운동에서는 '여성의 인권'을 화두 삼아 운동을 세계적으로 성공시켰지만, 정작 지원단체의 뜻에 따르지 않는 '늙은 한국 여성'의 인권은 존중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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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주의의 죄악을 바로잡겠다는 취지에서 출발한 정대협이라는 시민단체가 어느 사이에 그 자체로서 하나의 제국과 같은 권력이 되어 '국가의 얼굴을 하고 위안부를 억압'하고 있으며 한일관계에서 생산적인 소통 자체를 불가능하도록 가로막고 있다는 박유하 교수의 지적은 참으로 명문장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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