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③] “한국군‧미군 위안부에는 왜 분노하지 않는가”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 “미군 위안부 문제에는 ‘종족주의’ 작동하지 않아”

오문영 기자 ohyoung7777@naver.com 2019.05.15 10: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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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일본군 위안부나 미군 위안부는 역사적 배경이나 실태에서 동일하다고 생각한다하지만 일본군 위안부만큼 미군 위안부 문제에 분노하지 않는 것은 한국인의 반일 종족주의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장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3회차 강의 '1950~60년대 미국군 위안부'(219)에서 해방 이후 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며 이같이 말했다. 일본군 위안부와 달리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무관심한 한국 사회에 시사점을 던진 것이다. 그는 앞서 1회차 강의(6.25전쟁과 한국군 위안부)에서도 한국군 위안부 문제를 외면하는 이 사회의 실태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20대 여성 5~10% 성매매 산업 종사미군 위안부가 핵심

 

이영훈 교장은 1950~1960년대 성매매 산업 종사자의 규모를 설명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당시 정부가 발간한 보건사회통계연보에 따르면, 1955년 기준 성매매 산업에 종사한 여성은 11642, 1959164461, 1966년에는 391713명으로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 가운데 성매매를 전업으로 하는 이른바 위안부61833(1955), 98891(1959), 25964(1966)으로 증가 추세에 있었다.

 

통계에서 제시한 수치에 대해 이 교장은 연말 또는 월말 같은 특정시점에 활동한 여성의 절대 수를 가리키진 않는다면서 대략 26000~39000명의 여성이 특정 시점에 종사한 절대 수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이지만 이조차 정확하지 않은 추정에 해당한다고 부연했다.

 

이 교장은 20대 여성 전체에서 성매매 종사자가 차지하는 비율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먼저 1955년에는 20대 여성 144300명 중 성매매 산업 종사자(성병 검진 여성)82982(5.8%)이었다. 20대 여성 스무 명 중 한 명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이 가운데 성매매를 전업으로 한 위안부는 46375(3.2%)이다.

 

1960년에는 2093000명 중 107420(5.1%), 1966년에는 2319000명 중 256551(11.1%)이 성매매 산업에 종사했다. 이 가운데 위안부는 각 연도마다 65547(3.1%), 188223(8.1%)이었다. 따라서 1966년 기준으로 20대 여성 열 명 중 한 명(11.1%)이 성매매 산업에 종사했고, 열두 명 중 한 명(8.1%)은 성매매를 전업으로 했다고 볼 수 있다.

 

이 교장은 이처럼 번성했던 민간 위안부의 일부는 미군 위안부였다당시 미군 위안부는 1만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고 전했다. 앞서 이 교장이 추정한 1955~1966년 특정 시점 성매매 산업 종사자(26000~39000)에서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비율이다. 이 교장은 “1950~60년대 민간 위안부의 핵심은 미군 위안부로 볼 수 있다. 전국에 걸쳐 미군 부대가 주둔한 곳에는 기지촌이 발달했다파주가 가장 번성해서 38개 기지촌에 5000여 명의 위안부가 있었고, 다음으로 오산기지촌에 1900, 평택기지촌에 600, 동두천, 양주, 부평, 포천, 군산 등에도 (기지촌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미군 위안부는 고소득직종극빈계층 소녀들이 뛰어든 이유

 

이영훈 교장은 위안부들에 대한 사회의학적 조사 연구-군산 지구를 중심으로(1964, 박대근 저)’라는 석사논문을 인용해 당시 미군 위안부의 실태도 조명했다.

 

한국인 상대 위안부 180여명, 미군 상대 위안부 130여명을 조사한 논문에 따르면, 미군 상대 위안부의 평균 연령(27)이 한국인 상대 위안부(21)보다 여섯 살 더 많았다. 평균 학력도 미군 상대 위안부가 높았다. 한국인 상대 위안부는 대체로 중학교 중퇴미만이 다수였지만, 미군 위안부의 경우는 고졸에서 대학교 중퇴까지 있었다.


평균 종사 기간도 미군 상대 위안부(3)가 한국인 상대 위안부(평균 2.5)보다 길었다.

 

하루 평균 성교 횟수는 미군 상대 위안부가 1.7회로, 한국인 상대 위안부(5.51)보다 현저히 적었던 반면 월 평균 소득은 11423원으로 한국인 상대 위안부(3455)의 세 배가 넘었다.

 

이 교장은 당시 제조업 종사자 월평균 임금이 남녀 통틀어 3800, 여성 종업원의 경우 2500원 정도였다이에 비해 미군 위안부의 소득은 꽤 높은 수준으로 별다른 취업 기회를 갖지 못한 저학력 극빈계층 소녀들이 해마다 이 산업으로 진입했던 이유라고 추론했다.

 



한국군미국군 위안부 문제에는 한국인 집단정서 작동하지 않아

 

이영훈 교장은 수많은 여인들이 기지촌에서 맞아 죽고, 병들어 죽고, 자살했다. 가혹한 인간 예종(노예처럼 예속됨)의 역사가 1960~1970년대 한국 사회의 한쪽 구석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었다면서 물론 위안부 모두가 이처럼 비참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평균적으로 미군 위안부가 한국인 상대 위안부보다 양호한 처지에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이 교장은 정부가 미군 위안부들을 외화벌이 역군으로 동원했다는 미군 위안부 관련 일부 시민단체의 주장에 대해서는 동감하지 않는다며 선을 그었다. 하지만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수준으로 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사회적 관심과 정책적 배려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찬성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는 시민단체는 (이런 주장에) 동조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는 다르다고 주장한다미군 위안부로 일했던 여성들은 (이런 시각에) 분노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인은 무슨 이유로 미군 위안부 문제에는 일본군 위안부만큼 분노하지 않는 걸까라고 반문하며 반일 종족주의가 그 해답이라고 말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에는 반일 종족주의로 분노하지만, 미군 위안부 문제에는 적대적으로 반응할 집단 정서가 작용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이 교장은 일본군 위안부였다고 고백한 여인들은 140여 명인데, 미군 위안부였다고 고백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나아가 6.25 전쟁 시기 한국군 위안부였다고 밝힌 여인은 단 한명도 없다어떤 연구자가 전쟁 당시 한국군 위안부였음이 확실한 여인을 만나 커밍아웃을 권했지만 그 여인은 단호히 거부했다. 그들을 보호하고, 지원하고, 나아가 그들을 민족의 성녀로까지 받들 집단 정서로서 반일 종족주의가 한국군 위안부에는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교장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정치고문이었던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이 민족의 내부 성채는 깨지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금이 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가족이 먹을 것을 필요로 할 때 값싸게 팔아 버릴 수 있을 만큼 섹스는 하나의 상품으로 전락했다고 회고한 발언을 소개하며 “(이 회고를 되새길 때마다) 학자로서 연구 방향에 많은 시사를 받곤 한다면서 강의를 맺었다.






오문영 기자 ohyoung777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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