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3)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32)

미디어워치 편집부 mediasilkhj@gmail.com 2020.10.10 15:07:25





        3.5.2 당시 중국 정부의 인식

   3.6 당시 국제보도에 대한 의논

   3.7 중국과 연합국 측에 의한 프로파간다라는 주장

        3.7.1 중국의 프로파간다

        3.7.2 국민당 정부(장제스 정권)의 프로파간다

               3.7.2.1 코민테른과 미국 공산당의 중국 지원과 대일 선전

        3.7.3 미중 합작 프로파간다

        3.7.4 팀펄리 저작에 대한 프로파간다 의혹

        3.7.5 에드거 스노의 저작

        3.7.6 기록 영상에 의한 피해과장설

        3.7.7 아이리스 장의 ‘천황의 음모론’

        3.7.8 아이리스 장 등의 난징홀로코스트설

 

(계속)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1)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2)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3)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난징사건 논쟁(南京事件論争)’ (4)




3.5.2 당시 중국 정부의 인식(当時の中国政府の認知)

일본 자민당의 토이다 토오루(戸井田徹) 중의원 의원은 아지아(亜細亜)대학 교수인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의 연구를 인용해, 당시 중국 국민당이 1937년 12월부터 약 11개월 동안 300회의 기자회견을 했다는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국민당의 비밀문서에도 난징사건에 대한 기자회견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었다면서 난징사건의 존재 자체가 의심스럽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국민당의 신문에서도 비록 외국 보도의 번역 형식이긴 했지만 난징사건에 대해서 보도는 이뤄졌다. 국민당 계열 신문인 '중양리바오(中央日報, 중앙일보)', '신화리바오(新華日報, 신화일보)'는 미국의 상하이 신문인 Shanghai Evening Post and Mercury(대미만보(大美晩報)), 그리고 The China Weekly Review (John w. Powell주간)의 사건 보도 기사를 번역하여 게재했다. 

일본의 중국문학자인 세키네 켄(関根謙)은 중국 측이 독자적인 취재 기사로는 난징사건을 보도하지 않았던 이유로서, 당시 중국 측의 신문이 전의고양(戦意高揚)을 위해 전승 기사만을 반복하고, 난징전에서의 패배를 보도하고 싶지 않았다는 점을 제시했다.

한편, 전후 중화인민공화국의 간행물 기재를 살펴보면, ‘중공중앙문헌연구실(中共中央文献研究室編纂)’이 편찬한 ‘마오쩌둥 연보(毛沢東年譜)’의 1937년 12월 13일란에는 ‘난징실함(南京失陥)’(난징함락)이라는 표기가 있을 뿐이고 전 9권 총 6000쪽 이상의 연보에서 ‘난징대학살’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다. 

1957년 중국의 중학교과서(장쑤(江蘇) 인민출판사)에 난징대학살이 기재되었으나 1958년판 ‘중학역사교사 지도요령(中学歴史教師指導要領)’에는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여 국민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천도했다’는 기술이 있을 뿐, 1960년판에도, 1975년판 교과서 ‘신편 중국사(新編中国史)’의 ‘역사연표(歴史年表)’에도, 학살에 대한 기재는 없다. 

이처럼 중국의 간행물에서 난징사건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과 관련해, 중국 출신 일본의 작가인 엔도 호마레(遠藤誉)는 마오쩌둥이 학살 문제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사건 당시 중국 공산당군이 일본군과 제대로 싸우지 않았다는 사실과 국민당군의 분투와 희생이 강조되는 것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중국 정부와 관련해 근현대사 연구자인 미즈마 마사노리(水間政憲)는 당시 중국의 일반 국민들도 국민당 정부보다 일본군이 치안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고 환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 증거로서 난징 함락 직후 12월 15일에, 베이징에 있는 톈안먼(天安門, 천안문) 광장에는 5만 명의 베이징 시민들이 모여, 일장기(日の丸)와 오색기(五⾊旗, 중화민국 성립 이후부터 국민당 정부 수립 때까지 사용하던 중화민국의 국기)를 흔들며 난징 함락을 축하했던 모습의 사진을 제시했다.

그러나 당시 베이징은 이미 7월부터 일본군이 점령하고서 통치를 하고 있었으며 그 사진을 찍기 전날에 베이징에서 일본의 괴뢰 정권인 ‘중화민국 임시정부’(베이징)가 설립됐기 때문에, 축하가 과연 시민의 자발적인 행동인지 어떠한지는 그러한 배경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난징 함락 후의 점령 입성식에서 난징 시민들이 깃발을 흔드는 모습과 관련해서는, 일본군 입성식의 자리에서 주민들이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 환영의 깃발을 흔든 적이 있었다는 일본 측의 증언이 있다.)

3.6 당시 국제보도에 대한 의논(当時の国際報道についての議論)

당시 난징 공략전 후에도 현지 구미인(欧米人) 기자 5명(△ ‘뉴욕타임스(NYTimes)’ 틸만 더딘(Frank Tillman Durdin) 특파원, △ ‘시카고데일리뉴스(Chicago Daily News)’의 아치볼드 T. 스틸(Archibald Trojan Steele) 기자, △ ‘로이터(Reuters)’의 레슬리 스미스(Leslie C. Smith) 기자, △ ‘어소시에이티드 프레스(Associated Press)’(AP통신)의 찰스 맥다니엘(Charles Yates McDaniel) 기자, ‘△ 파라마운트 뉴스릴(Paramount Newsreel)의‘ 아서 멘켄(Arthur von Briesen Menken) 기자가 주재하고 있었다. 



구미인 기자들은 일본군의 난징 점령 직후 상하이 방면의 선박으로 대피했기 때문에 아주 초기 사건 이외에는 현지 기자의 부재 때문에 현장을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저 다섯 명의 기자들은 실제로 난징전과 조우했으며, 그 후 아래와 같이 난징사건에 대한 여러 기사가 국제 사회에서 1937년 12월과 이듬해에 걸쳐 많이 게재되었다.

그러나, 어떻든 현지 구미인 기자들 상당수가 대거 상하이 방면으로 피난했기 때문에 취재의 정확성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며, 또한 ‘파나이호 사건(パネイ号事件, USS Panay incident, 난징전 도중에 일본 해군항공대가 미국 해군 함정 파나이(파나이(USS Panay) 호를 공격해 격침시킨 사건)’, ‘앨리슨 구타 사건(アリソン殴打事件, the Allison incident, 1938년 1월, 난징에서 일본의 보초병이 미국 영사 존 M. 앨리슨(John M. Allison)을 구타한 사건)’ 등 미국 국민의 관심이 높은 보도가 더 크게 다루어졌다는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1937년 12월 15일, 난징전 당시에 난징에 있었던 아치볼드 T. 스틸(Archibald Trojan Steele) 기자는 ‘시카고 데일리 뉴스(Chicago Daily News)’에 ‘난징 대학살 이야기(Nanking Massacre Story : Japanese Troops Kill Thousands)’를 세계 최초로 보도했다. 또한 12월 17일 ‘특파원이 그리는 중국전쟁의 공포 - 난징의 학살과 약탈의 지배, 12월 18일 ‘난징에서 미국인이 용기를 갖고 말한다’ 보도했다. 1938년 2월 4일 기사에서는 난징에서의 중국인 학살을 토끼 사냥과 비교하면서 “사냥꾼이 설정한 경계선이 무기력한 토끼를 향해서 좁혀지고, 울타리로 쫓겨서는 거기서 맞아 죽거나 총으로 죽거나 하는 것이었다. 난징에서의 광경은 그것과 동일하며 거기에서는 다만 인간이 먹잇감인 것이다. 도망갈 곳을 잃은 사람들은 토끼처럼 무기력해졌고 전의를 상실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기를 이미 포기했다. (생략) 일본군은 병사와 편의병을 잡기 위해 시내를 샅샅이 수색했다. 수백 명이 난민 캠프에서 끌려와서 처형되었다. (생략) 일본군에게는 이것이 전쟁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냥 살육처럼 보인다”고 보도했다.

또한 난징전을 직접 목격한 ‘뉴욕타임스’의 틸만 더딘(Frank Tillman Durdin) 특파원은 12월 17일 상하이의 미국 선박 오아후(USS Oahu) 호에서 기사를 발신했고 이 기사는 12월 18일 뉴욕타임스에 게재되었다. 이 기사에서는 “.. 적어도 전쟁 상태가 끝날 때까지, 일본 측의 규율은 엄격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의 점령이 시작된 지 이틀째로 전망은 달라졌다. 대규모 약탈, 여성에 대한 폭행, 민간인 살해, 집에서 주민들을 추방, 포로의 대량 처형, 청년 남성의 강제연행 등으로 난징을 공포의 도시로 변화시켰다 민간인 살해가 확대되었다. 수요일, 도시를 광범위하게 돌아본 외국인은 어떤 거리에서도 민간인의 시체를 보았다. 피해자에는 노인, 여성, 어린이 등도 있었다 민간인 사상자의 수가 천 명을 꼽을 정도로 많아지고 있다. 유일하게 열려 있는 병원은 미국계 대학병원이었지만 설비는 부상자 중 일부를 취급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일본군은) 현지 중국 주민 및 외국인으로부터 존경과 신뢰를 얻을 수 있을 특별한 기회를 놓쳤다”고 보도했다.

그 외, 난징전을 목격한 ‘로이터(Reuters)’의 레슬리 스미스(Leslie C. Smith) 기자도 사건 초기 살인, 상해, 강간, 약탈 등의 범죄 행위가 일본군에 의해 이뤄졌다고 보도했다. 역시 현지에 있었던 아서 멘켄(Arthur von Briesen Menken) 기자(‘시애틀 데일리 뉴스(Seatle Daily News)’(12월 16일), ‘시카고 데일리 트리뷴(Chicago Daily Tribune)’(12월 17일)), 그리고 찰스 맥다니엘(Charles Yates McDaniel) 기자(‘시애틀 데일리 타임스(Seatle Daily Times)’(12월 17일) ‘스프링필드 데일리 리퍼블리칸(Springfiled Daily Republican)’(12월 18일)도 난징사건의 비참한 현실을 보도했다. 또한, 이 내용들은 영국의 ‘런던타임스(London Times)’(12월 20일)에도 보도되어 "일본군은 안전 구역에 들어가 야외에서 사로잡은 중국인을 이유 없이 그 자리에서 총살했다”고 썼다.

또한, 당시 미국의 신문은 난징사건보다 ‘파나이호 사건(パネイ号事件, 미국 선박의 일본군에 의한 침몰 사건)’을 확실히 더 크게 거론했지만, 애초부터 파나이호 사건은 당시 미국과 일본 사이에서 중대한 문제가 되고 있었으며, 일본 해군・외무성이 개입하여 해결되었지만, 일본과 미국 간에 전쟁이 벌어질 수도 있었던 큰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파나이호 사건에 대해서, 미국인들은 같은 시기의 아시아 지역에서 일어난 난징사건의 신문 보도보다는, 미국의 선박을 의도적으로 공격한 것이 아니냐는 여론이 높은 관심을 불러일으켜 미국에서 연속해서 크게 보도되었다. 마찬가지로 난징사건보다도 미국에서 더 크게 보도되었다고 하는 ‘앨리슨 구타 사건(アリソン殴打事件, 난징 주재 미국 영사 존 M. 앨리슨(John M. Allison)이 일본 군인으로부터 구타를 당한 사건)은 미국 본토에서 일본에 대한 분노의 여론을 일으키며 워싱턴에서 일본 특산 실크의 보이콧을 요구하는 시위까지 발생시켰다. 이 사건은 일본 외무성 측의 진사(陳謝)로 간신히 진정시킨 사건이었다.

한편, 앞서 언급한 뉴욕타임스 기자였던 틸만 더딘 특파원은 전후 일본에서의 취재에서(1986년,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의 질문에 대한 답변), 일본군이 난징을 향해 상하이에서 진군하기 약 3개월 전에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이주했고 그때 “전투를 피해서 난징에 가서” 상하이에서 남쪽으로 가는 길을 갔다고 말했다. 또한 그 후, 1989년 일본 잡지 ‘분게이슌주(文藝春秋)’에서는 일본군의 난징 진군보다 약 3개월 전에(난징전 때가 아님), 상하이에서 난징까지 갈 때에는 학살을 보지 못했다고 설명했다(“일본군은 상하이 주변 등 다른 전투에서는 이러한  학살 등을 저르지 않았습니다”라고 하면서 “상하이 부근에서 일본군의 전투를 여러 번 봤지만, 민간인을 마구 죽이는 장면은 없었습니다” “(상하이에서 난징으로 가는 길에 일본군이 포로와 민간인을 살해한 적은) 없었습니다”라고 답했다).

한편, 구미(欧米, 서양)의 보도 내용에 대해 의문을 갖는 의견이 일본의 연구자들 중에 여럿 있다. ‘난징전사(南京戦史)’(가이코샤(偕行社) 편찬자로 난징전 당시 독립 경장갑차 제2중대 소대장이었던 우네모토 마사미(畝元正己)는 일본에 적대감을 가진 영국과 미국, 독일 선교사와 신문 기자들이 일본군의 행동을 과장해서 소문과 추측까지도 전달한 것이라고 했다.

학살부정파인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는 난징 함락 후 12월 13~15일 일본군은 소탕전 중이었으며,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에 신고된 살인 사건도, 비록 신고된 것만이 전체는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목격자도 없는 것 5건 뿐이었으므로 아치볼드 T. 스틸 등 외국인 기자들이 봤다는 증언의 신빙성을 의심한다. 또 일본의 외교관들에게 보낸 ‘학살에 관한 외전(虐殺の外電, 학살에 관한 외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전문(伝聞, 들은 얘기)이 원천이며 일본 정부(또는 군부)는 이런 잘못된 정보를 보고받은 것이 아니다”고 한다.

또한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는 당시 ‘뉴욕타임스’에 게재된 ‘난징 학살의 증거 사진’이라고 하는 사진도 허위 사진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일본 병사가 일본 내지에 부친 편지는 정확성이나 신뢰성에 의문이 있다(이를테면, 학살 행위를 편지로 일본 내지에 전하려고 해도 검열에 의해 누락시키기 때문). 와타나베 쇼이치(渡部昇一)는 ‘뉴욕타임스’와 미국의 지역 신문의 ‘대학살’ 기사에 대해서, 편의대(便衣隊, 게릴라부대) 또는 편의대로 오인된 시민들에 대한 처형을 보고서 오해한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일본 국회의 ‘일본의 앞날과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의원 모임(日本の前途と歴史教育を考える議員の会)’은 “난징사건 발생 후 약 2개월의 신문 기사를 조사하였는데, 그 사이에 12월의 경우에 시민이 대학살 되었다라든지, 1월 이후에도 강간 사건이나 살인 사건이 있었다는 기사는 없다”고 주장했다. 당시 기사들은 미국 선박 파나이호의 일본군에 의한 침몰 사건(‘파나이호 사건’)과 1938년 1월 26일에 발생한 난징 주재 미국 영사 존 M. 앨리슨을 일본 군인이 구타한 사건(‘앨리슨 구타 사건’)이 주된 것이며, (앨리슨에 대한) 구타 사건보다 기사의 중요도가 낮았다면, 그 이상의 것, 예를 들어 강간과 살인과 같은 것은 난징에서 당연히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난징 주재 미국 영사 존 M. 앨리슨(John M. Allison)은 일해군기관학교(海軍機関学校) 영어교사의 경험이 있으며 후에 주일미국대사가 됐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을 작성했고,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대일 정책에도 영향을 주었다. 난징사건 당시 앨리슨의 기록에 따르면, “(1) 난징안전구의 진링(金陵)대학 농학원(農学院) 작업소에 무장한 일본 병사들이 심야에 침입하여 중국인 여성 1명을 납치 강간하고 반환했다. (2) 여성이 강간당한 곳은, 원래 미국의 가톨릭 사제가 살던 주택이며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었다. (3) 일본 병사들의 강간 사건은 일본 대사관에도 보고되었고, 1월 26일 오후, 일본인 헌병 등을 동반해서 앨리슨과 또 한명의 미국인이 일본군이 점령한 집을 피해자 여성과 함께 사건의 조사를 위해 방문했다. (4) 일본 헌병과 여성 뿐만 아니라 앨리슨 등도 역시 그 집에 들어가려고 하자 일본군으로부터 떠밀렸고 모욕과 구타를 당했다. (5) 앨리슨 등 미국인들은 일본 측에 난폭한 짓이나 모욕적인 짓을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일본군의 공식 견해는, “앨리슨 미국 영사는 사건 조사를 한다면서, 일본군 중대장의 제지를 뿌리치고 가옥 내에 침입하려고 했다” “앨리슨이 일본군에 마치 검찰관처럼 불손한 태도로 그 영사 직분을 초월하여서 일본군을 비난하는 것과 같은 태도로 나섰다”는 것이다.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는 일본군의 입장이 옳다고 본다. 한편 이누마 마모루(飯沼守)의 일기의 따르면 그 집에서는 아마노(天野) 중대장과 일본 병사 수십 명이 살았으며, 수 명의 여성을 납치해 전원이 강간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상의 사실을 종합해 ‘일본의 앞날과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의원 모임’의 니시카와 쿄코(西川京子) 중의원 의원(2008년 당시)은 뉴욕타임스도, 런던타임스도 학살은 전혀 보도하지 않은 것이라고 2013년 4월의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발언했다. 



그러나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실제로는 구미(서양)의 신문은 기사의 부정확함 문제나 기사의 빈도 문제와는 별개로 이 시기에 확실히 난징에서 일본군의 불법 살인 문제를 보도하고 있었다. ‘파나이호 사건’과 ‘앨리슨 구타 사건’이 당시 미국에서 난징사건보다 더 크게 보도된 경위도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은 사정이 있었다. 따라서, 당시 구미 신문 기사의 정보의 정확성에 대한 의문은 있더라도, 난징사건에 대해서 확실하게 보도하고 있었기에, 난징사건이 전혀 없었다고, 또 일본의 중국 군・민에 대한 불법 살인이 전혀 없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는 설이 있다.

3.7 중국과 연합국 측에 의한 프로파간다라는 주장(中国や連合国側によるプロパガンダとの主張)

당시부터 현재까지 중국과 연합국 측이 보도・저작・영화 등의 반일적인 전시 선전을 이용하여, 난징사건의 실제 피해(사실)를 과장하고 일본을 폄하하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중국이 선전에 매달린 배경에는, 구미의 대규모 무역 상대국인 일본에 대해서 구체적인 조처를 하는 것까지는 구미 여론이 움직이지 않았었던 당시의 국제 정세 속에서, 심지어 국제연맹에서 중국 측의 거센 일본 비난조차도 구미를 움직이지 못했다는 현실이 있었다.  

이중에서 국제연맹의 중국 측의 연설에서 언급된 ‘다나카 상주문(田中上奏文, 1927년에 당시 일본의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수상이 일본제국의 세계지배 전략이 담긴 상주문(上奏文)을 쇼와 천황에게 바쳤다고 하는 것으로, 현재는 중국의 선동에 의한 가짜 문서로 알려져 있다)과 같이, 일본의 행동에 대한 과장과 날조도 프로파간다로 간주되고 있다. 동시에 사건에서 사실의 과장과 날조와 함께 일중전쟁의 장기화를 겨냥한 코민테른의 책략(종교적인 평화운동에 침투 공작)이 존재했다는 주장도 있다.

3.7.1 중국의 프로파간다(中国のプロパガンダ)

중국은 적대 국가와의 사이에서 상대를 타도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취하면서 전쟁 외에 모략과 프로파간다도 사용하는데, 그러한 선전은 국민을 결집하는 방법이기도 하며, 난징사건 이전의 중국 역사에서도 다수의 프로파간다가 있다고 근현대사 연구자인 다나카 히데오(田中秀雄)는 주장한다.*

[* 중국이 적(敵) 측의 잔학성을 선전하고 공격하는 선례로서, △ 청나라 군대의 공격으로 80만 명의 희생자를 낳았던 양주 대학살을 명나라 측에서 기록한 ‘양주십일기(揚州十日記)’, △ 또, 1911년 중국 혁명 이전에는 ‘멸만흥한(滅満興漢)’의 슬로건이 바이블이 된 것, △ 1937년 12월 난징사건 이전인 1937년 10월 25 일에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이 영국 기자 제임스 버트넘(James Bertram)에게 일본군이 “학살, 약탈, 강간, 방화”를 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 △ 그리고 1927년 북벌에서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가 장쭤린(張作霖) 군대와 장쭝창(張宗昌) 군대를 공격하기 위해 뿌린 삐라에 “학살, 약탈, 강간, 방화”가 표기되어 있었던 것 등을 들어서 난징사건과의 관련을 지적하고 있다.]

다나카 히데오에 따르면, 중국은 적국의 잔학성을 홍보하고 공격하는 “광고가 무기보다 우선”이며, “프로파간다가 세계에서 인정받게 될 때, 처음으로 항일 전쟁은 우리들의 승리가 된다”라는 사상이 있었고, 이런 점에서 난징사건도 프로파간다에 의한 과장이 있었다고 한다.

3.7.2 국민당 정부(장제스 정권)의 프로파간다(国民政府(蒋介石政権)におけるプロパガンダ)

난징 함락 이전인 1937년 11월, 국민당 장제스는 직속 기관으로 중앙선전부 및 국제선전부를 마련하여 충칭에 본부를, 상하이, 홍콩, 뉴욕, 워싱턴, 런던에 지부를 두었다. 국제선전부(国際宣伝処)의 대적선전과(対敵宣伝科)는 1937년 12월 1일 프로파간다 활동을 시작하고 대적선전을 위한 책으로 해럴드 팀펄리의 저작을 발간했다.

사실에 대한 과장의 예로는 국제연맹의 결의에서 소개된 중화민국의 외교관 웰링턴 쿠(Wellington Koo, 顧維鈞)에 의한 1938년 2월 2일 국제연맹 이사회에서 중국 대표의 연설이 있다. 여기서 웰링턴 쿠는 틸만 더딘(Frank Tillman Durdin) 특파원의 1938년 1월 20일 ‘런던타임스’ 기사를 인용하고 있는데, “학살된 ‘중국 시민’의 수가 2만 명”(더딘의 기사에서는 2만 명의 “포로”)이라고 일부를 바꾸어 연설했다. 또한 이 연설 중에는 현재는 위조문서로 알려진 ‘다나카 상주문’이라고 하는, 일본이 세계 정복하기 위해 중국, 만주, 몽고를 정복해야 한다는 내용의 문서도 소개돼 있어 과장은 여전했다.

[* 웰링턴 쿠(顧維鈞)는 1933년 2월, 리튼 조사단(Lytton Commission)을 심의하는 국제연맹 이사회에서 ‘다나카 상주문(田中上奏文)’을 인용하고, 또한 ‘핑딩산사건(平頂山事件,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푸순(撫順)을 점령한 일본군이 1935년 9월 15일 중국 항일유격대의 습격을 받자 그 보복이라며 이튿날 핑딩산 주민 3천여명을 모아 학살했다고 알려진 사건)’을 거론하며 일본을 비난했는데, 학살 사건을 이용하여 비난하는 것이 난징사건 경우와 유사하다고 일본 근현대사 연구자인 다나베 토시오(田辺敏雄)는 지적하고 있다. 한편, ‘다나카 상주문(田中上奏文)’은 일본이 세계 정복하기 위해서는 중국, 만주, 몽고를 정복해야 한다는 내용의 문서로, 현재는 위조 문서로 판명되었지만, 당시는 중국을 비롯한 미국의 프로파간다 영화인 ‘더 배틀 오브 차이나(The Battle of China)’에서도 일본의 침략 계획으로 거론되거나, 또 전후 도쿄재판에서도 중요한 문서로 간주됐다. ‘다나카 상주문의 작성 경위에 대해서는 왕가정(王家楨, 중국 군벌 장쉐량(張学良)의 부하로 시작해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의 외교관으로 활동했다)과 소련, 일본 군인의 담화 등 여러 설이 있다.]

또한 당시 국제정세를 평가해보면 “세계적으로 좌파 자유주의와 공산주의가 결합했던 ‘인민 전선’의 시대에서 ‘중국을 침략하는 일본’이라는 도식은 확고했으며, 이에 구미(서양) 여론은 일본 비난으로 경사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난징안전구 위원들과 기자들도 국민당과 공산당이 연결되어 있었다는 설이 있고, 실제 일본 측은 당시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를 ‘반공식적인 중국정부기관(半公式の中国政府機関)’으로 취급했다.

또한 중국 측의 일본인 공작원이었던 가지 와타루(鹿地亘)와 아오야마 카즈오(青山和夫)가 이런 프로파간다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도 있다.*

[* 뒤에서 서술하는 헤럴드 팀펄리(Harold John Timperley)의 ‘전쟁이란 무엇인가(What War Means: The Japanese Terror in China)’는 1938년(쇼와 13년)에 일본어 번역(‘외국인이 본 일본군의 폭행(外国人の見た日本軍の暴行)’)으로 간행되었고, 가지 와타루(鹿地亘)와 아오야마 카즈오(青山和夫) 등 공산주의자들의 서문이 붙어있기 때문에, 이 두 명의 일본인 공작원이 관여하고 있었다고 다나카 히데오(田中秀雄)는 지적하고 있다. 먼저, 가지 와타루(鹿地亘)는 중국 국민당 지구에서 반전(反戦) 운동을 실시하였으며, 일본군 포로들을 조직화했다. 국민당은 일본군 포로로부터 여러 정보를 수집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을 중국 측의 관대함을 나타내는 국제 선전에도 이용하고 있었다. 또한, 수용소에서는 “중국 측에 대한 아첨으로 공순(恭順)을 가장하는 자”만이 ‘반전분자(反戦分子)’로 우대되었다. 가지 와타루는 궈모뤄(郭沫若)의 협력을 받아 1938년 12월에는 반전 동맹을 조직했다. 1939년 12월, 중국의 항일 전쟁이 ‘일본 인민의 자유 해방’과 일치한다는 성명이 발표됐고, 1940년 5월에는 옌안(延安) 지부가 건설되어 팔로군이나 신사군 지역의 일본인 포로 병사에 의한 반전 운동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아오야마 카즈오(青山和夫)는 중국 충칭 정부 국제선전처의 대일 공작 고문으로서(본명 구로다 요시하루(黒田善治)), 코민테른의 지령으로 대일 공작에서 활약했다. 또한 전후에 충칭에서 귀국한 아오야마 카즈오는 1946년 4월 3일 아사히(朝日)신문을 통해 “오자키 호쓰미(尾崎秀実, 일본의 평론가이자 언론인으로 활동한 공산주의자로서, 일본의 정계와 언론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소련 스파이로 밝혀져, 1944년 사형에 처해졌다.)가, 연합국 측에 (미국과 일본이 전쟁이 시작할 것이라는) 예고를 전했다. 따라서, 연합국은 일체의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오자키 호쓰미가 이런 예고를 알린 쪽은 소련과 중국이지만, 내가 영국과 미국 쪽에도 ‘전쟁 준비는 어떠합니까?’라고 확인해보니, 양국 모두 ‘잘 되고 있어’라고 답했다”면서 진주만 공격 이전에 있었던 미국 등 연합국 측의 정보 공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일본의 정치학자인 구라마에 모리미치(倉前盛通)는, 이 아오야마 증언을 인용해 연합국 측은 사전에 진주만 공격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3.7.2.1 코민테른과 미국 공산당의 중국 지원과 대일 선전(コミンテルンとアメリカ共産党による中国支援と対日プロパガンダ)


일중전쟁 당시에 중국 측이 대일(対日) 프로파간다를 실시하는데 있어서 미국의 협력자들에게 압력을 가했는데, 그 중에는 종교인도단체계(宗教人道団体系)의 활동(YMCA 등)의 활동도 있었지만, 일중전쟁을 공산화를 위해 이용하는 코민테른의 영향에 의한 프로파간다의 예도 있었으며 코민테른은 종교인들의 평화운동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 1937년 7월의 ‘루거우차오사건(盧溝橋事件, 일중전쟁의 발단이 된 사건으로 베이징과 연결되는 중요한 거점인 루거우(盧溝) 다리에서 일본군이 포격을 시작한 사건)’ 이후, 미국에서 반일 운동 기운이 높아져 회원 수 400만 명의 ‘반전-반파시즘 미국 연맹(American League Against War and Fascism)’은 ‘미국 평화 민주주의 연맹(American League for Peace and Democracy)’으로 개명하고 전국 각 도시에 ‘중국 지원 협의회(China Aid Council)’를 설치했다. 이 ‘중국 지원 협의회’의 명예회장으로 미국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어머니인 사라 루즈벨트(Sara Ann Delano Roosevelt)가 취임했고, 부회장으로 후스(胡適, 중국의 사상가이자 교육가로 베이징대학 학장, 주미대사 등을 지냈다), 이사로 조지 마셜(George Catlett Marshall) 미국 육군참모총장의 부인인 케서린 터퍼 마셜(Katherine Tupper Marshall)이 취임했다.  난징에 있던 존 매기(John Gillespie Magee)가 촬영한 필름은, 헤럴드 팀펄리(Harold J. Timperley)의 지시로 ‘침략된 중국(China Invaded)’이라는 제목으로 중국 YMCA 의 조지 피치(George Ashmore Fitch)를 통해 미국 각지에서 YMCA 등에서 상영되었다. 이 단체들도 공산당과 무관하지 않았다. 1925년에 YMCA가 설립한 싱크탱크인 ‘태평양 문제 조사회(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IPR)’의 사무총장 에드워드 카터(Edward Carter, 인도 YMCA)의 비서로 미국 공산당의 프레데릭 V. 필드(Frederick Vanderbilt Field)가 취임했으며 오웬 래티모어(Owen Lattimore), 기조정(冀朝鼎, 후에 국민당 재무장관 비서관), 그리고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 독일계 소련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주재 소련 스파이 총책으로 알려졌다. 종전 이전에 발각돼 처형됐다)가 주도하는 그룹의 진한생(陳翰笙), H. 노먼(E. Herbert Norman)이 연구원이 되었으며 1933년 이후 일본의 침략을 비난했다. ‘태평양 문제 조사위원회’는, 1939년 H.노먼의 저작인 ‘일본에서의 근대 국가의 성립(Japan’s Emergence as a Modern State: Political and Economic Problems of the Meiji Period)’ 등을 출간하고, 또한 미군 감수 프로파간다 영화인 ‘우리는 왜 싸우는가(Why We Fight)’ 시리즈(‘더 배틀 오브 차이나(The Battle of China)’(1944년), ‘당신의 적을 파악하라(Know Your Enemy: Japan)’(1945년))의 제작에도 협력했는데, 여기에는 일본의 세계 정복 계획에 대해 쓴 ‘다나카 상주문’(현재는 거짓 문서로 알려짐)이나 난징대학살이 악독하게 소개되었다.(이상의 내용들은 2차 세계대전 중 미국과 영국의 적성국 암호 해독 방첩 프로그램 내용이 적시된 ‘베노나 문서(The Venona files)’에 기반한 것으로, 이 극비 문서는 1995년에야 일반에 공개됐다. 관련 자세한 해설은 에자키 미치오(江崎道朗) ‘미국을 끌어들인 코민테른의 동아시아 적화전략(アメリカを巻き込んだコミンテルンの東アジア赤化戦略)’ ‘별책세이론(別冊正論) 15호. 2011년 6月22일간、산케이신분샤(産経新聞社)、pp.78-91. 을 참고할 것.)]

일중전쟁 중이던 1938년에 와카스기 카나메(若杉要) 뉴욕 주재 일본총영사는 미국에서의 반일 프로파간다 조직으로 △ ‘중국정부계(中国政府系)’, △ ‘미국공산당계(アメリカ共産党系)’, △ ‘종교인도단체계(宗教人道団体系)’의 세 종류가 있으며, 이러한 운동의 배경으로 당시 미국 여론이 장제스(蔣介石)와 쑹메이링(宋美齡)을 ‘민주주의와 기독교의 옹호자'로 인지하고 있었지만, 공산당계의 목적은 일본과 미국의 관계를 악화시켜 지나사변을 장기화시킴으로써 일본이 소련에 압력을 가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고 보고했다(와카스기 카나메(若杉要) 뉴욕 총영사, 1938년 7월 20일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 외무대신 앞 보고 ‘이 지방에서의 지나 측의 선전 문제에 관한 건(地方ニ於ケル支那側宣伝ニ関スル件)’)


또한, 1940년에 와카스기 카나메는 반일운동을 지휘하는 코민테른의 목적은 일본을 견제함으로써 아시아지역의 공산화를 조성하려는 것이므로 당시 일본이 반미정책을 펴는데 있어서 경종을 울렸다(와카스기 카나메(若杉要) 뉴욕 총영사, 1940년 7월 25일 보고 ‘미국내의 반일 원지 운동(米国内ノ反日援支運動)’).

‘만주사변(満州事変)’에 맞서 코민테른은 1932년 2월 모든 자본주의 국가 항구에서 일본으로 반출되는 무기와 군수물자의 수송을 반대해야 한다고 하면서, 중국의 항일전쟁을 지지할 것을 각국 공산당에 지시했다.

이에 미국 공산당은 ‘중국 인민 친구 모임(The Friends of the Chinese People)’을 설립하고 모임 회장에 맥스웰 스튜어트(Maxwell S. Stewart, ‘네이션(The Nation)’ 편집원), 기관지 ‘차이나 투데이(China Today)’ 편집장에 필립 자페(Philip Jacob Jaffe)가 취임하고 프레데릭 V. 필드(Frederick Vanderbilt Field, 미국 IPR 사무국), 토마스 A. 빗슨(Thomas Arthur Bisson, 중국 주재 선교사) 등이 위원이 되었다.

1933년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소련과 수교했고, 미국 공산당은 이때 ‘반전-반파시즘 미국 연맹(American League Against War and Fascism)’을 평화운동가를 내세워 결성했다. 1935년 코민테른 제 7대회에서 일본과 독일의 파시즘 국가들과 싸우기 위해 영국, 미국과 제휴하여 반파시즘 통일전선과 인민전선 결성을 각국 공산당에 지시했다. 

미국 공산당 서기장이자 ‘적색 노동조합 인터내셔널(Red International of Labor Unions, 프로핀테른) ’ 중국・태평양 지부 태평양 노동조합 서기국장인 얼 브라우더(Earl Russell Browder)의 지휘 하에, 반전-반파시즘 미국 연맹, 미국교원조합연맹(American Federation of Teachers, AFT), 미국노동총동맹-산업별조합회의(American Federation of Labor and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 AFL-CIO), 미국반전회의(National Council for Prevention of War, NCPW) 등의 단체와 ‘공산당색’을 지우고서 연계해 갔다.*

[* 이 외에 독일 신문 ‘프랑크푸르터차이퉁(Frankfurter Zeitung)’, 영국 신문 ‘맨체스터 가디언(Manchester Guardian)‘에서 활동한 여류 기자인 아그네스 스메들리(Agnes Smedley)도 코민테른으로부터 자금 원조를 받아 상하이에서 반일 프로파간다 공작을 했으며 “난징시민 20만명 학살”설을 주장하는 등, 소련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Pravda)’와도 협력했다. 1936년, 미국 공산당의 프레데릭 V. 필드(Frederick Vanderbilt Field)와 필립 자페(Philip Jacob Jaffe), 토마스 A. 빗슨(Thomas Arthur Bisson) 등은 중국 공산당을 지원하는 잡지인 ‘아메라시아(Amerasia)’를 창간했고, ‘태평양 문제 조사회(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 IPR)’의 오웬 래티모어(Owen Lattimore)도 위원이 되었다. 토마스 A. 빗슨은 중국에서 선교사 활동을 한 후에 일본이 패전하고서 연합군최고사령부(GHQ)에서 일본 재벌 해체를 담당했다. 1937년 6월, 미국 공산당의 프레데릭 V. 필드, 필립 자페, 토마스 A. 빗슨, 오웬 래티모어, 아그네스 스메들리, 에드거 스노 등은 옌안의 중국 공산당 기지를 방문해 마오쩌둥과 만나기도 했다. 상하이에서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와 아그네스 스메들리를 지원했던 루돌프 함부르커(Rudolf Hamburger)도 소련 적군(赤軍) 정보부 책임자로서 그의 아내 루트 베르너(Ruth Werner)는 리하르트 조르게의 조수이자, 욘 라베의 친구였다. 또한, 리하르트 조르게도 난징전을 목격했다고 한다. 1938년 8월에 조지 피치(George Ashmore Fitch) 등은 뉴욕에서 ‘일본의 침략에 가담하지 않는 미국위원회(American Committee for Non-Participation in Japanese Aggression)’(이하, 미국위원회)를 설립하고, 필립 자페, 토마스 빗슨, 맥스웰 스튜어트(Maxwell Stewart) 등 미국 공산당원이나, 해리 B. 프라이스(Harry B. Price, 옌칭(燕京, Yanjing) 대학 교수), 헬렌 켈러(Helen Keller)가 발기인이 되어, 1939년 1월 17일에는 명예회장으로 헨리 스팀슨(Henry L. Stimson) 전 국무장관이 취임했다. 또한, 해리 프라이스의 동생 프랭크 프라이스(Frank Price)는 중국 선교사였으며, 또 국민당 정부 국제선전처의 영문 편집 주사(主事)였다. ‘미국위원회’는 팜플렛 ‘일본의 전쟁 범죄에 가담하는 미국’, ‘전쟁 범죄’를 제작하고 로비 활동을 벌였다.(이상의 내용들은 2차 세계대전 중 미국과 영국의 적성국 암호 해독 방첩 프로그램 내용이 적시된 ‘베노나 문서(The Venona files)’에 기반한 것으로, 이 극비 문서는 1995년에야 일반에 공개됐다. 관련 자세한 해설은, 에자키 미치오(江崎道朗)의 ‘미국을 끌어들인 코민테른의 동아시아 적화전략(アメリカを巻き込んだコミンテルンの東アジア赤化戦略)’ ‘별책세이론(別冊正論) 15호. 2011년 6月22일간、산케이신분샤(産経新聞社)、pp.78-91. 을 참고할 것.)

3.7.3 미・중 합작 프로파간다(米中合作プロパガンダ)

와세다(早稲田)대학 교수인 아리마 테츠오(有馬哲夫)에 따르면, 종전 후 연합군최고사령부(GHQ)와 민간정보교육국(CIE)이 ‘워길트・정보 프로그램(War Guilt Information Program)’으로서 신문 연재 ‘태평양전쟁사(太平洋戰爭史)’와 라디오 ‘진상은 이것이다(眞相はかうだ)’ 등을 통해 난징의 폭행 사건에 대해서 보도하고 일본인을 ‘인죄(認罪, brainwashing)’로 이끌려고 했다. 또한 아리마 테츠오는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이 ‘난징대학살’을 반일선전으로 사용하는데 있어서 전투원의 전사, 편의병의 처형, 민간인 학살을 의도적으로 혼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 이전에는 ‘뤼순 학살 사건(旅順虐殺事件)’과 관련한 옐로우 저널리즘의 예도 있다.*

[* ‘뤼순학살사건(旅順虐殺事件)’은 ‘일청전쟁(日清戦争)’ 당시 ‘뤼순전(旅順戦)’의 패잔병 소탕에서 발생했다고 하는 학살 사건으로, ‘뉴욕월드(New York World)’지의 중국 특파원인 제임스 크릴맨(James Creelman)이 ‘2000명의 중국인 남자, 여자, 아이의 인육이 잘려서 도로에 흩어졌고 대부분의 주민이 학살되었다’고 충격적으로 보도한바 있다(중국 교과서에서는 이보다 인명피해가 더 컸다고 설명). 하지만 최근 저널리즘 역사 연구로는, 뤼순 관련 기사를 게재한 ‘뉴욕월드’지는 조셉 퓰리처(Joseph Pulitzer)에 의해 운영되고 있었으며 경쟁자 윌리엄 허스트(William Randolph Hearst I)의 ‘뉴욕저널(New York Journal)’(‘뉴욕모닝저널(New York Morning Journal)’)지와 경쟁관계로서 선정주의 보도를 해온 옐로우저널리즘 매체였다는 점이 밝혀지고 있다. 또한 제임스 크릴맨 특파원은 악독하게 보도된 뤼순 학살 보도로서 선정주의 보도 수법을 깨우치고, 4년 후인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 관련 보도에서도 이 보도 수법을 발휘했다고 한다. 한편, ‘뉴욕 헤럴드(New York Herald)’의 특파원인 프랑스계 인물 아메데 바이요 드 게르비유(Amédée Baillot de Guerville)는, 뤼순에서 제임스 크릴맨의 보도와 같은 학살은 발생하지 않았다고 보도하면서 학살은 날조라고 논했다. 또한 벨기에 공사인 알베르 다네탄 남작(Baron, Albert d'Anethan)도 학살 보도는 과장된 것으로, 주민들은 대피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살해된 것은 군복을 벗고 싸운 중국병(편의병)이며 부녀자는 살해되지 않았다고 한 프랑스 무관(武官)인 드 라브리 자작(Viscount, de Labry)의 증언을 보고하기도 했다. 다만, 뤼순에서의 학살 문제에 대해서 이바라키(茨城)대학 명예교수인 오에 시노부(大江志乃夫)는 일반 시민 6000명 학살은 “절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주장하는 등, 일본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학살 자체는 사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다. 하타 이쿠히코(秦郁彦)와 이치노세 도시야(一之瀬俊也)는 이러한 뤼순사건을 난징사건과 비교하기도 했다.]

전후 GHQ의 선전 정책(戦後のGHQの宣伝政策)

종전 후 연합군 점령 하의 일본에서 미국의 선전도 역시 프로파간다로서 지나침이 있었다고 지적하는 경우가 있다.*

[* 미국은, 해럴드 라스웰(Harold Dwight Lasswell)의 프로파간다 연구를 기초로 하여 프로파간다나 정보 조작에 의해 상대국을 따르게 하는 심리전을 중시했다. 전시에도 전시정보국(United States Office of War Information, OWI)과 전략첩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OSS)에 심리전 부서가 만들어졌고, 여기에 해들리 캔트릴(Albert Hadley Cantril, Jr.), 조지 갤럽(George Horace Gallup, 여론조사로 널리 알려짐), 프랭크 스탠턴(Frank Nicholas Stanton, 후에 CBS사장 역임) 등이 일했다. 미국 정부는 1945년 11월 1일 맥아더에게 일본 점령 정책의 기본 방침으로 이하를 통보했다. “적당한 방법으로 일본의 모든 계층에게 패배의 사실을 명확히 인식시켜야 한다. 그들의 고통과 패배는, 일본의 불법적이고 무책임한 침략 행위에 의해 초래되었다는 것, 또 일본인의 생활과 여러 제도에서 군국주의가 제거된 때에야 비로소 일본은 국제 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인식시켜야 한다.”]

연합군최고사령부(GHQ) 민간정보교육국의 켄 다이크(Ken Dyke)는 ‘태평양전쟁사’와 라디오 ‘진상은 이것이다’로 미디어 캠페인을 했다. 1945년 12월 8일부터 연합군최고사령부(GHQ)의 광고 정책으로서 전국 각 신문에 연재된 ‘태평양전쟁사’에서는,

2만 명의 시민, 아이들이 살육되었다. 4주 동안 난징은 피의 도시로 변해 잘게 잘린 살점이 흩어져 있었다. 여성도 온갖 폭행을 당하고 저항한 여성은 총검으로 살해되었다.

- 아사히(朝日)신문 1945년 12월 8일


라고 보도되었다. 또한 ‘태평양전쟁사’를 드라마로 편성한 NHK 라디오 ‘진상은 이것이다’가 같은 해 12월 9일부터 방송되고 여기에서 ‘난징의 폭행’에 대해서, 

상하이의 중국 군대로부터 큰 저항을 받았던 일본군은 그 1주일 후에 원한을 일시에 폭발시켜 난징 시내로 쇄도했다고 합니다. 이 난징대학살이야말로 근대사에서도 보기 드문 처참한 것으로, 부녀자 2만 명이 살해된 것입니다.

난징성 안쪽의 각 거리는 몇 주 동안 참사자들이 흘린 피에 물들여졌고, 또한 흩어진 시체로 온 거리가 뒤덮였던 것입니다. 그동안 광기의 일본 병사들은 비전투원을 붙잡아 되는대로 살육, 약탈했습니다. 또한 말도 못할 만큼 폭행을 하였습니다. (생략) 집단적 약탈, 테러 행위, 폭행 등 인도적으로 허용할 수 없는 행위가 시내 곳곳에서 있었습니다. (생략) 이것은 분명히 일본군 장교가 선동하여 일으킨 것이며, 그들 중에는 스스로 거리로 나와 상점 약탈을 지휘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일본군의 포로가 된 지나 병사들을 모아서 이를 사, 오십명 씩 묶어서 살해한 것도 또한 일본군 장교의 명령인 것입니다. 일본군은 거리와 가정에서 여성을 능욕하고 폭행에서 저항한 자는 총검으로 찔러 죽이고, 육십세 노인, 여성, 어린 11살 소녀까지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중국 적십자사의 위생반이 거리에서 시체 정리를 위해서 출동하자 우리 장병들은 그들의 목관까지 빼앗아서 그것을 “승리”의 횃불로 사용했습니다. 적십자 작업자의 다수도 살해되어 그 시체가 지금까지 그들이 처리한 시체 더미로 던져졌습니다. (생략)

(일본) 정부의 어용 기관인 도쿄 방송국은 다음과 같은 엉터리 허위 보도를 세계에 내보낸 것입니다. “난징에서 그렇게 다수를 살해하고 또 재산을 약탈한 ●●의 무리는 포박된 후 엄벌에 처해졌습니다. 그들은 장제스 군대에 속해 평소 불만을 품고 있던 병사의 소행임이 판명되었습니다”라고. (생략) 

난징의 폭행, 이것이야말로 중국이 일본에 대해 끝까지 저항을 결의한 최초의 동기가 된 것입니다.

–  ‘난징의 폭행(南京の暴行)’ 연합군최고사령부 민간정보교육국 편 ‘진상은 이것이다(眞相はかうだ)’ 렌고프레스샤(聯合プレス社), 쇼와 21년(1946년), pp.30-p33 


라고 방송했다.

아리마 테츠오(有馬哲夫)는, 이 라디오 프로그램 ‘진상은 이것이다’는 연합군최고사령부(GHQ)의 민간정보교육국이 제작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숨기고 NHK 제작인 것처럼 했다는 점에서 ‘블랙 프로파간다’(출처를 숨기는 프로파간다)라고 했다. 

3.7.4 팀펄리 저작에 대한 프로파간다 의혹(ティンパーリ著作におけるプロパガンダ疑惑)

호주 기자로서 ‘맨체스터 가디언(Manchester Guardian)’의 해럴드 J. 팀펄리(Harold John Timperley)는 난징사건 직전 9월까지 난징에 있었다. 그는 다른 저널리스트들의 정보 등을 바탕으로 난징사건과 관련해 1938년에 저작 ‘전쟁이란 무엇인가(What War Means: The Japanese Terror in China)’(‘일본군 폭행기실(日本軍暴行紀実)’)를 발간했다. 이 논문은 당시 영미에서 12만 권이 출판되어 일본군의 만행을 알리고 전후 전범 재판에서 검찰 측의 주요 증거로 채택되었다. 하지만, 책의 내용에 대해서는 정확성이나 그 외 많은 비판・논쟁이 있다.



우선 중국 정부의 프로파간다에 의한 과장과 각색이 존재한다는 설이 있다. 해럴드 팀펄리의 저작은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일본에서 귀국한 궈모뤄(郭沫若)가 중국어 버전의 서문을 썼고, 또한 일본판은 가지 와타루(鹿地亘)와 아오야마 카즈오(青山和夫) 등이 서문을 썼다 

스즈키 아키라(鈴木明), 기타무라 미노루(北村稔), 히가시나카노 슈도(東中野修道)는 국민당의 ‘중앙선전부 국제선전처 공작개요(中央宣伝部国際宣伝処工作概要)’, 그리고 국민당 정부 국제선전처장인 증허백(曽虚白)의 자서전 등 중국 측 자료를 발견했고, 이들은 이러한 자료를 통해 해럴드 팀펄리는 장제스 국민당 정부 중앙선전부 고문으로 취임했으며 국민당 정부의 의뢰를 받아 영국이나 미국에서 전시 프로파간다를 하고 있었던 것이 판명되었다면서, 해럴드 팀펄리 저작의 공정성이 의심된다고 주장했다.*

[* ‘중앙선전부 국제선전처 공작개요(中央宣伝部国際宣伝処工作概要)’(타이페이 국민당 당사 박물관 소장)에는 “본 처(국제선전처)가 편집 인쇄한 대적 선전 서적”이라면서 해럴드 팀펄리(Harold John Timperley)의 저작 중국어판인 ‘외인목격중지일군폭행(外人目睹中之日軍暴行)’이 소개되고 있다. 국민당 정부 국제선전처장이었던 증허백(曽虚白)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저서에서 증언하고 있다. / “팀펄리는 형편이 좋았으며, 우리가 상하이에서 항일 국제선전을 전개하고 있었을 때 상하이의 ‘항전위원회’에 참여한 3명의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 그리고 그에게 홍콩에서 비행기로 한커우(漢口, 국민당 정부)에 올 것을 요청하고, 직접 만나 전부 상담했다. 우리는 비밀리에 장시간의 협의를 했고 국제홍보처의 초기 해외홍보망 계획을 결정했다. 우리는 목전의 국제선전에 있어서 중국인은 절대로 얼굴을 내밀면 안 되며, 우리 항전의 진상과 정책을 이해하는 국제 사회의 친구를 찾아서 그가 우리의 대변자가 되어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정했다. 팀펄리는 이상적인 인선이었다. 이리하여 우리는 우선 돈을 써서 팀펄리 본인과 팀펄리를 통해 스마이스에 의뢰하여, 일본군의 난징대학살의 목격 기록으로 2권의 책을 써달라고 요청했고, 인쇄하여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생략) 이후 팀펄리는 그대로 했고, (생략) 두 책은 잘 팔렸고 선전의 목적을 달성했다.” - ‘증허백자전(曾虚白自伝)’ 연경출판사(聯経出版社), 1988년 - 여기서 “2권의 책”이란, 바로 팀펄리의 책과 스마이스 조사였다. / 해럴드 팀펄리의 책이 ‘일군폭행기실(日軍暴行記実)’(‘외인목격중지일군폭행(外人目賭之内日軍暴行)’)이며, 스마이스 조사는 ‘난징전화사진(南京戦禍写真)’이었다고 일본 근현대사 연구자인 다나베 토시오(田辺敏雄)는 지적한다. 또한, 팀펄리는 마이너 설 베이츠(Miner Searle Bates)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 책은 충격적인 책이 되어야 합니다. 더 학술적으로 다룬다면 일종의 균형 감각도 생길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극적인 효과를 내기 위해서도 그것을 희생해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충격적으로 쓰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다나베 토시오는 난징에 거주했던 구미인들이 일본군에 원한을 갖고 중국에 가세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겠으나 그 기록은 중립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 밖에, 난징 함락 다음날 현지로 간 외교관 후쿠다 도쿠야스(福田篤泰)는, ‘잔학행위’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지만, “내 경험으로 보면, 책에 써있는 것은 상당히 과장되어있다”고 하면서 T.J. 텀펄리의 ‘중국에서의 일본군의 잔학 행위(中国における日本軍の残虐行為)’(1938년)의 원 자료에는 조지 피치(George Ashmore Fitch) 신부가 현장 검증도 하지 않고 중국의 호소를 그냥 그대로 기록한 것도 있다고 한다. 또한 중국군의 저항은 격렬했으며, 한편 급한 진격으로 인해 일본군은 식량이 부족했고, 이런 것이 약탈의 하나의 원인이라고 했다. 안전지역의 난민 속에 편의병이 섞여 있었던 것도 사실이라고 한다(신문 보도에 따르면 당시 일본의 보도관은 “1,500명의 중국병이 난민구에 보호를 요청했는데 거기서 무기가 발견됐다”고 말했다. “Japan Seizes Control Of International Relief Body” The Deseret News, January 21, 1938. 同旨The New York Times, January 22, 1938.). 또, 해럴드 팀펄리의 저작에서는 일본의 비행기에 대해서 ‘일기(日機)’로 표기하는 등 중국식 표기가 있다면서 일본 유학 경험이 있는 중국인들이 집필에 협력했던 것이 아닐까하고 다나카 히데오(田中秀雄)는 지적하고 있다. 또한, 집필자의 신뢰성에 관해서도 논의가 있다. 익명으로 작성된 제1장 ‘난징의 생지옥’, 제2장 ‘약탈, 학살, 강간’, 제3장 ‘달콤한 기만과 참혹한 폭행’, 제4장 ‘악마의 소위’까지는 마이너 설 베이츠(Miner Searle Bates)와 조지 애쉬모어 피치(George Ashmore Fitch)가 집필했다. 마이너 설 베이츠는 진링(金陵)대학 역사학 교수겸 안전구 국제위원회 위원이었으며 국민당 보좌역이었다. 조지 피치는 중국 YMCA 지부장이며, 역시 국민당 군 치중(輜重, 보급) 부대 고문이었다. 해럴드 팀펄리는 당시 상하이에 있었으며, 책에서 쓴 내용은 그가 난징에서 견문한 내용이 아니었다.]

한편, 이와 같은 비판에 대해 와타나베 히사시(渡辺久志)는 증허백(曽虚白)의 증언에는 문제가 있으며, 또한 해럴드 팀펄리가 국민당 중앙선전부 고문으로 취임한 시기는 1939년이었다고 반박했다. 중국 전문 역사학자인 이노우에 히사시(井上久士)도 ‘증허백(曽虚白) 자서전’에서처럼 해럴드 팀펄리가 중국 측의 의뢰로 책을 썼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쓰루분카(都留文科)대학 교수인 가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는 증허백(曽虚白)의 증언은 신빙성이 없어 채용할 수 없다고 하면서 팀펄리 저작에서는 주요 부분은 난징 거주자들의 수기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에, 저작을 날조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했다. 또 만약 국민당 정부의 의도에 따라 취재를 했다고 하더라도 그 이전에 이미 ‘전쟁이란 무엇인가’를 저술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작이 아니라고 했다.

또한 해럴드 팀펄리, 마이너 설 베이츠와 친했던 일본인 신문기자 마츠모토 시게하루(松本重治)는 이 두 사람 다 일본에 호감이 있었지만 일본군의 행동으로 인해 호감이 실망으로 바뀌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와타나베 히사시(渡辺久志)와 카사하라 도쿠시(笠原十九司)에 의한 ‘해럴드 팀펄리가 국민당 고문이 된 것은 ‘전쟁이란 무엇인가’가 출간된 이후인 1939년이었기 때문에 국민당의 프로파간다와 해럴드 팀펄리의 저작은 무관하다’고 한 반박에 대해서, 해럴드 팀펄리는 ‘전쟁이란 무엇인가’를 발표하기 전인 1936년부터 이미 국민당의 프로파간다 공작원이었다고 하는 지적을 ‘맥휴 문서’와 동현광(董顕光)의 증언을 바탕으로 전개하는 의견도 있다.*

[* 국민당 정부 중앙선전부 부부장인 동현광(董顕光)은 해럴드 팀펄리(Harold John Timperley)에 대해 “그는 중국의 승리가 민주주의 세계에 중요하다는 신념을 갖고 우리 직원이 됐다”고 회고했다. 해럴드 팀펄리는 그후 국민당 국제선전처의 영국・미국 지부 개설에 진력했고, 1938년 7월에 국제홍보처 고문으로 정식 취임했으며, 같은 해 9월에 ‘맨체스터 가디언’을 사직하면서 국민당의 선전 공작에 종사했다. 하지만 동현광에 따르면 해럴드 팀펄리는 전용 크루저와 자동차를 요구하는 등 교만하게 나왔으며, 1941년 후반에는 국민당 국제선전처에서 사임했다.]

이 설은 미국 해군 정보 장교로서 장제스와 친했던 제임스 M. 맥휴(James M. McHugh)의 사료를 근거로 하고 있다. 해럴드 팀펄리가 난징 함락 이전 1937년 11월에 장제스 부부의 사적 고문인 호주 기자인 윌리엄  도널드(William Henry Donald)를 통해 국민당의 프로파간다 공작원으로 참여토록 권유받았다는 것이다.*

[* 윌리엄 도널드(William Henry Donald)는 ‘파 이스턴 리뷰(Far Eastern Review)’지의 편집위원으로 매체 사주와 일본의 충돌로 인해 1915년부터 반일의 입장이 되었으며 일본을 크게 비난해왔다. 윌리엄 도널드는 장쉐량(張学良)의 고문이 된 후에 장제스 부부의 개인 고문이 되었다. 윌리엄 도널드는 국민당의 호주 시드니 지부에서 근무했으며 국민당 십구로(19路)군에서 프로파간다를 담당하고 있던 윌리엄 조셉 류(William Joseph Lumb Liu)와 친했다. 윌리엄 조셉 류는 1931년 ‘다나카 상주문’에서의 일본의 세계 정복 계획으로 중국과 만주가 피해자가 되고 있다고 주장한 저서 ‘China and the Trouble in Manchuria : what it means to China, Japan, Russia and the world(중국과 만주 문제: 중국, 일본, 러시아, 세계의 의미(中国と満州問題:中国、日本、ロシア、世界にとっての意味))’를 출판하는 등 유력한 반일 프로파간다 운동가였다.]

그리고  해럴드 팀펄리는 이 결과로 국민당 정부의 전 재정부장인 송자문(宋子文)과 매월 1000 달러(현재) 화폐 가치로 약 175만 엔의 보상을 받는 것으로 합의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한편, 해럴드 팀펄리의 저작 중 부록에서의 보고를 보면, 난징사건 당시의 살인은 50명 정도다. 그러나 정작 미국인 선교사 마이너 설 베이츠(Miner Searle Bates)가 1만 2천 명의 중국인 비전투원의 살해를 도쿄재판에서 증언했으며, 이러한 차이는 설명이 되지 않다고 일본 근현대사 연구자인 다나베 토시오(田辺敏雄)는 지적하고 있다.*

[* 부록에는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에 의한 ‘난징폭행보고(南京暴行報告)’와 ‘서간문(書簡文)’(국민당 외교부 고문 서숙희(徐淑希) 편(編) ‘난징안전구 토안(南京安全区档案)’에도 수록) 및 ‘난징에서의 ‘살인 경쟁’’으로 일본의 ‘100인 참수 경쟁(百人斬り競争)’ 기사가 수록되었다. 또한 당시 국민당 외교부 장관은 왕총혜(王寵恵)였다. 해럴드 팀펄리(Harold John Timperley)는 ‘난징폭행보고’와 관련 일본군 점령 당초 안전구역 2개월의 보고는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다음과 같은 폭행 안건이 게재됐다. / No. 1 : 12월 15일, 도로 청소부 6 명이 고루(鼓楼)에서 일본군에 의해 총살, 1명 중상. / No. 12 : 12 월 14 일 밤, 일본군 11명이 동은항(銅銀巷) 집에 틈입, 여성 4명을 윤간. / No. 15 : 12월 15일, 일본군이 한구로(漢口路)의 집에 들어가 아내를 강간하고, 3 명의 여성을 납치했다. 2명의 남편은 총살. / No. 20 : 12월 16일 밤, 일본 군인 7명이 창(窓)에서 난민구로 침입하고, 그 자리에서 부녀를 강간. / No. 24 : 일본병이 홍만자회(紅卍字会) 철 냄비 1개를 약탈하고, 냄비 속의 쌀죽을 땅에 내던졌다. / No. 146 : 12 월 23 일 오후 3시, 일본병 2명이 한구로(漢口路) 소학교 수용소에서 여직원을 강간. 저녁, 일본 병사 수 명이 여자를 윤간. 7시경, 일본병 3명이 소녀 2명을 강간.]

3.7.5 에드거 스노의 저작(エドガー・スノーの著作)

중국 공산당을 취재한 ‘중국의 붉은 별(Red Star Over China)’(1937년)로 높은 평가를 얻고 있던 에드거 스노(Edgar Snow)는 난징전 당시엔 상하이에 있었는데 1941년 저작 ‘아시아의 전쟁(The battle for Asia, アジアの戦争 일본어 번역 : 미스즈쇼뵤(みすず書房) 1956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난징학살의 참혹한 이야기는 지금은 꽤 세계에 널리 퍼졌다. 난징의 국제구호위원회가 내게 알려준 사실에 따르면, 일본군은 난징에서만 적어도 4만 2천 명을 학살했다. 게다가 이 대부분은 여성과 아이였다. 또한 상하이에서 난징으로의 진격 중에 30여 만 명의 인민이 일본군에 살해되었으며, 이것은 중국군 사상자와 거의 동수였다. 적어도 여성의 경우 10세부터 70세까지는 모두 강간당했다. 난민들은 만취한 병사들에 의해 번번히 총검으로 죽임을 당했다. 엄마가 아기의 목이 잘리는 것을 보고서도 그 후 강간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 에드거 스노(Edgar Snow), ‘아시아의 전쟁(The battle for Asia)’(1941년) 


다나베 토시오(田辺敏雄)는 에드거 스노가 국제구호위원회의 전신인 난징안전구 국제위원회에서 베이츠와 팀펄리의 저작을 참고로 하여 저러한 내용을 쓴 것인데, 원래 “비전투원 1만 2천 명 학살”이었던 것이 “여성, 아이 4만 2천 명 학살”로 바뀌었다면서, “이것은 들어서 쓴 것은 믿을 수 없다는 좋은 예로서, 여기에다가 개인적 감정과 정치적 입장이 개입되면 악의를 담은 방향으로 한없이 변형되어 나간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후에 나온 난징 30만 명 학살설도 ‘아시아의 전쟁’에서 에드거 스노가 언급한 “상하이에서 난징 사이에서의 30만 명 학살” 설의 영향을 받은 것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3.7.6 기록영상에 의한 피해과장설(記録映像による被害誇張説)

프랭크 카프라(Frank Capra) 감독의 ‘더 배틀 오브 차이나(The Battle of China)’(미국, 1944년), 그리고 이 영화를 편집한 ‘중국지로후(中国之怒吼)’(중화민국(대만), 1945년)가 미국과 중국의 프로파간다 영화라는 비판, 문제점이 지적되었다. 미국 육군성이 감수한 프로파간다 다큐멘터리 영화인 ‘더 배틀 오브 차이나’ 중에서, ‘난징대학살’ 장면은 여성을 연행하는 군인의 견장과 훈장은 일본군의 것이 아니다. 또한 영화 장면 중에서 일본군이 허리에 탄대(弾帯)를 두르고 있는데 일본군의 권총은 회전식이 아니기 때문에 탄대는 필요가 없다. 또한 난징사건은 12월이었는데도 반팔 복장이 나온다. 그리고 생매장되는 여성 위에 ‘삼민주의(三民主義)’라고 쓰여진 종이조각이 보이는 등, 일본군이 난징에서 연행 살해를 하는 영상이 아니라 중국군이 다른 시기에 가서 찍었던 영상이 아니냐고 오오하라 야스오(大原康男)와 타케모토 타다오(竹本忠雄)는 지적했다.

3.7.7 아이리스 장의 ‘천황의 음모론’(アイリス・チャンの「天皇の陰謀説」)

일본 군부의 현장에서의 포로 살해 명령에 대한 논의와는 별도로, 아이리스 장(Iris Chang)은 저서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 한국어판은 ‘난징대학살’, ‘역사는 누구의 편에 서는가’ 등의 제목으로 번역소개됨)’(1997)에서 역사학자 데이비드 버가미니(David Bergamini)의 저서 ‘천황의 음모(Japan’s Imperial Conspiracy)’(1971)를 인용해 쇼와 천황이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朝香宮鳩彦) 중장에게 일본군 지휘를 명령한 후, 아사카노미야 중장 또는 참모가 “포로를 전부 살해하라”는 명령을 발동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아메리칸대학교(American University) 명예교수인 리처드 핀(Richard Boswell Finn)은 버거미니가 사용한 출처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밝히면서 천황과 아사카노미야 중장에 의한 포로 살해 명령은 신뢰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고 비판했다. 역사학자 바바라 터크먼(Barbara W. Tuchman)도 버거미니의 ‘천황의 음모’는 “거의 완전히 저자의 추론임은 물론이거니와, 악의적인 해석을 좋아하는 성향의 산물”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사실은 일본 육군은 직접적인 포로 살해 명령보다는 전시국제법(헤이그육전조약)를 소홀히 해도 좋다고 해석할 수 있는 명령이 일중전쟁 시작 후에 내려졌기 때문에 포로의 살해가 정당화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명령은 어디까지나 육군성의 재량에 의한 통지로서, 비록 천황이 군 통수권을 갖고 있었다고는 해도, (전시국제법을 중히 여기는) 천황폐하의 명령은 없었다는 것이다.

일본 육군에 의한 포로 살해에 대해서 제16사단장 나카지마 게사고(中島今朝吾)의 일기를 근거로 하여 포로 살해 명령이라고 하는 설과 관련 논쟁에 대해서는 뒤에서 서술하는 ‘# 진중일지’ 절을 참조하라.



3.7.8 아이리스 장 등의 난징 홀로코스트설(アイリスチャンなどの南京ホロコースト説)

아이리스 장은 저서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의 부제를 ‘잊혀진 2차 세계대전의 홀로코스트(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라고 했다. 

아이리스 장은 난징사건의 희생자 숫자가 26만~35만명에 달하며 도쿄 대공습과 히로시마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피해자 숫자(피해자 추산 약 23만 8900명)보다 더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난징사건의 (직간접적) 피해자가 580만 명이라고 추산된다면서 이를 나치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과 동일시했다.

아이리스 장의 저작이 출간된 후인 1997년 11월 30일, ‘뉴스위크(Newsweek)’는 아이리스의 저작과 내용이 중복되는 내용의 편집부 기명 기사 ‘‘난징의 강간’이 밝혀지다(Exposing the Rape of Nanking)’를 보도했다.

한편, 리차드 핀(Richard Boswell Finn)은 아이리스 장이 언급한 숫자는 과장된 것이며, 당시 난징에 있던 욘 라베는 피해자를 5만~ 6만 명, 현지에 도착했던 틸만 더딘 특파원은 수천 명으로 기록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버드대학 교수인 에즈라 보겔(Ezra Feivel Vogel)도 욘 라베의 기록은 아이리스 장이 언급한 숫자보다 훨씬 적다고 지적하고 있다.

스탠포드대학 교수인 데이비드 M. 케네디(David M. Kennedy)는 “난징에서 일어난 사건이 홀로코스트처럼 조직적인 살육과 동일하다고 결론을 내릴 이유를 아이리스 장은 독자에게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평했다.

‘뉴 리퍼블릭(New Republic)’지의 편집인인 제이콥 헤일브룬(Jacob Heilbrunn)은 홀로코스트는 나치에 의한 조직적이고 계획적이고, 정부조직에 의한 유대 민족의 멸종을 목표로 한 살인 행위였다. 하지만, 난징에서의 파괴는 전쟁범죄의 하나인 것이며, 중국인 멸종을 시도한 것은 아니다. 일본 정부가 사전에 폭력을 지시했기 때문이 아니라 전선의 군대가 폭주한 결과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난징과 같은 사건은 역사상 그 외에도 다수 일어났던 셈이다. 충격적인 선전 문구에서와 같은 잘못된 비교를 사용하는 일을 납득할 수는 없다 사건은 어디까지나 군대 일부에 의한 전쟁범죄이며, 일본 이외의 나라의 군대도 유사한 짓을 해왔다라고 코멘트했다. 그러면서 또한 중국 정부도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수백만의 대량 학살에 직면했던 사실을 계속 회피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 편집자주 : 미국의 군사전문기자 마이클 욘(Michael Yon)도  ‘재팬포워드(Japan Foward)’ 기고문에서 비슷한 입장을 밝힌 바 있다. --- 마이클 욘은 “중국이 주장한 난징 학살에 일말의 진실은 있다“며 “단, 우리는 항상 중국의 제시한 숫자에서 10으로 나누기를 해야 된다”라고 꼬집었다. 그는 “난징 학살 희생자의 객관적 추정치는 대략 2~3만명이다. 반면, 중국은 늘 3십만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마이클 욘은 난징사건과 관련 일본의 일부 극우세력과는 선을 그었다. 그는 “일본의 극우세력은 아예 희생자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학살은 확실히 있었다”면서 “다만 난징사건에는 많은 사람들이 간과하는 미묘한 논점들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난징사건의 미묘한 논점들에는 ▲ 중국인들 사이의 상호 혈투극, ▲ 당시 중국인들의 보편적 관례로 제복 입은 군경들이 신분 노출 위험으로 전투를 회피했던 점, ▲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한 군인들(게릴라)의 전투 참여, ▲ 군복을 착용한 병사는 포착 즉시 사살되었던 점, ▲ 공권력 및 치안 부재 상황 등등이 있음을 전했다. 마이클 욘은 “중국은 이러한 역사적 실체 규명에는 관심이 없다”며 “(난징사건과 관련해) 오직 선전선동 도구로서의 활용 가치가 중국의 유일한 관심사”라고 지적했다. 마이클 욘은 “사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사 최악의 잔혹한 학살은 독일 나치나 소련이 아닌 중국 내부에서 자행됐다”고 강조하며, “중국에는 그 학살의 희생자를 위한 위령비 하나 없으며, 오히려 학살을 자행한 실제 주인공(마오쩌둥)의 사진이 천안문 광장 중심에 걸려 있다”라고 중국의 이중성을 신랄하게 꼬집었다. (‘“위안부 문제 배경에 중국의 한일 이간질 책략”...미국 반공우파의 시각’(미디어워치, 2018년 1월 6일자)]

이 밖에도 일본 국내외 언론과 중국 측이 2000년도 이후에 난징사건과 관련해 밝힌 입장에서도 홀로코스트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1984년 8월 4일 아사히(朝日)신문 석간은 난징대학살을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원폭이나 아우슈비츠와 동급인 무차별 대량 살인(広島、長崎の原爆やアウシュビッツと並ぶ無差別大量殺人)”이라고 보도했다. 또, 미국의 학교에서는 유대인 대학살은 수업에서 다루지만 중국인에 대한 홀로코스트는 취급되지 않는다면서 재미화교단체는 샌프란시스코의 공립학교에서의 역사 수업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중국의 피해에 대해 다루도록 하는 캠페인을 실시하였고 도입하는데 성공했다. 2000년에는 ‘중국 홀로코스트 박물관(Chinese Holocaust Museum)’이 샌프란시스코에서 개관됐다. 오사카(大阪)교육대학의 중국계 학자인 마효화(馬暁華)에 따르면, 중국계 미국인에게 있어서 일본의 전쟁 범죄는 “중국인의 홀로코스트”이며 이는 유대인의 홀로코스트보다 더 무섭고 파괴적인 타격이라고 한다. 2015년, 시진핑(習近平) 공산당 총서기는 난징대학살, 나치에 의한 유대인 학살, 일본에 원폭 투하가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상 3대 참사라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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