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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妓生)’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2년 9월 29일판, 번역 : 박재이).
‘기생(妓生)’은 원래 이씨 조선 시대 이전부터 조선반도에서 다른 여러 나라로부터 찾아온 사자(使者)나 고관(高官)의 환대 및 궁중 내 연회 등에서 악기를 선보이거나 성적 봉사 등을 하기 위해 준비된 노비 신분의 여성(계집종(婢))을 의미한다.
갑오개혁으로 법적으로는 폐지되었으나 나중에 민간의 사창가(‘기생집’ 등)의 호칭으로 잔존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목차
1 개요
2 기원 2.1 무녀의 유녀화설과 백제의 양수척설 2.2 중국의 기녀와 기생 2.3 신라의 원화, 천관녀 2.4 백제 유민설 2.5 일본의 구구쓰시와의 관련
3 고려의 기생제
4 변방 군인의 위안부로서
5 이씨 조선의 기생 5.1 기생제 존폐 논쟁 5.2 기생청 5.3 연산군과 기생 5.3.1 운평, 청녀
6 기생과 외교 6.1 공녀
7 이조의 성범죄와 법규
8 기생의 신분 8.1 칠천 8.2 노비 8.3 관비로서의 기생 8.4 비녀 8.5 방기생, 수청기생
9 기생의 종류 9.1 일패, 이패, 삼패, 갈보 9.1.1 일패 9.1.2 이패 9.1.3 삼패 9.1.4 화랑유녀 9.1.5 여사당패 9.1.6 색주가 9.2 기생방
10 기생제의 붕괴와 근대 공창제로의 이행 10.1 조선의 개국과 일본 유곽업의 진출 10.2 일본 정부의 단속 10.3 기생 단속령 10.4 일본 통치하의 공창제 10.4.1 기생과 게이샤
11 대한민국의 기생 11.1 한국군 위안부 11.2 ‘기생 관광’ 11.3 외국인 기생 11.4 기생집
1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생
13 기생과 공창에 관한 논의
14 유명한 기생
15 조선 춘화 속의 기생
16 기명
17 기생에 관한 작품
18 참고자료 |
각종 표기(各種表記)
한글(ハングル):기생 한자(漢字):기생(妓生) 발음(発音):キセン 일본어 읽기(日本語読み):きしょう 로마자(ローマ字):Gisaeng, Kisaeng |
1 개요(概要)
고려에서 이씨 조선 말기까지 약 1천 년 동안 항상 기생 2만-3만 명이 있었으며 이조 시대에는 관비로 각 현마다 10-20명, 군에 30-40명, 부에 70-80명 정도가 상시 있었다.
2 기원(起源)
그 기원에는 여러 설이 있으며 확실하지 않다.
2.1 무녀의 유녀화설과 백제의 양수척설(巫女の遊女化説と百済の揚水尺説)
기생은 노래와 춤으로 유흥을 북돋우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며, 매춘을 하는 이패(二牌)와 삼패(三牌)는 기생으로 불리지 않았다. 발생에는 여러 설이 있어서 신라 무녀(巫女)의 유녀화(遊女化)에서 비롯되었다거나, 고려시대의 백제 양수척(揚水尺)에게 가무를 배우게 한 것으로 비롯되었다는 말도 있다.(사토 쓰기다카(佐藤次高) ‘역사학사전8(歴史学辞典8)’(2001년))
2.2 중국의 기녀와 기생(中国の妓女と妓生)
조선의 기생(妓生) 제도는 중국의 기생 제도가 전해진 것이라고 한다. 기녀 제도는 원래 궁중의 의료나 가무를 담당하는 여비로서 기생(관비)을 고용하는 제도였는데, 훗날 관리나 변방에 있는 군인의 성적 봉사를 겸하게 되었다.(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 ‘조선에서의 공창제도 실시(朝鮮における公娼制度の実施)’ 윤정옥 편(編) ‘조선인 여성이 본 위안부 문제(朝鮮人女性がみた「慰安婦問題」)’ 산이치쇼보, 1992년)
2.3 신라의 원화, 천관녀(新羅の源花・天官女)
종교민속학자 이능화(李能和)가 쓴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1927년)의 내용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 37년에 “원화(源花)를 받든다”고 했다. 원화는 화랑과 짝을 이뤘는데 원화는 여성, 화랑은 미소년이 맡았으며 이것이 기생의 시작이라고 한다. 또한 신라시대의 천관녀(天官女)가 기생제에 해당한다고 한다.
2.4 백제 유민설(百済遺民説)
이능화는 ‘고려사(高麗史)’를 토대로 해서 백제 유민 여성을 화려하게 꾸미고 고려여악(高麗女楽)을 배우게 한 것도 그 기원 중 하나로 삼았다. 또한 이씨 조선 후기의 학자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의 설에 따르면 기생은 백제 유민 유기장(柳器匠, 고리장이)의 후손 양수척(천민) 등이 유랑하는 것을 고려인 이의민(李義民)이 남자는 노비, 여자는 기적(妓籍)으로 등록하여 관리한 것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2.5 일본의 구구쓰시와의 관련(日本の傀儡子との関連)
민속학자 야나기타 구니오(柳田國男)는 기생과 일본의 구구쓰시(傀儡子)는 동조(同祖, 조상이 같음)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철회했다. 그 후 법학자인 다키가와 마사지로(滝川政次郎) 등도 계통이 같다는 설을 주장했으며 문예평론가인 가와무라 미나토(川村湊)도 성기에 대한 신앙이 기생과 구구쓰시에게 공통되는 점 등으로 미루어 도래설이 유력하다고 봤다.
(구구쓰시(傀儡子, 괴뢰자)는 괴뢰(인형)를 사용해 각지를 여행한 예인. 일본의 유랑예인집단으로 남자들은 인형극과 환술 따위의 각종 연희를 행하였으며 여자들은 공연을 하거나 몸을 팔기도 했다. -역주)
3 고려의 기생제(高麗の妓生制)
고려시대(918년-1392년)에 중국의 기녀 제도가 전해져 조선의 기생(妓生) 제도가 되었다.
관기(궁녀), 관비 중에서 얼굴과 몸매가 뛰어난 사람을 선별하여 가무를 익히게 해서 여악(女楽, 고려여악)으로 삼았다. 고려는 정부 직속 장악원(掌学院)을 설립했고 관기들은 그곳에 등록되어 가무와 의료 등의 기예를 담당했다.
4 변방 군인의 위안부로서(辺境軍人の慰安婦として)
장악원(掌学院)에 등록된 기생은 점차 관료나 변방의 군인에 대한 성적 봉사도 겸하게 되었다.(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 ‘조선에서의 공창제도 실시(朝鮮における公娼制度の実施)’ 윤정옥 편(編) ‘조선인 여성이 본 위안부 문제(朝鮮人女性がみた「慰安婦問題」)’ 산이치쇼보, 1992년)
이조 시대에도 기생은 국경 수비 장병의 위안부로도 활용되었다. 국경 6군데의 ‘진(鎮)’과 여진족이 출몰하는 백두산 부근의 읍 4군데에 파견되어 장병들의 바느질이나 술과 식사의 상대, 잠자리 시중을 해서 사기를 북돋웠다.(가와무라 미나토(川村湊) ‘기생(妓生)’(2001년) - 한국에서 소담출판사에서 2002년에 ‘기생 - 말하는 꽃’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출간)
5 이씨 조선의 기생(李氏朝鮮の妓生)
이씨 조선 시대의 기생은 여악 외에 궁중에서 의료를 실시하고 옷을 짓기도 했기 때문에 약방기생(薬房妓生), 상방기생(尚房妓生)이라는 명칭도 생겨났다. (사토 쓰기다카(佐藤次高) ‘역사학사전8(歴史学辞典8)’(2001년))
기생은 관에 속하는 관기(기녀, 서울에서 일하는 궁기(宮妓)와 지방의 향기(郷妓)로 나뉜다)와 사유물(私有物)인 기생이 존재했는데 대부분은 관기였던 모양이다. 기생이 되는 대부분의 여성은 노비인데 친정의 몰락, 일가가 뿔뿔이 흩어지거나 고아가 되거나 신세를 망친 양반의 딸 등이 기생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이씨 조선의 기생은 고려 여악을 뿌리로 하며 궁중 연회에 이용하기 위한 관기를 두고 이를 관리하기 위한 기관인 기생청(妓生庁)이 존재했다. 일반적으로 기생은 양반으로 상대하기 때문에 가무음곡, 학문, 시가, 침구 등에 능통해야 했다. 또한 화려한 옷이나 호화로운 장식품의 착용이 허용되어 다른 나라의 고급 창부와 마찬가지로 복식의 유행을 선도하는 역할도 했다.
5.1 기생제 존폐 논쟁(妓生制存廃論争)
1392년에 이씨 조선이 성립되며 1410년에는 기생 폐지론이 일어난다. 하지만 반대론 중에는 기생제도를 폐지하면 관리가 일반 가정의 여자를 범할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여성학자인 야마시타 영애(山下英愛)는 조선 시대의 이 기생제도 존폐 논쟁을 봐도 “(기생의) 그 성적 역할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의 4대 국왕 세종 때에도 기생 폐지론이 일어나지만 신하가 기생을 폐지하면 봉사(奉使, 관리)가 유부녀를 빼앗아 범죄로 치닫는다고 반론했다. 세종은 이를 인정하고 “봉사는 기생으로 편하게 한다”며 기생제도를 공인했다.(가와무라 미나토(川村湊) ‘기생(妓生)’(2001년))
5.2 기생청(妓生庁)
이씨 조선정부는 기생청을 설치했으며 서울과 평양에 기생학교를 설립해 15세~20세의 여자 중에 기생을 육성했다.(박례서(朴禮緒) ‘’조선역사민속여행’ 기생(1)〈朝鮮歴史民俗の旅〉妓生 (1)’ 조선신보(朝鮮新報), 2004년)
5.3 연산군과 기생(燕山君と妓生)
종교민속학자 이능화에 따르면, 이씨 왕조의 역대 왕 중에서는 9대 국왕 성종과 그의 장자인 10대 국왕 연산군이 기창(妓娼)을 몹시 좋아했다.
특히 연산군은 폭군, 또는 암군(어리석은 임금)으로 유명한데 기창을 후궁으로 많이 끌어들였고 왕비가 방해될 경우에는 처형했다. 화장하지 않았거나 옷이 더러워졌을 경우에는 기생에게 곤장으로 때리는 벌을 줬으며 임신한 기생은 궁중에서 추방하고 또 기생의 남편을 조사해 모두 참살했다.
연산군은 유명한 사찰 원각사(円覚寺)를 못 쓰게 하면서 이곳에 기생원을 짓고 전국에서 여자를 모집해 대량의 기생을 육성했다. 연산군의 음탕한 상대가 된 여성은 만 명에 달했다고도 하며 말년에는 경회루 부근에 만세산을 만들어 산 위에 월궁을 짓고 기생 3천여 명이 에워쌌다. 연산군의 시대는 기생의 전성기(절정)라고도 한다. 한편 이런 것은 연산군의 음탕한 성격에 기인한다고 하며 기생의 풍기도 문란해졌다.
5.3.1 운평, 청녀(運平・青女)
연산군은 기생을 ‘태평함을 운반한다’는 의미로 ‘운평(運平)’이라고 개칭시키고 전국에서 미녀든 유부녀든 첩이든 강탈하여 ‘상납’시키도록 명령했다. 전국에서 미혼의 처녀를 ‘청녀(青女)’라고 불러서 바치게 하거나 각 고을의 8세에서 12세의 미소녀를 모집해 음탕한 짓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조실록(李朝実録)’에서는 “왕색(王色)을 찾아다니는 구별이 없다”고 기록했다.
6 기생과 외교(妓生と外交)
연산군 시대 등에서는 왕이 여음에 빠진 탓에 신하도 풍속이 문란했다. 문예평론가 가와무라 미나토(川村湊)는 이 시대를 “축첩(畜妾), 축기(畜妓)는 당연했으며, 기생의, 기생에 의한, 기생을 위한 정치라고 평가해야 한다”며 “조선은 ‘기생 정치(妓生政治), 기생 외교(妓生外交)’를 실시했다”고 했다. 가와무라 미나토는 현재의 김씨 조선(북조선)이 전국에서 미녀를 모집해 ‘기쁨조’라고 부르며 마음에 든 여성을 VIP의 잠자리 시중에 제공한 점에서 김정일은 “연산군 등의 정통한 후계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6.1 공녀(貢女)
기생은 외교적으로도 쓰일 때가 있었는데 중국에 공녀(貢女), 즉 공물로 ‘수출’됐다. 고려시대에는 송나라의 사자나 명나라 및 청나라 외교관에게도 공여했다.(가와무라 미나토(川村湊) ‘기생(妓生)’(2001년))
이조 시대에서도 성종이 변방의 창기는 국경을 수비하는 장병들의 바느질을 위해 둔 것인데 수도의 창기는 풍속 문란을 초래하기 때문에 기생 제도를 폐지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하자 신하들은 “중국 사신을 위해, 여악(女楽)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기생은 필요합니다”라며 기생의 외교적 유용성을 들며 대답해서 성종은 만족하고 기생제도를 공인했다. 이런 일은 일본인(왜인)에 대해서도 이루어져서 1507년 ‘권발일기(権発日記)’에는 왜나라의 ‘야인’에게도 아름다운 기생을 바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와무라 미나토는 조선의 중국 외교는 언제나 사대주의를 고수했고 사신에 대한 여색 향응은 우호 외교를 위한 “값싼 대가(제물)나 다름없었다”고 했다. 또한 한국 병합 이후의 총독부 정치도 이러한 “기생 없이 성립할 수 없는 국가 체제”를 계승한 것이라고 했다.
7 이조의 성범죄와 법규(李朝の性犯罪と法規)
한편 이씨 조선 시대에는 성에 대해 엄격한 법규가 존재했다. 성폭력 사건은 ‘대명률(大明律)’로 ‘범간죄(犯奸罪)’ 적용을 받았는데 강간 미수는 곤장 100대와 삼천리 유형, 강간은 교수형, 근친 강간은 참수형이었다. 중종 23년(1528년) 10월, 궁인(宮人) 도백손(都伯孫)이 과부를 강간했을 때 중종이 “상인(일반인)이 강간하는 것도 옳지 않은데 하물며 사족이 아니냐“고 하며 엄벌을 지시한 것처럼 지배층에게는 한층 더 엄격한 처신을 요구했다. 화간은 남녀 모두 곤장 80대였기 때문에 여성은 강간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경우에는 여성의 처음 의도가 판단 기준이었다.
세조 12년(1466년) 정4품 호군(護軍)인 신통례(申通礼)가 관비인 고음덕(古音徳)과 여러 차례 성관계를 가졌다. 고음덕은 “처음에는 거절하여 소리 내어 울었다(초거이곡(初拒而哭))”는 이유로 무죄였고 신통례만 처벌받은 것이 일례다. 이 사건처럼 피해 여성의 신분은 중요하지 않았다.
기녀(妓女)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폭력이 없었어도 여성의 동의가 없었으면 강간으로 처벌했는데 피해 여성이 처벌을 원하는지의 여부는 형량의 참작 대상이 아니었다. 절도 도중에 강간까지 한 경우는 참수형이었고, 유아 강간은 예외 없이 교수형이나 참수형이었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에도시대의 ‘간통죄’가 첩 제도나 유곽 제도 안에서 빠져나갈 길이 있었던 것처럼 다양한 방법이 만들어졌다.
8 기생의 신분(妓生の身分)
8.1 칠천(七賤)
고려, 이조 시대의 신분제도에서는 지배 계급인 양반, 그 밑에 중서(中庶) 계급(중인, 이속(吏属)), 평민 계급이 있었으며 그 밑에 천민 계급의 칠천(七賤)과 노비가 있었다. 문학평론가 임종국(林鍾国)에 따르면, 칠천은 상인, 뱃사공, 옥졸, 역졸, 승려, 백정, 무속을 뜻하며 이들은 신분적으로 노예가 아니었던 반면, 노비(奴婢)는 주인의 재산으로 예속되었기 때문에 칠천에는 미치지 못하는 신분이었다.
8.2 노비(奴婢)
노비에는 공천(公賤)과 사천(私賤)이 있는데 사천의 종류에는 전래비(伝来婢), 매비(買婢), 조전비(祖伝婢)가 있으며 하인을 가리켰다. 노비는 매매, 약탈의 대상일 뿐만 아니라 빚의 담보이며 선물로도 양도되었다. 종모법(従母法)에서는 노비의 자식은 노비이며 따라서 주인의 재산이므로 자유롭게 매매되었다. 그래서 한 번 노비로 전락하면 대대로 그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8.3 관비로서의 기생(官卑としての妓生)
조선시대의 기생은 대부분이 관기였는데 신분은 천민, 관비(官卑)였다. 조선 말기에는 기생, 나인(궁녀), 관노비, 이족(吏族), 역졸, 뇌령(牢令, 옥졸), 유죄 도망자는 ‘칠반공천(七般公賤)’으로 불렸다.
8.4 비녀(婢女)
비녀(婢女, 여성 노비)는 통직(筒直)이라고도 하며 하녀를 말한다. 임종국(林鍾国)에 따르면 조선에서 비녀는 ‘사실상의 가축’이며 매각(인신매매), 사형은 물론 비녀를 살해해도 죄를 묻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그는 “구한말, 도랑이나 강에는 종종 떠내려가지 않은 채 어딘가에 걸려 있는 소녀들의 유기된 시체가 있었다고 한다. 국부에 돌이나 막대기가 꽂혀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주인의 노리개가 된 끝에 안주인에게 살해당한 불행한 운명의 주인공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양반집의 비녀는 노복(奴僕)과의 결혼이 허락됐는데, 대신댁의 비녀는 “비 중의 비는 대관비”라고도 입을 모아 말했지만 결혼은 허락되지 않았다. 임종국은 비녀가 주인의 성 노리개가 된 배경에는 조선의 노예제, 신분제도 외에 당시의 “양반은 지위가 높을수록 부인이 있는 안방으로 가는 것을 체면과 관계된다고 생각했기에 근처에 있는 비녀에게 성욕을 토해낼 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젊고 아름다운 관비가 첩이 되는 일도 흔했고 지방 관리 중에는 평민의 딸에게 죄를 씌워 관비로 신분을 떨어뜨려서 목적을 이루기도 했다고 말했다.
8.5 방기생, 수청기생(房妓生・守廳妓生)
또한 성적 봉사를 제공하는 사람을 방기생(房妓生), 수청기생(守廳妓生)이라고 했는데, 이 봉사를 누릴 수 있는 것은 감찰사나 암행어사 등 중앙정부가 파견한 특명관리 양반 계급에 한했으며 위반하면 처벌받았다.
9 기생의 종류(妓生の種類)
9.1 일패, 이패, 삼패, 갈보(一牌・二牌・三牌・蝎甫 (カルボ))
이씨 조선 시대의 기생은 세 등급으로 나뉘었다. 가장 높은 사람을 일패(一牌), 그 다음 사람을 이패(二牌), 가장 하급인 사람을 삼패(三牌)라고 했다.
종교민속학자 이능화에 따르면 유녀(遊女)의 총칭을 갈보(蝎甫)라고 하며, 중국어로 취충(臭虫)이라고 한다. 갈보에는 기녀(기생(妓生))도 포함되었으며 은근짜(銀根子), 탑앙모리(塔仰謀利), 화랑유녀(花娘遊女), 여사당패, 색주가가 포함되었다.
이씨 조선 말기에는 삼패도 기생으로 불렸으며 일패, 이패, 삼패를 구별하지 않게 되었다.
9.1.1 일패(一牌)
일패 기생은 기생학교를 졸업한 후 궁중으로 나갔다. 궁중에 들어간 일패 기생은 자부심이 세서 ‘기생 재상’으로 불리기도 했다. 또한 ‘매패불매음(売唄不売淫)’이라고 하듯이 정절을 중시하고 몸을 팔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으나 실제로는 국가가 지급하는 급료에 비해 지출이 많았기 때문에 특정 양반에게 휘둘려 자금 지원을 받는 ‘가축 제도(家畜制度)’(축(畜)은 부양한다는 의미)가 인정되었다. 이는 사실상의 첩 제도다. 하지만 특정 양반에게 휘둘려 일패 기생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예외적으로 노비가 아니라 양민의 자녀로 대우하는 제도가 있었다. 고려, 이씨 조선에서는 한쪽 부모가 노비, 천민일 경우 그 자녀를 노비로 삼는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제도의 대상은 남자뿐이며 여자는 원칙적으로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기생이 되었다.
또한 궁중에 들어가지 못한 일패 기생은 집에서 손님을 받기도 했다. 궁중에 들어간 일패 기생이라도 30세 무렵에는 은퇴해서 결혼하거나 심부름꾼, 매주업(売酒業, 실질적으로는 매춘업)을 한 사람도 있었다.
일패에는 ‘약방기생(薬房妓生)’이나 궁중의 의복 관계를 담당한 ‘침비(針婢, 상방기생(尚房妓生))’도 포함되었다.
9.1.2 이패(二牌)
이패는 은근짜(殷勤者)라고 하며 은밀하게 매춘업을 한 여성을 가리키며 퇴물 일패 기생이었다고 한다. 주택가에서 생활하며 숨어서 매춘하는 사람이 많았다.
9.1.3 삼패(三牌)
삼패(삼패 기생)는 완전한 창부(娼婦)이며 탑앙모리(搭仰謀利)라고도 한다. 잡가(雑歌)를 부르며 손님을 맞았다고 한다.
근대화 이전에는 경성에 산재했으나 훗날 시동(詩洞)에 모여 살았고 일터를 상화실(賞花室)이라고 했다. 이씨 조선 말기에는 삼패도 기생으로 불렸다.
9.1.4 화랑유녀(花娘遊女)
화랑유녀(花娘遊女)는 성종 시대에 성립한 것으로, 봄, 여름에는 항구나 세금을 징수하는 장소에서, 가을, 겨울에는 산사의 승방에서 매춘을 했다. 승려가 안내하며 여성을 비구니로 승방에 두고 매춘업을 했다. 승려가 중개한 배경에 관하여 가와무라 미나토는 이조 시대에 유교가 강해지고 불교가 쇠퇴해서 승려는 천민의 지위로 떨어져 기부금 등도 끊겼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9.1.5 여사당패(女社堂牌)
여사당패(女社堂牌)는 유랑예인집단으로 낮에는 광장(마당)에서 곡예나 가면극(떡볶이), 인형극을 하고 밤에는 매춘을 했다. 남성은 남사당이라고 해서 남색을 상대했으며 여성은 여사당이라고 해서 매춘을 했다. 사당 집단의 본거지는 안성(安城)의 청룡사(青龍寺)였다. 가와무라 미나토는 여사당패를 일본의 구구쓰시(傀儡子)와 비슷하다고 했다.
9.1.6 색주가(色酒家)
색주가(色酒家)란 일본에서 말하는 메시모리온나(飯盛女, 에도시대 역참의 여관에서 나그네의 식사 시중을 들고 매춘도 겸한 여성. -역주), 작부를 말하며 여관 등에서 매춘을 했다. 술을 팔고 매춘을 하는 점포를 술집이라고 했는데, 근래에도 ‘바’나 ‘카바레’의 술집 아가씨(술집 여자), 찻집(티켓다방)에서는 다방 아가씨(다방 여자), 지금도 사우나방(소프란도)이나 ‘퇴폐이발소’라고도 하는 이발소에서 면도 아가씨라는 여성이 있다.
9.2 기생방(妓生房)
또한 서울에는 기생방(妓生房)이라고 하는 곳이 있었다. 주로 관청의 관리 하에 영업했는데 유곽과 비슷하며 상당히 엄격한 관례에 따라 운영되었다. 그러나 지방에서는 삼패가 많아서 기생방이나 그와 유사한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고 한다.
10 기생제의 붕괴와 근대 공창제로의 이행(妓生制の崩壊と近代公娼制への移行)
10.1 조선의 개국과 일본 유곽업의 진출(朝鮮の開国と日本の遊郭業の進出)
1876년 이씨 조선이 일본의 개국 요구를 받아 일조수호조규(日朝修好条規)를 체결해 개국한 이후에는 부산와 원산에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어 일본식 유곽 등도 개업했다. 일본이나 해외에서 문화가 유입되어 기생제도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일본의 게이샤와 유곽제도, 러시아 등에서 백인 창녀(감인(甘人)이라고 한다) 등이 들어와 기존의 기생제도와 융합하여 구별이 없어졌다. 이씨 조선 말기에는 기생조합이 만들어졌는데 이로써 기존에 고용주가 필요했던 기생도 주인 없이 기생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지방 기생이 서울로 들어와 기생의 형태가 격변하며 일본통치시대에 확립된 공창제도에 편입되었다. 대한제국시대까지는 초경 전의 소녀를 기생으로 삼는 일도 많았지만 한국병합 후에 소녀를 기생으로 삼는 일은 금지되었다.
김일면(金一勉)과 김양기(金両基)는 조선의 도시에 유곽이 버젓이 등장한 것은 일본인이 등장한 이후의 일이며 조선 각지에서 소녀 인신매매가 공공연히 횡행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10.2 일본 정부의 단속(日本政府による取り締まり)
1881년 10월에는 부산에서 ‘유곽 및 예창기 영업규칙(貸座敷並ニ芸娼妓営業規則)’이 제정되었고 원산에서도 ‘창기 유사 영업 단속(娼妓類似営業の取締)’이 실시되었다. 이듬해인 1882년에는 부산영사가 ‘유곽 및 예창기에 관한 고시(貸座敷及び芸娼妓に関する布達)’를 공포해서 유곽업자와 예창기에게 세금이 부과되었으며 예창기에게는 영업감찰(영업허가증) 취득을 의무화했다. 1885년에는 경성영사관에서 ‘매음단속규칙(売淫取締規則)’을 내려서 서울에서의 매춘업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일청전쟁 후에는 음식점에서의 예기 고용이 공인(영업 허가제)되어 1902년에는 부산과 인천, 1903년에는 원산, 1904년에 서울, 1905년에 진남포에서 유곽이 형성되었다.
일러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으로 삼은 이후로는 일본의 매춘업자가 더욱 증가했다. 서울 성내 쌍림동에는 신정(新町)유곽이 만들어졌고 이는 재원(財源)이 되기도 했다.
1906년에 통감부가 설치되는 동시에 거류민단법(居留民団法)도 시행되고 영업 단속 규칙도 각지에서 나와 제도가 정비되었다. 같은 해에는 용산에 도산(桃山)유곽(나중에 야요이(弥生)유곽)이 개설되었다. 일본인의 거주지로 유명한 경성의 신정(新町), 부산의 녹정(緑町), 평양의 유정(柳町), 대전의 춘일정(春日町) 등에는 수십 채에서 수백 채에 달하는 유곽이 설치되었으며 지방의 소도시에도 십여 채의 유곽이 줄지어 늘어섰다.
10.3 기생 단속령(妓生取締令)
일본인 매춘업자가 성행하는 동시에 조선인업자도 증가하는 가운데 서울경무청은 시내의 창부영업을 금지했다. 1908년 9월에는 경시청이 기생단속령, 창기단속령을 내려서 기생을 당국 허가제로 하고 공창제에 편입시켰다. 1908년 10월 1일에는 단속 이유로 매매인의 속임수로 본의 아니게 종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10.4 일본 통치하의 공창제(日本統治下の公娼制)
1910년 한국병합 이후에는 통감부 시대보다 단속이 더욱 강화되어 1916년 3월 31일에는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령 제4호 ‘유곽 창기 단속 규칙(貸座敷娼妓取締規則)’(같은 해 5월 1일 시행)이 공포되었다. 조선 전역에서 공창제를 실시했으며 일본인, 조선인 창기 모두 연령 하한이 일본 본토보다 한 살이 어린 17세 미만으로 설정되었다.
한편 병합 초기에는 일본식의 성 관리 정책을 철저히 하지 못했다. 1910년대 전반의 여성 매매 형태로는 속인 여성을 아내로 삼아 팔아넘기는 사례가 많았는데 훗날 1930년대에 볼 수 있는 유괴해서 창기로 파는 사례는 아직 적었다. 당시 신정, 도산 유곽은 당당한 유곽인데 비해 사창을 두는 작은 음식점인 ‘아이마이야(曖昧屋)’는 서울시에 130여 채가 산재했다. 1차 세계 대전 전후에는 전쟁 경기로 1915년부터 1920년까지 경성의 화류계는 전성기에 달했다. 조선인 창기도 1913년에는 585명이었는데 1919년에는 1,314명으로 증가했다. 1918년 경성 본정(本町)의 일본인 거류지와 종로서 관내에서의 임검에서는 호적불명자와 13세 소녀 등이 검거되었다.
10.4.1 기생과 게이샤(妓生と芸者)
야마지 하쿠우(山地白雨)가 1922년에 간행한 ‘슬픈 나라(悲しき国)’(지유토큐샤(自由討究社))에서는 “기생은 일본의 게이샤와 창기를 합친 것과 같은 자이며 창기로서는 격이 높고 게이샤로서는 그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마지막 목적은 잠자리에 모셔서 깊은 정을 모시는 데 있다”고 기록했다.
같은 해에 간행된 류켄지 도자에몬(柳建寺土左衛門)(마사키준쇼(正木準章) ‘조선센류(朝鮮川柳)’(센류켄지샤(川柳建寺社))에서는 기생을 조선인 게이샤를 말하며 교토 게이샤와 같다고 했고 갈보는 매춘부라고 적었다.
1934년 경성관광협회(京城観光協会) ‘조선요리 연회 안내서(朝鮮料理 宴会の栞)’에서는 “에로 방면에서는 명물인 기생이 있다. 기생은 조선의 요릿집에서나 일본의 요릿집에서도 부를 수 있다. 일류 기생은 3, 4일 전부터 약속해 놓지 않으면 좀처럼 볼 수 없다”고 했고 “엽기적 방면에서는 갈보라는 것이 있다. 요컨대 에로 서비스를 하는 여자다”, “갈보는 매춘부”라고 하며 기생과 갈보를 구분해서 썼다.
1940년 당시 기생의 실태를 아사히신문 기자가 조사한 내용에 따르면 “기생의 대부분이 매춘부”라는 사실을 보도했다.
11 대한민국의 기생(大韓民国の妓生・キーセン)
11.1 한국군 위안부(韓国軍慰安婦)
대한민국 성립 후에 조선전쟁(한국전쟁)이 발발하여 전쟁으로 불타버린 국토의 부흥에 막대한 비용이 필요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일본과 대한민국 간의 기본 관계에 관한 조약으로 얻은 자금을 바탕으로 부흥을 추진했고 재한미군(주한미군_을 새로운 부흥의 자금원으로 찾아냈다. 당시 주둔하던 미군에 대한 유흥업소는 조선어로 조폭(야쿠자)이라고 불리는 비합법 범죄조직이 관여했고 막대한 금액이 지하로 유출되었다. 이를 일제히 적발해서 새로운 국영 창관제도를 대신 설치해 외화를 벌었다. 이것이 편의적으로 국영(国営) 기생으로 불리는 제도이며 더 많은 외화 벌이를 위해서 한때 베트남전쟁 때 등에 해외로도 파견되었다.
11.2 ‘기생 관광’(「キーセン観光」)
일본이 부흥하고 해외여행이 재개되자 일본 관광객에 대해서도 국영 기생을 사용했다. 1990년대까지 이를 ‘기생 여행’이라고 할 정도로 한국 여행이 유흥업소 여행과 비슷한 의미가 있었던 이유는 이 때문이다. 교통공사(交通公社)와 긴키닛폰투어리스트(近畿日本ツーリスト)의 여행에서는 하네다발 2박 3일에 35,000엔 정도, ‘기생’과 만난 후 저녁식사가 끝나면 호텔로 ‘기생’이 왔다. 밤거리로 나가거나, 방에서 쓸데없는 잡담을 하거나 하는 식으로 다음날 아침까지 함께 있으면 3만 엔을 요구했다.
관련 르뽀에 따르면, 밤거리에 혼자 나가면 ‘힘센 남성’(남들은 경찰관이라고 한다)이 미행했다. 그 덕택에 안심하고 골목길 포장마차 등에서 서울의 밤을 즐겼다고 한다. 산 채로 썰어낸 낙지를 먹기도 하고, 또 즉시 주문해 입을 수 있는 맞춤 셔츠를 구입해서 호텔로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호텔 직원이 문을 두드렸다. “혼자 오셨나요? 외롭지 않으세요?” 문 위의 회전창에는 당시 일본에서 유행한 청점퍼 등을 걸친 여성 두 명이 직원 뒤에서 벽에 몸을 기대고 기다렸다.
새벽 2시 너머까지 직원이 여러 번 노크를 했다. 직원에게도 수수료가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업자는 그녀들을 “기생”이라고 하지 않고 “공주”라고 불렀다.
11.3 외국인 기생(外国人キーセン)
한강의 기적을 거쳐 1980년대에 한국 경제가 궤도에 오르기 시작하자 국영 기생을 지망하는 사람이 감소했다. 부족한 인원수를 메우는 형태로 성장한 민간 기생으로는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에서 여성을 유치했다. 소련이 붕괴한 후에는 러시아 여성도 유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외국인 창부에 대한 위법 행위가 빈발하여 일부에서 사회문제가 되었다. 2004년에 한국 의회는 모든 매춘시설을 폐쇄하고 매춘 행위를 위법으로 하는 법을 개정했다. 이로써 기생은 대한민국에서 사실상 폐지되었다.
11.4 기생집(キーセン・ハウス)
서울의 기생집으로는 ‘청운각(清雲閣)’, ‘대원각(大苑閣)’, ‘삼청각(三清閣)’ 등이 유명했다. 전통적인 기생집으로 유일하게 남아 있던 ‘오진암(梧珍庵)’도 2010년에 폐점했다.
12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생(朝鮮民主主義人民共和国の妓生)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기생 실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씨 조선 시대의 관기와 유사한 것으로 ‘기쁨조’가 존재한다.
또한 가와무라 미나토는 현재 김씨 조선(북조선)이 전국에서 미녀를 조집해 ‘기쁨조’라고 부르며 마음에 든 여성을 VIP의 잠자리 시중에 제공한 점에서 김정일이 ‘연산군 등의 정통한 후계자’라고 평가했다.
13 기생과 공창에 관한 논의(妓生と公娼に関する議論)
기생에서 일본의 공창제에 이르는 성립 과정에 관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얽혀서 논란이 일고 있다.
자칭 옛 일본군 위안부라고 한 김학순, 문옥주 등이 ‘조선의 사창 또는 공창을 위하거나 일본의 사창을 위한 기생학교가 아니라, 일본군 또는 일본 정부 등에 의한 일본의 공적 기관 봉사를 목적으로 한 공창제 기생학교에 입학한 후 정부에 영업을 허가받은 창부로서 일본의 공식 영업 허가를 얻기 위한 기생에 관한 지식이나 기술 등을 습득하고 졸업했다’는 식으로 증언했다.
기생 등 조선의 전통 제도는 일본의 공창제로 붕괴됐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야마시타 영애는 “조선사회에도 예로부터 다양한 형태의 성매매가 존재했다. 상류계급에서는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전해졌다고는 기녀제도가 있었고 일본에 의해 공창제도가 도입될 때까지 지속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기생제와 일본의 공창제의 차이에 관하여 가와다 후미코(川田文子)는 기생 외에 잡가를 즐기는 창녀, 유랑예능집단이었던 여사당패, 색주가에서 일하는 작부 등의 형태가 있었는데 특정한 집창 지역이라서 정부가 관리하는 공창제도와는 다르다고 했다. 또 재일조선인 역사학자 김부자(金富子)나 양징자(梁澄子), 재일한국인 평론가 김양기(金両基) 등은 기생제도는 성매매를 제도화한 공창제도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김양기는 대부분의 기생들이 매춘과는 무관하며 한시(漢詩) 등에 있어 명작을 남긴 일패 기생 황진이처럼 문화인으로 인정받거나 기생의 순애를 그린 ‘춘향전’과 같은 문학의 소재가 되었으며 70년대에서 90년대까지 주로 일본인 여행객 접대에 사용된 기생 관광과는 전혀 다르다고 반론했다.
한편 가와무라 미나토는 “이조 이전의 기생과 근대 이후의 기생이 다르다. 에도시대의 요시와라(吉原)유곽과 현대의 요시와라 소프란도 거리가 다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그 정치적, 사회적, 제도적인 지배-종속의 구조는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하면서, 현대의 서울 미아리 88번지의 미아리 텍사스나 청량리 588 등 사창굴에도 “성을 억압하며 그것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고급스럽게 포장한 기생문화의 근본에 있는 것은 여기에도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14 유명한 기생(高名な妓生)
기생 중에는 시와 회화로 유명한 사람도 있다.
• 어우동(於宇同)
• 진홍(真紅)
• 황진이(黄真伊)
• 장녹수(張緑水) – 국왕 연산군의 측실.
• 정난정(鄭蘭貞) – 윤원형(尹元衡)의 후처.
• 정칠성(丁七星)
• 논개(論介)
• 유감동(兪甘同)
15 조선 춘화 속의 기생(朝鮮春画のなかの妓生)
조선에는 춘화가 없다고 일부에서 말해왔지만 풍속화가 신윤복의 ‘전훈원(伝薫園)’이나 김홍도의 ‘사계춘화첩(四季春画帖)’ 등 성교나 성희 장면을 그린 춘화도 많이 있다. 조선 춘화의 등장인물은 거의 다 기생과 손님이었다. 가와무라 미나토는 이러한 에로틱 예술의 시선 속에서 기생만 등장인물이 된 점을 조선 춘화의 특색으로 삼았다. 그 배경에 조선 유교가 있어서 “허구의 회화 속이라고 해도 음란한 행동을 하고 성을 드러내며 노골적인 추태를 보이는 것은 기생뿐이어야 하며 유부녀나 마을 처녀나 오오쿠(에도성 안에서 쇼군의 부인과 첩, 하녀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쇼군을 제외하고 남성은 출입이 금지되었다. -역주)의 여성들이 등장한 에도시대의 우키요에 춘화야말로 질서와 억제, 한도도 없는 방종하고 부도덕한 불륜 행위를 권장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도덕적인 춘화. 이것이 조선의 춘화를 나타내는 가장 적합한 말일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16 기명(妓名)
• 고려(高麗)
• ‘자운선(紫雲仙)’, ‘백련(白蓮)’, ‘칠점홍(七点紅)’, ‘옥반주(玉盤珠)’ 이인로 개명 장중주(李仁老改名掌中珠), ‘초영(楚英)’, ‘옥기향(玉肌香)’, ‘천돌(千咄)’, ‘화수(花羞)’, ‘소매향(小梅香)’, ‘옥직직(玉織々)’, ‘진주(真珠)’, ‘연쌍비(燕双飛)’, ‘벽옥(碧玉)’, ‘동인홍(動人紅)’, ‘월아(月娥)’, ‘설매(雪梅)’, ‘상선래(謪仙来)’, ‘호호(好々)’, ‘만년환(万年歓)’, ‘봉지연(鳳池蓮)’
• 이씨 조선(李氏朝鮮)
• ‘자동선(紫洞仙)’ 경기(京妓), ‘장미(薔薇)’ 나주기(羅州妓), ‘동인홍(動人紅)’ 철원 기(鉄原妓), ‘금개(今介)’ 공주기(公州妓), ‘매화(梅花)’ 곡산기(谷山妓), ‘계생(桂生)’ 호매창 부안기(号梅窓 扶安妓), ‘무운(巫雲)’ 강계기(江界妓), ‘소상매(瀟湘梅)’ 강계기(江界妓), ‘일두홍(一朶紅)’ 금산기(錦山妓), ‘은태선(銀台仙)’ 성주기(星州妓), ‘천졸(千拙)’ 홍성기(洪城妓), ‘양태운(陽台雲)’ 공주기(公州妓), ‘금란(金蘭)’ 충주기(忠州妓), ‘득옥(得玉)’ 성천기(成川妓), ‘옥서선(玉棲仙)’ 홍주기(洪州妓), ‘대중래(待重来)’ 밀양기(密陽妓), ‘홍랑(洪娘)’ 홍원기(洪原妓), ‘논개(論介)’ 진주기(普州妓), ‘진이(真伊)’ 송도기(松都妓), ‘영산홍(暎山紅)’ 전주기(全州妓), ‘봉희(鳳姫)’ 선성기(宣城妓), ‘복개(福介)’ 부안기(扶安妓), ‘선향(仙香)’ 안악기(安岳妓), ‘무정개(武貞介)’ 평양기(平壌妓), ‘단인장(断人腸)’ 성천기(成川妓), ‘막종(莫従)’ 전주기(全州妓), ‘석개(石介)’ 경성기(京城妓), ‘승양비(勝楊妃)’ 광주기(光州妓), ‘무정가(無定価)’ 평양기(平壌妓), ‘자홍자옥소선(紫鸞字玉簫仙)’ 평양기(平壌妓).
• 일본통치시대(日本統治時代)
• 경성(京城)
• ‘매홍(梅紅)’, ‘일덕(一徳)’, ‘산호주(珊瑚珠)’, ‘채옥(彩玉)’, ‘옥선(玉仙)’, ‘일지홍(一枝紅)’, ‘경란(瓊蘭)’, ‘운선(雲仙)’, ‘영산향(暎山香)’, ‘녹주(緑珠)’, ‘은옥(銀玉)’, ‘난홍(蘭紅)’, ‘섬홍(蟾紅)’, ‘계향(桂香)’, ‘우춘(又春)’, ‘산홍(山紅)’, ‘취향(翠香)’, ‘연화(蓮花)’, ‘송자(松子)’, ‘연향(蓮香)’
• 평양(平壌)
• ‘화중선(花中仙)’, ‘일지화(一枝花)’, ‘은홍(銀紅)’, ‘진실(真実)’, ‘일선(一扇)’, ‘화선(花扇)’, ‘목단(牡丹)’, ‘산월(山月)’
17 기생에 관한 작품(妓生に関する作品)
• ‘춘향전(春香伝)’ – 이씨 조선시대의 소설로 판소리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 ‘어우동(於宇同)‘ – 1985년 한국 영화.
• ’황진이‘ – 2006년 한국의 TV드라마.
• ’황진이‘ 영화판 – 2007년 한국 영화.
• ’신기생뎐‘ – 기생이 현재까지 존재한다는 설정으로 그려낸 2011년 한국 TV드라마.
• ’어우동 ~주인 없는 꽃~‘ - 2015년 한국 영화. (위키에 실린 내용과 달라서 임의 수정했습니다. -역자)
• ’해어화‘ – 2016년 한국 영화.
18 참고자료(参考資料)
•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 이능화(李能和), 1927년
• ’서울 성 아래로 한강은 흐른다(ソウル城下に漢江は流れる)‘ 임종국(林鍾国) 저, 임해석(林海錫), 강덕상(姜徳相) 역 (’한국사회풍속야사‘의 일본어 번역본. -역자)
• ’조선기행(朝鮮紀行)‘ 이사벨라 버드 비숍, 고단샤(講談社) (우리나라에서는 ’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이라는 제목으로 출간. -역자)
• ’조선 의학사 및 질병사(朝鮮医学史及疾病史)‘ 미키 사카에(三木栄)
• ’조선풍속집‘ 이마무라 도모(今村鞆), 시도칸(斯道舘), 1914년, 국서간행회, 1975년 (홍양희 역, 최혜주 감수, 민속원, 2011년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