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戰後) 레짐’ 뒤집기
아베 신조 전 수상은 싸우는 정치가였다. 그렇기에 나는 범인이 주체가 되고 아베가 피해자라는 의미의 '암살'이라는 말은 더 이상 쓰고 싶지 않다. 아베가 주체가 되는 ‘순직(殉職)’이라는 표현이 적절하다고 보고 있다.
아베는 무엇과 싸워왔는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전후(戰後) 레짐’과 싸워왔다. 그 투쟁은 인생을 건 격렬하고도 끈질긴 것이었다. 이에 이번 그의 순직은 ‘전사(戰死)’였다고, 나는 느끼고 있다.
아베가 싸워왔던 ‘전후 레짐’이란 무엇인가. 여러가지 논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그것을 일본 민족에 대한 ‘성악설(性惡說)’이라고 부르고 있다.
올해 5월에 이 코너에서 나는 일본 헌법 전문에 쓰여 있는 “일본 국민은... 정부의 행위로 인한 전쟁 참화가 또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할 것을 결의(한다)”에 대해 언급했었다. 여기서 “정부의 행위”란 우리 일본 정부의 행위를 가리키는 것인데, 이를 그냥 방치하면 “위안부 강제연행”, “난징대학살”과 같은 나쁜 일이 또 벌어질 것이며, 반면에 우리 일본 정부 이외 국가 정부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공정(公正)과 신의(信義)”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 바로 일본 민족에 대한 ‘성악설’이다. 그래서 이에 기반하여 일본국 헌법 9조 2항에도 우리 일본만 전 세계 국가들 중에서 유일하게 육해공 전력을 갖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하는 내용이 버젓이 명기되어 있는 것이라고 나는 지적한 바 있다.
헤이세이 9년(1997년), 아베는 재선의 중의원 의원이었던 젊은 정치인 시절에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씨, 에토 세이이치(衛藤晟一) 씨 등 뜻을 같이 하는 다른 의원과 함께 ‘일본의 앞날과 역사교육을 생각하는 젊은 의원들의 모임(日本の前途と歴史教育を考える若手議員の会)’이라는 자민당 내부의 의원동맹을 결성했다. 그리고 매주 한 번씩 총 아홉 차례 위안부 문제에 관한 공부모임을 갖고서 그 (연구) 성과를 책으로까지 출판했다.
위안부 문제와 납북 문제 해결에 힘쓰다
당시는 일본 정치인들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 자체가 크게 터부시됐던 때다. 언론에서는 이 문제를 논의하려는 이들을 두고서 비참한 경험을 강요당한 한국 여성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역사수정주의자”, “극우주의자”라는 식의 딱지를 붙이는 일도 만연했었다. 하지만, 아베 일행은 일단 위안부 ‘성노예파’의 의견도 들으면서 무엇보다도 이 문제의 사실관계가 무엇인지를 밝혀나가고 있었다.
그때 아베는 “일본군이 정신대라는 국가적 제도로 조선여성을 다수 강제연행해서 위안부로 삼았다”고 하는 당시 다수 의견이 실은 아사히신문의 날조보도 등에 의해서 퍼진 거짓말이었음을 밝혀냈다. 그리고 이 거짓말과의 싸움을 필생의 사업으로 여겼다. 그래서 헤이세이 24년(2012년) 12월, 제2차 아베 정권 발족식 전의 당수(黨首) 토론회에서 아베는 아사히신문 기자의 질문에 대해서 “위안부 문제는 당신들 아사히신문이 요시다 세이지(吉田清治)라는 거짓말쟁이의 이야기를 사실처럼 퍼뜨린 것이잖느냐”고 반문하기도 했었다.
헤이세이 28년(2016년) 1월에는, 그 바로 전 해의 12월에 일한위안부합의에 관한 일본 국회 답변에서 “(위안부 문제에 관하여) 해외에서의 압력을 포함하여, 허위에 기반한 비방중상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성노예’ 또는 ‘20만 명’이라고 하는 사실은 없습니다... 정부로서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표명해나가고 싶습니다”라는 역사적인 답변을 하기도 했다.
아베와 납북 문제의 관계는 헤이세이 초, 유럽에서 요도호 그룹(よど号グループ)에 의해 북조선으로 납치되었던 아리모토 케이코(有本恵子) 씨의 부모님과의 만남에서 시작됐다. 아베는, 케이코 씨의 어머니인 카요코 씨가 2년 전에 서거했을 때 “아직 내가 아버지의 비서를 하고 있을 무렵부터 이야기를 들었고, 오랜 기간 어떻게든 케이코 씨를 되찾아오고자 함께 싸워왔습니다”고 말했던 적이 있는데, 실제로 그 말 그대로 해왔다.
당시(1988년도)에 납북 문제를 다룬다는 것도 역시 거대한 터부에 도전하는 일이었다. 일본 헌법에 담긴 ‘우리 일본 정부의 움직임만 막고 있으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식 기존 일본 민족에 대한 성악설(性惡說)의 관점에서 본다면, 외국 정부가 우리 일본 국민을 납치하는 일은 애초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납치는 근거 없는 소리라며 무시하라는 식의 강한 압력이 가해질 일이었다.
그런 터부에 지지않고 아리모토 케이코 씨 부모님의 호소를 진지하게 들어주었던 것은 그때 아베 신조가 비서로 일하고 있던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郎) 사무소 뿐이었던 것이다. 당시 산케이신문 이외의 매쓰고미(マスコミ, 쓰레기 언론)들은 이런 중대한 사건에 대해서도 사실임이 의심스럽다며 거의 무시만 하고 있었다.
터부에 목숨을 걸고 도전하다
나는 아리모토 케이코 씨에 대한 납북 문제가 떠올랐던 헤이세이 3년(1991년), 한 월간지에 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일본인이 납치되고 있다는 논문을 썼었다. 그 당시 정부 관계자를 포함한 전문가들로부터 “신변에 위험은 없었습니까”라고 하는 우려섞인 질의를 받았다. 익명으로 “죽여버린다”는 협박장도 받았었다. 일본인 학자가 일본의 잡지에 일본인이 북조선에 의해 납치되고 있다고 쓰는 것만으로도 신변에 위험이 미칠 것을 걱정해야 했던 것이다. 이러한 큰 터부에 아베는 목숨을 걸고 도전을 계속했다. 아베의 납북 문제에서의 투쟁에 관해서는, 그가 순직한 날 밤에
‘가족회(家族会)’와 ‘구출회(救う会)’에서 성명을 내고 업적을 열거하기도 했으므로 참고해주길 바란다.
아베의 투쟁은 언론과 선거에 대한 것도 있었다. 헤이세이 14년(2002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의 방북을 통해서 일본 국민 중에 많은 이들이 납북이 사실이었음을 알게 됐고 그래서 일찍부터 피해자 구출에 힘써왔던 아베의 국민적 인기가 급상승했다. 그때 그는 당내(黨內)에 동지를 늘리기 위해 동료의원, 입후보 예정자 모임에도 몸을 사리지 않고 나갔다. 그는 난치병을 달고 있으면서도 어떻든 선거에서 이기는 것이 ‘전후 레짐과 싸우는 길’이라고 골똘히 생각해왔다. 그런 아베가 선거 응원연설 도중에 피습당해 서거했다. 바로, 전후 레짐에 대한 투쟁 중에서의 ‘순직’이었다. (니시오카 쓰토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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