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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3월 3일 일본 교도통신은 전두환 전 대통령이 영국과 서독의 유력의원들에 의해서 올해의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고 일본 교토통신이 오늘 보도했다.


교토통신은 유럽 의회 관계자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의 노벨 평화상 후보 추천 이유로 재임기간 중 안정보장상의 중대한 위기를 평화적으로 해결했으며 한국 정치사상 처음으로 평화적 정권 교체를 실현하고 대통령직을 떠난 점도 추천 이유에 포함됐다고 밝혔다.’


Ⅰ. 전두환과의 재회(再會)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는 민주주의를 ‘파르헤지아 실천의 조건’이라고 말한 바 있다. 영어로 ‘Free Speech’로 번역되는 ‘파르헤지아’는, ‘두려움 없이 진실 말하기’를 의미한다. 즉, 자신이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을 처벌이나 후환에 대한 두려움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행위와 관련된다.


우리는 지금 진실을 말하기가 두려운 사회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지금 그대는 전두환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진실을 말하는 것이 거짓을 말하는 것보다 더 두려운 사회라면, 그 사회는 미래가 없다. 지금 우리는 그런 사회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정의는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지키고자 하는 것이 진실과 올바름이라면 정의는 칭송과 위대함의 화려한 옷을 입는다. 그러나 정의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거짓과 불의(不義)라면, 정의는 역사를 짓밟는 가혹한 폭력이 된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정의를 입에 올리는 자들은 두 개일 수 없는 진실을 말한다.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과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의 진실은 두 개로 나뉘고 있다.


따라서 진실을 지키고자 하는 용기, 즉 정의도 두 개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모든 사실에 대한 평가나 판단도 두 개로 나뉜다.


그 중의 하나가 전직 대통령에 관한 평가다. 예를 들면 전두환을 보자. 누군가는 전두환을 ‘살인마’라 평가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전두환을 단군 이래 최대의 경제호황을 이끈 지도자, 혹은 이 시대 민주주의를 이끈 선구자였다는 평가를 내린다. 양립할 수 없는 두 가지 평가라 할 것이다.


현 대한민국이 극심한 가치혼란에 빠진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본다. 누군가는 끊임없이 전두환을 저주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전두환 시대의 영광을 기억하고 있다는 것.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전두환에 관한 한 무엇이 진실인가에 답을 내려주어야 한다. 이러한 혼란을 정리해야 만이, 우리는 우리의 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진실을 가려내는 밝은 눈이 필요하고, 그리고 가려낸 진실을 지키는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 용기를 우리는 정의라 말할 것이다. 거짓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 것이 더 두려운 사회에서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


필자(筆者)가 전두환을 다시 만난 것은 2017년 8월 21일의 일이었다.


그날 나는 우연히 페이스북에서 문학인의 신문을 접하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교류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거기엔 미당 서정주 시인에 대한 친일논쟁이 한창이었다. 가슴 아픈 일이었다. 미당이 이 땅을 떠난 지 10여년. 살아 생전(生前)에 친일논쟁에 휩싸여 마음 한번 편히 살지 못한 분이셨다.


미당을 공격하는 이들은 스스로를 ‘문예노동자’라 칭하고 있었다. 다분히 정치이념적인 명칭이었다. ‘문예노동자’라는 이름에서 필자(筆者)는 고소를 머금고 말았다. 그들이 무엇을 꿈꾸는 사람들인지 그 정체를 이해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문학인을 문예노동자라 말하는 그들에게 필자(筆者)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 싫든 좋든 미당은 문학으로 남는다ㆍ미당에 문단에 등단할 당시 진정 손가락질을 받을 자들은 카프(KAFF)를 추종한 문예노동자들이었다. 문학을 사상의 도구로 전락시킨 문학의 반역자들이다. 그들의 사상은 공신주의였고, 그들의 활동은 공산혁명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미당이 친일 글을 썼다 하여도, 카프를 추종한 문예노동자들보다는 낫다.‘


임화를 주축으로 한 공산혁명을 민족의 생로(生路)로 잘못 인식한 문예노동자들. 결국 문학은 정치이념의 도구일 수 없다는 자성(自省)에서 우리 문학은 순수문학으로 돌아온 바 있다. 비록 동반자 작가들이 뒤를 이어갔으나, 그러나 우리 문학은 시문학파에 의해 본 궤도로 돌아왔고, 그리고 미당과 청마 유치환에 의해 화려한 생명파 시대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2017년에 이르러, 가증스럽게도 카프 이후 90년 만에 다시 이 땅에 문예노동자들이 등장한 것이었다.

다음은 페북에서 그들에게 전한 필자(筆者)의 언어다.


정재학 : 미당의 글이 그것뿐이라면 나도 미당을 친일파라 하겠소. 그러나 미당은 해방 후 우리문학의 상승을 선도한 분이었소. 나라를 빼앗기고 일제 밑에 살게 만든 자들이 받아야할 비난을, 왜 미당이 모두 받아야 하는 겁니까. 8월 21일 오후 8:46


정재학 : 그 누구일지라도 일제치하에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해야 했소. 신체의 자유부터 출판 집회의 자유까지 빼앗긴 민족이 무엇을 했겠소. 더 이상 미당의 친일문제를 거론하지 마시오. 당신들의 할아버지도 친일을 했기에 살아남아서 당신들 같은 후손을 남겼을 것이오.


그러나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미당이 쓴 전두환에 관한 글 때문이었다. 군부독재에 대한 찬양의 글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필자(筆者)는 그들의 비좁은 시각을 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재학 : 군부독재자? 전두환 시대에 이르러 대한민국의 경제는 완성이 된다. 기업들이 대학을 찾아다니며 사람을 구할 때였다. 호황기라는 말이 실감날 때였고, 대학생들이 교직을 마다하고 기업으로 몰려갈 때였다ㆍ그대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고 세상을 평가하지 마라. (8월 18일 오후 8:12)


이어 다음과 같은 말도 덧붙여 주었다.


정재학 : 전두환은 단임 약속을 지킨 민주주의자였다. 직선제 개헌으로 자신의 책임을 다한 대통령이었다. 대통령 안 나온다고 약속해놓고, 국민을 속이고 나온 자들과는 달랐다. (8월 18일 오후 8:15)


그러자 그들은 다음과 같이 대응하였다.


김oo : 광화문 네거리에서 돌로 쳐죽여도 시원치 않을 살인마 전두환이 민주주의자라는 말에 할 말을 잃었네, 너같은 쓰레기 틀딱에게 예의 갖춰 댓글 단 내가 병신이네, 곱게 늙기는 애시당초 힘들겠고 추하게 늙지는 마라,,...(8월 19일 오후 12:26)


곽oo : ㅋㅋㅋㅋ 나름대로 열려있는 사람처럼 글 쓰고 있었으나 어김없이 좌빨식 색깔론 편나누기 이념나누기 등장.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마음은 알겠는데, 개인의 자유를 조금이라도 침해하면 좌빨식 색깔나누기 하는 개소리 좀 하지 맙시다. (8월 19일 오후 3:53)


그들은 거침없이 ‘틀딱, 개소리’ 같은 저속한 언어를 쓰고 있었다. 짐작컨대 그들은 전두환 시대를 살아보지 않은 젊은이들이었다. 어떤 선입관과 편견에 치우친 잘못 길러진 젊은이들. 소위 문학을 한다는 어린 세대의 저질스런 언어에 더 이상 반응할 필요는 없겠으나, 그러나 필자(筆者)는 다음과 같이 말해주지 않을 수 없었다.


정재학 : 평면만으로 존재하는 존재는 없다. 존재하는 것들을 양면을 지닌다. 남에게 주어들은 선입관으로 전두환을 평가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전두환도 양면성이 있다. 전두환 시대를 살아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누군가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로 남을 평가하지 말라. 전두환은 민주주의자이며, 이 나라 경제를 반석 위에 올린 위인이며, 단임 약속을 지킨 사내대장부다. (8월 19일 오후 5:42)


정재학 : 사물과 사실의 양면성과 입체성에대한 시각부터 갖추는 것이 올바른 판단을 위한 기본의 자세다. 그러지 못하니, 어리석은 것들이 좌편향된 이론에 치우쳐 세상을 바르고 올곧게 못 보는 것이다.

진실을 알면 속지 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이 글을 쓴다. 전두환, 이 이름은 가장 혐오를 받고 있는, 그리하여 가장 안타까운 대한민국 현대사를 이끈 상징적인 인물일 것이다. 전두환도 대한민국의 국운 상승을 위해, 그리고 그 영광을 위해 노력한 사람이었기에, 그에 대한 진실만큼은 밝혀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문예노동자들과 정치권을 에워싼 진보좌파는 전두환을 끝까지 ‘살인마’라는 이름의 구렁텅이에 몰아넣고 짓밟고 있었다.


좌파들로서는 그렇게 짓밟고 능멸해야 만이 진보를 상징하는 문재인 정권 의 정당성이 확보되는 일이라 믿었을 것이다. 더욱더 전두환과 박근혜를 욕하고 비난하는 것은, 이후로도 진보의 장기집권을 위한, 폭력적인 그들의 행위와 존재 가치에 대한 정당성이 부여될 것이기에, 무려 1981년 12대 대통령이 취임 후 무려 36년이 지나간 지금까지 전두환을 놓아주지 않는지 모른다.


이에 필자(筆者)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미래를 위해, 전두환 전(前) 대통령에 대한 진실을 풀어내지 않고는 그 무엇도 온전할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비교를 하자면, 박정희 대통령 시절부터 끝없이 반대를 일삼던 두 인물을 생각해야 한다. 민주화 투사로 알려진 김영삼과 김대중이다. 이 두 인물들도 모두 대통령이 되었다.


이 두 인물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이끌었느냐는 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나라 경제를 망쳐 IMF 시대를 열었고, 또 한 사람은 북핵을 완성시켜 주어, 오늘의 비극을 만들어낸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 둘은 아직까지 민주화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아직도 광주와 호남은 김대중의 생일날을 성인의 탄신일처럼 기리고 있다. 지나친 행위일 것이며, 조소(嘲笑)를 받을 일이다.


만약 전두환 이후 직선제 대통령제에서 노태우 대신 이 두 인물 중 한 명이 대통령이 되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철강왕 박태준은 김영삼의 인물됨을 이렇게 말한다.


“김영삼은 한 시간만 대화를 나눠도 인물의 밑천이 보인다.”


한 마디로 대통령 욕심만 잔뜩 들어있지, 국가경영에 대한 비전과 지혜와 경륜은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김대중은 더 일찍 북한 경제의 회생과 북한 핵개발을 위해, 전두환이 이룩한 경제성과물을 북으로 보냈을지 모른다.


역사는 오늘에서 평가와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오늘의 상황, 즉 현실의 상황을 파악하여 교훈을 추출한다. 그리고 그 교훈을 통해 미래를 설계하고 나아간다.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시대는 우리가 바라는 역사가 아니다. IMF로 각인된 민주화 투사 김영삼, 북한 핵개발로 이어지는 김대중 시대는 깊이 묻어야 할 오류의 역사일 수도 있다. 우리의 미래로 연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민주화는 목표가 아니다. 민주화는 국가와 민족의 영광을 밑받침하는 도구적 이념일 뿐이다. 우리의 궁극적 목표는 어떤 이념을 막론하고 부국강병을 실현하여 역사의 수치를 씻어내는 한편, 고토(古土)를 수복하여 강한 민족 강한 나라가 되어 민족의 영광을 재현하는 일이다. 전두환은 그 길을 걸었던 40년 전의 위인(偉人)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용기를 내야 한다. 침묵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 스티븐슨은 이렇게 말한다.


‘가장 잔혹한 거짓말은 침묵 중에 말하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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