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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⑨] "위안부 숫자 턱없이 과장… 3,500명 가량이 합리적 수치"

이영훈 교장, '조선인 위안부 20만명설'‧'조선인 위안부 강제연행설' 본격 반박

이전기사 : [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⑧] 역외로 진출한 조선의 매춘업… '위안소도 직접 경영했다'

 


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9회차 동영상 강의 일본군 위안부(4월 19일)를 통해 위안부 ‘20만명설강제연행설을 반박했다.

 


한국인들, 여자근로정신대와 위안부 혼동

 

이영훈 교장은 이날 강의에서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일본과의 외교적 분쟁으로 떠오른 것은 1991년부터였다지금까지 28년간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 교장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에는) 일본의 원인도 있고 한국의 요인도 있다고 지적하며 한국의 요인을 지적하자면 위안부여자근로정신대를 혼동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이영훈 교장은 여자근로정신대는 전시기에 여성이 군수공장으로 동원돼 일정기간 노동한 것을 말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위안부 문제가 터지니 위안부와 정신대를 혼동했다일제가 여성(근로정신대)을 위안부로 삼았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근로정신대가) 위안부로 충당된 단 한건의 사례도 알려진 바가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 1990년 생존 위안부를 돕는다는 취지로 만들어진 단체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는 단체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정신대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 단체는 얼마전 일본군성노예제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재단'(정의기억재단)과 통합하면서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로 단체명을 변경했다.


 

조선인 출신 위안부 ‘20만명설은 과장 ‘3,500명 가량이 합리적

 

턱없이 과장왜곡된 숫자를 제시하는 ‘조선인 위안부 20만명설도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어렵게하는 요인이라고 이영훈 교장은 피력했다. 그는 한 때는 조선인 위안부가 20만 명이나 됐다는 사실이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지금도 3만명, 수만명이라고 하기도 한다그 수는 턱없이 과장됐다고 꼬집었다.

 

이영훈 교장은 조선인 출신 위안부가 얼마나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일본이) 1937년 위안소를 공식 설치할 당시, 병사 150명 당 1명의 위안부를 두는 방침이었다이에 일본군 280만명을 상대한 (일본, 중국 조선인 등) 위안부의 총 수는 1만 8,000명 정도였다고 일갈했다.

 

아울러 “1942년에 일본군이 장병들에게 지급한 콘돔의 총수는 연간 3210만개라며 이로부터 하루 콘돔의 사용량을 구하고, 또 한명의 위안부가 하루에 상대하는 장병의 수를 5명 정도로 간주한다면, 역시 1만 7,000명 정도가 추산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위안부의 민족별 구성은 일본인 40%, 현지인 30%, 조선인이 20%, 기타 10%로 추산되는 것이 일반적이고, 이로부터 추산되는 조선인 위안부는 대체로 ‘3,500정도다라며 이것이 합리적인 수치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인들, 요시다 세이지의 날조된 이야기를 사실로 믿고 있어

 

이영훈 교장은 조선인 위안부 강제연행설도 조목조목 반박했다.

 

이영훈 교장은 일본인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라는 사람은 일본군 헌병이 길거리에서 여학생을 끌고 갔다’, ‘어느 마을의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는 여인들을 트럭에 싣고 갔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사람이라며 요시다 세이지는 제주도에서 무려 200명의 여인을 납치했다고 주장했고, 일본 아사히 신문이 그 사람과 인터뷰를 해서 그 사건을 널리 보도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어 세월이 20년이 지난 다음에 요시다 세이지는 돈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를 날조를 했음이 밝혀졌고, 아사히 신문도 오보라는 것을 인정했다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은 그러한 이야기를 사실로 믿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노예납치설이나 강제연행설의 근거로 쓰이는 생존 위안부들의 증언에 대해선 개인의 증언을 역사적 사료로 채택할 때에는 매우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교장은 “20세기 들어 미국의 역사학자들은 남북전쟁 이전에 노예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노예시절에 관한 기억을 채집했다그때 역사학자들은 노예들과 인터뷰를 할때마다 개인의 기억이 오락가락하는 것,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을 알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오래전의 일이라 (인터뷰이(interviewee)의) 기억이 희미할 수도 있고, (사건의) , 뒤가 착란을 일으킬 수 있고, 새로운 기억이 만들어질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상대방(인터뷰어(interviewer)가)이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아차리고 그에 맞게끔 자기의 기억을 재생산하기도 한다고 부연했다.

 

그러면서 위안부들의 증언도 그러한 경우가 많다인터뷰를 듣는 사람이 무언가 다른 내용을 듣고 싶어하고, 그런 이야기를 하면 환영을 받게 되고, 나아가 정부의 보조금까지 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또 인터뷰를 잘못하면 보조금이 취소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증언을 바꾸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위안소 업무 규정 위안부에 대해 난폭한 행동을 금한다

 

이영훈 교장은 일본 다카모리(高森部隊) 부대 위안소 업무 규정(1940)’을 통해 일본 군의 위안소 운영 실태를 설명하며, ‘위안부 성노예설의 논리적 허점도 짚었다.

 

그가 소개한 해당 부대의 위안소 규정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시됐다.

 

-위안소 이용 시 연대본부가 발생한 허가증을 영업자에게 제출해야 한다.

-위안소 내에서는 음식을 들 수 없다.

-위안부 및 영업자에 대해 난폭한 행동을 금한다.

-이용시간을 엄수하고 타인에 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

-영업자 기타 위안부 여급 등에 대한 일체의 대차 관계를 엄금한다.

-이용시간과 요금

병은 10시부터 17시까지, 30분에 1, 1시간에 2.

하사관은 17시부터 22시까지, 30분에 120, 1시간에 240

준사관 이상은 22시부터, 1시간 3, 24시 이후는 10.

-사쿠(콘돔)는 영업자가 부담한다.

-황군 의외의 자는 접객을 금한다.

-영업자는 매월 초 5일까지 위안부별 영업 상황을 보고한다.


이 교장은 위안소는 군의 철저한 통제하에서 영업이 이루어진 공창업이었다위안부들은 정기적으로 (성병) 검진을 받아야했으며, 영업주는 매월 1회 위안부별로 영업 현황을 보고해야했다고 부연했다. 이어 위안소 운영규칙은 몇가지 사례가 더 있는데 대동소이하다저는 이 운영규칙을 보고 아 것은 조선총독부가 발표한 대좌부취체규칙이랑 다를바 없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이영훈 교장은 중국 흠조(欽州, 진처우)에 위치해 있던 위안소 자료도 소개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해당 구역에는 10곳의 위안소 업소가 있었다. 1개의 위안소에는 5~6명의 위안부가 속해있었다.

 

주목할만한 부분은 위안부들의 전출전입 현황이다. 특정시기 한달 만에 전출이 16, 전입이 5명에 달하는 때도 있었다. 이에 대해 이 교장은 계약기간이 만료되거나 합당한 사유가 발생하면 여인들은 위안소 밖으로 전출되서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또는 다른 위안소로 가기도 했던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는 위안부 일인당 하루 평균 수익은 18원 정도다. 18원이면 당시 소학교를 나온 공장 여공 두달 치의 월급이라며 식비, 생활비, 포주에 대한 전차금은 200원 수준이었다. 이 정도의 수익이면 전차금은 여인들을 얽어맬 굴레는 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이영훈 교장은 대중적 매춘산업이 군사적으로 동원될 때 (위안부의) 노동의 강도는 격렬했다. 만주에서 발달한 조선인 매춘업에 어느여인은 하루밤에 30명도 맞았다고 했는데, 그만큼 고소득이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기존 공창제를 군사적으로 재편성한 것

 

이 교장은 그간 자신이 해온 일본군 위안부 강의를 다시 한번 요약 정리했다.


위안부 제도는 일본군 수뇌부가 1937년 어느날 갑자기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전부터 공창제의 형태로 있어 왔다. 민간인 업자들은 (조선의) 여인들을 끌고와 군 주변에 각종 요리점이나 카페의 형태로 위락시설을 만들었다. 1937년 일본군은 그것을 군의 위안시설로 공식화하고 군의 위안시설로 끌어들였다. 이때부터 군이 감독하고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위안부 제도다.


근대 국가가 공창제를 시행한 것은 전근대적인 신분적인 인신매매를 금지하고 국민건강을 위해서 성병을 통제할 목적이었는데, 보다 직접적인 동기는 군대조직의 사기를 앙양할 위안 시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1910년 조선에서 시행된 공창제도도 마찬가지였다. 설립에 따라 곳곳에 들어선 대좌부 유곽지역의 상당 부분은 일본군 주둔지와 근접한 지역에서 일종의 군사위안시설로 건립됐다.


(공창제) 초기에는 조선에 건너온 일본 군인과 소수 일본인 남성을 위한 특권적 매춘 산업이었다. 여인들도 주로 일본에서 건너온 일본인 창기였다. 그러다 식민지적 개발과 더불어 조선인이 참여하는 대중적 매춘산업이 발달했다. 조선인 창기, 작부, 예기도 증가하고 그들을 찾는 조선인 유객의 수도 증대했다.


대좌부 유곽이나 요리옥, 음식점의 창기, 작부, 예기의 공급 경로는 인신매매였다. 대중적 매춘업은 나아가 국경을 넘어 만주, 대만, 중국관내, 일본으로 확산됐는데, 그와 더불어 인신매매도 더욱 왕성해져, 가난한 집안의 딸들을 그 지역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이 시장에서는 일찍부터 각종 업소에 여인을 공급하는 주선업이 발달해 있었다. 여인들은 일본군에 잡혀간 것이 아니라 주선업자에 의해 끌려간 것이다. 가난한 집안의 비정한 아버지들은 주선업자들로부터 전대금을 받고 딸을 팔아넘긴 것이다. 딸은 울면서 또는 매를 맞으면서 그들에게 끌려갔던 것이다. 그것이 숨길 것 없는 그 시대의 실태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1937년 일본군이 위안부 제도를 창설한 것은 허허벌판에 건물을 짓고 여인을 납치해온 것이 아니다. 일본군 위안소는 군의 뒤를 따라 들어온 민간의 대좌부나 요리옥을 군 전용 시설로 지정한 것에 다름없다. 군이 직접 설치하고 운영한 위안소도 있긴 했지만 많지는 않았고, 대부분은 부대 주변 민간업소를 위안소로 지정하고 그 운영을 위탁, 감독하는 형태였다.


일본군 위안부 제도의 역사적 의의를 요약하자면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기존의 공창제를 군사적으로 재편성한 것이었다. 그러한 변화는 공창제가 원래 그러한 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다시말해 군사 위안시설로서 공창제였기 때문에 그러한 변화는 단절적이라기보다 연속적인 변화였다. 많은 경우 만주나 조선이나 대만이나 일본 등에서는 공창업이 일찍 발달한 곳에서는 단순 명칭 변경에 지나지 않는 경우도 많았다. 다시 강조하자면, 1930년대에 걸쳐 대중적 매춘산업이 발전했고, 그 매춘 산업이 전시기에 이르러 군사적으로 동원되고 재편성된 것이 일본군 위안부제도 였던 것이다.


중국에서 위안소라는 또 하나의 커다란 대중적 매춘 시장이 열리게 되자 민간의 인신매매는 더욱 활발해졌다. 1939~1941년 매일신문에 실린 인신매매 기사는 120여건에 달한다. 가장 왕성하게 인신매매를 벌인사람은 하유명이라는 사람의 부부였는데, 무려 150명의 소녀를 만주 등지로 팔아넘겼다고 한다. 40명을 팔아넘긴 업자도 있었다.


그들은 딸을 좋은데에 취직시킨다는 감언이설로 부모의 승낙서를 받거나, 또는 빈곤‧구타 또는 친구의 꾀임 여러 가지 이유로 가출한 소녀들을 자신의 호적으로 입양하거나, 여러가지 수법을 통해서 서류를 조작했다. 경찰의 취업 승인을 받는데는 합당한 서류가 필요했던 것이다. 창기 주선업, 곧 인신매매업은 여인을 끌고 가는 완력을 행사하는 자일 뿐만 아니라 서류를 조작하는데에 상당한 노하우를 갖는 직종이기도 했다.  


 



다음기사 : [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⑩] “우리 모두는 위안부와 위안소 관리인의 자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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