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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⑬] 한국사회, 90년대 이전엔 위안부를 ‘피해자’로 보지 않았다

위안부를 기억하는 세대가 사라진 뒤, 요시다 세이지의 거짓증언과 정대협의 기획으로 시작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



주익종 이승만학당 교사(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실장)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13회차 동영상강의 ‘해방40여 년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없었다’(2019년 5월 19일)를 통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제기되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들여다봤다.

해방 이후 한국정부와 민간사회, 둘 다 위안부를 피해자로 보지 않았다



영상에서 주 교사는 직접 찍은 수요집회 사진을 보여주면서 참가자 대부분이 10대, 심지어는 초등학생을 단체로 데려온 경우도 있었음을 지적했다. 수요집회 사진에서도 볼 수 있듯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 가장 어려운 외교 현안이다. 주 교사는 한국의 반일주의가 이제는 일본의 혐한을 불러오는 위중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주 교사에 따르면 1990년대 이전엔 현 상황과 전혀 달랐다. 가령, 1952년에 시작해서 1965년에 매듭지어진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회담에서 이른바 ‘위안부 피해’ 문제는 단 한번도 다뤄진 바가 없었다. 만약 한국 정부가 위안부를 식민지배의 피해 중 하나로 인식하고 있었다면 회담 과정에서 최소한 언급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국교정상화가 이뤄지기전 13년 동안 한국 정부는 위안부 문제를 전혀 거론하지 않았다.



주익종 교사에 따르면 1970년대까지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위안부 문제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1982년에서 1996년까지 쓰인 국정 교과서에서야 처음으로 ‘여자들까지 침략전쟁의 희생물로 삼기도 했다’고 서술하면서 그나마 위안부의 존재를 암시했을 뿐이다.

주 교사는 국내 신문들도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언급이 매우 적었다고 설명했다. 1945년~1960년까지 단 1건, 그 후 70년대까지 연 1회 정도만 기사가 나왔다. 위안부에 대한 언급은 적지 않았으나 1970년대까지 위안부란 오직 ‘미군 위안부’를 뜻했다. 

당시엔 일본군 위안부 출신자들이 대부분 살아있었고 당연히 주변에 이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들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해 일체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것을 본다면 그 당시만 해도 이른바 ‘위안부 피해’ 문제는 없었음을 알 수 있다고 주 교사는 지적한다.



1980년대까지 문화예술계도 위안부를 피해자로 조명하지 않아

주 교사는 1980년대까지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 작품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일부 다루긴 했으나 그 방식이 특이했다고 평가했다. 

가령 1965년 영화 ‘사르빈강에 노을이 진다’란 영화의 경우, 미군 위안부, 혹은 양공주의 이미지를 빌려온 일본군 위안부의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1970년대 개봉한 영화인 ‘여자정신대’란 영화도 ‘별들의 고향’과 같은 호스티스 영화이며, 위안부는 피해자로 조명되지 않았다.

1980년대 말에 가서야 위안부가 피해자로 조명되기 시작했다. 젊은 날 위안부 생활을 했던 할머니들이 다큐멘터리 등을 통해 한국에 소개된 것이다. 1979년 오키나와에 살고 있던 배봉기 씨를 인터뷰한 ‘오키나와의 할머니’, 1984년의 태국 노수복씨 이야기. 그리고,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는 소설이 나왔다.

다큐멘터리 ‘오키나와의 할머니’에 따르면 배봉기 씨는 1914년에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배씨는 29살인 1943년 가을에 쉽게 돈을 벌 수 있단 말에 속아 오키나와로 왔다고 한다. 배봉기씨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위안부 생활이 부끄러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고 한다.  

태국의 노수복 씨는 1984년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을 통해 한국에 알려졌다. 노씨 또한 1942년부터 2년간 싱가포르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고 1944년부터 태국에 남았다. 배봉기씨와 마찬가지로 노씨 또한 고국으로 돌아갈 면목이 없어서 태국에 눌러앉게 된 경우다.



1982년 윤정모 씨는 소설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를 발간한다. 이 소설은 임종국 씨의 ‘실록정신대’란 책을 참고해 쓴 책이다. 이 책은 굉장한 인기를 끌어 1988년, 1997년 재판된다. 소설 주인공의 어머니는 진주 출신으로 자신의 오빠가 징용될 위기에 처하자 정신대를 자원했던 인물로 그려진다. 필리핀에서 만난 조선인 병사와 전쟁 후 부산에서 정착했으나, 과거 위안부 생활의 상처를 건드려 가정은 파탄난다. 

주익종 교사는 이 세 이야기는 위안부 생활이 부끄러워서, 면목이 없어서 고국에 못 돌아온 것이란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실존 인물인 배봉기씨와 노수복씨가 당시에 관심이 끌었던 것은 위안부 생활 자체보다는 오히려 위안부 경력 때문에 고국에 돌아오지 못한 기구한 인생살이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주 교사에 따르면 대중문화 작품에서도 1980년대 초까지 위안부는 불행하고 불쌍하긴 하지만 스스로 또는 남들에게 부끄럽고, 면목 없는 사람들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이어 주 교사는 우리가 미군 위안부나 양공주를 강제동원 된 피해자로 보지 않는다면서 결국 위안부도 같은 문제라고 설명했다. 그는 과거에 가장 흔한 위안부 모집 과정인 가난한 집에서 부모가 전차금을 받고 딸을 모집업자에게 넘겨준 과정도 언급하면서 위안부를 일본 식민지배의 피해자로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1990년대에 새롭게 가공된 기억을 통해 폭발한 위안부 문제

해방이 된지 4,50년 후에 위안부 문제를 직간접적으로 알았던 사람들이 대부분 사망한 다음, ‘일본이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새로운 기억들이 갑자기 만들어졌다. 주 교사에 따르면 요시다 세이지의 ‘위안부 사냥’이란 증언과 ‘나의 전쟁범죄: 조선인 강제연행(私の戦争犯罪―朝鮮人強制連行)’이란 증언록이 이 현상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요시다는 증언록 3장에서 1943년 5월 하순, 제주도 성산포 등지에서 민가나 공장에 여자들이 모여 작업하고 있는 걸 일본군이 둘러싸고서는 마구잡이로 이백여 명을 잡아갔다고 써놓았다. 남편이나 가족이 막으면 개머리판으로 때리고 칼로 위협해서 물리쳤다고 했다. 주익종 교사는 “요시다 본인이 강제연행을 했다고 고백하니 사람들이 진짜라고 믿었다”고 덧붙였다. 

요시다의 충격적인 증언이 나왔지만 정작 제주도 현지에선 이런 사건이 있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2000년대에 들어 요시다의 아들은 아버지의 주장이 모두 거짓이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요시다의 증언으로 인해 ‘일본 정부가 여자들을 강제로 동물 사냥하듯이, 포로 생포하듯이 잡아서 위안부로 끌고 갔다’는 이미지는 당시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박혔다고 주 교사는 설명한다. 주 교사에 따르면 2016년도에 개봉한 영화 ‘귀향’에도 이런 이미지가 그대로 사용됐다. 

1990년 11월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정대협(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현 정의기억연대)이 설립된다. 정대협은 1991년 8월 김학순 씨의 위안부 증언을 기획한다. 14살 때 평양 기생 권번에 팔려가고, 일본군으로 넘겨져서 5개월간 매일 4, 5명의 일본 군인을 상대해야 했다는 증언이다.

주 교사는 이를 두고 “가해자(요시다)의 증언과 피해 당사자(김학순)의 증언이 모두 나온 셈”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여론은 발칵 뒤집혔고 언론은 연일 관련 내용을 보도하고 정대협은 위안부 증언을 이어가며 각종 성명을 발표한다. 상황이 완전히 달라져서 위안부 피해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면서 일본이 사죄하고 위안부 피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된다.

주 교사는 어떤 면에서는 위안부의 실상을 더 잘 알 수 있었던 1970년대까진 전혀 관련 문제 제기가 이뤄지지 않았고, 오히려 40년 넘게 지난 후 가공된 새로운 기억들을 통해 위안부 문제가 불거졌다고 요약했다. 그는 1990년대 이후 위안부 문제가 어떻게 전개됐는지 다음 강의에서 설명 하겠다며 해당 강의를 마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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