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미국 파사데나대학(Pasadena City College)의 철학과 교수인 에드워드 페저(Edward C. Feser)가 2004년 2월 16일, 테크센트럴스테이션(Tech Central Station)이라는 웹기반 매체에 기고한 ‘The Opium of the Professors’라는 에세이를, 원 저자의 허락을 얻어 미디어워치 편집부 현대사상팀이 번역해 공개하는 것이다.
이 글은 앞서 소개한 에드워드 페저 교수의 다른 에세이인
‘왜 대학은 좌파 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가’에서 제기된 문제의식의 연속선상에 있는 글이다. 한국에서도 386 좌파 지식인을 사변적 도덕의식으로 무장된 중세 조선의 양반 사림파로 비유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미국에서도 좌파 지식인들을 중세시대 사제로 비유해 지적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좌파 지식인들의 독선 문제는 비단 보수우파 뿐만이 아니라 ‘뉴욕타임스(NewYork Times)’같은 진보좌파 매체에서도 여러번 성토되고 있는 문제다. 에드워드 페저의 글과 함께 다음 글들도 참고하기 바란다.
아래 글의 사진과 캡션은 모두 미디어워치 편집부 현대사상팀이 첨부한 것이다.
리버럴 교육(liberal education)의 목적에 대해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 바로 “학생들을 그의 아버지와 최대한 다르게 만드는 것” 이라고.
물론 당시의 우드로 윌슨은 단지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이었을 뿐이다. 우드로 월슨이 저런 말을 했을 때는 그가 미국의 대표적인 원칙주의자로 거듭나기도 전이었고, 이후 1차 세계대전 참전 결정으로 유럽의 전쟁을 종식시키고 세계의 민주주의를 보호하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했다. 사회 향상 제도와 투명한 국제주의, 통합적 교육 철학으로 더 잘 알려진 윌슨은 틀림없는 좌파적 교육자의 전형이었다.
요즘 대학 소개 카탈로그에서 얼마나 단조로운 교육목표가 제시되고 있던 간에, 현대 대학의 실질적 교육목표는 다음과 같다.
바로 학생들이 갖고 있을 만한 전통적 신념들에 대한 일말의 충성심마저도 완전히 파괴하겠다는 것이다. 도덕, 종교, 정치, 문화적 영역에 있어서의 전통적 신념 말이다. 그들의 국가에, 또 그들 조상에 대한 신념에,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이 역사적으로 기본적 '품위'라 여겼던 것에 돌을 던지게 하는 것이다. 즉, 오늘날 대학의 목표는 바로 좌파 사상을 전파하는 것이다.
앞선 글(
‘왜 대학은 좌파 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가’)에서 필자는 이 현상을 설명하고자 제기된 다양한 이론들을 검토했지만, 이들 모두가 그 현상을 설명하는데 불충분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래서 필자는 이번 글에서 대학의 좌파 편향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더 알차고 깊은 이론을 전개해보고자 한다.
우선 우리는 근래에 대학의 실제 기능들이 '교육의 전통적 목적'과 정반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 있다. 교육의 전통적 목적은,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문화를 높은 지적 수준에서 젊은이들에게 가르침으로써 그들을 적절한 사회 일원으로 육성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교육에서는 교수란 학생들보다 우월하며, 또 교수는 교수 본인보다도 더 우월한 '전통'이란 것의 수호자였다.
물론 교수의 의무가 맹목적으로 또는 무비판적으로 전통을 전달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교수의 진정한 의무가, 2,500년 이상 지속된 문명의 원대함에 대하여, 또한 문명의 제도가 구현하고 문명의 사상가들이 형성한, 종합적 '지혜'에 대하여 적절한 존중과 겸허함을 가지고서 그 전통을 학생들에게 전수해주는 것임은 분명했다.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문명이란 당연히 그리스, 로마 및 고대 이스라엘을 본거지로 하는 서양 문명이며, 그 특징적 요소에는 유대-기독교의 종교적 전통과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는 정치사상, 제한된 정부 및 법에 의한 지배, 자유시장 또는 자본주의 경제질서가 포함된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 문명의 지적 토대에 대한 이해를 돕도록 만들어진 교과과정이 최소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신약 및 구약성서,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 아퀴나스, 로크와 스미스, 버크와 토크빌, 오크숏과 하이에크 등을 강조할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듯이, 오늘날 대학에서는 이런 인물들이나 문헌들을 한 번도 접하지 않더라도 학사학위를 받기가 아주 쉽다. 설령 학생들이 이런 중요한 문헌들과 접촉할 기회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하워드 진(Howard Zinn)이나 노엄 촘스키(Noam Chomsky)의 헛된 장광설 같은 영적 독약의 꾸준한 유입으로 희석되는 경우가 많다(이들의 서적은 지적 무게가 없는, 좌익적 기준으로도 3류 밖에 되지 않는 저속한 정치 팜플랫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제도적 목적에서의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오늘날 대학에 갓 입학한 한 젊은 학생에 대한 상상을 한번 해보도록 하자. 단순한 종교적 신념을 가진 이 학생의 부모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미국의 상징인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기회를 찾기 위해 자국의 폭정을 피해 이 먼 곳까지 날아온 것이다.
이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바는 이렇다. 자녀가 자신들만큼이나 이 새로운 나라를 사랑하고, 이 나라가 그에게 제공하는 자유를 최대한 누리기를, 또 이런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축복을 내려주신 신께 계속 감사하기를, 이어 그 자유를 누릴 만한 자격이 있도록 그가 신앙을 실천하는 삶을 살기를. 이는 그가 국가 및 동료 시민들의 자산이 되게 하고, 그의 가족에게 명예를 선사할 수 있게 하는 바로 그런 삶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부모는 자신의 자녀가 교육받은 신사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학문과 고급문화와의 접촉에 의해 신앙심과 애국심이 다져진 신사 말이다. 그러나 작금의 대학에서 4년을 보내고, 교수들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진보적 인간'(New Progressive Man)의 틀에 맞춰 그들의 자녀를 반죽해버린 후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바로 체 게바라 (Che Guevara) 티셔츠를 입고, 마리화나를 피며, 입이 험악한 상습적 간음자일 것이다.
높은 도덕적 삶에 대한 그의 개념은 (환경주의에 근거한) 재활용, 그리고 녹색당(Green Party)에 대한 투표로 구성되고, 그가 생각하는 "영성"은 네바다 사막의 버닝맨 축제(Burning Man festival, 편집자주 : ‘인간 모형 태우기’를 주요한 행사로 두고서 사막 한가운데서 진행되는 전위예술, 자기표현과 관련한 미국의 공동체 축제)에서 다른 뉴에이지 추종자들과 어울리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종교(기독교)에 대해서는 그것이 억압적인 사기라는 것 이외에는 교육 받은 것이 없고, 성적 윤리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빼고는 성적 윤리에 대해서도 배운 것이 없으며, 자신의 국가 및 역사에 대해서는 “인종차별적이다”, “성차별적이다”, “동성애 혐오적이다”, “장애인들에 대해 둔감하다”라는 것 외에는 교육받지 못했다. 그는 단지 미국이 자신의 부모가 도망쳐 왔던 그 철조망 속 국가와 더 비슷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러므로 당대 대학의 좌파적 편향은 '전통'의 전복을 지향함의 필연적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선 글(
‘왜 대학은 좌파 세력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가’)에서 언급했듯이,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단순히 대학 교육과정의 체제전복적, 미묘한 좌파적 편향성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완강한 '독선(perversity)'이다.
이런 독선은 상식을 비웃고, 공산주의 및 다른 혁명들에 대한 실제 역사적 기록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우려하지 않고, 겉으로는 ‘다양성’과 ‘비판적 사고’를 중시하면서도, 당대의 사상가들이 내놓은 전통적 자세와 제도를 변호하는 정교한 주장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시하는 좌파의 자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독선의 배경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오래된 이상들 Older Ideals
필자가 위에서 설명한 과거 교육의 이상이 가장 완전하게 실현되었을 때가 사실은 중세시기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독자는 위 질문에 대한 답변이 어디서 시작될지 예상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중세시기에 대한 스토리는 이러하다: “기독교의 도래 이후 1,500년 이상 유럽 문명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이후 현대과학이 찾아오고 나서야 모든 것은 밝아졌다.” 물론 이 이야기는 미국공영방송(PBS) 시청자들이 그들 자녀에게 들려줄 만한 종류의 ‘동화 같은 이야기’다.
과학 혁명은 중세시기의 지적 동향으로부터 자연스럽고 점진적으로 파생된 결과의 측면이 컸고, 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중세인들은 더 계몽되어 있었으며, 오히려 현대인들이야말로 더 미신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저 ‘동화 같은 이야기’는 이미 현대 지식인의 정신에 최면적인 효과를 가했다.
현대 지식인에게 있어서, 태양이 태양계의 중심에 있으며 인간이 원숭이로부터 진화했을 수 있다는 주장은, 볼테르가 처음으로 신성 모독을 가하기 시작했던 시점 이전에 주장되거나 고안되었던 소위 전근대적인 것들의 대부분을 무효화시키거나, 적어도 이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만들었다.
하지만, 철학자 데이비드 스토브(David Stove)가 지적했듯이, (특히 진화론과 결부되어) 현대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과도한 회의주의(hyper-skepticism)는 대부분 대대적인 성급한 일반화로 인해 빚어진 결과다. 근대 이전의 상식이 틀렸다고 밝혀진 몇 가지 경우만을 토대로 해서 전통은 모조리 다 잘못되었다는 식의 과도하게 일반화된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철학자 마이클 레빈(Michael Levin)은 현대 사상에서 이런 논리적 실수가 두드러지는 현상에 대해서 이름을 지었다: 바로 “무지방 우유(skim milk)” 오류, 즉 가정의 오류(fallacy of assuming)다.
길버트(Gilbert)와 설리번(Sullivan)의 말을 빌리면, “보이는 그대로가 사실인 경우는 거의 없다, 무지방 우유가 크림으로 위장하는 것처럼 말이다.”(편집자주 : 윌리엄 길버트(William Gilbert)와 아서 설리반(Arthur Sullivan)은 19세기말의 오페라 작가이자 작곡가이다. 페저 교수가 직접인용한 부분은 그들의 오페라에 나오는 대목이다.)
즉, 그런 식이라면 (내일의 상식은 또 달라질 수도 있으므로) 오늘날 세상의 모든 상식도 일반적으로 다 잘못된 것으로 가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사람들의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먼 분야의 성격을 고려한다면 – 시공간의 거대 구조, 분자와 원자의 미세세계 등 – 그런 분야에 대해서 사람들이 오랫동안 여러 가지로 무엇을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그런 분야가 아닌 우리의 일상생활과 직접 관련된 분야에서는 – 인간의 본성 및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영역에서는 – 일반적으로 전근대 시기의 사람들이라도 아주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은 낮다.
왜냐하면 이러한 일상 영역과 관련해서도 심각한 오류가 생긴다면, 오래지 않아 바로 생물학적, 문화적 진화의 힘이 이런 오류를 제거해버리기 때문이다. 진화로써 오류가 제거되는 과정의 자세한 원리까지 여기서 다 논의할 필요는 없다 – 이는 버크(Burke)와 하이에크(Hayek)에 연관된 전통과 상식에 대한 보수적 정당화와 관련되는데, 이는 필자가 다른 글에서도 변호한 내용이기도 하다.
다만 이 자리에서는, 단지 현대 지식인들의 삶에 스며들어 있는 ‘상식 및 전통적 자세에 대한 회의주의’에 대해서도 회의적이어야 하는 강력한 이유가 있다고만 설명해도 충분하다. 현대의 지식인조차 이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비-서양문화의 전통적 방식들에 대해서만큼은 한결같이 사려 깊은 배려를 한다는 것만 봐도 입증이 된다.
심지어 아프리카의 전통인 여성할례(clitorectomy, 음핵절제) 의식처럼, 버크-하이에크의 전통 옹호 입장에서도 도저히 수용하기 어려운 케이스조차 옹호를 하는, 문화적으로 예민한 (육체적으로는 그다지 예민하지 않은 듯한) 서양 페미니스트들을 찾아볼 수가 있다.
사실, 학계에서 무시를 당하고 있는 것은 오직 ‘평균적인 일반 서양인들의 전통적 태도’뿐이다. 따라서 “무지방 우유(skim milk)” 오류가 우리가 설명하고자 하는 이 현상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단순한 실수라고 보기엔 현대의 지식인들은 이 오류를 너무나도 선택적으로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일한 적개심 Unique Hostility
그렇다면 서양의 전통적, 상식적 관습에만 오로지 향해있는 이 단일한 적개심의 근원은 무엇인가? 필자가 위에서 언급한 '동화 같은 이야기'를 더 자세히 살펴보자. 이 '동화'가 어느 정도 진실이려면, 현대과학은 믿음의 시대였던 중세시대의 세계관에 불가결했던 어떤 '요인'을 완전히 논파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동화'로써 서양 전통에 대해서만 단일한 적대적 편향성을 정당화하려면, 과학에 의해 논파된 그 '요인'은 오직 서양에만 있는 고유한 사고여야만 한다.
그렇다면 이 '요인'은 정확하게 무엇이란 말인가? 보기에 가장 뻔한 답은 아마도 인류의 시작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의 결과였다고 말하는 전통적 기독교 사상일 것이다. 알다시피 다윈의 진화론은 이 사상에 큰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 답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서양의 유대-기독교 유산에 대한 지식인들의 적대감은, 비록 극에 달한 건 20세기였지만, 다윈이 갈라파고스 제도로 떠나기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는 것이다. 둘째는, 인류의 근원에 대해 초자연적 관점은 비단 서양의 종교적 전통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어떤 서양 지식인도 인류의 기원에 대한 힌두교, 그리고 중국 또는 북미 원주민들의 사상들을 과학적 이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서양 지식인은 그런 비서양의 전통 사상들을 멸시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비서양 전통 사상들은, 우리가 끊임없이 경축해야 하는 '아름다운 다양한 다문화 샐러드 그릇 모자이크’(이걸 정확히 뭐라고 부르든지 간에)를 구성한다. 심지어 인간에 관한 현대 과학 연구에 저항하는, 가장 호전적인 비서양 종교적 전통주의자조차도 극진한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미군 육군 공병대가 북미 원주인 조상의 기원에 대한 기존의 관점에 어긋날 수 있는 ‘케너윅 맨(Kennewick Man)’과 관련한 증거를 기꺼이 묻어버렸다는 사실을 상기해 보라. 그에 반해, 다윈설의 정당성에 대해 적어도 논의의 가능성은 열어두어야 한다고 공손하게 주장하는 근본주의 개신교도는 마치 박물관에서 다른 네안데르탈인들 옆에 전시돼야 마땅한 것처럼 취급을 받고 있다.
사실, 유대-기독교 전통은 어쨌든 우리 인간이 물질적으로는 그저 하찮은 기원을 갖고 있다고 여겨왔고(아담은 심지어 흙에서 만들어졌지 않은가), 인간과 동물 사이의 명백한 해부학적 연계성을 부정한 적도 없다. 유대-기독교 전통은 애초부터 인체의 기원에 대해서 중요하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오히려 인간이 신의 형체를 본떠서 만들어졌다는 것은 인간이 유일하게 추상적 이성을 가진 존재라는 이야기로 해석되었다.
서양 전통에서 추상적 이성은 언제나 인간 정신의 본질적 속성으로 고려된 능력이다. 또한 인간 정신의 비물질성 또는 그 불가해함은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어거스틴과 아퀴나스,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 포퍼, 그리고 더 늘어나고 있는 당대 사상가들에게 이르기까지 – 언제나 신학적 전제처럼, 또는 그 이상으로, 순수하게 철학적인 (따라서 이성적으로 입증 가능한) 결론이었다.
형이상학 및 과학 Metaphysics and Science
이제 우리는 본 논의에 있어 본격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에 도달했다. 서양의 종교적 세계관에서 중심적이고 불가결한 전제는, '유기체로서의 인류의 근원'도 아니고, '다른 천체들과 관련지어 본 지구의 위치'도 아니고, '순수하게 과학적인 주제가 되는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서양의 종교적 세계관에서 중심이 되는 전제들(가정들)은 그 성격이 오히려 본질적으로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따라서 그 진리성 여부는 실증적 연구보다는 궁극적으로 철학적 논쟁을 거쳐서 결정되어야만 한다.
서양의 종교적 세계관에서 중심이 되는 전제는 바로 인간 정신의 비물질성이다. 더 전통적인 용어로 말하자면 ‘영혼’의 존재가 가장 첫번째 전제다(보통 이원론(dualism)이라고 불리는 가정이다).
두 번째 전제는 인간의 세계와 그 세계를 지배하는 과학적 법칙의 제1원인(First Cause), 또는 그의 근본적 설명이 될 수 있는 '필수적 존재(Necessary Being)'의 실재이다. 다시 말해서, ‘신’의 존재이다. 철학자들은 이 존재에 대한 믿음을 유신론이라고 부른다.
서양의 종교적 세계관에서 중심이 되는 전제 중에서 세번째 것은 수학적 진리, 플라톤의 형상이론(Plato's Forms) 등과 같은 추상적 존재들에 대한 영역의 실재와 관련된 것이다. 즉, 객관적으로 존재하되, 비물질적이며 불변하는 물체의 본질 및 속성의 영역이다. 일상적인 물체와 유기체들은 이 영역이 불완전하게 구현된 것 뿐이다. 이 사상은 플라톤주의라고 알려져 있다.
이 전제들이 수립된다면, 실증적 과학에 의해서 앞으로 무엇이 발견되는지와 무관하게 유대-기독교 세계관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만약 이 전제들이 각각 철학적으로도 이미 논박이 될 수 있다면, 설사 생물학자들 모두가 내일 당장 진화론을 폐기해버린다고 하더라도 유대-기독교의 세계관 자체가 깨끗하게 논파될 것이다. 따라서 과학적 발견 그 자체는 사실 저 전제들과 관련이 없다.
그럼, 과학자에 의해 논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저 중요한 전제들이 철학자에 의해서 논박이 됐는가? 당대의 어떤 철학자도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이 전제들은 철학자들 사이에서 예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살아있는 화두다.
현대 철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철학 논쟁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는 걸 알고 있다 — 즉 바로 인간의 정신과 그 정신 이상의 세계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 일반 세계와 특히 수학적 진리에 대한 지식, 현실의 기본 구성요소가 무엇인가에 대한 형이상학적 이해 등의 '현상'들이 과연 “자연주의화(naturalized)"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여부이다.
다시 말해서, 철학적 탐구의 주된 논점은, 과연 그런 현상들이 순수한 '자연주의적' 개념이나 용어로써 설명되거나 해명될 수 있느냐이다. 비물질적, 또는 무형의 존재나 원리에 의존하지 않는 개념이나 용어로써 말이다. 이것이 그렇게 격렬한 논쟁 주제인 이유는 그동안 아무도 형이상학적 현상들이 자연주의적 방식으로만 설명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각각의 철학자들에게 자신이 선호하는 이론이 있을 수 있다. 대부분 당대의 철학자들은 현대의 지식인들답게, 이런 것들이 결국 언젠가 “자연주의적으로(naturalistically)”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결정적이고 설득력 있게 이를 입증하지 못했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렇다면 자연주의자의 자신감은 어디서 오는가? 누군가는 이는 믿음의 문제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신감을 가질만한 하등의 합리적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실, 당대의 “자연주의자(naturalist)”의 주장은 이미 유물론자들이 지난 천년 동안 내놓았던 주장들에서 약간의 변화를 준 정도밖에 안 된다(물질적 현실이 모든 현실이라고 믿는 그들은 요즘 스스로를 유물론자라고 칭하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이들 자연주의자의 주장은 이원론자, 플라톤주의자 및 철학적 마인드의 유신론자가 고대 그리스와 중세 유럽에서 처음 제기했던 이후, 유물론적 해석을 지속적으로 괴롭혀온 여러 반론들을 피하지 못한다.
필자는 자연주의자에 대한 유신론적 입장의 반론들이 그야말로 절대적으로 결정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필자 개인적으로는 결정적인 것이라고 믿지만, 이 짧은 에세이로 그걸 다 설명하기엔 한참 부족할 것이다). 단지 필자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런 이원론자, 플라톤주의자, 유신론자의 반론들이 세상 모든 것이 자연주의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한 분명 진지하면서도 위력적인 반론들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심지어 유물론주의 철학자들도 인정한다. 실은 이것이 유물론자들이 그런 유신론적 반론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려고 끊임없이 책을 쓰고 있는 이유다. “이원주의, 플라톤주의 및 유신론에 대한 반박”이 지난 수 세기 동안 지속되어 온 것을 보라. 비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득력이 없고 여전히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과학 대 종교”라는 진부한 갈등은 존재하지 않는 신화이다. 현실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히려 서로 라이벌 격인 형이상학적 체계 간의 논쟁이다. 전통 서양 철학의 유신론, 이원론, 플라톤주의와 이에 대립한 현대 자연주의(또는 유물론) 간의 논쟁이다(후자는 현대 과학의 산물이라기보다는 과학에 대한 이념적 세속주의식 해석에 가깝다).
그러나 당대의 지식인에게 있어서 '과학 vs 종교' 픽션, 즉 과학과 종교 사이에 전쟁이 있으며 이 전쟁에서 종교가 지고 있다는 허구에는 홍보적 가치가 있다. 그 때문에 실제의 투쟁인 '철학적' 투쟁에서도 일단 “자연주의자들”을 믿어봐야 한다고 제의하는 게 더 쉬운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태도에 있어 합리적 정당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럴만한 동기는 있다. 이는 철학자 토마스 네이글(Thomas Nagel)이 철학자들 사이에서 보기 쉽지 않은 솔직함을 보이며 토로한 바 있다. 그의 저서 ‘마지막 한마디'(The Last Word)’에서 그는 현대 지식인들 사이에 “종교에 대한 공포”가 있음을 시인한다. 이 종교에 대한 공포는 인간 정신과 지식의 본질을 설명하기 위한 자연주의적 시도에 맞선 깊은 문제들을 직시하지 못하도록 만든다.
“나(토마스 네이글) 자신도 이 공포의 피해자이므로, 내 경험을 토대로 말하겠다. 나는 무신론이 사실이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아는 사람 가운데 가장 똑똑하고 박식한 사람들이 종교인이라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낀다. 단순히 신을 믿지 않는 내 생각이 옳기를 바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신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신이 없었으면 좋겠다. 우주가 그렇게 생겼음을 원치 않는다. 이런 우주적 권위에 대한 거북함은 흔하게 볼 수 있으며, 우리 시대의 과학주의와 환원주의의 원인으로 보인다. 우주적 권위에 대한 거북함이 만드는 경향 중 하나가 진화생물학을 터무니없을 정도로 남용하는 것이다, '정신'을 포함한 인간의 삶에 대한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유대-기독교에 대한 적대감 Hostility to Judeo-Christianity
하지만 왜 지식인들은 유난히 유대-기독교 전통에 대해서만 적대감을 갖고 있는가? 다른 종교들에 비해 유대-기독교 전통의 철학적 전제가 특별히 현대 지식인들로부터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인가?
유대-기독교의 전제가 함축하고 있는 내용을 숙고해 보자. 만약 정말로 물질의 본질에 대한 객관적 영역이 존재한다면, 인간도 객관적인 천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기본적 천성을 인정하지 않는 도덕성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가 나오게 된다.
다시 말해, 도덕법은 바로 자연법이고 인간의 권리도 자연권이며, 이 두 사항은 구속력이 있기에 호색꾼의 변덕이나 사회공학자의 설계에 따라 변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 이성의 중심이 정말로 무형의 영혼이라면, 인간은 이런 객관적인 천성과 그에 따른 도덕적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영혼을 가진 인간은 도덕성에 부합하는 삶을 살 능력이 있다. 단순히 생물학적 본능과 물질적 힘에 무조건 좌우되는 동물이 아닌, 자유의지가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형상을 본떠서 인간의 영혼에 이성, 자유의지 및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 신이 정말로 있다면, 이 신은 도덕법의 준수 여부에 따라 인간을 심판할 수 있을 것이다.
비-서양 종교들엔 일반적으로 이런 요소들이 없다. 불교와 힌두교에서의 궁극적 실재는 인격화된 신이나 도덕적 입법자가 아니다. 우리 인간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비인격적인, 절대적인 그 무엇이다. 이 종교들에는 서양식 개념에서의 영혼이라는 게 없다. 그 이유는 영속적이거나 변치 않는 자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은 단지 덧없고 하찮은 환상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도덕에 부합한 삶을 사느냐 마느냐에 대한 궁극적인 중요성이 없다.
물론, 전통적 힌두교 신자나 불교 신자는 정통 유대교 또는 보수적 기독교 신자에 못지않게 엄격한 도덕주의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들의 도덕주의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선견지명이나 개인의 영생과 창조주와의 영원한 유대감에 대한 바람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대안적 영성(alternate spirituality)“을 추구하는 서양인으로서는 동양의 형이상학을 선택하고서 도덕성은 내던져 버리는 것이 더 편하다. 일관성 없는 사람처럼 보일 걱정 없이 말이다. 동양의 종교는 서양의 종교가 요구하는 것과 같은 개인에 대한 도덕적 도전을 주문하지 않는다.
필자가 주장하건대, 개인에 대한 도덕적 도전이야말로 바로 현대 지식인들이 멸시하는 유대-기독교 전통의 중요한 측면이다. 이 도덕적 도전이 서양의 고유한 관점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 유대-기독교 전통에 대해 사람들이 적대감을 갖는 이유다.
진화론을 둘러싼 논쟁은 부수적일 뿐이다. 어떤 사람이 “임신중절 찬성파(pro-choice)”라고 한다면, 설사 그가 진화론을 불신하는 창조론자라 하더라도, 그는 그 휘황찬란한 '다문화 뷔페'에 일원으로 환영받을 것이라고 필자는 감히 말한다.
지식인들이 적대감을 갖는 대상은, 바로 인간이 복종해야만 하는 냉혹한 자연계의 질서에 대한 믿음이다. 인간 본성과 도덕률을 포함한 그 모든 것에 대한 믿음 말이다. 이런 믿음에 대한 부정이야말로 바로 현대 지식인의 삶을 지배하는 '독선'의 근원인 것으로 보인다.
서양 전통의 도덕률과 이를 정당화하는 형이상학에 대한 현대 지식인들의 증오가 어느 정도냐 하면, 그 반대 위치에 있는 좌파주의에 대해서는 정작 그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는 '도그마'로 위치지어서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 좌파주의 교리는 널리 전파되어야만 하며, 그 적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 좌파주의 교리에 반대되는 모든 증거에 상관없이 탄압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지식인들의 이런 태도는 그들 자신이 비판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좌파주의를 억압하는 방식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지식인의 아편 Opium of the Intellectuals
현대의 지식인은 광신도에 못지않다.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이 표현했듯이, 좌파주의는 간단히 말해 “지식인의 아편”이다. 즉, 서양 전통이 요구하는 까다로운 도덕 규범도 없고, 언제나 세계의 창조자이자 집행자였던 신도 없는, 그런 세계의 가능성에 대한 헌신적인 신념인 것이다.
이것이, 필자가 이전 글에서 언급한 요인들에 추가로, 현대 지식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권력을 설명한다. 좌파주의는 한때 대학에서 주류였던 위대한 서양 종교 및 문화유산의 왜곡된 거울상이며 사악한 쌍둥이다. 그리고 좌파주의가 만들어낸 "반-교회 학자들"이 바로 현대 대학의 교수들인 것이다.
이들은 전설의 중세인들 못지않게 자신들이 선호하는 교리로 젊은 학생들을 세뇌시키는 데 헌신적이다. 그들은 학계의 전문가라기보다는, 의사 중에서도 최악의 의사라고 볼 수 있다. 제임스 버넘(James Burnham)이 말한 대로 자유주의가 “서양 자살의 이데올로기”라면, 대학 교수들은 문화적 키보키언(Kevorkian, 편집자주 : 안락사 집행으로 유죄판결을 받은 미국의 유명한 의사)이기 때문이다.
대학 교과과정이 처방하는 '약'이 주입하는 생각은 다음과 같다. “비판적 사고”라는 것은 언제나 전통적 서양 신념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 또 “열린 마음”이란 전통적 서양의 신념에 대해 적대적인 생각에만 열려 있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주장은 한 가지 명백한 결함을 갖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 질문할 수 있다. “일반 사람의 경우에도 전통적 유대-기독교의 도덕률을 부담스럽게 여기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이 꼭 지식인의 좌파적 관점을 지지하지는 않지 않는가?” 라고 말이다.
하지만 사실 보통 사람조차도 좌파적 관점을, 적어도 마음속으로는, 대부분 공유하고 있다. 서양의 오랜 전통에 대해서 감성적 애착이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게 바로 수십 년 간 지속되어온 보수우파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좌파적 비전이 대학을 지배하고 있는 이유이다.
지식인 계급이 계속해서 더 좌파화됨에 따라, 평균적인 비-지식인들 또한 대학, 언론, 주류 교회를 통해 그들의 영향을 받아 좌파화되고 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인지부조화의 삶을 살게 된다. 2000년 대통령 선거 당시 TV 해설자가 쓴 속어를 빌리자면, 왼쪽 귀에다 유혹적인 말을 속삭이는 “파란 주”(blue state: 민주당 지지 주)의 악마와 오른쪽 귀에 그 어느 때보다 절박한 애원을 하는 “빨간 주"(red state: 공화당 지지 주)의 천사 사이에서 고민을 한다.
그에게 있어 전통사상에서의 자립심과 자제력, 가족과 믿음에 대한 소명은 지금도 매력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시민의 비용으로써 정부로부터 받아먹을 수 있는 떡고물, 또 결과에 대한 걱정 없이 즐기는 감각적 사치 등에 대한 전망은 현대 서양의 평균적인 시민이 저항하기엔 너무 막강한 권력으로 작동한다. 그는 이미 반세기 간의 복지정책과 성적인 “해방”으로 인해 무기력해졌다.
그는 이미 지식인들의 '새로운 종교'로 반은 개종한 거나 다름없다. 그의 증조부들은 이 신종교와 신종교가 하는 일에 대해 공포를 느끼며 움츠러들었을 것이다. 이에 반해 오늘날 그분들의 증손자들은 신종교를 통째로 삼킬 운명인 것처럼 보인다. 심지어 그 신종교의 비전통적이고 비상식적인 사악함을 확장시킬 운명인 듯하다. 서양 쇠퇴의 말기인 지금 봐도 혼란스러울 정도로 말이다.
죄악은 어떤 인간의 마음도 흐리게 만들 수 있다. 대개, 그 결과는 나쁜 품성과 나쁜 양심뿐이다. 하지만 상상력과 합리화에 탁월한 지식인의 경우에는, 아예 세계관 자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근본적 전제나 원리 문제에 있어서까지 지식인이 늘 신뢰성을 확보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반인과는 달리, 지식인은 앞서 언급한 근본적 전제, 원리에 관한 함의를 일관성 있게 도출하는데 현저히 능숙하다
이것이 좌파주의가 지난 수십 년간에 걸쳐, 순전한 광기에 그토록 가까워지게된 이유다. 그 광기가 현대 서양 사회에 어느 때보다 깊게 스며들어 버리면서, 보수주의 사상가의 견해야말로 일반인에게는 점점 몽상적이고 비현실적이며 도달하기가 불가능해 보이게 됐다.
비록 전형적인 당대의 서양인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광란에 공감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는 아퀴나스, 버크 또는 하이에크의 교리에 끌리지도 않는다. 그러기에 그는 너무 멀리 떠나버렸다. 그는 자신의 보수주의가 현격히 희석되기를 바란다. 적어도 연방 의료보험에 의한 처방약 혜택과 필이 꽂힐 때마다 할 수 있는 포르노 접속을 위한 공간 정도는 마련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게 일관성 결여로 보인다면… 그래도 좋다. 그런 건 대학 교수들이나 걱정하게 내버려 둬도 된다.
만약 누군가 그에게 일말의 보수주의조차 모두 폐기해야 하며, 대신 위에서 언급한 혜택과 포르노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특화된 세계관(좌파주의)을 선택해야 한다고 한다면, 세월이 지날수록 그는 그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현대 지식인들은 그들의 중세시대 선배들이 했던 것과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세련되지 못하고 미성숙한 방식으로, 속된 일반인이 몸 담그고 있는 세계관에 대한 결과에 불과한 것을 그저 합리화시키고, 전파하고, 체계적으로 헤아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결국 지식인의 아편이, 곧, 온 국민의 아편이 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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