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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근현대사, 일제시대 “강제징용”이라는 신화

대법원의 일제시대 “강제징용”에 대한 판결, 우리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반일종족주의에 기초한 근현대사 왜곡에서 비롯

[편집자주] 본 원고는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 2018년 11월 16일 미디어워치 국가경영포럼에서 했던 강연의 종결부를 칼럼 형태로 재편집한 것입니다. 



단언하건대 최근 대법원의 “강제징용”에 대한 판결은 한반도 근현대사에 대한 왜곡에서 비롯된 것이다.

필자는 대법원 판결의 문제와 관련하여 그 법리적인 부분, 즉 ‘개인청구권이 인정되는가’, ‘시효 내에 있는 사안인가’, ‘현 일본 기업은 과거 기업의 책임을 계수하는가’ 등등에 초점을 맞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필자는 그보다도 사법부의 최고 권위기관이 일제시대 노무동원의 실체적 진실을 전혀 보려 하지 않고 판결을 내렸다는 것, 또 우리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반일종족주의에 기초한 근현대사 왜곡에 근거하여 판결을 내렸다는 것에 대해서 먼저 비판적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판단한다.

이에 필자는 지난 수 년간 “강제징용” 문제를 연구해온 학자로서 본 칼럼에서 “강제징용”, “손해배상금” “미불임금”이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대법원 판결의 문제점을 다뤄보고자 한다.




‘강제징용’이 아니라 ‘노무동원’과 ‘징용’이 정확한 표현이자 개념

먼저 “강제징용”은 잘못된 ‘표현’, 잘못된 ‘개념’이라는 점부터 지적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징용(徵用)’이라는 표현 안에 이미 법적인 ‘강제’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제시대에는 징용에 응하지 않는 자는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00엔 이하의 벌금에 처해졌다. 한반도에 살던 조선인이나 일본본토에 살던 일본인이나 모두 마찬가지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젊은 청년들도 군복무를 기피하면 법적처벌을 받는다. 이 역시 정당하건 부당하건 법적으로 ‘강제’되어 있는 의무다.

“강제징용”이라는 말은 우리가 국어 시간에 많이 이야기했던 “驛前앞”과 같은 말이다. “驛前앞”에서 前가가 이미 앞이라는 뜻이 들어가므로 “앞”자가 필요 없듯이, “강제징용”이라는 말에서도 “징용”에 이미 강제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강제”라는 말은 굳이 덧붙일 필요가 없다. 그저 “징용”이라고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제징용”이라는 말이 왜 1965년 이래 지금까지 정부, 학자, 언론, 시민단체 등에서 사용돼왔을까.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시작한 뒤 1939년 9월부터 조선인을 동원하는 “노무동원”이 시작되었다. 이 “노무동원”의 마지막 단계가 바로 법적으로 강제할 수 있는 “징용”이다. 하지만 “징용”은 사실 1944년 9월부터 불과 몇 개월간 시행되었다.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실제 “징용”이 긴 기간이 되지 못하다보니 반일종족주의를 퍼트리고 반일감정을 악화 시키고자 했던 정치세력들에게는 이것이 장애가 되었다. 관련 문제를 과장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그들은 1939년 9월 이후부터 1944년 9월까지, 즉 징용이 시작되기 이전의 비교적 긴 기간 동안 이루어진 조선인 “노무동원”도 새로이 규정해야할 필요가 생겼다. 이 순수 “노무동원” 시기에서부터 조선인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동원”되었다고 규정해야만 노무동원의 강제성이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렇게 탄생하게 된, 즉 1939년 9월부터 1945년 8월까지의 시기를 새로이 규정지은 “강제징용”이라는 표현 속에는 교묘한, 단순한 실수라고 결코 말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관계에 대한 과장과 왜곡이 들어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표현을 만들어 낸 것은 조총련계 학자인 박경식을 비롯하여 1960년대 이후의 연구자들이다. 같은 연구자로서 필자는 그들이 어떻게 이와 같이 심각한 개념상의 조작을 범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번에 대법원은 판결문에서 “강제징용”이라는 말을 쓰지 않고 “강제동원”이라고 표현했다. 이는 대법원도 이러한 문제를 내심 파악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노무동원”은 기본적으로 자발적, 심지어 일본 밀항의 도구로까지 활용돼

분명히 해둬야 한다. “징용” 이전, “모집”과 “관알선” 단계에서는 조선인이 “노무동원”에 응하지 않더라도 일본정부는 이를 법적으로 처벌하지 못했다. “강제”가 아니다.

사실 “노무동원”과 관계된 직업은 탄광 등 보통 사람들이라면 기피하는 소위 3D 업종과 관계된 것이 많았다. 그래서 “노무동원” 당시에는 일본 기업들이 모집원을 조선에 파견했고, 조선총독부의 행정조직도 지원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관청이 개입하였다고 해도 “노무동원”이 갖는 개인의 자발적 선택이라는 속성은 변할 수 없다. 대한민국도 정부 차원에서 독일에 광부를, 쿠웨이트에 건설노동자들을 대거 보낸 적이 있고 이런 일은 원전 건설을 통해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이것을 두고 “강제징용”라고 하는가.

1939~40년에 한반도에 큰 흉작이 들었다. 이로 인해서 일본 기업들이 계획한 인원의 몇 배가 넘는 조선인들이 “노무동원”에 지원했다. “징용”이라면 순전히 지원자의 사정에 따라 지원율이 몇 배씩 뛴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한편 “징용”은 미공군이 한일해협을 장악하는 1945년 3-4월경이 되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그래서 비교적 짧은 기간 동안에만 실시된 것이고 일본으로 간 조선인 근로자 72만 4천여 명 중에서 징용으로 간 사람은 10만 명 내외로 추산된다.

요컨대, 1939년 이후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 전체를 “강제”로 동원된 사람들로 볼 수도 없고, 일본에 의한 조선인 노무동원을 한데 묶어 “강제”라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 필자의 결론이다.

“징용”을 포함하여, 일본으로 간 조선인들은 어떠한 노동과 생활을 했는가. 비참하기가 짝이 없었던 것인가. 조선인 근로자들의 근로환경 실체를 알려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 “도주”, “도망”이다. 

당시 신문철만 뒤져봐도 쉽게 알 수 있겠지만 당시 대부분의 조선 청년들은 산업과 문화에 앞섰던 일본을 동경했다. 

그래서 그 이전은 물론이고 심지어 “징용”이 실시되고 있을 때 조차도, 고액의 비용을 들여 작은 배를 이용하여목숨을 걸고서 일본으로 밀항하려는 조선인들이 많았다. 일부는 성공하였지만, 일부는 현해탄에서 숨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조선인 중에는 “노무동원”이라는 제도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합법적으로 안전하게, 그것도 비용없이 일본으로 건너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일본에는 가고 싶어 했지만 “노무동원”에 의해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요구했던 탄광과 같은 어렵고 힘든 사업장은 기피했다. 

이에 그들은 일본에 도착한 후, 가능한 가장 신속하게, 대부분 1개월 이내에 탄광이나 광산에서 도망가서, 공장, 토목공사장 등 더 좋은 근로환경을 갖춘 곳에 재취업했다.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들의 경우에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번에 대법원 재상고심 선고를 맞이한 원고들은 당시 ‘일본제철’에서 근무했다고 한다. 공장은 업무환경이 탄광이나 광산보다 훨씬 좋았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지적하면 이들은 1941년부터 1943년 사이에 근무하였고, 이때는 “징용” 자체가 조선에서는 아직 시행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적어도 그들은 “노무동원”, 즉 “모집”이나 “관알선”의 형태로 취업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들의 당시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봐도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해온 “강제징용”의 이미지를 떠올리기가 어렵다.

탄광이건 공장이건 일제시대에 일본에서 일했던 근로자들은 요정, 극장, 영화관 등 각종 문화생활을 즐겼으며, 고향에 송금도 정상적으로 할 수 있었다. 유곽에 가고 도박에 돈을 탕진했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분명 오늘날 한국의 외국인 근로자들과 비교했을 때도 상당히 높은 생활수준을 누렸음을 알 수 있다.

‘손해배상금’ 또는 ‘위로금을’ 네 번이나 일본에게 요구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나

필자가 지적하려는 두 번째 문제는 ‘손해배상금’ 문제다. 

여기에서 문제의 초점은 지금 우리가 과연 근본적으로 일본 기업들에게 “손해배상금”을 요구할 권리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법원이 “위자료”라는 이름으로 지급을 선고했다고 해서 문제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을 미리 얘기하자면, 이번 재판의 원고들 또는 전쟁 중 일본으로 간 근로자들이 일본 기업들이나 그 누구에게도 금전을 요구할 권리는 더 이상 없다.

그 이유를 다음 세 가지로 제시해볼 수 있다.

첫째, 1939년 9월부터 1944년 9월까지의 “노무동원” 시기는 물론이고, 이후부터 1945년 4월 경까지 실시된 “징용” 시기의 경우에도 조선인들은 임금 등 제반 급여를 정상적으로 수령했다.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의 임금차별은 없었다. 일본인과 마찬가지로 강제저금 문제가 있었지만, 계약기간이 만료되면 이 저금은 정상적으로 인출되었다. 조선에 있는 가족에게 보낸 송금도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둘째, 박정희 정부는 1975년에, 한일협정 이후 10년의 시차가 있었지만, 일제시대에 “노무동원”이나 “징용” 한국인이나 그 가족들에게 배상금을 지급했다. 박정희 정부가 이를 위해 일본에 별도의 재원을 요구한 일은 없었다. 

박정희 정부가 왜 일본에 재원을 요구하지 않았던가. 이는 한일협정 당시 일본의 청구권`경제협력 자금으로 제공한 무상 3억 달러와 차관 5억 달러 속에 한국인 근로자에 대한 배상금이 포함되어 있다고 박정희 정부가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측의 이러한 인식은 일본과의 협상 과정에서도 확연히 나타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셋째, 노무현 정부 하에서도 총 4,800억원이 “노무동원 또는 “징용” 대상자에게 위로금으로 지급되었다. 이때도 정부가 그 재원을 일본에 청구한다는 것은 정부 내외, 어디에서도 있을 수도 없는 발상이었다. 

그들은 1차로 일본에서 기업으로부터 정상적으로 급여를 받았고, 2차로 박정희 정부 하에서 배상금을 받았고, 3차로 노무현 정부 하에서 위로금을 또 받았다. 이런 이유로 ‘한 근로로 세 번의 보수를 지급받는다’는 말이 나왔고, 실제로 그러한 예가 없지 않았다고 한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로 인해 이후 일본 기업에 “위자료”를 청구할 수 있게 된 한국인이 최대 15만여 명이라고 한다. 만약에 이번 판결이 판례가 되어 일본 기업이 “위자료”를 지급한다면, 그 명목이 무엇이 되었건, 한 번의 근로에 대하여 이제 네 번의 보수를 받는 것이 되며, 실제로 4차례 전부 수령하는 경우가 없을 것이라 장담할 수도 없다.

개인적 차원에서 이러한 금전 수취가 도덕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인지, 필자는 정말 심각하게 의심한다. 내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이라면 원칙과 수단을 떠나 무조건 다 좋다는 것인지, 이것은 아무래도 한국 사회에 만연한 금전만능의 배금주의 탓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국가적 차원에서도 한국과 일본이 이렇게 불화한다면 한일관계의 미래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것인지, 그야말로 막막할 뿐이다.

거액의 미불임금이란 환상과 개인청구권 문제

세 번째로 다뤄볼 주제는 “미불임금” 문제다. 이 문제는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해 개인청구권이 소멸된 것은 아니라는 입장과 맞닿아 있다.

당초 이번 대법원 판결의 원고들이 요구했던 것은 바로 이 “미불임금”이었으나, 판결에서 이것이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미불임금” 문제는 또 언제 한일 간에 쟁점이 될지 모르는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도 밝혀둔다.




한국에서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만 7년간 일본으로 간 72만 4천여 명의 조선인 노무자가 일본 기업들으로부터 받지 못한 “미불임금”이 거대한 액수라고 알려져 있다. 한국인이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거액의 미불임금은 적어도 역사적인 사료에 의해 증명된 것이 결코 아니다. 사실 필자는 이 “미불임금”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자를 단 한명도 알지 못한다. 다시 말해 사료, 즉 역사적인 증거에 입각하여 “미불임금” 문제를 연구한 문헌이 국내에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 국민들뿐만 아니라, 정부기관, 연구자, 언론인 등 거의 모두가 “미불임금”이 거액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결국 이 문제는 연구자들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밖에 없다. “반일종족주의”에 경도된 연구자들이 구체적인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면서 한국인에게 그러한 환상을 갖도록 조장해온 것이다.

거액의 미불임금이란 환상은 어떻게 생긴 것인가. 우선, “미불임금”이 아니라 정확하게는 “미불금”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점부터 지적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 속에는 임금만이 아니라, 제반 수당, 귀국여비, 각종 적립금과 같이 조선인 근로자들이 퇴직할 때 그들에게 지급해야할 여러 항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간에는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 기업이 조선인들에게 장기간 보수를 주지 않아서 이 미불금이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앞서 얘기한 것처럼, 보수는 정상적으로 지급되었다. 전쟁이 끝난 바로 뒤에, 자기가 받아야할 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정산하여 받아오지 않고 서둘러 귀국한 한국인들이 많았다. 바로 이 과정에서 “미불금”이란 것이 생기게 된 것이다.

실제 미불금 내역을 보면 임금보다 적립금과 같은 다른 항목들의 액수가 훨씬 많다. 이것도 1945년 8월 15일 직전까지 임금이 정상적으로 지급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국 거액의 미불금이 남아있다는 환상은 일본 기업이 조선인들에게 임금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다’는 역사왜곡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이 미불금은 실제 얼마나 되었을까? 대략 계산해서 3-4개월치 월급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공탁문서”라는 자료를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일본 정부는 패전 이후 퇴직금 같은 것을 정산하지 않고 급히 귀국하는 한국인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또 언젠가 한국인들이 그 돈을 청구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그 돈을 모두 국가기관에 맡겼다. 이것을 “공탁”이라고 하는데, 자료를 보면 1인당 미불금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한 가지 문제는 미불금 액수를 안다고 해서 그 액수가 무엇을 뜻하는지, 예를 들어 1,000엔이라면 얼마만한 가치가 있는지, 이것을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당시 임금이나 물가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침 필자는 얼마 전에 나가사키 옆에 있던 에무카에(江迎)라는 탄광의 임금 자료를 얻었다. 1944년 8월에 탄광근로자의 월급은 대략 150-200엔이었고, 그 뒤로 물가가 크게 올랐다. 따라서 1,000엔이라면 대략 3~4개월치 정도의 임금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거액의 미불금’이라는 신화가 생긴 것은 자료 조사를 게을리 한 연구자들 탓이고, 그것을 그대로 받아쓰고 쉽게 믿어버리는 정부, 언론계, 교육기관들 탓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필자는 우리 조상들이 소액도 아닌 고액의 돈을 일본에 남겨둔 채 대책없이 귀국할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 ‘거액의 미불금’이라는 환상은 우리 할아버지들을 경제 개념이 없는 사람들로 취급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설사 미불금이 대단히 많았다고 하자.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액수는 일본인이 조선에 남겨둔 사유재산, 즉 농지나 집, 공장과 같은 부동산이나, 각종 재산들과 비교하면 고작 수천 분의 일, 수만 분의 일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해 개인청구권까지 소멸된 것은 아니라는 일각의 주장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도 마찬가지다. 한국이 개인청구권이 남아있다고 주장하면 일본도 그러한 주장을 못할 이유가 없다.

처음 말한 것과 같이 15만명 가량의 한국인들이 이번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일본이 위자료를 청구한다고치자. 이에 대한 맞대응 차원에서 일본인들이 한국에 남겨 두고온 재산을 청구한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 

필자는 미불금 청구가 단연코 지극히 한국에 불리한 행동이라고 자신있게 말씀드린다. 일본이 당시 한국에 두고 간 재산은 당시 한국 국부의 9% 수준으로 추정된다. 미불금을 돌려받자고 지금 부산이나 경상남도 수준의 국부를 일본에게 되돌려 줘야한다면, 과연 이런 거래를 해야하는 것인가?




한국과 일본, 이제 근현대사 문제와 관련 진실로써 서로 대화해야할 때

이번 대법원 판결은 전시기 노무동원을 “강제동원”, “노예사냥”, “강제노동”, “노예노동”으로 규정한 역사왜곡에 근거해 이뤄졌다. 이러한 왜곡은 실증을 견뎌낼 수 없다. 

- 최대한 길게 잡아 8개월간 실시된 “징용”을 제외하면, 조선인 노무동원은 기본적으로 자발적 의사에 따라 이루어졌다.

- 피징용자를 포함하여 근로를 위해 동원된 모든 조선인은 일본인과 동일한 규칙에 따라 급료와 대우를 받았다. 

- 거금을 저금하고 가족들에게 송금한 조선인들도 많았다. 또 다른 많은 조선인들은 자신이 번 돈을 술과 고기를 사먹는데 쓰기도 했고, 심지어 “특별위안소”의 조선 여인들에게 쓰거나 도박으로 탕진하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사법부의 이번 판결을 포함하여 그간 한국이 일본에 대해서 때때로 거침없이 터트려온 감정은 사실 일본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결코 적지 않음을 지적하고자 한다.

불행히도 그간 한국 뿐만이 아니라 일본에서도 학계나 언론, 정부 어디에서도 20세기초 실제 살아 숨쉬었던사람들의 삶, 생생한 역사적 실체를 보려하지 않았다. 법리적 판단과 그로부터 나오는 결론에나 집착했다. 

지적으로 게을렀던 것이고 조총련계 “연구자”가 만들어 놓은 “통설”에 일본의 어느 지식인도 저항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이렇게 사실을 무시하는 태도로는 한국 일각의 “반일종족주의”를 이겨낼 수 없다.

잘못된 역사인식에 근거한 컴플렉스로 가득 찬 이웃을 곁에 두는 것은 일본에게도 바람직하지 않다. 양국이 이제는 위선과 체면을 벗어던지고 진실로써 서로 대화해야할 때다.

/ 이우연(경제학 박사 ·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


[ '일제시대 징용노동의 진실' (18차 국가경영포럼 / 이우연 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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