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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역사의 상징 ‘위안부상’ 바로 옆에서 동상철거와 진실회복을 외치다

위안부 ‘강제연행설’, ‘성노예설’, ‘14세 소녀설’, ‘20만명설’ 등 모두 거짓 역사왜곡...“위안부피해자법 폐기하고 위안부상 철거하라”

어느새 21회째를 맞이한 한일우호 지지 및 위안부상 철거 촉구 집회가 사상 최초로 그동안 정대협이 전세내다시피 수요집회를 개최하던 장소에 진입해 터를 잡으면서, 진실회복을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28일(화) 정오 구 일본대사관 근처 위안부상 옆에선 ‘반일동상진실규명공동대책위원회(이하 공대위)’와 ‘위안부인권회복실천연대(이하 위인연)’의 ‘위안부피해자법’ 폐기를 촉구하는 공동 기자회견 및 제21차 위안부상 철거촉구 집회가 열렸다. 이날 현장에는 공대위에서 고현형·김병헌·최덕효·황의원 공동대표와 김기수 대변인, 위인연에서 박세원 대표, 나수열 부대표가 함께 했다. 미디어워치 독자모임 회원들과 한국근현대사연구회 회원들도 객원멤버로 참석했다.





이날 최덕효 공대위 공동대표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 ‘강제연행설’과 ‘성노예설’, ‘14세 소녀설’, ‘20만명설’ 등이 잘못된 속설임을 설명하면서, 거짓 역사왜곡을 상징하는 위안부상을 즉각 철거해야 한다는 내용의 기조연설을 했다. 

나수열 위인연 부대표도 위안부 지원단체들의 이른바 ‘위안부 비즈니스’ 문제를 조목조목 짚었다. 나 부대표는 “전국에 개당 수천만원 대의 위안부상이 120여 개나 이미 세워져 있고 해마다 이것이 늘고 있다”면서 “위안부 애니메이션, 뮤지컬, AI, 게임, 액세서리 등 끝없는 위안부 상업화 문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어진 발언 순서에서 김기수 공대위 대변인은 정대협이 매주 수요집회를 통해 미성년자들에게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성노예’ 등 잘못된 관념을 심어주고 있는 반교육적 문제를 고찰했다. 김 대변인은 “역사왜곡 문제를 떠나서 이러한 정대협의 수요집회 미성년자 동원은 일종의 아동학대행위”라면서 “정대협은 반일정치를 하고 있는 것이지 위안부를 위한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마지막으로 김병헌 공대위 공동대표는 ‘존립 근거가 사라진 위안부피해자법을 즉각 폐기하라’는 제목의 기자회견문을 낭독했다. 김 대표는 “위안부피해자법은 제2조 1항 위안부피해자를 정의하면서 그들에게 위안부 생활을 강요한 장본인이 일제라고 적시했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 배치되는 허위”라면서 “이 법의 존립 근거가 사라졌으므로 이 법은 마땅히 폐기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날 집회는 위안부상과 2미터 정도만 간격을 둔 채 초근접거리에서 열렸다. 때문에 주최측은 정대협과 반일단체들의 극심한 반발을 우려했으나 다행히 경찰의 질서유지로, 집회는 무난하게 진행됐다. 실제, 백은종 서울의소리 대표 등 반일활동가들이 여럿 현장에 나타났지만 별다른 분란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공대위는 앞으로 매주 화요일 위안부상 바로 옆에서 위안부상 철거 촉구 집회를 계속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아래는 이번 집회 기자회견문 전문.


[기자회견문] 존립 근거가 사라진 '위안부피해자법'을 즉각 폐기하라!


일제하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보호·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약칭: 위안부피해자법)’은 당장 폐기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해당 법률 제2조의 정의가 역사적 사실과 배치되기 때문이다.


이 법률 제2조 1항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동원되어 성적 학대를 받으며 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피해자를 말한다.’고 정의하였다. 일본군 위안부를 강제로 동원하고, 성적으로 학대하고, 위안부 생활을 강요한 장본인이 바로 일제라는 것이다.


하지만 위안소의 설립 목적과 당시의 사회 상황, 그리고 위안부들의 증언에 비추어 볼 때 이는 위안부의 진실을 왜곡한 거짓말이다. 먼저 위안소 설립 목적에 대해 윤미향(전 정의기억연대 대표)은 점령 지역에서의 납치, 강간과 같은 전시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해서, 군인들의 성병 예방을 위해서,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라고 정리하면서 이를 위해 일본군은 남성들의 성적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매춘’은 필요한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라고 쓰고 있다.


윤미향의 설명에 따르면 위안소는 전시 성폭력 방지, 군인들의 성병 예방과 사기 진작을 목적으로 마련된 성적(性的) 위락 시설, 즉 매춘업소였던 것이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사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는 계약에 의해 이루어진 매춘의 성격”이라고 한 여성가족부 홈페이지의 설명이나, 정대협에서 발간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1)』에서 “위안소 규정에는 군인들의 계급별로 사용시간에 따라 요금이 명기되어 있고, 혼잡을 방지하기 위하여 요금은 대부분 표[切符]로 지불하도록 되어 있었다.”고 한 설명과도 일치한다.


결국 일본군 위안부는 일본군의 성욕(性慾) 해소를 목적으로 동원된 여성을 이르며, 양자를 이어주는 매개체는 돈이다. 때문에 이들 사이에서 돈을 벌기 위해 각종 방법으로 위안부를 동원해서 위안소를 운영하는 업자가 등장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들이 바로 포주(抱主)다.


국내에 미군 부대가 주둔하는 곳이면 기지촌이 있듯이 당시 일본군 주둔지에는 일본군을 대상으로 돈을 벌기에 혈안이 되어 이역만리 타국으로 여인들을 끌고 다닌 포주들이 있었다. 그들에게 위안부는 일본군을 대상으로 한 상품이었고, 일본군은 돈을 벌어주는 중요한 고객이었다.


그들은 사업 밑천인 여성들을 확보하기 위해 취업사기, 인신매매, 유인 유괴, 공무 사칭 등 실로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음은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이 포주에게만 집중된 것은 아니다. 위안부 주선업자, 인신매매범, 합법을 가장한 수양(收養) 부모뿐만 아니라 자식을 물건 취급하며 너무나 쉽게 팔아넘긴 부모들도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를 피해자라고 한다면 이들을 물건처럼 팔아넘긴 부모와 인신매매범, 그리고 포주가 바로 가해자였던 것이다.


일본 군인은 소정의 비용을 지불하고 성욕을 해소하는 성매수자였기에 돈이 있으면 위안소를 이용하고 없으면 이용할 수 없었다. 막대한 액수의 전차금을 지불하고 확보한 여성을 아무런 대가없이 고객에게 제공할 포주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피해자가 된 인물들이 바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학순, 김복동, 길원옥, 이용수씨와 같은 분들이다.


1924년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난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의 주인공 김학순(1924~1997)씨는 생후 백일도 안 되어 아버지를 여의고, 열 네 살 되던 해에 어머니가 재혼하자 새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열다섯 살 때 기생을 키우는 양아버지에게 40원에 팔려갔다. 양아버지는 미리 데려 온 다른 양녀와 김씨를 평양기생학교에 보내 2년 동안의 기생 교육을 시킨 다음 국내 영업을 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녔으나 19세라는 나이 제한에 걸려 좌절되자 두 여인을 데리고 중국으로 갔다.


양아버지에 이끌려 베이징에 도착한 김학순씨는 거기서 별을 두 개 단 장교와 군인들에게 납치당했다고 하였으나 이는 신뢰하기 어렵다. 그들이 김씨를 데리고 간 곳이 중국 사람들이 도망치면서 버리고 간 빈 집이었다는 점, 거기에서 두 여인을 강간하고 잠을 잤다는 점, 다음날 아침 김학순씨의 찢어진 옷을 본 장교라는 남자가 ‘이제 그런 옷은 여기서 입지 못한다.’고 한 점, ‘우리를 직접 관리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한 점 등을 고려할 때 그들은 인신매매범이거나 포주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김씨가 1991년 폭로 당시 “나를 데리고 갔던 양아버지도 당시 일본 군인들에게 돈도 못 받고 무력으로 나를 그냥 빼앗기는 것 같았다.”는 보도와 “양녀들을 이용해 일본군을 상대로 ‘영업’을 하려했던 양아버지는 일본군의 총칼에 돈한 푼 받지 못하고 이들을 일본군에게 넘겨주었다.”는 보도를 미루어볼 때 김씨를 끌고 간 사람을 군인이라 하기는 어렵다. 이 세상 어느 군대를 막론하고 여인을 사고파는 군인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길원옥 평화상’의 주인공 길원옥씨(1928~ )는 열세 살에 감옥에 있는 아버지 때문에 푸줏간에 20원에 팔렸다가 우여곡절 끝에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가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그곳에서 성병에 걸려 더 이상의 영업을 할 수 없게 된 길씨는 한국인을 따라 귀국하게 되는데, 이때가 15세 무렵이었다.


귀국한 길씨는 생계를 위해 군수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과거 평양기생학교에 다니면서 알게 된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하던 중 ‘중국에 가면 편안하고 돈 많이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함께 압록강을 건너 북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냥 술집에서 노래나 하고 술을 따르는 줄 알았을 뿐 위안소인 줄 몰랐다고 한다. 이러한 길씨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만주로 갈 때나 중국으로 갈 때나 모두 돈을 벌기 위해 자발적으로 간 것이지 누구에게 끌려간 것이 아니다.


‘김복동’이라는 영화와 미국에 김복동 센터 건립으로 널리 알려진 김복동(1926~2019)씨는 '계급장이 없는 누런 옷을 입은 일본인'이 아들이 없기 때문에 대신 정신대로 가야 한다고 부모를 속여 자신을 강제로 끌고 갔다고 했다. 김복동씨를 끌고 간 일본인은 양산에서부터 부산, 시모노세키, 대만, 광동,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홍콩 등지를 이동하면서 계속 끌고 다니며 영업을 하다가 해방이 되자 도망을 가버렸다고 했다.


군인이 1940년부터 해방 때까지 소속부대를 떠나 여인들을 데리고 다니며 영업을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결국 김복동씨를 끌고 간 사람은 ‘정신대’ 동원이라는 명목으로 공무(公務)를 사칭한 인신매매범이거나 포주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가 군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일본인이었는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2017년 5월 미군의 성주 사드 기지 설치에 반대하며 ‘어떤 미국 연놈이 우리 대한민국에다가 사드, 택도 없는 소리 하지 마라’고 일갈했으나 그로부터 6개월 뒤 내방한 트럼프 미대통령과 포옹한 위안부로 널리 알려진 이용수씨는 자신을 끌고 간 사람에 대해 ‘국민복에 전투모를 쓴 일본인 남자가 건네준 옷 보퉁이 속에 있는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에 마음이 혹해 다른 생각도 못하고 선뜻 따라나서게 되었다.’고 증언하였다. 이후 ‘밤에 잠을 자는데 일본군이 와서 끌고 갔다’고 증언을 바꾸지만 신뢰하기 어렵다. 결국 이용수씨는 일본인 남자가 건네 준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에 홀려 자신도 모르게 끌려간 것이지 일본 군인이 끌고 간 것이 아니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위안부 피해자법 제2조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동원되어 성적 학대를 받으며 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피해자를 말한다.’고 한 정의는 역사적 사실과 배치된다.


강제 연행의 주체에 대해 정대협에서 발간한 증언집에서조차 ‘지금까지 발견된 군문서 중에 위안부 동원방식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은 한 건도 없다.’고 한 언급이 이를 뒷받침한다. 조선의 여인을 강제로 동원해서 성적 학대를 하며 위안부 생활을 강요한 장본인은 일본군이 아닌 포주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가난 때문에 자식을 내다버린 부모가 있고, 온갖 사기와 회유, 협박을 동원한 인신매매범이 있고, 포주와 공생 관계에 있는 관리자가 있었던 것이다.


결국 위안부 피해자법 제2조 1항은 명백히 역사적 사실과 배치되는 허위이며, 이에 따라 설정된 '이 법은 일제에 의하여 강제로 동원되어 위안부로서의 생활을 강요당한 피해자를 보호·지원하고......’라고 한 제1조(목적)도 당연히 효력을 잃고 이 법의 존립 근거는 사라졌다. 


이에 우리는 존립 근거가 사라진 ‘위안부피해자법’을 즉각 폐기할 것을 촉구한다.


2020. 4. 28.


반일동상진실규명공대위

위안부인권회복실천연대

 



[ 공대위와 위인연의 제21차 위안부상 철거촉구 집회 (스케치 영상) ]




[ 최덕효 공대위 공동대표 연설 ]



[ 나수열 위인연 부대표 연설 ]



[ 김기수 공대위 대변인 연설 ]



[ 김병헌 공대위 대표 기자회견문 낭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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