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본, 한국, 그리고 중국 사이의 여러 이슈 중에서 아마 위안부 문제보다 더 논쟁적인 이슈는 없을 것이다.
당시 일본군의 책임 문제는 물론, 현 일본 정부의 책임론에 대해서도 갑론을박이 지금도 격렬히 이어지고 있는데, 특히 위안부의 정확한 숫자, 그리고 전쟁 당시와 전쟁 이후 그녀들이 처했던 상황에 대해서 다들 커다란 견해 차이가 있다. 위안부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일각에선 자신들이 겪었다고 하는 끔찍한 경험담을 토로하는 이들도 있다.
1992년에 중도좌파 성향이자 일본내 두 번째로 발행부수가 많은 일간지인 아사히신문은, 위안부 이슈를 1면에서 센세이셔널하게 다뤘다. 이후 이 문제로 오랜 조사가 진행됐는데, 결국 아사히의 위안부 관련 기사들은 허위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아사히신문은 2014년이 되어서야 이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과했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고 아사히의 보도들은 이미 너무도 큰 상처를 남겼다.
국제관계학 교수로서 또 여러 정부 기관에서도 활동한 바 있는 하타 이쿠히코 씨는, 위안부 문제라는 매우 논쟁적이고 감정적인 문제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이번 저서, ‘위안부와 전쟁터의 성性’은 완성도가 상당히 높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일본, 한국, 미국의 여러 문헌들을 참고했으며, 한때 기밀문서로 취급된 자료나 당사자의 회고록까지 인용하고 있다. 나아가 그는 여러 국가들의 옛 위안부와, 그들을 해당 업종으로 끌어들인 위안소의 소위 업주나 브로커 등과 직접 면담을 갖기도 했다.
저서에서 그는 옛 위안부와 당시 군인들을 임금을 비교하고 있으며, 그들의 생존율에 관한 비교연표도 기술하고 있다. 또한 기록이 남아 있는 일본 및 세계의 매춘 제도에 관한 다양한 2차 사료물도 참고자료로 제시하고 있다.
그의 연구 결과를 살피고서 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필자의 감상을 영어 두 단어로 정리하자면, ‘it's complicate(복잡하다)’라고 할 수 있겠다.
위안소의 근원을 쫒다
하타 이쿠히코 교수는 일본군 전용 위안소의 시초는 1932년 상하이라고 서술한다. 중국군을 격퇴한 뒤 당시 일본군 사령관은 다음과 같이 썼다. 군인들이 “여성을 찾아 사방을 헤매고 있다.” 따라서 “시설”을 설치함으로써 “불미스러운 사건”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 위안부 시설을 설립하고 위안부를 모집하는데 있어선 엄격한 점검이 있었으며, 이에 많은 여성들은 거기에 합격하지 못했다. 통과한 여성들도 질병 예방제와 소독제가 주어졌고, 일주일에 한 번씩 의사의 진찰을 받아야 했다. 위안부는 부적절한 행위를 자행하는 고객, 예컨대 취객 또는 학대를 감행하는 손님은 거부할 수 있었다.
전쟁이 확대되고 더 많은 군인이 참전하게 되면서 위안부의 수요도 동시에 증가했다. 사실, 각 위안부들은 지리적으로 서로 크게 분산되어 있었고, 명칭 또한 다양했기에(작부, 호스테스, 댄서, 게이샤 등. 또한 모든 직종이 성 서비스를 제공한 것도 아니다), 하타 이쿠히코 교수의 관련 방대한 연구가 책 한 권에 다 담기기에는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분명 보편적인 패턴은 존재했다.
유괴된 것이 아닌, 가족이 팔아넘긴 것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에 납치됐다는 옛 위안부의 증언과는 달리 실제로 그녀들은 빈곤한 가족에 의해 주로 조선인 브로커들에게 팔려 갔다고 한다.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에 대한 일탈 행위도 발생했었으나 이는 엄중하게 처벌되었다. 한 사건에서는 해당 군인에 대해서 사형이 선고된 경우까지 있다.
그리고 당시 조선 지역 주재 일본인 순사들은 단순히 여성들에 대한 납치설이나 강간설만 해당 지역에 풍문으로 떠돈대도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킬 수 있다고 우려했었다. 일본인 순사들은 그런 명분으로 폭동이 일어난다면 조선인 순사들은 폭동을 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더구나 특히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에 의해 그런 일탈이 벌어진다면 서구 식민주의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대동아공영권을 형성했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약화시킬 것이 뻔하기도 했다.
다음으로 급여에 대해 조사를 해보면, 위안부 여성은 당시의 일본군보다 몇 배나 많은 임금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위안부들이 1, 2년 안에 채무 조건을 충족시켰다. 그들 중 일부는 근속했고, 수입을 본국에 있는 가족에게 송금하거나 자신들을 위해 아낌없이 쓰는 경우도 있었다. 다만 수입을 저축하여 군표로 임금을 대신 받은 검소한 위안부들은 불행을 피할 수 없기는 했다. 일본이 전쟁에서 실패를 거듭하고 불리해지자 군표의 가치가 떨어진 것이다.
불어난 강을 건너 위안부를 대피시키던 한 일본군 장교가 전한, 매우 가슴 아픈 사례도 있다. 그녀는 그녀의 소지품이 담긴 무거운 가방을 버리라는 장교의 말을 거절했고, 순간 발을 헛디뎌 미끄러지며 급류에 휩쓸려 갔다.
위안부의 생존율에 관한 기술도 있다. 전쟁터에서 일본군은 항복을 거부하라는 명령을 받들어야 했지만, 대부분의 위안부들은 대피가 가능했다. 따라서 위안부의 생존율은 병사들보다 훨씬 더 높았을 것이다.
미군을 위한 위안부 시설
하타 이쿠히코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을 점령한 미군, 그리고 한국전쟁 시에 주한미군을 위한 위안부 시설도 존재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는 이미 인신매매가 금지되고, 매춘이 불법화되었으므로 성병에 대한 의무적인 검사나 치료를 시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미군과 한국군의 성병 발생률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심지어 한국 정부는 종전 후에도 외화를 마련하기 위해 관광진흥법을 제정하여 미군 병사들의 방문을 장려했다. 이에 가세하여 서울시는 일본으로부터의 ‘섹스 관광(sex tour)’까지 촉진했다.
한국 전문가인 캐서린 문(Katherine Moon)의 분석에 따르면, 1960년대에 이른바 섹스 관광을 통해 벌어들인 수입이 한국 국민총생산의 25%에 달했을 정도라고 한다.
1960년대 한국이 베트남전에 참전했을 때, 한국군은 사이공에 있는 위안소 운영을 위해 베트남 여성을 모집했다. 한국은 항시 일본을 규탄하고 배상을 요구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들이 설치한 위안부 시설에 대해서는 자국 정부를 비롯하여 자국 언론은 언급조차 꺼리고 있다.
하타 이쿠히코 교수의 책은 이러한 한국 정부의 태도에 대한 한국 사회의 인식과 숨겨진 분노를 지적하고 있다. 예컨대 한국의 한 여성은 서울시를 “미군의 큰 포주(a big pimp of the U.S.)”라고 꼬집었다.
한편, ‘위안부상(像)’은 한국 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건립되어 일본을 향한 비난은 나날이 가속되고 있다.
실은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전 관방장관의 사과와 아시아여성기금 설립은 역효과만 낳았다. 이는 일본의 아시아여성기금 측이 옛 위안부들이 거주하는 국가와 직접적인 합의를 거치지 않아 발생한 문제이기도 하다.
또한, 속죄금을 받은 위안부와 이를 거부한 위안부 사이에 큰 갈등이 빚어졌다. 하타 이쿠히코 교수는 일련의 사태를 두고, “호의의 노력이 본래의 의도와는 상반된 결과를 낳는 좋은 예”라며 냉철하게 지적했다.
하타 이쿠히코 교수는 또 하나의 견해를 소개한다. 위안부 제도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여성들을 혹독한 환경에서 보호하려는 상층의 욕망과, 가난한 집 자식들을 위안부로 삼아 그녀들에게 그런 모든 부담을 떠넘기려고 한 사회의 관행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더 넓은 의미에서, 전쟁은 관련 국가들에서 매춘제도를 조장하게 만들기도 한다.
하타 이쿠히코 교수는 “모든 사실관계를 공평하게 정리했으므로 이제 결론은 독자들을 몫”이라고 언급하며 이 감명깊은 저서를 끝맺는다.
책 관련 정보
제목: Comfort Women and Sex in the Battle Zone
저자: Ikuhiko Hata
출판사: Hamilton Books, a division on Rowman and Littlefield
출판일자: September,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