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가 된 것은 한국의 명문 연세대학교 강의 중 발언이었다. 2019년 9월 ‘발전사회학’ 수업에서 위안부에 대해 언급한 내용이 명예훼손이라며 형사고발된 것이다. ‘학문의 자유’가 가장 존중되어야 할 곳에서 일어난, 너무나도 이상한 ‘마녀사냥’의 그 모든 전말.
[필자소개] 류석춘(柳錫春). 전 연세대학교 교수. 1955년생. 연세대학교 졸업. 미국 일리노이 대학에서 박사 학위. 87년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조교수, 97년부터 동 교수가 되어 2020년에 정년 퇴직했다. |
2019년 9월 17일 정년을 1년 남긴 필자는 연세대 강의실에서 수강생들과 열띤 토론을 했다. 이 강의는 대한민국이 발전했다고 인정한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밝혀보자는 ‘발전사회학’ 수업이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필자는 같은 방식으로 강의를 해왔다.
늘 그랬듯이 강의의 시작은 ‘대한민국의 발전에서 일제 식민지 시기의 역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를 다뤘다. 식민지 시기를 ‘수탈’의 시대로만 접근하면, 건국 후 이루어진 대한민국의 비약적 발전과정을 온전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필자의 견해를 먼저 전했다.
기를 쓰고 반발하는 학생들
이 문제제기를 학생들이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대략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질문을 이어가야 한다. “1961년 5·16 이후 이루어진 고도성장은 오로지 박정희 정권의 역할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는가요?” 이 질문에 학생들은 대부분 ‘아니’라고 반응한다. 그리고는 원론적인, 그래서 사실은 ‘하나 마나 한 이야기’를 한다. 국민들이 함께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필자의 질문이 이어진다. “국민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은 시기가 있었나요?” “북한이 못사는 건 북한 주민이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인가요?” “후진국 국민들도 열심히 노력하지 않아서 후진국이 된 건가요?” 이 대목에 오면 학생들의 저항이 상당히 수그러든다.
질문은 계속 이어진다. “그렇다면 박정희 정권의 앞 단계인 이승만 정권의 역할이 대한민국의 발전에 기여한 측면은 없을까요?” 다시 학생들이 펄쩍 뛴다. 친일파가 세운 나라인데, 6·25 전쟁이 모든 것을 파괴했는데, 전쟁 후엔 원조경제가 전부였는데, 부정부패가 만연했는데 등의 이유를 거론하며 ‘절대 아니’라고 반응한다.
당황하는 학생들
이 대목에서 이승만 정부의 역할에 대한 논의로 바로 뛰어들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아직 학생들이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그럼 여러분은 박정희도 인정하지 않고 이승만도 아니라고 하니, 결국 그 앞 단계인 일본의 식민지배 시기에 발전의 씨앗이 뿌려진 거라고 보는 건가요?” 요 대목에서 학생들 대부분은 ‘황당’하다는 반응 일색이다.
그러나 필자는 질문을 계속한다. “발전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면 발전의 역사적 뿌리가 있어야 하는데, 박정희도 아니고 이승만도 아니라니 그렇다면 식민지배 시기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요?” “설마 여러분은 나라를 넘긴 구한말이 대한민국 발전의 기원이라고 생각하나요?”
“구한말에서 35년 식민지배로 착취당하고, 미군정 3년 지나가고, 이승만 12년도 부정하고, 갑자기 박정희 18년으로 연결이 되어 발전이 이루어졌다고요?” “그도 저도 아니라면 대한민국의 발전은 뿌리 없이 갑자기 나타난 박정희라는 인물의 ‘개인적 카리스마’ 덕분이라고 보아야 하는 겁니까?”
학생들의 묵묵부답이 이어진다. 그렇다. 지금까지 학생들에게 전달된 현대사 교육에는 이런 질문들이 전혀 던져지지 않았다. 이러한 질문들에 노출되고 나서야 비로소 학생들의 뇌에는 ‘식민지 시기’와 ‘이승만 시기’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설 공간이 마련된다. 그렇다고 여기서 논쟁이 끝나는 건 아니다. 논쟁은 다음 단계에서 더욱 격화된다.
식민지기는 수탈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식민지배 시기에 대한 설명 또한 엄청난 장애물과 마주친다. “식민지배 시기는 수탈과 근대화가 공존하는 시기”라는 필자의 주장은 시작부터 저항에 부딪힌다. 학생들은 ‘수탈’이 당연하지, 무슨 ‘근대화’라는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일축한다. “서구를 공부해서 만든 일본의 근대 시스템이 우리에게 강압적으로 이식되는 계기가 식민지였다”는 필자의 설명은, 그래서 “일본에 감사해야 하냐?”는 학생들의 비아냥으로 이어진다.
“정치적으로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차별을 받은 것이 맞지만, 동시에 사회문화적으로는 조선이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 전통사회의 굴레를 일본이 벗겨 준 것 아니냐?”는 필자의 반문에 학생들은 당황하기도 한다. 그러나 곧 일본이 그렇게 한 것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일본을 위한 것일 뿐이라는 주장으로 넘어간다. “일본을 위한 것은 맞지만, 결과적으로 우리 근대화에 도움이 되지 않았느냐?”는 필자의 대응은 ‘결과론’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
“학교, 공장, 감옥과 같이 시간을 관리하는 ‘감시와 처벌’ 시스템이 다름 아닌 근대”라는 푸코 (Michel Foucault) 를 동원하며 필자는 “일본이 조선을 근대로 기율(紀律)했다”고 설명을 이어간다. 다른 나라의 식민지 경험과도 비교하면서 “식민지는 전(全) 지구적으로 근대가 확산되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고 부연한다.
독립투쟁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학생들은 그렇다면 식민지의 독립투쟁을 ‘반(反)근대투쟁’으로 보아야 하냐고 반문한다. 이에 필자는 “식민지의 독립투쟁은 정치적 독립을 위한 것이지, 사회문화적으로 근대로부터 독립해 전통으로 회귀하자는 투쟁이 아니다”라고 덧붙인다.
“식민지 주민을 대변할 국회의원이 없고, 군대에도 가지 못하면서 세금만 부담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정치적 독립이 필요한 건 맞다. 그러나 반상(班常), 서얼(庶孽)과 천출(賤出), 그리고 남녀(男女)라는 신분의 구별을 없애고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보통교육을 실시하는 시대가 식민지와 함께 왔는데 그것을 다시 전통으로 되돌리자는 건 불합리한 것 아니냐?”고 다시 필자가 맞받아친다.
한국의 진정한 역사를 처음 깨닫는 학생들
학생들은 그렇게 차원을 나누어 분석적으로 접근하면 식민지라는 차별의 ‘총체적 성격’을 희석시키는 문제가 생긴다고 대응한다. 총체적으로 접근하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다른 무엇보다 경제적 차원의 문제를 논의하면서 등장한다. “토지를 수탈하고, 쌀을 빼앗아 가고, 징용으로 노동을 착취하고, 위안부를 강제로 끌고 갔다는 등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반일종족주의’적 사고의 산물이라는 최근 연구성과를 소개”하면 처음에는 전혀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영훈, 김낙년, 정안기, 이우연, 주익종 등의 학자들이 주도한 ‘식민지근대화론’의 연구성과를 설명하고 또 그들의 논문과 책을 직접 읽히면 학생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는다. 그러면서도 조금씩 그 타당성을 받아들인다. 이들의 논리와 자료가 그만큼 탄탄하기 때문이다.
“일본과 조선이 단일한 시장으로 묶이면서 발생한 인적·물적 교환의 결과 토지를 일본 사람들과 거래했고, 쌀을 돈 받고 팔았고, 계약에 따라 돈 벌기 위해 노동자가 일본으로 진출했음”을 학생들이 비로소 깨닫게 된다. 물론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일본이 항복하기까지 대략 9개월 동안에는 ‘징용’ 즉 ‘강제로 끌려가 일한 사람들’도 있었음을 덧붙여야 한다. 나아가서 그렇지만 그들도 돈은 받았다는 설명도 해야 한다.
‘구조적 강제’라고 하는 방패
그럼에도 절대 넘어서지 못하는 벽이 하나 남아 있다. 다름 아닌 ‘위안부’ 문제다. 이 문제는 특히 오늘날 ‘페미니즘 담론’에 익숙한 여학생들의 저항이 거세다. 온갖 자료를 동원해 “위안부들 하나하나의 사정이 강제로 끌려가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다고 보기엔 무리”라는 설명을 아무리 해도, 그들은 끝내 넓은 의미의 ‘구조적 강제’라는 개념을 방패로 버틴다.
그러나 온 국민이 열심히 일하지 않은 시대가 없듯이, 넓은 의미의 ‘구조적 강제’가 없는 시대 또한 없다. “과거 식민지 조선이건 오늘날 발전한 대한민국이건, 후진국이건 선진국이건, 전통사회건 근대사회건, 넓은 의미의 ‘구조적 강제’가 없는 현실 사회가 존재하는가?” 그래서 이 말은 아무런 설명도 못 하는 “하나 마나 한 말일 뿐”이라 필자는 지적한다. 바로 이 허상과의 대립과 논쟁이 만들어 낸 사건이 필자를 형사 법정에 서도록 만든 2019년 9월 17일 연세대 사건이다.
세 가지 쟁점
2019년 9월 17일 연세대 강의 중 검찰이 문제 삼은 발언은 2020년 10월 29일 서울서부지방검찰청이 필자를 ‘일본군 위안부 및 정대협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며 배포한 ‘보도자료’에서 잘 드러난다.
이 보도자료는 피고인 필자가 “1)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매춘에 종사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것이다, 2) 정대협이 일본군에 강제동원 당한 것처럼 증언하도록 위안부 할머니들을 교육했다, 3) 정대협 임원들이 통합진보당 간부들이며 정대협이 북한과 연계되어 있어 북한을 추종하고 있다는 3가지 취지의 “허위사실을 발언하여 일본군 위안부 및 정대협과 윤미향의 명예를 훼손”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세 쟁점 중 이 글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이 매춘에 종사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위안부가 된 것이다”라는 쟁점에 관한 필자의 강의 및 학생들과의 질문·답변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밝힌다. 누군가에 의해 불법으로 녹음되어 언론에 유통된 끝에 재판의 증거로까지 채택된 음성 녹음파일에 담겨 있는 내용이다. 검찰이 기소한 이 형사사건은 현재 1심 10차 공판이 2022년 5월 25일로 예정되어 있다.
현재 매춘산업에서 일하는 여성은 자발입니까 강제입니까?
여학생 A: 교수님께서 아까 위안부 관련 말씀을 하시다가 ‘중간에 끝까지 말씀을 안 하신 것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렇다면 위안부로 끌려갔던 여성분들은 자기가 자발적으로 갔다고 교수님은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강제로 연행해 가지 않았다고...
교수: 지금 매춘산업이 있잖아요, 우리나라에. 잘 모르죠? 어린 학생들은 잘 모르지만, 강남에 가면 엄청 많아요. 마사지 뭐 어쩌고, 저쩌고... 룸싸롱 많아요. 지금 거기에 여성들이 다 일하고 있잖아요. 그 여성들은 자기가 갔어요? 부모가 팔았어요? 어떻게 해서 간 거야?
여학생 A: 그렇다면 지금 있는 매춘부랑 예전에 위안부를 지금 동급으로 본다는 말씀이신가요?
교수: 그거랑 비슷한 거죠.
여학생 A: 그렇다면 지금까지...
교수: 그 사람들이 살기가 어려워서 매춘업에 들어가게 되요. 집이 어렵고, 본인이 돈을 못벌고. 그러니까 매춘으로 유혹이...‘여기 와서 일하면 조금만 일해도 월급 많이 받을 수 있어, 와서 일해.’ 이런 유혹이 있고 해서 들어가서 일하게 되잖아요.
여학생 A: 그렇지만...
교수: 지금 그렇다는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죠? 지금도 안 그래요?
여학생 A: 지금은 그렇지만...
교수: 지금은 그런데, 과거에는 ‘안 그랬다’라고 얘기하려고 하는 건데, 그게 아니고 옛날에도 그랬다고.
여학생 A: 그렇다면 교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제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예전에 일제 치하에서 위안부로 일했던 모든 여성들이 다 그렇게 자발적으로 직접 가서...
교수: 지금 일하는 사람들은 자발적이예요? ‘자의반, 타의반’이죠. 지금도 ‘자의반, 타의반’이예요.
여학생 A: 제가 알기로는...
교수: 생활이 어려워서 그렇지, 내가 원해서가 아니예요.
연세대학교에서의 처분
나머지 두 가지 즉 “정대협이 일본군에 강제동원 당한 것처럼 증언하도록 위안부 할머니들을 교육했다” 및 “정대협 임원들이 통합진보당 간부들이며 정대협이 북한과 연계되어 있어 북한을 추종하고 있다”는 쟁점에 관해서는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교수가 일본 역사인식문제연구회(歴史認識問題研究会) 논문집 ‘역사인식문제연구’ 제10호 (봄/여름호, 2022년 3월 18일)에 발표한
“한국에서의 ‘학문의 자유’ 위기에 대해서”(韓国における学問の自由の危機について)(한국어 번역판)를 참조하기 바란다.
다른 한편, 필자는 2019년 9월 17일 강의에서 “궁금하면 한번 해 볼래요?”라고 한 발언 때문에 연세대 당국에 의해 ‘정직 1개월’ 징계처분도 받았다. 이 발언이 ‘언어성폭력’에 해당한다는 이유였다. 이 발언이 ‘매춘을 해보라’는 말로 들렸다는 학생의 일방적 주장에 학교 당국이 동조한 결과다. 그러나 이 발언은 매춘을 ‘연구해 보라’는 발언이었을 뿐, 성희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발언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월간(月刊) ‘하나다(Hanada)’ 2020년 8월호 기사(한국어 번역)를 참고하기 바란다. 필자는 연세대의 징계처분이 잘못되었다고 현재 민사재판에서 다투고 있는 중이다.
피해자 중심주의, 이대로 좋은가?
만약 김병헌 국사교과서연구소 소장이 쓴 책 ‘빨간 수요일’이 필자의 강의 당시 출판되어 수업의 교재로 삼을 수 있었다면 문제의 사건은 아예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책은 ‘반일종족주의’적으로 위안부 문제에 접근하는 기존의 문헌과 판결을 정밀하게 추적하고 비판하면서도, 반일종족주의의 본산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 혹은 정의기억연대) 가 출판한 자료를 핵심적인 근거로 사용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대협의 ‘수요집회’를 지지하는 학생들을 설득하는 데에는 그만큼 효과적일 수 있다.
책의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이 저자인 김병헌은 이 책을 철저히 증거 위주로 썼다. 저자의 말대로 그래야 덜 다치기 때문이다. 집필에 활용된 자료는 역설적이게도 정대협이 1993년부터 2014년까지 약 30년에 걸쳐 나름 심혈을 기울여 발간한 총 8권의 위안부 증언집이다.
정대협이 선전한 위안부들의 구술 증언을 토대로 이른바 ‘피해자 중심주의’를 금과옥조로 삼고 있는 학생들은 그래서 더욱 이 책을 외면할 수 없다. 참고로, ‘피해자 중심주의’란 피해자의 진술만 있으면 다른 증거들과 교차검증 할 필요도 없이 그 진술을 중심으로 피해를 인정해야 한다는 매우 ‘황당한’ 주의다.
“민간의 매춘업소에서 일한 위안부”로 보아야 할 예
그러나 동시에 김병헌은 식민지 당시의 공식 문헌과 사료, 특히 군 위안소를 운영한 일본군 문서는 물론 미군의 기록 그리고 당시의 신문기사 등도 함께 폭넓게 검토한다. 그리하여 저자는 이들 객관적 사료를 통해 드러나는 당시 위안부 현상의 실체를 입체적으로 접근한다. 그러한 종합적 판단의 결과로 다음과 같은 증언의 경우에는 ‘일본군 위안부’가 아니라 ‘민간의 매춘업소에서 일한 위안부’로 보아야 한다고 깔끔하게 정리한다.
1) 일본군 위안소가 없는 곳 즉 일본, 조선, 대만, 만주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증언 (군 위안소는 전선 가까이에만 설치되었다).
2) 중일전쟁이 발생하는 1937년 이전부터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증언 (군 위안소는 중일전쟁 이후 설치되었다).
3) 주민등록상 1930년 이후 출생했거나 17세 이하의 나이에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증언 (당국은 당시 기준 미성년자의 군 위안소 취업을 불허했고 이에 관한 문서 관리를 엄격히 시행했다).
4) 군인과 민간인을 동시에 상대하며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증언 (일본군 위안소는 군인 전용이었다).
“위안부 생활자보다 일반 매춘업소에서 종사한 여성이 많다”
김병헌의 지적처럼 일본 본토, 조선, 대만, 만주에는 군 위안소가 전혀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위안부들의 기억과 주장에만 의존해 군 위안소의 위치를 파악한 지금까지의 지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참고로 ‘연합군번역통역부 보고서’는 조선인을 포함한 일본인 전쟁포로들에 대한 미군의 심문보고서(IR, Interrogation Report) 및 이를 종합한 연구보고서(RR, Research Report)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이 네 기준을 적용해 김병헌은 정대협에서 발간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시리즈 6권 그리고 ‘중국으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시리즈 2권에 등장하는 증언들을 교차 분석한다. 그리하여 김병헌은 “상당수가 위 사항에 해당된다”고 밝힌다. 즉 “일본군의 관리·감독 하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한 여성보다 일반 매춘업소에 종사한 여성이 더 많다”고 지적한다(김병헌, 2021, 53쪽).
한 걸음 더 나아가 김병헌은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동원된 경우’는 아예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다”고 단언한다. 저자의 치밀한 분석의 결론은 “여성가족부에 등록된 소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240명 중 ‘위안부피해자법’이 정의한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된 사례는 단 한 명도 없다”는 충격적 선언으로 마무리 된다 (김병헌, 2021, 54쪽).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가 가장 끈질기게 분석한 사례는 1993년 정대협이 출판한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증언집 I’ 에 등장하는 이용수 및 김학순 사례다. 다음에는 이를 자세히 살펴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