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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칸신초] ‘위안부 증언’은 왜 오락가락하나? 류석춘의 검증

‘슈칸신초(週刊新潮)’ 2022년 6월 2일호 게재, ‘류석춘 교수 수업중 위안부 문제 발언 파동’ 전모 수기 두번째



※ 본 기고문은 일본 유력 주간지 ‘슈칸신초(週刊新潮)’ 2022년 6월 2일호에 게재된 류석춘 전 연세대학교 교수의 ‘위안부 증언’은 왜 오락가락하나? “위안부는 매춘의 일종” 발언으로 형사소추된 한국인 전직 교수의 검증(「慰安婦証言」はなぜ二転三転? 「慰安婦は売春婦の一種」発言で訴追された韓国人元教授が検証)’ 제하 수기를, 류 전 교수의 허락을 얻어 게재한 것입니다. 류 전 교수의 한국어 기고문 원문을 기초로, 슈칸신초의 번역·편집 과정에서 일부 누락된 부분은 보강하였음을 밝힙니다.


[슈칸신초] ‘류석춘 교수 수업중 위안부 문제 발언 파동’ 전모


1.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비참한 빈곤임을 지적한 류석춘


2. 위안부 증언’은 왜 오락가락하나? 류석춘의 검증 

 







위안부들의 초기 증언을 통해 떠오르는 그림은 빈곤에 의해 인신매매가 됐다는 불쌍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녀들은 모두가 “일본군에 의해 강제연행되었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 배후에는 그녀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한 일본과 한국, 양국 좌파 세력의 연계가 있었다. 


[필자소개] 류석춘(柳錫春). 전 연세대학교 교수. 1955년생. 연세대학교 졸업. 미국 일리노이 대학에서 박사 학위. 87년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조교수, 97년부터 동 교수가 되어 2020년에 정년 퇴직했다.  



이용수와 김학순, 두 사람은 정대협이 주도한 위안부 운동을 각각 상징하는 인물이다. ‘빨간 수요일’의 저자인 김병헌은 1990년대 초반부터 오늘날까지 온갖 매체에 증언한 기록을 하나하나 추적하며 증언이 바뀌고 있음을 분석한다.  

‘2007년 2월 미 의회’에서 이용수는 ‘군인에게 끌려갔다’고 증언했지만, 그로부터 15년 전인 ‘1992년 8월 KBS 생방송’에서는 ‘가죽구두와 원피스에 홀려 따라 나섰다’고 증언했다. KBS 에서의 증언 영상은 간유리로 가려져 있지만, 영상 속 음성은 주인공이 이용수라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해 준다.

다른 한편 1992년 KBS 방송에 나온 증언은 1993년 출판된 정대협의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증언집 I’(한울) 124쪽에 등장하는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강제가 아니라 업자의 유혹에 넘어갔음을 명확히 증언하고 있다. “빨간 원피스와 가죽구두가 보였다. 그걸 받고 어린 마음에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그래서 그만 다른 생각도 못하고 선뜻 따라 나서게 되었다.” 

그렇다면 어느 증언이 사실인가? 2022년 2월 현재도 진행 중인 필자의 1심 형사 재판 과정에서도 이 문제가 논란이 됐다. 







상식에 근거하지 않은 증언

2021년 3월 12일 있었던 두 번째 공판이었다.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한 정의기억연대 사무총장 한경희의 발언에 대해 피고인인 필자가 재판장의 허락을 얻어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사례를 딱 한 사람만이라도 구체적으로 지목해 달라’고 하자, 한경희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했다.

대신 한경희는 ‘강제로 끌려갔다’라는 표현의 의미가 반드시 “공권력이 물리적으로 강제연행한 것으로 국한해 좁게 해석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한경희는 일본 제국주의 아래에서 군 위안소로 간 경우는 모두 ‘넓은 의미의 구조적 강제’로 보아야 한다고 법정에서 말했다. 필자가 강의에서 지적한 ‘하나 마나 한 이야기’일 뿐이다.

한경희의 증언은 분명 보편적 상식에 기반한 판단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권력에 의한 강제연행’은 이용수의 ‘2007년 미 의회 증언’ 같은 상황이어야 한다. 한경희 증인의 ‘넓은 의미의 구조적 강제’라는 추상적 개념은 오늘날 대한민국 아니 전 세계에서 매춘에 들어가는 여성들이 모두 동일하게 겪는 ‘가난’이라는 구조적 조건을 지적하는 말일 뿐이다. 


또다른 증언

이용수의 경우와 비슷한 증언의 변화를 김학순의 경우에도 추적할 수 있다. 이용수의 증언이 실린 1993년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증언집 1’ 34쪽 및 35쪽에는 김학순의 다음과 같은 증언도 등장한다. 그대로 인용한다 (밑줄은 필자의 강조).

...내가 열네 살 되던 해 어머니는 재혼을 하셨다. ... 어머니와 나 둘이서만 살다가 아버지라는 사람하고 함께 사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란 소리도 안 나오고 그 앞에 잘 나가지도 않았다. 어머니에게도 정이 떨어져 반항을 하곤 하니깐 어머니하고도 사이가 갈라졌다.

어머니는 나를 기생을 기르는 집에 수양딸로 보냈다. 그때 내 나이가 열다섯 살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그 집에 가서 노래를 불러보고 합격했다. 그리고는 어머니가 수양아버지에게 40원을 받고 몇 년 계약으로 나를 그 집에서 살게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도 집에 있는 것이 거북살스럽고 싫어서 그편이 오히려 속 시원하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수양딸로 간 집은 .... 그 집에는 나보다 먼저 온 양딸이 한 명 더 있었다. ... 그 언니하고 나는 평양 기생권번에 같이 다녔다. 그 권번은 2층 집이었는데 대문에 큰 간판도 있고 생도도 300명이나 있었다. 나는 2년 정도 권번에 다니면서 춤, 판소리, 시조 등을 열심히 배웠다. 

권번에서 졸업증을 받게 되면 정식 기생이 되어 영업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나이가 열아홉 살이 되어야 관에서 기생 허가를 내주었다. 졸업하던 해 내 나이가 열일곱 살이라 졸업을 하고도 영업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양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허가를 받아보려고 애를 많이 썼다. 내가 나이보다 몸이 성숙하여 양아버지는 나이를 늘려 이야기했지만 관에서는 실제 나이가 열일곱 살이라 안 된다고 했다. 

국내에서 우리를 데리고 영업할 수 없었던 양아버지는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집에서 함께 기생수업을 받았던 언니와 나는 양아버지를 따라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 그때가 1941년, 내가 열일곱 살 나던 해였다. 양아버지는 중국으로 떠나기 전에 어머니에게 연락을 하여 중국으로 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떠나는 날 어머니는 노란 스웨터를 사가지고 평양역까지 나와서 배웅해 주었다.






증언이 바뀌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

이 증언 또한 김학순이 가난의 희생자로 매춘에 진입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 줄 뿐, 일본 공권력의 강제연행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빨간 수요일’의 저자 김병헌 역시 이 두 위안부의 초기 증언은 그들이 ‘가난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의 증언은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차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피해자’로 둔갑한다. 이렇게 증언이 둔갑한 결정적 증거는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출판한 또 다른 책에서도 확인이 된다. 다름 아닌 정대협을 이끌었고 2022년 2월 현재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윤미향이 2016년 ‘사이행성’에서 출판한 25년간의 수요일에 등장하는 이용수와 김학순에 대한 기록이다. 

이 책의 48쪽에는 이용수, 138쪽에는 김학순에 관한 기록이 각각 등장한다. 이 기록들에 따르면 이용수는 옷과 구두에 홀려 따라나선 것이 아니라 “밤에 자다가 강제로 일본군들에 끌려갔고” 김학순은 어머니가 팔아서 양아버지(포주)를 따라 중국으로 간 게 아니라 “납치되어 일본군에 끌려갔다”는 것이다. 

위안부들의 증언이 역사적 사실과 부합하는가 하는 문제는 필자의 형사 재판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 쟁점 중 하나다. 왜냐하면 검찰이 필자를 기소한 이유가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허위사실’을 유포해 ‘위안부들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쟁점에 대해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궁금하다.


요시다 세이지의 ‘나의 전쟁범죄’

1983년 일본에서는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라는 공산당원이 나의 전쟁 범죄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저자인 요시다가 일제 시절 국가 권력의 명령으로 조선 여인을 ‘강제연행’했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증언집이다. 이 책은 출판과 함께 이른바 ‘양심적’인 일본의 지식인과 활동가들로부터 엄청난 주목을 받았다. 그로부터 6년 뒤인 1989년에는 나는 조선 사람을 이렇게 잡아갔다는 제목을 달고 한국어로도 출판됐다.

일본에서는 이 책이 출판된 지 대략 10년이 지난 1992년 1월부터 이 책에 나오는 증언을 근거로 아사히신문(朝日新聞)이 대대적으로 ‘강제연행 프로파간다’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1990년 11월 활동을 시작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출범한 지 얼마 되지 않을 무렵이다. 일본 열도가 발칵 뒤집혔다. 

급기야 요시다는 ‘일본의 양심’으로 떠올랐고, 그 와중에 사죄하러 한국을 방문하는 이벤트도 마련했다. 1990년 11월 활동을 시작한 정대협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귀인(貴人)이 나타난 셈이었다. 1992년 8월 12일 방한한 요시다를 인터뷰한 경향신문은 “나는 일본 정부의 명령으로 한국인 종군위안부를 강제송출한 노예사냥꾼이었다”고 폭로했고, “만일 일본 정부가 끝까지 이를 부인하면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놓겠다”

당시 이 증언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규탄하는 여론이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 들끓었고, 또한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여론의 흐름을 배경으로 일본에서는 1993년 8월 내각의 관방장관 고노 요헤이(河野洋平)가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더욱이 관헌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고 일본 정부의 책임을 인정하는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세계 여론에 부응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악화일로에 있던 당시 한·일 관계를 정상화시켜 보겠다는 일본 정부의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선택이었다. 그러나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김영삼은 1995년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놓겠다’고 호언하며 ‘중앙청’으로 쓰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는 등 대일 강경책으로 일관해서 일본의 노력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어서 1995년에는 호주 언론인 조지 힉스(George Hicks)가 요시다의 증언을 주요 근거로 삼아 위안부(The Comfort Women)란 영어책을 출판했다. ‘일본 제국 군대의 성노예(Sex Slaves of the Japanese Imperial Forces)이란 선정적 부제를 붙인 책이다. 일본의 위안부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 창구가 된 책이다. 

“요시다 세이지는 직업적 거짓말쟁이”라는 지적을 무시

마침내 1996년 1월 UN 인권위원회는 ‘강제연행’과 ‘위안부 성노예 설을 뒷받침하는 일명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를 발표했다. 일본의 한국 식민통치에 관한 역사는 물론 현지어도 전혀 모르는 스리랑카 출신의 법률가 라디카 쿠마라스와미(Radhika Coomaraswamy)는 일본과 한국에서 요시다를 지지하는 그룹, 특히 한국 ‘정대협’의 도움을 받으며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위안부들의 증언을 모아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을 내세우며 보고서를 썼다.

1983년 요시다의 책으로 시작해 1992년부터 전개된 아사히신문의 ‘위안부 프로파간다’는 1993년 고노담화를 거쳐 드디어 1996년 UN 인권위원회의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를 통해 위안부 문제에 관한 세계 여론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그러나 1996년 발표된 그녀의 보고서는 1995년에 나온 힉스의 책에 일방적으로 의존한 것이었다. 영어로 된 위안부 문헌이 그것밖에 없을 때였다. 그리고 앞서 밝혔지만 힉스의 책은 요시다의 증언에 주로 의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결국 힉스의 책을 매개로 요시다의 증언을 재탕한 보고서에 지나지 않는다.

이 보고서가 나오는 과정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도 있었다. 앞서 지적했듯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현지어 즉 한국어와 일본어를 몰라 원(原) 사료를 전혀 읽을 수 없었던 쿠마라스와미는 보고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위안부 문제 전문가 두 사람을 면담했다.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및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다. 

하타는 면담에서 다음과 같은 3가지 핵심 내용을 전했다고 한다. (a) 위안부 ‘강제연행’에 관한 일본 측의 유일한 증인인 요시다 세이지는 ‘직업적 거짓말쟁이’다. (b) 폭력적으로 연행되었다는 위안부 증언 중 객관적인 증거로 뒷받침되는 증언은 없다. (c) 위안부의 고용 관계는 일본군이 아닌 위안소 경영 업자와 체결되었다. 

그런데 1996년 1월 발표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하타의 이 같은 지적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하타는 ‘분게이슌주(문예춘추, 文芸春秋) 1996년 5월호에 왜곡된 나의 논지(歪められた私の論旨) 라는 글을 발표했지만,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난 뒤였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학문적으로는 수준이 낮은 보고서

이 문제의 심각성은 지금도 인터넷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한 좌담회 기록에서 잘 드러난다. 2006년 10월 개최된 아시아여성기금과 우리들(アジア女性基金と私たち)이란 일본의 위안부 전문가들 좌담에는 다음과 같은 토론 기록이 남아 있다.

요코타 요조(横田洋三): 우선, 1996년에 유엔 인권위원회의 “여성에 대한 폭력”의 특별 보고자인 쿠마라스와미 씨가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쿠마라스와미 씨는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는 일반적인 문제, 특히 현 시대의 문제에 집중했기에, 위안부 문제는 자신의 직접적인 주제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NGO로부터 “아니다, (위안부) 피해자는 지금도 있다”라는 압력이 가해져, 결국 보고서의 부록 형태로 추가된 것입니다. 

오누마 야스아키(大沼保昭): 안타깝게도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학문적으로는 수준이 낮은 보고서입니다. 사실이란 면에서도 신뢰할 수 없는 의견에 의거하고 있으며, 법적인 의논(議論)에 있어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특히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의 위안부 부분은 낙제점이 주어질 수준이며, 맥두걸 보고서는 이보다 훨씬 수준이 낮다고 생각합니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보고서 내용의 대부분이 특히 힉스의 책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오누마 야스아키(大沼保昭): 저런 책에 의존한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성의가 없으며, 학문적으로는 낙제에 해당됩니다. 


토론자들은 모두 UN이라는 국제기구를 통해 국제사회에 위안부가 ‘강제로 연행된 성노예’라는 인식을 퍼뜨린 ‘쿠마라스와미 보고서’가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세계의 여론은 요시다의 증언으로 완전히 기울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페미니즘에 기초한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의 포로였던 쿠마라스와미는 한국의 정대협과 일본의 요시다 간에 구축된 ‘피해자 중심주의’라는 올가미를 벗어나지 못했다. 거짓과의 싸움이 요구되는 상황은 그렇게 온 세상을 뒤덮었다.

요시다의 증언은 완전한 거짓말임이 명백해지다

다른 한편 ‘위안부 문제의 진실’을 찾는 노력은 언론의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조금씩 조금씩 진전되고 있었다. 요시다의 증언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당시를 같이 살았던 사람들은 요시다가 증언한 일을 전혀 모르겠다고 말했다.

1989년 8월 17일 제주신문은 요시다가 강제연행을 했다는 제주도 성산포의 단추공장을 찾아가 나이든 주민들의 증언을 확인한 결과, 그런 일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주민들이 날조라 지적하며 일본의 몰염치한 상술에 분개’한다는 부제를 단 기사였다. 그러나 이 기사는 반일감정에 묻혀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일본에서도 같은 의심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초반 주한 일본대사관에서 전문조사원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는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가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며 일본인 납북자 문제를 파헤치는 친한파 언론인이자 학자이다. 그 역시 당시를 산 사람들의 경험이 요시다의 증언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에 주목했다. 

니시오카의 집요한 문제제기에 힘입어 일본에서는 마침내 아사히신문이 요시다의 책 출판 시점으로부터 무려 30여 년이 지난 2014년 4월 진실규명을 위한 자체조사단을 제주도에 파견하게 되었다. 이들의 확인을 거치며 요시다의 증언은 ‘처음부터 끝까지 완전한 거짓’이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한국 국민은 모르는 진실

결국 아사히신문은 2014년 8월 5일 요시다의 증언이 날조임을 사고(社告)로 밝혔고, 16개의 관련 기사를 삭제한다고 발표했다. 아사히신문 회장은 사과했고, 편집국장은 파면됐다. 심지어 2017년에는 요시다 세이지의 장남이 이미 고인이 된 아버지의 잘못을 대신 반성하는 책도 출판했다.
 
니시오카는 위안부 문제를 둘러싸고 아사히신문과 싸워 온 과정을 정리해 2007년 6월 ‘알기쉬운 위안부 문제(よくわかる慰安婦問題)’(문고판은 2012년에 출간)라는 책을 일본에서 출판했다. 요시다의 거짓 증언이 책으로 나온 지 무려 20여 년 후다. 이 책은 ‘누가, 언제, 어떻게 문제를 확산시켰는가? 그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필독서’라는 겉표지 띠를 두르고 있다. 또한 ‘현 상황에 입각한 신(新) 내각 관방장관 담화 시론(試論)을 제안한다’는 파격적 대안도 담고 있다. 

한국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던 이 책은 마침내 2021년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됐다. 청색 표지를 가진 번역본은 한국 정부와 언론이 말하지 않는 위안부 문제의 진실이라는 도발적 제목을 달고 있다. 또한 녹색 표지를 가진 별책 부록 자료집은 이 문제와 관련된 일본 측의 주요 문헌 자료를 모두 한국어로 정리해 담고 있다. 




녹색 별책부록 자료집에는 2015년 발표된 아사히 신문의 위안부 보도에 대한 독립검증위원회 보고서’, 2014년 발표된 일본 정부의 고노담화 검증보고서’, 1996년의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유엔에 제출했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즉시 철회한 일본 정부의 유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대한 반론서 등 요시다 세이지의 거짓 증언과 그것이 불러온 후폭풍을 일본 사회가 극복하는 과정에서 제출된 중요 자료들을 망라하고 있다. 모두 일본군 위안부에 관한 왜곡을 밝히는 핵심 자료들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아사히신문의 의도적 왜곡 보도는 이미 1991년부터 시작된 일이다. 한국에서 정대협이 출범한 1990년 11월에서부터 대략 1년이 지난 시점이다. 1991년 12월 6일 일본 법원을 통해 일본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한 김학순이 소장에 ‘어머니가 팔아 기생이 되었다’라고 기재한 것을 아사히신문은 ‘일본군이 위안부를 여자정신대로 강제연행했다’고 바꿔서 보도했다. 

이 왜곡을 찾아낸 사람이 바로 니시오카다. 김학순의 이 재판은 10여 년을 끌다가 2004년 일본의 최고재판소에서 최종적으로 패소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드러난 아사히신문의 만행을 한국의 언론은 단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의 사법부도 전쟁 책임을 인정하지 않기는 마찬가지’라는 비난 보도로 일관했을 뿐이다. 한국의 위안부 담론은 이렇게 거짓의 산을 쌓았고, 진실은 그 아래 깊숙이 묻히게 되었다.

일본과 한국의 좌파 언론과 활동가들이 이렇게 연대해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고 있는 현실을 한국 국민들은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다. 더구나 이런 사실을 조금이라도 밝히면 오히려 ‘일본 극우의 앞잡이’라는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반일 종족주의’가 끝날 날이 오리라 믿고

이 암울한 현실 앞에서 필자는 ‘No Japan’ 구호를 앞세운 한국 반일 좌파의 수장 문재인 대통령의 반일선동이 절정에 이르던 시점에 ‘역사의 진실’을 강의실에서 말하는 엄청난 ‘죄’를 지었다. 말 그대로 역린(逆鱗)을 건드린 것이며, 그 결과는 검사의 기소였다. 형사 법정에서 ‘허위사실로 위안부의 명예를 훼손한 책임’을 지라는 공권력을 상대로, ‘허위사실이 아니며, 설사 허위사실이라 하더라도 학문의 자유로 보호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며 다투고 있는 상황이 결코 즐거울 리 없다. 

그러나 언젠가는 빨간 수요일이라는 또 하나의 디딤돌을 통해 나의 전쟁 범죄가 쌓아 놓은 거짓의 산이 무너지고 마침내 위안부 문제의 진실이 밝혀져서 유령처럼 우리 사회를 휘감고 있는 반일종족주의가 산산조각 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 필자는 확신한다. 결국에는 진실이 이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이 필자는 2020년 8월 정년을 맞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현재는 이미 정년퇴임을 1년 반이나 넘긴 상태다. 그 사건이 벌어지고는 벌써 2년 반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그 세월이 만들어 준 혜택도 없지 않다. 만약 지금 필자가 다시 발전사회학 강의를 한다면, 이제는 학생들에게 읽힐 좋은 텍스트가 많아져서 고맙고 기쁘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도 논문철회 요구가

다른 한편, 뜻밖에 등장한 미국 동료 교수의 존재도 큰 힘이 되고 있다. 다름 아닌 하버드 대학의 마크 램지어 (Mark Ramseyer) 교수다. 그는 순수 학술지 ‘인터내셔널리뷰오브로앤이코노믹스(International Review of Law & Economics) 2021년 3월호에 일본군 위안부들이 매춘업자들과 맺은 계약을 ‘연기(年妓)계약’(indentured contract, 연한을 정하고 매춘이나 기생 용역을 제공하는 계약) 개념으로 실증적으로 분석하는 학술논문 ‘태평양 전쟁에서의 성계약(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을 발표했다. 

그러나 논문이 세상에 나오는 즉시 그는 미국에 있는 일본학 전공의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주의에 심취한 교수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강제로 끌려가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한 위안부’를 ‘계약에 의한 자발적 매춘 노동자’로 접근하는 잘못을 저질렀다는 이유였다. 좌파들의 상투적인 딱지 붙이기 즉 ‘일본 극우의 앞잡이’라는 비난은 급기야 논문 철회요구로까지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학술적인 비판과 논쟁은 발붙일 틈이 없었다. 

그가 미국에서 받은 비난은 내가 한국에서 받은 비난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자신들과 다른 입장의 ‘논문을 썼다’ 혹은 ‘강의를 했다’는 이유로 언론을 통해 ‘왕따’를 시키고 대학에서 몰아내는 처벌을 기정사실로 만들어 가는 방식이다. 차이가 있다면 하버드대학은 학문의 자유를 지켜 주었지만, 연세대학은 이를 지켜 주지 않았다는 점 뿐이다. 그러나 어찌 됐건 진실은 비록 더딜지는 몰라도 언젠가는 드러나고 만다, 그렇게 나는 믿는다. 거짓을 잠시 가릴 수는 있어도 영원히 숨길 수는 없다.



정치적으로 이용된 위안부

문제가 된 강의에서 학생들 상대로 강의를 마치며 필자가 한 말을 이 지면에 옮기는 것으로, 결론을 대신한다. 다시 들어도 옳은 말이다.

“... 하지도 않은 일들을 일본이 했다고 얘기하는 게 불의잖아요. 한 일을 가지고 얘기해야지.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정의는 없어요. 사실에 기초해야 정의가 나와요. 하지도 않은 일을 한 걸로 만들어서 누구를 죽이면, 많은 사람을, 그게, 그야말로 마녀사냥이지. 

아니 그런데 여러분들은 이상하게 일제 때 위안부 할머니에 대해서는 그렇게 동정하면서 왜, 요새 오늘날 매춘업에 있는 여성들은 동정하지 않아요? 그 사람들 동정하세요. 차라리. 그 사람들한테 뭔가 좋은 길로 갈 수 있는 길을 만드는 노력을 하세요... 왜 태국 여자가 여기까지 팔려와서 마사지하게 만드냐고 ... 

왜 그건 가만 놔두고 100년 전에 있었던 일 가지고 난리냐고. 바로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은 못 본 체 하면서. 신촌 바닥에 나가 보세요. 여러분들 술 처마시는 뒷골목에 가면, 바로 그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모른단 말이예요? 그거를 모른 척하는 건 비겁한 거지. 

남들이 다 상 차려 놓으니까, 거기 가서 숟가락 들고서. 여러분이 판을 만들어 보세요. 여러분이 보기에 잘못된 게 있으면 바로 잡아야 돼. 그걸, 지금. 왜, 그건 바로 잡지 못하고 100년 전에 가정이 어려워서 자기 집 경제적으로 도움 주려고 전선에 나갔던 그 할머니들을 이용하냐고. 

... 강남에 가면, 신촌에 가면 매춘업이 성하고 있는데, 그 매춘업을 없애는 노력을 하세요, 차라리. 그거는 못 본 체 하면서. 비겁한 거예요. 정신대협의회가 상 차려 놓은 거에 여러분들 알량한 정의감으로 달라붙어 가지고 사회정의를 이루겠다고 난리를 쳐대는데, 알량한 거에요.

여러분들이 한번 만나나 봤어요? 그분들 목소리나 들었지. 진짜 그 사람들 삶이 어떤지 뒤져 봤어요? 이영훈(교수)가 다 뒤졌어요. 증언을 다. 젊었을 때 했던 증언, 그 일을 했다가 돌아와서 60년대 자기가 무슨 일을 어떻게 했고, 증언이 그대로 나와요. 책 보세요. 그 사람들은 진짜 열심히 살았어요, 정신대 할머니들, 위안부 할머니들. 

그걸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게 힘들게 살고 열심히 살았는데. 지금 매춘업에 나간 사람들 여러분 욕 못하죠.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여건이 좋고, 그 사람들은 여건이 나빠. 여건이 나쁜 중에 먹고 살라고, 거기에 팔린 거예요. 거기다 함부로 못 해요,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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