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게이슌주] 하타 이쿠히코 “쿠마라스와미는 위안부 문제를 왜곡했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학생 리포트라면 낙제점을 줄 수 밖에 없어 ... 요시다 세이지라는 ‘직업적 거짓말쟁이’에 의해 유엔 인권위까지 놀아난 위안부 문제

미디어워치 편집부 mediasilkhj@gmail.com 2022.09.22 10:49:40



※ 본 기고문은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전 니혼(日本)대학 교수의 것으로, 일본 유력 월간지 ‘분게이슌주(文藝春秋)’가 1996년 5월호에 왜곡된 나의 논지(歪められた私の論旨) 제하로 게재한 것입니다. 원 글은 위안부 문제 관련 유엔 인권위에서의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발표(1996년 2월경)를 맞아, 해당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서도 위안부 문제로 전문가로 언급됐던 학자인 하타 이쿠히코 교수가 보고서에서 자신의 전문적 의견이 왜곡돼 실린 사연을 담았습니다. 미디어워치가 분게이슌주 측과 하타 이쿠히코 교수의 허락을 얻어 번역게재합니다. 아래 사진과 캡션은 미디어워치의 것(도표 제외)입니다. (번역 : 요시다 켄지)


왜곡된 나의 논지
(歪められた私の論旨) 


올해(1996년) 2월 6일부터 7일에 걸쳐, 일본의 각 신문들은 일제히 종군위안부 문제에 관한 라디카 쿠마라스와미(Radhika Coomaraswamy) 유엔 특별보고관의 일본 정부에 대한 권고에 관해서 보도했다. 

엄격하게 말하면, 권고의 표제는 ‘전시(戦時)의 군사적 성노예제 문제에 관한 보고서(Report on the Issue of Military Sexual Slavery in Wartime)’(일변련(日弁連, 일본변호사연합회)의 번역)라고 한다. 영문 원문을 참조하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한국, 일본에서의 조사 여정에 따른(on the mission to the Democratic People's Republic of Korea, the Republic of Korea and Japan)’이라고 한정 짓고 있으며, 일본인 위안부와 여타 아시아 제 국가들의 위안부는 언급하지 않아 실질적으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식민지(외지)였던 조선반도 출신의 조선인 위안부만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군사적 성노예제(military sexual slavery)’라는 섬뜩한 네이밍을 쓰고 있으나 이는 이른바 ‘종군위안부’를 가리킨다.

필자는 원래 위안부 문제의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우연한 계기로 인해 관련 논고를 두세 개 발표하게 됐고, 지난해(1995년) 7월에 일본을 방문한 쿠마라스와미 여사와도 면담한 인연도 있고 하여 권고 내용에 주목했다. 보고서를 곧바로 훑어봤지만, 오인(誤認)과 오단(誤断)이 적지 않았다. 이 일은 인권 문제이기도 해서 그냥 제쳐둘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이 보고서의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기로 한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영문으로 37쪽, 9장, 139항으로 이루어져 있고, 25개의 각주와 옛 위안부 16명을 포함한 총 78명의 면접자 리스트가 첨부되어 있다. 우선 문제의 일본 정부에 대한 6가지 권고의 요점을 아사히신문(1996년 2월 6일자 석간)으로부터 인용한다.

1) 일본제국 육군이 만든 위안소 제도는 국제법에 위반된다. 일본 정부는 그 법적 책임을 인정하라. 
2) 일본의 성노예가 된 피해자 개개인에 보상금을 지급한다. 
3) 위안소와 그와 관련된 활동에 대한 모든 자료를 공개한다. 
4) 피해자 여성 개개인에 대해 공개 서면에 의한 사과를 한다. 
5) 교육의 장에서 이 문제에 대한 이해를 더한다. 
6) 위안부 모집과 위안소의 설치에 관여한 범죄자의 추궁과 처벌을 가능한 실시한다. 


생각해 보면, 1991년 12월의 한국인 옛 위안부 세 사람에 의한 제1차 소송, 그리고 이듬해 1월에 방한한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 총리가 일본군의 관여를 인정하여 사죄한지 4년 여의 시간이 경과했다. 그동안 일본 측은 나름대로의 대응책을 강구해 왔다. 권고 2)에 관해서는 일본 정부가 사무비를 부담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 기금(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아시아여성기금)이라는 민간 기금이 작년(1995년) 8월에 설립되어 모금이 시작됐고, 현재 지불 준비 중에 있다.

권고 3)에 관해서는 92년 7월까지의 조사를 통해 관련 공문서 127건을 일본 정부 내에서 발견하여 공개했다. 권고 4)에 있어서는 여성기금의 모금 분배와 함께 사죄문을 첨부한다고 무라야마 총리가 약속했다. 권고 5)의 경우, 아직 한국에서의 기술 사례는 없지만, 일본 측에서는 “고등학교의 역사교과서 7사(社) 9권(冊) 모두에 종군위안부가 등장”(93년 7월 2일자 산케이신문)한다. 타이시도 츠네야스(大師堂経慰) 씨의 95년 4월 조사에 의하면 위안부에 관한 기술은 더 늘어 8사 20권에 달했으며, 이정도면 충분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나머지는 권고 1)과 권고 6)인데, 특히 ‘범죄자의 추궁과 처벌’을 요구한 권고 6)은 법의 원칙과 인권이 얽혀있어 가볍게 취급할 수 없는 논점이다. 이 부분을 다시 한 번 영문으로 읽고서 필자 나름대로 직역을 해보면 다음과 같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의 위안부 조달 및 위안소의 제도화(recruitment and institutionalization)에 관여(involve)한 범인을 가능한 특정하여 처벌(identify and punish)해야 할 것이다.” 


‘명령자’면 그렇다 치더라도 ‘관여자’의 경우 해석과 운용에 따라 처벌의 대상자가 얼마든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시효가 만료되어 문제없다는 의견도 나오지만, 위안부 문제에 관여해왔던 국내외의 인권 법률가들 사이에선 “인권 문제에 시효를 적용해선 안 된다” 혹은 “사후에 입법하면 된다”는 등의 논의가 오가고 있다. 쿠마라스와미 여사도 또한 컬럼비아대 대학원을 졸업 후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소지한 법률 전문가로서, 이러한 논의를 수용한 끝에 권고를 작성했다고 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유사한 위안소 제도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이탈리아, 미국, 영국, 소련 등에서도 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구체적으로는 요시미 요시아키의 책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를 참조), 일본만을 처벌하라는 것은 공평성이 결여된 것이 아닌가. 

시효가 없는 사후입법, 심지어 추후에 서술할 애매모한 정황 증거만 갖고 일본의 ‘관여자’만이 처벌된다면, 이전의 도쿄재판과 BC급 전범재판, 이보다 최근으로는 한국에서의 광주사건(光州事件) 등 또한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옴진리교급의 흉악범죄에서도 이러한 망론(暴論)은 제기된 바 없는데,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일본의 언론, 법조계, 학계, 종교계에서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를 전면적으로 지지하는 목소리가 강하다. 몇 가지 대표적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일본 신문사들 중에서 위안부 문제에 누구보다 열정적인 아사히신문은, 1996년 2월 6일자 석간 1면에서 개요를 소개한 뒤, 10면에 구체적인 해설 기사를 게재했다. 이 외에 “법적인 반론을 해야 할 때는 할 것”이라는 하시모토 류타로(橋本竜太郎) 수상의 코멘트, “기금 활동은 지속하겠다”는 아시아여성기금 사무국장의 담화, 한국 및 필리핀의 반향을 전하는 특파원 보고, “향후의 권고가 법적, 정치적인 논의를 부활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제네바 특파원 보고, 4명의 지식인과 관계자의 코멘트 등 수많은 목소리가 소개됐다.

앞서 언급한 4명의 지식인은 다음과 같다. “쿠마라스와미 권고의 내용은 옳다”고 하는 재일조선인 옛 위안부인 송신도(宋神道) 씨,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저희들이 일본 정부에 요구해 온 것과 많은 점에서 일치한다”라고 주장하는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주오(中央)대학 교수, “유엔 전체의 인식이 되어 일본 정부도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의 내용을 수용할 것을 기대”하는 다카기 겐이치(高木健一) 변호사, “100점 만점의 내용”이라고 주장한 위안부 지원 단체의 양징자(梁澄子) 씨. 이처럼 일제히 ‘권고 지지파’뿐이며, 이는 아사히신문 측의 의도적인 지면기사로 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요시미 요시아키 교수는 “쿠마라스와미가 직접 내 의견을 청취했다”고 소개되고 있는데, 쿠마라스와미 여사는 필자의 의견도 역시 청취했고 보고서에 필자의 실명이 언급되면서 그 내용을 포함시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사히신문은 필자에게는 어떠한 코멘트도 요구하지 않았다.  

아사히신문의 견해는 하나같이 불분명하지만, 취재 장소에서 만난 면면들이나, 또한 “개인에게는 국가 보상을 회피해 온 일본 정부에 대해, 유엔의 인권 전문관이 명확하게 ‘NO’라는 사인을 냈다..구 일본군의 성적노예제와 그 후유증에 시달려 온 여성들은...”이라는 머리말만 보더라도 권고 지지의 방침을 내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이니치신문은 제1보에서는 쿠마라스와미 권고의 요점만 보도하는 데 그쳤으나, 2월 7일자에서는 “위안부 문제에서 눈을 돌리지 마라, 국가배상을 요구하며 시민단체결성”이라는 제목을 달며, ‘응답하라! 유엔 권고’라는 시민단체(단체장은 무샤코지 킨히데(武者小路公秀) 교수와 여성사 연구가인 스즈키 유코(鈴木裕子))가 탄생, 백만 명 규모의 전국 서명운동을 전개한다고 보도하며, 동조하는 자세를 보였다. 

이 시민운동에는 가톨릭교회와 일본그리스도교회도 합류하고 있다고 알려졌는데, 일본 ‘가톨릭신문(カトリック新聞)’의 1996년 2월 25일호에는 “일본 정부는 법적 책임을 져라”라는 시라야나기 세이이치(白柳誠一) 추기경 담화와, “처벌이라는 권고도 수용할 것”이라는 오오츠협의회(大津協議会, 일본 시민단체) 총간사장 담화가 게재됐다. 

의외라고 느낀 것은 일본변호사연합회(일변련)가 1996년 2월 7일자 발표 성명에서 “일변련은 이 보고서가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채택될 것을 강하게 희망한다”라고 언급했다는 것인데, 일변련은 일본 정부가 “(권고 내용에 대한) 실행을 주저없이” 착수하는 것이 “국제사회에서 일본이 명예로운 위치와 평가를 획득할 마지막 기회”라고 못 박고 있다. 

일변련은 지난 몇 년간, 인권파 변호사를 동원하여 실질조사나 규제활동을 하며 수 차례의 위안부 소송도 맡아 왔다. 이른바 경험 풍부한 프로의 법률가 집단임에도 위안부의 인권을 구제하기 위해서 ‘일본인 모집 관여자’의 인권을 희생해도 괜찮다는 감각은 충격적이다. 

학생 리포트라면 낙제점  

훑어 본 결과,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 대해 정면부터 이의를 제기한 논평은 산케이신문의 칼럼 ‘산케이쇼(産経抄)’뿐이었다. 그 주장은 나중에 언급하기로 하고, 다음으로 해당 보고서가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은 내용의 권고를 도출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논증을 거쳤는지부터 분석해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보고서는 만약 구미(서구)의 1류 대학에 제출된 학생 리포트라면 낙제점을 줄 수밖에 없는 수준의 허술한 작품이다. 

필자는 하버드 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 두 대학교에서 공부를 했었고, 프린스턴 대학교에서는 가르친 경험도 있다. 리포트를 작성하여 채점 받은 적도 있거니와 채점을 직접 해본 적도 있다. 

채점을 할 때는 우선 말미의 각주(풋노트(footnote))부터 점검하는 것이 관례다. 인용 문헌의 수, 참고한 문헌의 질, 필수적이어야 할 문헌에 누락이 없는가, 실제로 읽고 인용한 것인지 확인하는 절차를 밟는다. 그 단계에서 중대한 실수가 발각되면 내용을 읽기도 전에 E(낙제점)를 주는 교수도 있다. 

쿠마라스와미 여사는 예일 대학교 및 컬럼비아 대학교를 나왔고 하버드 대학교에서도 공부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러한 리포트 작성상의 기법은 주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보고서의 사실관계에 관한 부분은 일제히 호주 출신 저널리스트인 조지 힉스(George G. Hicks)가 1995년에 간행한 책인 ‘위안부 : 일본제국의 성노예(The comfort women:sex slaves of the Japanese imperial forces)’라는 통속서(通俗書)로부터 인용하고 있다. 

(조지 힉스의 책은 한국에서도 '위안부 : 일본 군대의 성노예로 끌려간 여성들'이라는 타이틀로 창작과비평사에서 1995년도에 출간됐었다. - 편집자주). 


만일 이용한 참고문헌이 이 한 권의 책이라면 이를 통째로 베꼈다고 판정해도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 조지 힉스의 저서 또한 문제가 다분하다. 말미에 36개의 참고문헌을 기재했으나(쿠마라스와미 여사는 필자의 논문, 저서는 인용하지 않고 있다), 구미에서는 일반서에도 각주를 붙이는 것이 관행임에도 불구하고 각주가 특이하게도 없다. 즉, 어느 문헌에 근거하여 기술했는지를 파악할 수도 없는 형태로 쓰여 있다. 

그래도 인내하고 읽어나갔으나, 초보적인 실수와 왜곡이 만연하여 이제 와서 고쳐 쓰기에는 어렵다고 느꼈다. 한 예를 들면, 

“스즈키 유코(鈴木裕子)의 저서에 따르면 1932년의 제1차 상하이 사변(上海事変) 중에 일본군의 오카무라(岡村) 중사가 나가사키 현 지사에게 의뢰하여 북규슈(北九州)로부터 일단의 조선인 여성들을 상하이의 위안소로 보낸 것이 첫 번째 ...”(조지 힉스의 책 ‘위안부 : 일본제국의 성노예’ 19페이지, 밑줄은 필자)


라는 요지의 기술이 있다. 

여기서 스즈키 유코의 저서 ‘종군위안부・내선결혼(従軍慰安婦・内戦結婚)’를 살펴보면, 주지(主旨)는 동일하나, 책에는 밑줄이 그어진 부분의 내용은 없다. 스즈키 유코가 출처로 인용한 ‘오카무라 야스지 대장 자료(岡村寧次大将資料)’ 상권을 읽어 봐도 역시나 밑줄 부분의 내용은 없다. 

즉, 조지 힉스가 스즈키 유코를 인용하는 단계에서 “조선인 여성들”이라는 내용이 혼입된 것으로, 조지 힉스의 서문을 읽고 짐작이 갔다. 조지 힉스의 책 서문을 살펴보면, 조지 힉스 본인은 일본어를 못 읽으며, 도쿄대학의 다카하시 아키라(高橋彰) 교수에 부탁하여 재일한국인 여성 유미 리(이유미) 씨를 소개받아, 그녀가 일본의 운동가 등으로부터 자료를 수집하여 (아마도 영역도 하여) 보내주었다고 한다.  

조지 힉스는 자료의 80%를 그녀에게 의존했다고 서술할 정도이니 문제의 추가 부분은 조지 힉스와 유미 리 씨의 전달 단계에서 창작되어 고스란히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의 제24항에 전기(転記)되어 버렸다고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21항에는 미크로네시아에서 70명의 위안부가 일본군에 학살당했다고 쓰여 있는데, 인용원인 조지 힉스의 저서와 김일면(金一勉)의 저서(‘천황의 군대와 조선인 위안부(天皇の軍隊と朝鮮人慰安婦)’) 어느 한 곳에도 사람 숫자는 적시된 바가 없다. 하지만 보고서에는 70명이라는 숫자가 돌연 출현한다. 이러한 종류의 의문은 보고서의 다른 곳에서도 발견되지만 나머지는 생략한다. 

쿠마라스와미 보고관의 고의성이 있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표지에 반라(半裸)의 위안부 사진을 디자인으로 활용하고, ‘군신(軍神)과 비너스’(제1장), ‘인육의 시장’(제2장)과 같은 선정적인 제목을 단 비학술적인 문헌에 전면적으로 의존한 부주의의 대한 책임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는 이 외에도 일본 국가총동원법의 성립을 1932년이라고 쓰는가 하면, 그보다 2페이지 앞에는 1938년(이 연도가 정확하다)라고 기술하는 등 부주의함(careless miss)이 눈에 띄는데, 필자 또한 그 피해자 중 한 사람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 작년(1995년) 7월 23일, 필자는 도쿄에서 쿠마라스와미 여사와 면담했다(백인 남녀 보좌관 각 한 사람이 동석). NGO가 쇄도하여 한 사람당 5분으로 발언 시간을 제한했던 경우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필자가 쓴 영문 의견서(2페이지)를 펼쳐서 1시간 가량 설명과 질의 시간을 가졌던 필자는 그래도 이례의 행운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실 면담이 있던 9개월 전, 필자는 그녀가 정리한 예비 보고서를 읽고 이미 대략의 경향은 주지하고 있었으므로 신중하게 발언했다. 필자가 강조한 것은 

(1) 위안부의 ‘강제연행’에 대해 일본 측에서 유일한 증인으로 알려진 요시다 세이지는 ‘직업적 거짓말쟁이(professional liar)’다. 
(2) 폭력으로 연행되었다고 주장한 위안부의 증언 중 객관적으로 뒷받침된 사례는 단 하나도 없다. 
(3) 위안부의 고용계약 관계는 일본군이 아닌 업자(위안소의 경영자)와의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등이다. 

그리고 (3)의 실상 파악에 대한 자료로는 1944년 버마 전선에서 포로가 된 일본인 업자 부부와 20명의 조선인 위안부를 심문하여 미군정보부가 작성한 보고서(미 국립공문서관 소장)가 적절하다고 언급했고, 미군 보고서의 복사본을 건네주기도 했다. 



그러나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의 40항에서는 (3)의 논점에 대해 필자의 논지를 다음과 같이 정반대로 왜곡하여 소개하고 있다. 

“지바(千葉)대학의 역사학자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박사는... 대부분의 ‘위안부’는 일본군과 계약을 맺고 평균적인 군대의 급료(1개월에 15-20엔)보다도 110배나 많은 급료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에 필자가 쿠마라스와미 여사에게 일방적인 주장을 전했다고 반론할 수도 있겠지만, 다행히 필자에게는 그녀에게 건넨 영문 의견서가 남아있다. 필자는 해당 의견서에서 “미군 심문기록에 따르면, 여성들은 브로커(및 경영주)가 300-1,000엔의 전차금을 부모에게 지불하였는데 그 채무를 위안소에서 수입으로 반환했다. 경영자와의 수입 분배의 비례는 40 대 60으로, 여성들의 수입은 월 1,000-2,000엔, 병사의 월급은 15-25엔”이라고 명확히 기재했었다.

고용관계의 유무는 법적책임을 묻고 보상을 검토함에 있어 중요한 포인트다. 예컨대 도쿄대공습 당시에 순직(殉職)한 일본의 정규 소방사에게는 사망 사금(賜金)이나 은급(恩給, 연금)이 지급되나, 도움을 준 민간인들은 받지 못했다. 전재사(戦災死)한 일반 시민이 국가의 방공 책임을 묻고 특별입법으로 보상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실현되지는 않았다. 

위안부는 공창제도의 연장선에서 탄생했다. 평시에는 창부나 주인이 감독하고, 이를 지도한 것은 경찰이었으나, 전쟁터에서는 그 역할을 군이 담당한 것이다. 굳이 차이를 찾는다면 배와 트럭 등의 유송(輸送) 수단을 군이 제공하는 사례(빈선공여便宣供与)가 많았다는 점을 들 수는 있겠다. 

위안부 중에는 이전에 직업적 창부였던 예도 적지 않으므로, 이 경우 보상의 범의는 끝없이 넓어질 것이다. 관여나 감독 불행 접수의 책임을 물으면 전후 ‘자파유키상(ジャパゆきさん, 1980년대 일본 버블경제시대에 돈을 벌러 일본으로 건너온 아시아 각국의 여성들을 칭한 유행어)’에 대한 보상을 막을 이유도 사라질 것이다.   
         
오늘날은 신용조직이나 주전문제(住専問題, ‘주택 금융 전문 회사’의 준말)로 세금의 사용 방식에 대해서 엄격한 주문이 붙는 시대이기도 해서, 딱한 사정은 알겠으나, 고용관계의 유무로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쿠마라스와미 여사에게도 그러한 입장에서 이를 잘 설명했다고 생각되나, 필자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미군 보고서는 무시하고 위안부와 일본군 사이에 마치 고용관계가 존재한 것처럼 논지를 왜곡한 점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다.

허술한 시나리오 라이터 

물론 고용관계의 유무와 관계없이 만약 관헌에 따른 강제연행적 위안부 조달이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므로, 이 경우에는 일본 정부는 특별입법을 하여 보상을 해야 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관헌이었는지 여부를 불문한다면 이러한 현상이 있었던 것은 명백하다. 일중전쟁 초기의 1938년 3월 4일에 육군성으로부터 현지군에 지시한 ‘군 위안소 종업부 등 모짐에 관한 건(軍慰安所従業婦等募集に関する件)’을 보면, “위안소 설치를 위해 내지에서의 종업부 등을 모집함에 있어, 장난으로 군부 양해(諒解) 등의 명의를 이용해...모집의 방법, 유괴와 같은 경찰 당국에 검거취조를 받을 수 있는 행위”가 있으므로, 군의 위신유지와 치안유지를 위해 업자를 확실하게 단속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 통달은 어떻든 군이 관여했던 것을 입증하는 공문서로서 이용되고 있으나, 다른 측면에서는 범인은 어떻든 악질적인 경영자나 브로커였고, 이를 경찰은 검거 등을 통해 단속했었다는 사실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유괴성의 모집의 실태를 누구보다 지실(知悉)하고 있는 것은 본인(및 부모)과 경영자의 중계역할을 한 브로커(제겡(女衒), 뚜쟁이)이니, 그들을 찾아 증언을 청취하는 것이 빠르겠지만, 요 4, 5년간 단 한 사람도 자기 이름을 밝힌 이가 없고 찾아낸 사례도 없다.

따라서, 관헌에 의한 ‘강제연행’의 존재를 주장한 사례는 일본에서는 ‘나의 전쟁 범죄 - 조선인 강제연행(私の戦争犯罪―朝鮮人強制連行)’(1983년, 산이치쇼보(三一書房))의 저자인 요시다 세이지(吉田清治)의 고백 하나이고, 나머지는 옛 위안부들의 증언뿐이다. 후자(옛 위안부들)는, 기억에만 의존하는 애매모호한 것이 많으며 검증할 방법도 없고, 전자(요시다 세이지)는 82살의 고령이지만 본인은 아직 건전(健全)하다. 제주도에서의 위안부 사냥은 일시나 장소, 정경(精細)도 정밀하게 작성되어 있어 검증하기 편하다. 

거기서 1992년 3월, 필자가 현지를 돌며 조사한 결과, 1989년에 요시다 세이지의 한국어판 책이 발간된 직후에 현지의 ‘제주신문’(1989년 8월 17일자)이 책 내용은 사실은 무근이라며 전면부정하며 “이 책은 일본인의 악덕한 면을 드러낸 얄팍한 상술”이라고 논평한 기사까지 발견했다. 담당 여기자(허영선(許栄善) 기자)도 만났는데 그녀는 “무슨 목적으로 이런 날조 이야기를 적었을까요?”하고 묻기에 필자는 답변에 어려움을 겪었다.



요시다 세이지는 문제의 책을 출간하기 6년 전에 자서전풍의 또 다른 책도 출간했는데, 출신지나 연자(縁者)를 만나본 결과 거짓으로 도배된 인생을 보낸 것으로 판명됐다. 상세한 내용은 졸저인 ‘쇼와사의 수수께끼를 쫓다(昭和史の謎を追う) 하(下)’에 추가로 우에스기 치토시(上杉千年)의 ‘검증 종군위안부(検証従軍慰安婦)’에 양도하고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다만 어떻든 한때 TV나 신문에서도 화제가 됐던 요시다 세이지는 최근 1-2년은 신용을 잃고 침묵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그가 4년 전 필자와 대화했을 때 “조만간 유엔에 끌고 가 큰 문제로 만들 겁니다”라고 예고했던 일도 떠오른다.

요시다 증언이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서 오랜만에 부활한 것을 보고 필자는 놀랐다. 그의 증언(제29항)에 대한 신빙성에 대하여 필자의 지적을 포함하여 논란이 있는 것은 언급하지 않았고, 요시다 저서의 영어 번역(NGO의 누군가가 부분적으로 영어로 번역한 것)을 인용하여, 천 명의 위안부를 사냥했다는 그의 ‘체험’을 소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보고서는 다른 부분에서 “모집 방법에 대해 증언한 기록은 거의 없다”(19항) “실제로 어떻게 여성을 징용했는가에 대한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든가, 공적인 문서가 공개되지 않고 있다는 상황에 부딪힌다. ‘위안부’의 모집에 관한 증거는 대부분 모두 피해자 자신의 증언에 기초한다”(23항)라는 등, 강제연행을 부정하는듯한 뉘앙스의 기술도 있다. 

하지만 최종적으론 1993년 8월 4일자의 고노 관방장관 담화를 인용하는 형식으로 “모집은 민간업자가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행정당국자와 군 관계자가 직접 모집에서 참여한 경우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129항)라고 결론 짓고 있다. 

이 담화는 1년 반에 걸친 일한(日韓) 상호의 조사를 밟은 정치적 결착(決着)이기도 했으나, 그 한 부분에서 “모집,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다”(밑줄은 필자)라는 구절이 포함되어, 마치 모집 단계에서 관헌이 위안부를 경제연행한 것 같은 인상을 남겨버렸다. 

당시 필자는 정치적 타협으로 정확한 증거 없이 강제연행을 인정하는 듯한 표현을 넣으면, 필연적으로 미래에 화근을 남길 것이라고 절언(切言)을 했으나, 안타깝게도 예상대로 되어버렸다. 쿠마라스와미 보고서가 중간 단계에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내놓았음에도, 최종적으론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에 의한 “총합판단”에 맡겨버리는 구실을 마련해버린 것이다.

독자에 따라서는 그녀가 평양이나 서울, 도쿄에서 만난 옛 위안부들을 증언으로부터 이러한 결론에 도달한 것이라고 주장할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옛 위안부들의 증언의 신뢰성에 대해 약간의 검토를 덧붙이고자 한다. 특별보고관이 면접한 옛 위안부는 평양에서 4명, 서울에서 11명, 도쿄(재일)이 1명, 총 16명이며, 내외의 언론에 몇 번이나 등장한 이른바 ‘이야기꾼(語り部)’도 여러 명 포함되어 있다.

그중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서 인용된 증언은 4개이나,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이야기 뿐이다. 여기서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서 2페이지에 걸쳐 활용되어 장황하게 소개되어 있는 정옥순이라는 옛 위안부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를 요약한다.

정옥순은 1920년 함경남도에 태어나, 13살 때 우물을 긷고 집으로 향하던 중 납치되어 트럭으로 경찰서에 끌려가 수 명의 순사에게 강간당했다. 그때 구타를 당해 왼쪽 눈을 실명했다. 열흘 후에 일본 병사들의 병사(兵舎)로 끌려갔으나, 거기서 400명의 젊은 조선인 여성이 매일 5,000명의 일본 병사의 성노예로 서비스를 강요받고 있었다. 양친은 정옥순의 실종을 알 겨를도 없었다. 정옥순 동료 중에 한 사람이 하루 40명의 사람을 상대하는 것은 힘들다고 고정(苦情)을 말하자, 야마모토 중대장은 그녀를 고문한 뒤에 목을 베어 버리고 “(그녀의) 목을 삶아서 먹여라”라고 명령했다. 성병 소독을 위해 뜨거운 철봉을 음부에 쑤셔 넣거나, 생매장당하거나, 문신이 새겨지는 등 소녀의 반 이상이 죽임을 당했다. 정옥순은 5년 후에 도망쳐서 조선으로 돌아갔으나, 불임과 언어장애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제 54항).

이 무시무시한 ‘경험담’을 읽고, 필자는 어디선가 들어본 이야기라 생각되어 낡은 파일을 찾아봤다. 찾아낸 것은 1992년 7월 15일자의 ‘로동신문’(평양)에 공표되고, AP뉴스의 타진으로 전 세계에 전해진 이복녀(1919년생)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1943년에 제주도의 위안소에 연행되어 낙인이 새겨졌고, 목이 잘린 사람의 머리 고기 수프를 먹도록 강요받았다고 주장했다. 장소와 시기도 다르므로 별인(別人)이겠지만, 이야기의 내용은 유사하다. 

어떻든 시나리오 라이터의 구성력이 너무나 터무니없고 어처구니가 없다. 약간의 주석을 더하자면, 우선 정 씨가 납치당했다는 1933년 당시 조선반도는 평시였고, 유곽은 있었으나 군전용 위안소는 존재하지 않았다.

반도 주둔 일본군은 전체적으로 1만 명 남짓 정도였고, 함경남도에는 단 하나의 연대(2,000명)밖엔 없었다. 따라서 5,000명이나 있는 병소는 있을 수 없다. 

위안부의 살해나 학대의 스토리는 이 종류의 신병 이야기에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사실 그녀들은 업자들 입장에선 전차금을 지불한 장사도구였고, 군 입장에서도 병사에 서비스를 제공하는 존재이니, 그에 알맞은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살해하거나 상해를 입혔다간 업자는 본전도 못 건졌을 것이다. 

단, 도망가려는 여성들을 감시하거나, 본보기로 폭력을 행사하는 요짐보(用心棒)가 일본 내지의 유곽에서도 있었으니 유사한 현상이 위안소에서도 발생했을 가능성은 있었을 것이다.

만일을 위해 필자는 조선총독부에 근무했던 츠보이 신세이(坪井辛生, 종전시의 한국 충청북도 경찰부장)와 타이시도 츠네야스(大師堂経慰, 종전시의 한국 강화도 지방과장), 두 사람에게 물어봤으나, 두 사람 다 위안부 강제연행은 말도 안 된다며 전면부정했다. 그리고는 “조선인 사이에서도 반일 감정이 저류에 있었으니, 우리들은 치안유지에 상당히 신경을 썼다. 만일 요시다 세이지류의 사냥이 행해졌다면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며, 조선인 경관이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랬다면 또한 종전 후에 총독부의 관사나 가족은 무사히 귀국하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교대로 말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이 역시 쿠마라스와미 여사가 면접한 재일 한국인이자, 일본의 공식 사죄 등을 요구하여 소송 중인 송신도 씨가 아사히신문의 취재에 응해 주장한 신상 이야기다. 

1922년 충청남도 출생. 16살 때 부모가 결정한 상대와 결혼을 하나, 거식을 치른 다음날 가출한다. 대전에서 조선인 여성에 “전쟁터에 가서 국가를 위해서 일하면 돈을 벌 수 있다”라고 권유받아 평양에 갔고, 다른 대세와 함께 중국의 우한에서 위안부가 되었다. 종전으로 제대(除隊)한 일본인 조장으로부터 “같이 일본에 가자”고 청혼을 받아 하카타로 육상한 직후 버려졌다. 미야자키현에서 재일 조선인의 남성과 함께 살았으나 10년 전에 사별(死別), 현재는 생활보호를 받으며 혼자 산다. (1993년 9월 21일자 석간)

취재한 기자는 이 여성으로부터 “조선인은 아직 북과 남 사이에서 전쟁을 하고 있다. 그러니 정말 싫다”거나, “나는 재판 같은 것은 반쯤 장난으로 하고 있다”는 등 주장을 서슴없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분명히 하고자” 그녀를 위한 지원 단체에 함께 하는 일본인이 적지 않다면, 이는 분명 필자의 이해를 초월하는 일이다.

산 넘어 산  

아마도 위안부들의 내역은 국가와 지역, 시기에 따라 천차만별일 것이다. 정규의 군인·군속과 달리 위안부들의 경우 통일적인 명부도 없을뿐더러 전우회(戦友会)와 같은 조직도 없다. 전후의 경우(境遇)도 다양하다. 가정을 꾸린 사람, 독신으로 곤궁(困窮)한 사람, 또는 생활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도 있다. 

적어도 고용자나 브로커의 이름, 부대 이름이나 부대장 이름의 기억이라도 있으면 신빙성이 뒷받침이 되지만, 필자가 아는 한 그녀들의 주장에는 이러한 정보는 이상할 정도로 결여되어 있다. 

그러므로 필자는 발단의 시기부터 그녀들의 구제는 민간의 NGO가 주체가 되어 신문광고 등에서 위로금을 모아 전달하는 방법 밖엔 없다고 판단해, 저서에서도 그리 주장해 왔다. 

세금을 지출할 경우 히로시마의 피폭자나 미나마타병 환자의 사례는 말할 것도 없고, ‘인정’되기까지 엄청난 수고와 시간이 걸리며 때를 놓쳐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민간의 기금이면 그런 번잡함도 없고 탄력적으로 운영이 가능하다. 

전쟁 중에 위안소를 이용했던 전 병사들에게도 의견을 들어봤다. “영장 한 장에 처자를 두고 소집되어 싼 급여로 전쟁에 끌려가 아사한 다른 전우들을 생각하면, 그녀들(위안부들)의 사정은 그나마 좋았던 것 아닌가”라며 화내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신세를 지게 됐던 그녀들이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면 익명으로라도 응분의 위로금을 내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위안부 문제를 전쟁책임이나 전후보상의 일환으로 일본 정부를 몰아세우는 소재로 쓰려는 일부 NGO운동가나 언론의 행동에 반감이 생긴 전 병사들은 이러한 활동을 외면하고 있다. 현재 아시아여성기금의 모금 상황도 좋지 못하고, 하시모토 총리가 가족의 저금통마저 털었으나, 신문광고의 게재료에도 못 미치는 1억 엔 정도 밖에 모이지 않았다. 이대로는 목표인 10억 엔에 도달하지 못할 듯 하다. 

그 사이에 옛 위안부들은 운동가나 언론에 끌려 다녔고, 가미사카 후유코(上坂冬子) 씨가 4년 전에 염려했던 것처럼, “나중에 남겨지는 것은, 결국 온 천하에 자신의 프라이버시가 폭로되어버린 가련한 노파뿐”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이는 조선반도(한반도)에 있어 새로운 반일 논의의 대두를 자극할 수 있다. 

한국에서도 일부의 여성지원단체를 제외하면, 노태우 대통령이 아사리 케이타(浅利慶太) 씨와의 대담에서 말한 것처럼 “일본의 언론기관 측이 이 문제를 제기하여 우리나라 국민의 반일정서를 조장하여 국민을 분격하게 해버린 것입니다”(‘분게이슌주’ 1993년 3월호)라고 인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출처: NHK의 ETV특집 (1995년 12월 13일 방송)
주: 인도네시아의 경우, 가와타 후미코(川田文子)의 현지조사에 따랐다. 96년 1월 14일자의 아사히신문 보도에 따르면 16,884명으로 증가. 

도표로 알 수 있듯, 이미 이름을 밝힌 옛 위안부의 수는 1만 명을 넘을 기세다. 한 명당 200만 엔을 지불해도 200억 엔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특히 인도네시아(자바섬)에서는 일변련의 모 인권파 변호사가 건너가 활동을 했는데, 3천 명, 6천 명, 1만 6천 명으로 끝없이 치솟는 숫자에 그도 당혹스러워 하고 있다고 들었다. 무엇보다 일본군의 병력이 1만 명 전후였는데, 이를 뛰어넘는 위안부 숫자는 터무니없으며, 대부분은 편승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1996년 2월 8일의 ‘산케이쇼’에서는 문제를 “일으킨 것이 일본인의 변호사와 그 지원단체였다는 것에 몹시 부끄럽다”라고 한탄하며, “한때 종군위안부가 된 여성을 헤아리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 자체에 대해선 결코 증오할 일은 아니다”라고 썼다. 

필자도 이에 동감하며, 지금으로서는 아시아여성기금을 활용하여 복지시설 등을 만드는 정도의 방법 밖에는 없다고 생각한다. 

쿠마라스와미 권고는 3월 18일부터 제네바에서 개최되는 유엔의 인권위원회에 제출된다. 일본 정부가 반대표를 던지고도 채택된다면, “리튼 보고서의 도래”(도츠카 에츠로 변호사)가 된다고 주창하는 자도 있다. 1933년의 일본은 리튼 보고서의 채결(採決)에서 패하여 국제연맹을 탈퇴했다. 위안부 문제로 유엔 탈퇴는 말도 안 되지만, 42대 1 정도로 표차를 벌리겠다는 수읽기일 수도 있다. 

‘범행’을 본인만 자백하고 있는 요시다 세이지만을 처벌하라는 목소리도 나올법하지만, 일단 필자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가 필자의 논지를 왜곡한 점을 지적하여 수정을 요구하는 3월 15일자 신청서를 쿠마라스와미 여사와 유엔 인권위원회사무국에 보냈다. 처음에는 일변련에 조언을 구했으나 아이타니 사무총장 대행으로부터 거절을 당했으므로 외무성에 부탁하여 보내도록 했다.

효과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이 이후에는 “전쟁터에서의 강간” 문제를 조사한 린다 차베스(Linda Chavez) 특별보고관(미국인 여성)의 등장이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그야말로 산 넘어 산인 낌새다.


주요 참고 문헌

-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쇼와사의 수수께끼를 쫓다(昭和史の謎を追う)’ 하(下) (분게이슌주, 1993년)
-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 (이와나미신쇼(岩波新書), 1995년)  
- 우에스기 치토시(上杉千年) ‘검증 종군위안부(検証従軍慰安婦)’(젠보샤(全貌社), 199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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