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은 눈을 의심케 했다. 이렇다 할 논증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본지가 ‘제국의 위안부’ 저자 박유하 교수에 대한 2심 유죄 판결문에 대한 평가를 요청하자 법조계 인사들이 한결같이 밝힌 의견이다.
금년 1월 25일 서울동부지법의 박유하 교수에 대한 1심 무죄 판결은 우리 사회 학문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사법부가 어떻게 수호해야하는지를 섬세하게 밝힌 명판결이었다는 호평이 자자했었다.
그러나 10월 27일 서울고법의 2심 유죄 판결은 호평을 얻었던 1심 유죄 판결의 논증과 정면승부를 포기하고 사실상 논증이라고 볼만한 것도 없는 체로 엉터리 결론을 내려버렸다는 지적이 곳곳에서 나오고 있다.
[쟁점1] 박유하 교수가 허위의 사실을 기술했다?
1심과 2심의 가장 결정적 차이는 박유하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과연 허위 사실을 기술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와 관계된다.
1심은 검찰이 기소한 ‘제국의 위안부’에 있는 35곳의 표현 중 30곳은 진위를 따질 수 없는 ‘의견표명’이라고 판단했다. 진위를 따질 수 있는 ‘사실적시’인 나머지 5곳 중에서도 3곳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사실상 무관하며, 관계있다고 볼만한 2곳도 ‘생존 위안부’를 반드시 가리킨다고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즉 박유하 교수가 허위 사실을 기술한 것이 없다는 결론이다.
1심의 판단 중에서 눈여겨볼만한 것은 검찰 측이 제시한 주요 쟁점 중의 하나인 ‘일본정부, 일본군대에 의한 직접적 위안부 강제연행설’의 진위 문제에 대해서 사법부가 굳이 개입해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1심 재판부(서울동부지법 제11형사부 이상윤 재판장, 이지혜 판사, 김웅재 판사, 2015고합329 명예훼손)는 위안부 피해자의 명예와 직접적으로 관계되지 않는 순수 역사적 사실관계의 쟁점이라는 사유로 일단 강제연행이 일본정부 또는 일본군대의 공식정책이었는지 아니었는지 문제와 관련 진위를 분명히 따지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다만 위안부 중에서 일부 자발적 매춘부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문제에 대해서는 위안부의 명예와 직접적으로 관계되는 문제로 봤다. 하지만, 이 문제는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조선인 일본군위안부 전체’ 중에서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 일부’와 관계된 것으로, 고소인들인 나눔의집이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쪽의 ‘생존 위안부’와 반드시 직접적으로 관계된다고 볼 수가 없다는 사유로 역시 굳이 진위를 명확히 따지지 않았다.
2심 재판부(서울고등법원 제4형사부 김문석 재판장, 엄기표 판사, 류창성 판사, 2017노610 명예훼손)는 관련해 1심 재판부와 판단을 전혀 달리 했다. 2심은 검찰이 기소한 ‘제국의 위안부’에 있는 표현 35곳 중에서 11곳이 진위를 따질 수 있는 ‘사실적시’이며 11곳 모두가 ‘일본정부, 일본군대에 의한 직접적 위안부 강제연행설’을 부정하고 있는 허위라고 판단했다.
2심 재판부는 ‘일본정부, 일본군대에 의한 직접적 위안부 강제연행설’은 논란이 있는 가설이나 이론이 아니라, 1996년도 유엔인권위원회의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1993년도 고노담화문 등에 근거하여 “현재로선 ‘위안부’에 관한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실”로 인정된다고 밝혔다.
2심 재판부는 박유하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에서 위안부를 제국주의, 자본주의에 있어서 구조적 강제성의 희생자(민간업자들에 의한 약취, 유인은 물론, 가부장제와 가난 등의 종합적인 문제)로 서술했다는 점, 또 위안부가 위안소에서 성적 학대를 받았다고 서술했다는 점은 인정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이번에 유죄로 인정된 11곳의 표현은 그런 서술과는 별개로 ‘위안부가 자발적으로 경제적 대가를 받는 매춘부가 되었으며, 일본정부나 일본군대가 강제연행한 것이 아니다’는 식으로 독자들이 받아들이도록 서술한 허위사실 적시라고 밝혔다.
관련해 본지 인터뷰에 응한 법조인 A씨는 “강제연행 문제가 대부분 민간업자들의 소행이었던 것이 아니라, 정말로 일본정부와 일본군대의 공식정책으로까지 추진됐던 것이 맞는지 이번 재판에서 과연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로 명백한 증명이 이뤄졌는지를 모르겠다”면서 “이는 재판과정에서 검사가 입증해야 하는 것인데, 1심과 달리 허위성의 입증여부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없다는 것이 2심의 치명적인 논리결함”이라고 지적했다. 강제연행의 형태를 ‘일본정부, 일본군대에 의한 직접적 위안부 강제연행설’로만 국한시키려면 예외는 없었다는 점이 분명히 확인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어 A씨는 “박유하 교수는 분명 위안부 피해자 경험의 다양성을 얘기했으며 ‘제국의 위안부’에서 일부 일본 군인들에 의한 일탈적 강제연행도 있었다고 서술한 점을 2심 재판부도 인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에서 특정 11곳 표현만 따로 떼어낸 후에 그것을 ‘일본정부, 일본군대에 의한 직접적 위안부 강제연행설’을 전적으로 부정하려는 표현이라고 단정한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A씨는 “원래 허위사실적시 명예훼손 판결에 있어 진위 판단은 특정 표현들을 고립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 책의 구성, 작가가 의도한 문맥, 어휘 등을 종합해서 해야 된다는 것이 대법원 판례의 일관된 기조”라고 강조했다.
[쟁점2] 박유하 교수에게 고의성이 있었다?
1심과 2심은 박유하 교수의 고의성 여부에 대해서도 판단을 크게 달리했다.
1심 재판부는 박유하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를 서술한 주요한 동기가 “‘한일 양국의 상호 신뢰 구축을 통한 화해’라고 하는 공공의 이익을 위한 목적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1심 재판부는 박유하 교수에 대해서 비판적인 일부 학자들이 ‘제국의 위안부’가 자료 취사 선택 등에서 논란을 부를 수 있다고 지적한 대목도 “(박유하 교수는) 새로운 사료를 날조하거나 기존 사료의 내용 자체를 왜곡”한 것이 아니라, “기존 사료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와 해석에 근거하여 논란의 소지가 많은 주장을 제기하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1심 재판부는 박유하 교수가 위안부에 대해서 ‘일본군과 동지적 관계’, ‘식민지인으로서의 협력적 관계’라고 서술한 부분도 그 취지를 정확히 봐야 한다고 밝혔다.
즉, 이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확장 과정에서 사회하층계급 여성이 동원되는 형태로서 당시의 가난한 여성이나 오늘날 가난한 여성이나 다 마찬가지로 매춘업에 종사하게 된 측면, 그리고 조선인 위안부의 경우는 식민지배하 일본제국의 일원으로 간주돼 적국 여성과는 달리 전쟁 도구로서의 역할이 부여된 측면을 추상적, 구조적 차원에서 제시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일본정부, 일본군대에 의한 직접적 위안부 강제연행설’은 국제기구 보고서 등으로 객관적 사실로 인정될 수 있다면서 이에 박유하 교수가 ‘제국의 위안부’ 중 11곳에서 ‘일본정부, 일본군대에 의한 직접적 위안부 강제연행설’을 부정하는 듯한 표현을 적시한 것은 그 어떤 고의성이 있는 일이라고 봤다. 비록 위안부를 비방하려는 목적은 아니지만, 박 교수가 위안부 문제를 기존과 다른 관점에서 다루면서 자신의 한일 양국간 갈등 해결 방법론을 제시하려는 의도에서 사실을 왜곡한 혐의가 있다는 것이다.
관련해 법조인 B씨는 “이번 재판에서 ‘일본정부, 일본군대에 의한 직접적 위안부 강제연행설’은 그 진위 여부가 핵심쟁점 그 자체다. 헌데, 2심 재판부는 이를 곧바로 논란의 여지없는 ‘객관적 사실’로 단정해버리고서, 박유하 교수가 이것이 ‘객관적 사실’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고의로 ‘객관적 사실’로서의 ‘일본정부, 일본군대에 의한 직접적 위안부 강제연행설’을 부정하는 허위 내용을 책에 썼다고 판단했다. 한마디로 결론과 근거가 뒤집어진 판단”이라고 비판했다.
B씨는 “어떤 역사적 사건을 설명하는 유력한 가설로 A설, B설 두개가 있다고 치자. 알고보면 두 가설이 다 맞을 수도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2심 판단의 논리는 ’B설의 지지자들은 A설을 거짓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A설을 언급했으므로 고의로 거짓말을 한 것이다‘는 식의 논리를 제시한 상황이다”라고 꼬집었다.
이어서 B씨는 “2심 재판부는 결국 ‘고의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셈”이라며 “사실상 재판관 마음대로 남의 양심과 사상을 재단하겠다는 것으로, 이런 판결이 고등법원에서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의견도 전했다.
[쟁점3] ‘생존 위안부’를 대상으로 명예를 훼손했다?
1심 재판부와 2심 재판부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거론된 위안부가 오늘날의 ‘생존 위안부’로 정확히 특정될 수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결론을 완전히 달리 했다.
1심 재판부는 박유하 교수가 책에서 거론한 위안부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던 조선인 일본군위안부 전체’를 지칭한 것으로 그중 일부 하위집단이나 특정 사람을 지칭한 것이 아니라고 밝혔다.
또한 1심 재판부는 ‘역사적으로 존재하였던 조선인 일본군위안부 전체’의 구성원 수가 학자에 따라서는 추산치가 수만명이나 되는 등 그 구성원 개개인을 가리킨다고 할 수 없고, 집단의 성격이 균질적이거나 그 경계가 분명하다고 보기도 어려워 피해자는 특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제국의 위안부’에는 일부 위안부 피해자에 대해서는 구조적인 측면 즉 가난 등의 형편 때문에 외견상은 자발적 의사에 위안부가 된 것처럼 보인다는 식 묘사한 부분도 있다. 독자들이 이를 어떻게 인식할는지와 관련해서도 1심 재판부는 “일반 독자로서는 피고인(박유하 교수)이 말하는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위안부가 된 일부 위안부들’이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고소인들(‘생존 위안부’)을 가리키기보다는 그동안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인식할 여지가 많다”고 밝히기도 했다.
반대로 2심 재판부는 ‘제국의 위안부’에서 언급한 위안부는 사실상 모두 ‘생존 위안부’로만 특정된다고 판단했다. 일본의 사죄를 비롯한 문제 해결 요구, 학술 조사, 언론보도 등도 다 나눔의집이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연루된 ‘생존 위안부’를 중심으로 이뤄져왔고 이에 우리 국민들이 위안부라고 하면 우선은 ‘생존 위안부’를 떠올리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제국의 위안부’를 읽은 독자들은 ‘생존 위안부’와 ‘자발적인 의사에 따라 위안부가 된 일부 위안부들’을 등치시켜서 이해하는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고 2심 재판부는 판단했다.
이와 관련해 법조인 C씨는 “대법원 판례는 특정 집단을 대상으로 한 표현이 명예훼손이 되려면 그 집단의 경계가 명확할 것, 집단의 조직화 및 결속력이 견고할 것, 해당 명예훼손적 표현이 고소를 추진한 집단을 대상으로 한 것임도 분명히 인식될 것 등의 조건을 요구한다”면서 “1심은 분명 이러한 대법원 판례를 모범적으로 따랐음에도 불구하고, 2심은 피고인 작가가 해당 집단(위안부)을 어떻게 다뤄 서술했는지는 제대로 안따지고 ‘생존 위안부’만이 유일무이한 위안부 피해자라는 식 교묘한 ‘스테레오타입’만을 들이댔다”고 비판했다.
C씨는 2심 재판부가 ‘양형사유(판결문에서 유죄판단을 내린 후에 형벌의 정도를 제시하고 그 근거를 밝히는 대목)’에서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위축을 우려하며 시혜를 내리듯 선처(징역형 아닌 벌금형)를 표시한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C씨는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위축은 대다수의 대법원 판결에서 고의성 판단을 부정하고 더 나아가 무죄 판결을 내는 데 핵심적인 근거로 설시하는 논리”라며 “차라리 비방의 목적이 있었다고 하든지, 이번 위안부 논란도 한 학자가 남다른 견해를 제시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는 것을 재판부가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무죄 사유가 아니라 단지 형벌을 깍아주는 사유로 제시한 것은 정말 듣도 보도 못한 경우”라고 개탄했다.
[해설] ‘일본정부, 일본군대에 의한 직접적 위안부 강제연행설’과 관련한 논란
‘일본정부, 일본군대에 의한 직접적 위안부 강제연행설’은 일제시대에 일본정부, 일본군대가 식민지 조선인 여성들을 공식적이고 조직적인 형태의 강제연행을 통해 위안부로 만들었고 성노예로 만들었다는 인식으로, 위안부 문제에 관해서 현재 우리 사회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정설(定說, orthodox)이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측이 만든 상징인 위안부 소녀상이 바로 이러한 정설을 대표하는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제연행의 정확한 상(像)과 관련해서 학계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조선인 위안부 대다수가 분명 당사자의 의사에 반해서 일본군 위안부가 됐다는데는 학계에 일정한 컨센서스가 있다. 그러나 본인 의사에 반한 것은 맞더라도 위안부가 된 실제 경위에 대해서는 정설과 반대되는 의견도 나온다. 사기꾼에 의해서 버젓히 인신매매를 당해야 했던 경우, 부모가 자식인 본인을 마치 노예처럼 민간업자에게 팔아버린 경우 등이 위안부 당사자의 증언으로도 상당수 확인됐기 때문이다. 이런 증언 중에는 심지어 가부장제, 가난 등의 문제로 외견상은 마치 본인의 의사로 위안부가 된 듯 한 것까지 있다. 이에 비록 공창제를 운영했던 것은 맞지만 일제가 당시에 군대나 공기관을 공식적으로 활용하여 위안부들을 직접적으로 납치했던 것은 아니며, 흡사 북한 접경지역의 ‘꽃제비’와 같은 열악한 상황에 놓여있었던 당시 가난한 사회하층계급 조선인 여성들이 일종의 구조적 강제성의 형태로 일본군 위안소까지 흘러들어가게 됐다고 보는 견해도 학계에서는 큰 세를 형성하고 있다. 학계 일각의 이러한 입장을 ‘구조적 강제연행론’, ‘광의의 강제연행론’, ‘간접적 강제연행론’으로 칭하기도 한다.
위안소에서의 위안부 생활상과 관련해서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정설은 위안부가 성노예로서 완전히 일방적 착취만 당하는 형태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문제로도 학계에서는 반대되는 의견도 나온다. 고소득을 누렸던 사례, 계약만료기간이 있었던 사례, 휴일이 있었던 사례, 아편을 즐겼던 사례, 심지어 일본군을 살해했어도 정당방위로 인정받았던 사례 등도 역시 일부 위안부들의 증언이나 여러가지 기록 등을 통해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박유하 교수 등은 우리 사회 위안부 문제와 관련 이설(異說, heterodox)을 제시하는 쪽이다. 강제연행의 상과 관련해서는 일본정부, 일본군대에 의한 물리적 강제성과 관계된 ‘협의의 강제연행’, ‘직접적 강제연행’보다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구조적 강제성과 관계된 ‘광의의 강제연행’, ‘간접적 강제연행’이 더 우세한 모습에 가까워 보인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또한 박유하 교수 등은 위안소에서의 위안부 생활상과 관련해서도 위안부가 성노예로서 일방적 착취를 당했던 양태 뿐만이 아니라, (외견상 일부 경제적 대가를 받았던 사례가 있다고 하더라도) 핍박만 받아온 당사자가 당장 생존을 도모해야했기에 불가피하게 갖게 된 협력자로서의 양태, 둘 모두를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
박유하 교수 1심 무죄 판결 관련 기사 :
박유하 교수 2심 유죄 판결 파장 관련 기사 :
한일 위안부 문제 관련 갈등에서의 쟁점 관련 기사 :
권력화된 정대협의 문제 관련 기사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