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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군사동원의 경험과 유산, 그리고 기억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일본과 한국이라는 두 개의 조국에 충성할 수 밖에 없었던 우리 선조들의 번민과 희생에 이제는 정당한 평가와 명예회복이 뒤따라야



1938~45년 조선인 청년들은 일본군 병사의 일원으로 아시아태평양전쟁에 참전했다. 이를 두고 한국사회는 일본이 조선인의 인적 수탈과 희생만을 강요했던 강제동원의 피해자로만 생각해왔다. 그러면서도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조선인 출신 일본군 전사자들에 대해서는 민족의 반역자 혹은 친일파로 몰아세우며 영혼의 귀향마저 거부하고 있다. 

강제동원의 피해자이면서도 민족의 반역자라는 모순된 기억은 오늘날 한국인들이 살아보지도 않은 식민지 역사를 지극히 단순하게 왜곡되게 배워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식민지기 조선인 군사동원의 실상은 어떠했으며, 그 경험과 유산은 20세기 대한민국사에서 어떤 의미가 있었는가. 또 이들을 위한 진정한 위령과 현창은 어떠해야 하는가.
      
제국의 신민으로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일본은 약 12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 청년들을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동원했다. 이는 일본군 총동원 병력의 약 1.44퍼센트에 상당한다.

동원제도별 실상은 육군특별지원병 1만 8594명, 학도지원병 3050명, 해군특별지원병 1000명, 징병 9만 651명(육군 7만 3335명, 해군 2만 316명)이었다. 동원병사의 약 75퍼센트를 차지한 것은 1944~45년 조선인 징병제 시행으로 동원된 병사들이었다. 

더구나 총동원 병력의 약 80퍼센트를 차지했던 조선인 육군병의 지역별 부대 배치는 북방권 91.4퍼센트와 남방권 8.6퍼센트를 기록했다. 가장 많이 배치된 지역은 조선, 일본, 중국의 순이었다. 

한편, 1962년 일본 후생성이 발표한 조선인 병사의 역종별 전사자는 육군병 5870명과 해군병 308명으로 합계 6178명이었다. 육군병 전사자의 지역별 구성은 북방권 19.8퍼센트와 남방권 80.2퍼센트를 기록했다. 

가장 많은 전사자가 발생한 지역은 필리핀, 뉴기니, 중국의 순이었다. 전사자 발생은 대규모 동원지였던 북방권이 아니라 필리핀을 비롯한 남방권이었다. 이 가운데 육군병 전사자 5,870명은 1944~45년 동원된 징병자가 아니라 1938~43년에 걸쳐 동원된 육군특별지원병이었다. 이는 1944년 말 일본의 전황이 절망적 항전기로 바뀌면서 수송력 부족과 미군의 잠수함 작전으로 격전지 남방권에 대한 병력 파병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일본 육해군 전체 전사자의 약 0.32퍼센트를 차지했다. 


 
일본은 1938~43년 지원병제, 1944~45년 징병제를 시행해서 조선인의 군사동원을 추진했다. 특히 식민지에서 징병제 시행은 20세기 제국주의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은 지원병제를 채용해서 식민지 청년들을 전쟁에 동원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법제적 강제성을 동반한 징병제 시행에도 불구하고 1873년 징병령 공포 당시 일본에서와 같은 대규모 혈세 반대운동이 없었다. 왜냐하면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일본과 조선은 공동운명체’라는 분위기와 함께 병역부담을 당연한 국민의무로 간주하는 일본 국민됨의 심성이 광범위하고도 깊이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당시의 상식으로서, 그들은 국민의무를 다해서 국민의 권리를 확보하고자 국가와 천황의 부름에 기꺼이 응했던 것이다. 
          
또 다른 조국을 위해  

1920년을 전후해서 출생한 이들 조선인 출신 일본군 병사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일본 신민이었고, 유년기 이래 철저한 황국 신민화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세대다. 이들은 일본군 복무를 거치면서 국가 공동체에 대한 복종, 충성, 희생의 고귀함 그리고 국가와 국민의 이원적 관계를 의식하는 근대국가의 국민됨을 내면화했다. 

조선인 출신 일본군 병사들의 이러한 국가주의 심성은 일본이 패망했다고 해서 결코 훼손되거나 무화(無化)될 수 없는 이념의 불도장이었다. 군대는 학교와 함께 몸과 마음으로 충량한 국민됨을 수육하고 실천하는 근대국가의 훈육장치이자, 정치적 이념적으로 살균되는 ‘국민 만들기의 공장’이기 때문이다.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조선인 출신 일본군 병사들은 일본인 전우와 함께 뉴기니, 버마, 필리핀에 참전했다. 이들은 극한의 전장 환경과 생물학적 한계를 돌파하는 생존투쟁을 거치면서 전문적인 군사지식과 풍부한 실전경험을 쌓았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군사 경력자들은 1945년 8월 해방 이후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참여했다. 군사영어학교, 조선경비사관학교, 육군사관학교를 거쳐 대한민국 초급장교로 임관했다. 특히, 1946년 군사영어학교 출신 110명의 장교단은 1950~60년대 대한민국 국군의 수뇌부를 형성했다. 이들은 일본군(87명), 만주군(21명), 중국군(2명)으로 대한민국 창군을 주도하는 핵심 인적 자원이었다.
      
이들은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을 부정하고 김일성 정권을 지지했던 제주4·3 사건과 여순사건을 진압하는 대대적인 토벌작전의 주역들이었다. 미 군사고문관들도 1946년 경찰 보조병력으로 출발해서 산돼지 몰이나 하던 이들의 일사불란한 연합작전 능력에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이들은 한국전쟁기 누란지세(累卵之勢)의 구국전선에서 최일선 부대장으로 용전분투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춘천지구 전투에서 북한군 제2군단의 남침을 저지/분쇄했던 것은 국군 제6사단 제7연대였다. 이들의 결사항전을 진두지휘했던 연대장은 식민지기 육군특별지원병 출신의 임부택 중령이었다. 

춘천전투는 스탈린의 3일 단기결전 계획을 좌절시킨 세계사적 의미를 갖는 사건이자, 그야말로 한국전쟁사에 빛나는 ‘춘천대첩’이었다. 일본군 복무를 거치며 투철한 국가관, 사생관, 군인관을 내면화했던 일본군 출신 군사 경력자들은 한국전쟁기 멸공의 햇불 아래 죽기를 다짐했던 호국의 간성들이었다.


 
이들은 충성심과 애국심으로 충만했던 일본군의 유전자를, 대한민국의 국군에 대한민국에 대한 것으로서 이식하고 전수했던 장본인들이다. 1950년대 한국전쟁은 이들의 군사적 자질과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역사적인 무대이기도 했다. 이들은 식민지기 실체성을 결여한 민족을 반역하고 일본과 천황에 대해 죽음을 맹세했기 때문이야말로 또 다른 조국 대한민국에도 진충보국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20세기 대한민국 창성(創成)이 식민지 군사동원의 경험과 유산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역사적 피구속성을 시사한다. 
 
야스쿠니의 조선인 영령들          

일본 도쿄에는 한국 사회에서 그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야스쿠니 신사가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야스쿠니 신사에는 일본인만이 아닌 약 2만 1,000명에 달하는 조선인 군인·군속이 합사되어 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서 천황제 근대국가로 전환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내전을 치러야 했다. 야스쿠니 신사는 이들 내전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위령·헌창함으로서 메이지유신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국가적인 추모시설이다. 야스쿠니는 조국을 위해 순국한 선열들의 고귀한 뜻을 후세에 전하는 일본 국민됨의 전당이자, 국민통합의 상징이다.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조선인 군인·군속 합사자는 415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2만 585명은 1945년 8월 종전 이후의 일이었다. 일본은 비록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지만, 군사동원 과정에서 야스쿠니 합사라는 ‘죽음의 약속’을 잊지 않고 지켜주었다.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의 조선인 영령들은 죽어서도 고향땅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일본과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친 민족의 반역자 혹은 매국노라는 황당한 이유 때문이다. 그동안 이들은 부모와 형제 그리고 동족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해 왔다. 참으로 불쌍한 영혼들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아니었다면, 또 다른 조선인 청년들이 머나먼 이국땅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망국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럼에도 이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시대에 순응하고 적응하며 자유인의 본성을 지닌 근대인으로 성장했다. 그래서 이들은 국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국민의 책무를 다하고자 기꺼이 아시아태평양전쟁에도 참전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들은 자신들이 이들의 후예들임을 망각하고 조선인 출신 일본군 병사들을 민족의 반역자와 매국노로 몰아세우며 영혼의 귀향마저 거부하고 있다.
 
2018년 10월 야스쿠니의 잠들지 못하는 조선인 영령들을 위로하는 각별한 책이 출간되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한류 전도사이며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구로다 후쿠미(黑田福美)의 저서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이다. 이 책은 경남 사천 출생으로 가미가제 특별공격대원이었던 탁경현과 꿈속의 인연과 현실의 인연을 다루고 있다.

탁경현은 1945년 5월 오키나와 전선에서 빗발치는 미군의 함포 사격에도 조종간을 놓지 않았던 조선인 가미가제였다. 그녀는 “죽어서라도 고향 땅에 묻히고 싶다”는 탁경현의 하소연과 간절한 소망에 감응했다. 영혼의 귀향마저 거부당한 채 이승과 저승을 떠도는 야스쿠니의 조선인 영혼들에 대한 절절한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이 책을 읽다보면, 한국 사회가 이토록 비정한 사회였는가에 아연실색하게 한다. 그녀의 저작은 양심있는 한국인들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지극한 휴머니즘의 기록이다. “한국인! 당신들은 누구인가”라고 묻는, 청산하지 못한 우리안의 식민주의에 대한 깊은 성찰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반일이라는 울타리에 갇힌 양떼”와도 같다는 그녀의 지적은 폐부를 찌르는 아픔이 있다. 아마도 양심있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 책을 읽고서 이웃나라 일본만을 오로지 ‘공공의 적’으로 삼아 집요하게 공격하는 반일종족주의 광기와 위선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정당한 평가와 명예회복을  

그동안 한국 사회는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동원된 조선인 일본군 병사들을 강제동원의 피해자임과 아울러 민족의 반역자로 간주해 왔다. 결코 양립하기 곤란한 기억의 모순이다. 

군사동원 문제는 그동안 한국과 일본 사회를 뜨겁게 달구어 왔던 조선인 위안부와 조선인 징용자 문제와도 맥락을 달리한다. 그동안 군사동원과 관계된 유가족들은 강제동원의 피해자라 주장하고자 해도 민족의 반역자 혹은 매국노라는 사회적 비판을 의식해야 했다. 식민지 군사동원이라는 사안의 동시대성에도 법제적 대응과 공론화를 억제하는 사회적 자기검열이 작동해 왔기 때문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통해서 이들 군사동원 피해자들에 대해서도 보상했다. 1977년 박정희 정부는 인명 피해자 8,552명에 대해 개인 당 30만 원씩(현재 기준 270~300만원 수준)을 보상했다. 2007년 노무현 정부는 특별입법으로 3차례 접수를 거쳐 신고자 3만 2857명에 대해서 유족 2,000만 원, 부상자 1000만 원으로 총액 6,800억 원을 지급했다. 

한국 정부는 일본을 대신해서 피해와 위로의 명목으로 유족과 부상자에 대해 2차례의 공적 부조를 실시했다. 그럼에도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는 1950년 한국전쟁과 1980년 5·18 민주화운동 피해자 수준의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2018년 10월 말 대한민국 대법원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을 부정하는 적반하장을 저질렀다. 미쓰비시중공업(주)을 비롯한 일본 기업들에 대해서 징용자 개인의 청구권을 인정하고 위로금 지급을 판결했기 때문이다. 당면한 한일관계 파탄의 직접적인 근원을 제공한 지난 대법원 판결은 그동안 피해자 소송을 제약해 왔던 민족의 반역자와 친일파라는 사회적 프레임을 제거하고 유족들의 물질적 탐욕을 자극하는 법제적 효과를 발휘하게 되었다. 군사동원 관련 유족들의 빗발치는 소송도 법원의 문턱을 넘어서는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조선인 출신 일본군 병사들은 자신들이 속한 국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국민의무를 다하고자 전쟁에 출정했다. 이는 당대인들의 가열한 선택이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일본군 군사 경력자들은 국제 공산세력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는데 고군분투했다. 

야스쿠니의 잠들지 못하는 조선인 출신 일본군 영령들도 살아서 귀환했더라면, 역시 대한민국을 위해서도 같은 식의 희생과 헌신을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점에서 일본과 대한민국이라는 두 개의 조국에 대한 이들의 충정은 양가성과 등가성을 갖는다.

이들을 위한 진정한 위령과 현창은 반복되는 물질적 보상이 아니다. 바로 자신들이 속한 국가 공동체를 위한 희생과 헌신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명예회복이다. 

이런 집단적 자기성찰과 성숙함이야말로 우리안의 식민주의를 청산하는 첫걸음이자, 과거지향이 아닌 미래지향의 한일관계를 정립하는 이정표라 하겠다. 그 점에서 작금의 한국 사회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의 결연한 단절과 그 사회적 합의가 절실한 상황이다. 

파국에 직면한 한일관계의 엄중함과 자라나는 후대들을 위해서라도 오염된 기억과의 불모한 싸움을 그만두어야 한다. 

서로 다른 기억의 싸움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성취를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며, 또 다시 예종의 길로 들어서는 망국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정안기(경제학 박사 · 전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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