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모래시계의 주제가였던 주라블리(白鶴)는 전사한 병사가 학이 돼 돌아온다는 러시아곡이다. 전몰장병이 학이 돼 돌아온다고 러시아인들이 믿었던 것처럼 일본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숨진 병사들의 넋이 반딧불이 돼 다시 돌아온다고 믿었던 것 같다.
2001년 개봉된 일본영화 ‘호타루’(ホタル, 반딧불)가 있다. 철도원으로 유명한 타카쿠라 켄(高倉健)과 아사다 지로의 원작 창궁의 묘(蒼穹の昴)를 일중합작으로 만든 드라마에서 서태후역을 맡은 타나카 유코(田中裕子)가 주연을 맡은 이 영화에서는 남자주인공이 전쟁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조선인 카미카제 대원 카네야마(金山)가 등장한다.
카네야마는 치란(知覧)의 카미카제기지 근처 토미야식당(富屋食堂)의 어머니뻘 여주인 토리하마 토메(鳥濱トメ)와 작별을 고하면서 아리랑을 부르는 것으로 묘사된다.
토리하마 토메는 젊은 카미카제 조종사들을 위해 늘 맛있는 음식을 준비했고 그들에게 마음의 지주가 된 딸 두명을 둔 중년의 여주인이었다. 병사들이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상부에서 검열하는 바람에 마음속 이야기를 제대로 쓰지 못하는 것을 배려해 위험을 무릅쓰고 편지를 대신 고향에 부쳐주기도 하는 등 따뜻한 마음씀씀이로 특공의 어머니라 불렸다.
토미야 식당은 반딧불관(館)으로도 불리는데 사지(死地)로 출격하는 특공대원들이 반딧불이 돼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출격한 다음날 밤에 마당에 반딧불이 보이면 토리하마 토메는 병사의 영혼이 돌아온 것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토리하마 토메와 카미카제 특공병의 애뜻한 휴먼 스토리는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오랫동안 연극무대에도 오른바 있다.
필자는 2001년 한국관광공사의 주선으로 영화 ‘호타루’ 팸투어에 참가했다. 찬란한 노란 유채꽃 뒤로 사쓰마의 후지라 불리며 출격한 카미카제 조종사들이 일본에 작별을 고하며 창공에서 마지막으로 바라봤다는 카이몬다케(開聞岳)와 영화 주인공 야마오카(山岡)부부가 어선을 한척 유지하며 조업을 하던 바닷가 로케지역, 그리고 치란의 특공평화회관(特攻平和会館)을 관람했다.
특공평화회관(特攻平和会館)에는 제로센 전투기와 카미카제 특공작전으로 숨진 젊은 병사들의 사진과 유품이 전시돼 있었고 탁경현(卓庚鉉)이란 조선인이 있었던 것이 기억에 생생하다.
탁경현의 일본이름은 미쯔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로 경남 사천 출신으로 출격 전날 토미야 식당에 찾아와 여주인 토리하마 토메앞에서 “처음 말씀드리는데 저는 조선인입니다. 마지막으로 고향의 노래를 부르겠습니다”라면서 아리랑을 불렀다.
그는 전투모로 눈을 가렸지만 눈물을 가리지는 못했고 이 광경을 본 토리하마 토메와 두 딸은 펑펑 울며 통곡했다. 당시 탁경현은 1년전 어머니가 병사했고 연로한 아버지와 여동생은 조선으로 귀국한 뒤였다. 토리하마는 늘 쓸쓸해 보였던 탁경현에게 마음이 갔었던 터였다.
탁경현(卓庚鉉), 일본명 미쯔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가 영화 ‘호타루’에 등장하는 카네야마(金山)의 모델이다.
시대상황으로 인해 운명적으로 카미카제 특공병으로 숨져간 조선인 탁경현을 꿈속에서 만난 일본 여배우가 있다. 에세이 작가, 번역가로도 활동하고 있는 유명 여배우 쿠로다 후쿠미(黒田福美) 씨는 어느 날 “한 젊은이가 나타나 천황을 위해 전사한 것은 억울하지 않지만 나의 원래 이름으로 죽지 못한 것이 아쉽다”라고 말하는 이상한 꿈을 꾼다.
이후 쿠로다 후쿠미는 카고시마 치란 특공기지를 취재해 11명의 조선인 카미카제 대원이 있었음을 알게 되고 꿈에서 본 젊은이가 탁경현이라고 믿게 된다.
쿠로다 후쿠미는 탁경현의 영혼이나마 고국으로 돌려보내주기 위해 귀향기원비를 고향인 경남사천에 세우기로 추진했지만 기념비 제막식은 소위 시민단체들에게 저지당하고 만다. 탁경현이 ‘친일 부역자’ ‘전범’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한국어를 배워 한류전도사로 나선 쿠로다 후쿠미는 이념과 민족을 초월한 지극한 휴머니즘으로 미쯔야마 후미히로라는 이름으로 죽어간 탁경현의 슬픈 이야기와 그의 영혼을 귀향시켜주려 했으나 한국내 반일 감정이란 벽에 봉착한 사연을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それでも、私はあきらめない)란 책으로 출판했다.
과거사를 제대로 이해하고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위해 읽어 볼만한 책이다.
/ 박상후 (전 MBC 시사제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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