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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 (1)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16)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20년 2월 23일판, 번역 : 황철수).

본 항목 내용과 관련하여서는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한국어 번역) 항목, 위안부(慰安婦)(한국어 번역) 항목, 그리고 ‘일본통치시대의 조선인징용(日本統治時代の朝鮮人徴用)’(한국어 번역) 항목도 병행 참조해주기 바란다.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는, 대일본제국이 제 2차 세계대전 중에 창설한 근로 봉사 단체의 하나로, 주로 미혼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여자정신대는, 전쟁 시기에 일본에서 노동력이 부족하고 절박한 형세인 가운데, 강제로 직장을 재배치하는 국가총동원법(国家総動員法) 하에 국민총동원체제의 보조로서 실시되었으며 공장 등에서 근로노동으로 종사했다. 

1944년 8월, 여자정신근로령(女子挺身勤労令)에 따라 12세〜40세의 내지(内地, 일본)의 여성이 동원되었다. 일본통치하의 조선 여성에 대한 적용도 검토는 되었다. 하지만 실제로 적용은 되지 않았다. 1945년 국민근로동원령에 의해 여자정신대는 국민의용대(国民義勇隊)로 개조되어 소멸했다.








목차


1 명칭

   1.1 ‘정신대’라는 표현

   1.2 정신대와 위안부


2 배경


3 연혁

   3.1 근로보국대 결성

   3.2 여자정신대의 결성

   3.3 여자정신근로령 발령


4 조선에서의 관 알선에 의한 정신대

   4.1 파견 장소

        4.1.1 도쿄 아사이토 방적 누마즈 공장

        4.1.2 도야마 후지코시 공장

        4.1.3 나고야 미쓰비시 항공기 도우토쿠 공장


(계속)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 (1)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여자정신대(女子挺身隊)’ (2)

 



1 명칭(名称)

여자정신대는 ‘여자근로정신대(女子勤労挺身隊)’, 짧게 ‘정신대(挺身隊, 일본어 ‘데이신타이(ていしんたい)’)’라고도 한다. 일본통치하 조선에서의 관 알선 모집에 의한 정신대는 ‘조선여자근로정신대(朝鮮女子勤勞挺身隊)’ 또는 ‘반도여자근로정신대(半島女子勤労挺身隊)’라고도 불렸다.

1.1 ‘정신대'라는 표현(「挺身隊」という表現)

‘정신(挺身)’이라는 말은 “스스로 나서는 것, 자신의 몸을 내던지고 일을 하는 것”을 의미하고, ‘정신대(挺身隊)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몸을 내던지고 일을 하는 조직”을 말한다.

이 정신대라는 표현의 사용예로는,

・1922년 4월 23일-5월 11일 오사카 시사신보(大阪時事新報)에서 연재된 ‘인물 전기 장쭤린6(物伝記張作霖六)’에서 “일본군의 별동대가 되어 몽고 지역에 진출하고 우리 정신대를 도운 공로는 적지 않았다.”

・1933년 8월 13일-9월 3일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에서 ‘보도권 본사 독점 열하탐험기(報道権本社独占熱河探検記)’에서는 “마치 학술의 정신대가 과학의... ”라는 표현

・동년 11월 28일-12월 7일 오사카 시사신보 기사 ‘희망대로 가는 대련 일의대수의 북지에 조건 전부 ‘O · K’ 정크 무역(誂え向の大連 一衣帯水の北支へ条件すべて“O・K” ジャンク貿易)’에 나오는 “무역 ‘정신대’다운 면목(貿易『挺身隊』なる面目)”, “바다의 정신대(海の挺身隊)”라는 표현

・1933년(쇼와 8년) 내무성 경보국의 자료에는 ‘구국 사이타마 청년 정신대 사건(救国埼玉青年挺身隊事件)’이라는 용례

・1935년(쇼와 10년) 2월 26일 고베신문(神戸新聞)에는 ‘보르네오의 처녀, 밀림을 목표로 벌재 정신대 출발(ボルネオの処女密林めざし伐材挺身隊出発)’ 기사가 게재, 1941년 5월 30일 오사카 마이니치신문(大阪毎日新聞)에는 “농업 보국 정신대(農業報国挺身隊)”

・이 외에도 “독(일) 정신대 미(국) 본토에 잠입(独挺身隊米本土に潜入)”이라는 독일의 ‘정신대’라는 표현도 있었다.

윤명숙(尹明淑)은 “정신대라는 용어는 남녀 구별 없이 사용되며 특정 단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었다”고 했다. 조선에서 ‘정신대’가 처음 언급된 것은 매일신보(毎日新報) 1940년 11월 13일의 ‘농촌정신대(農村挺身隊)’ 결성 기사라고 한다.

이 밖에 ‘부인농업정신대(婦人農業挺身隊)’, 의사나 간호사를 대상으로 한 ‘인술보국정신대(仁術報国挺身隊)’, ‘어업정신대(漁業挺身隊)’, 문화, 상업, 보도, 운송, 금융, 산업 등 32개 단체로 결성된 ‘반도공보정신대(半島功報挺身隊)’ 등 다양한 동원에 대한 호칭 표현이 사용되었다.

조선(한국)에서는, 미혼 여성을 정신대로 근로 동원하는 것을 ‘처녀공출(処女供出)’이라고 불렀다. 윤명숙에 따르면 조선어의 ‘처녀’는 미혼 여성이나 젊은 여성을 가리키는 총칭이다. 이런 ‘정신대’라는 표현을 여성을 대상으로 한 동원에 정식으로 적용한 ‘여자정신대’가 일본 내지에서 결성된 것은 1944년 8월의 여자정신근로령(女子挺身勤労令)에 따른 것이다.

그 이전에는 1941년 국민근로보국협력령(国民勤労報国協力令)에서 ‘근로보국대(勤労報国隊)’가 결성되어, 1943년 9월 13일 차관회의(次官会議) ‘여자근로동원의 촉진에 관한 건(女子勤労動員ノ促進ニ関スル件)’에서 ‘여자근로정신대(女子勤労挺身隊)’가 자주적으로 결성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관 알선에 의한 모집은 있었지만 여자정신근로령이 정식으로 발령되지는 않았다.

1.2 정신대와 위안부(挺身隊と慰安婦)

일본통치하 조선에서는 “정신대가 되면 위안부가 된다”는 루머가 유포되고 있었다. 또 한국에서는 한국전쟁시의 한국군 위안부를 ‘정신대’라고 불렀다. 게다가 1960년대 박경식(朴慶植)의 ‘조선인 강제 연행의 기록(朝鮮人強制連行の記録)’이나 시오타 쇼베이(塩田庄兵衛) 등의 저작을 비롯하여 일본과 한국에서 정신대를 ‘위안부’와 동일시하고 혼동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특히 한국에서는 위안부를 정신대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으로 정착되기까지 했다.


2 배경(背景) 

여성의 전시 동원(女性の戦時動員)

제 1차 세계대전 중에는 자원, 인력이 많이 소비되었고,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도 국가의 모든 인적·물적 자원을 정부가 통제 운용할 수 있는 국가총력전이 본격적으로 각국에서 전개되었다.

국가총력전이 된 제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영국 등 연합국은 일본에 앞서서 이미 여성을 군수공장 등에 동원했다. 일본도 전쟁 국면의 악화로 징병이 확대되고 남성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여성의 노동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고, 1943년(쇼와18년) 10월 6일 ‘샤신슈호(写真週報)’에서는 연합국의 여성 근로 사진을 인용해 “적(敵)인 미국은 여자마저 이렇게 동원하고 있다”고까지 소개했다. 

또, 여성이 후방지원뿐만 아니라 병사로서 최전선에 서는 경우까지 있었다. 영국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인 1917년에 지원육군부인부대(志願陸軍婦人部隊, Women 's Army Auxiliary Corps, WAAC)가, 1918년에는 왕립부인공군(王立婦人空軍)이 편제되었다.



1938년에는 영국군 예비역의 국방의용군(国防義勇軍)이나 부인군(婦人軍, Women 's Legion) 등에 소속하는 여성병사를 직합(集合)하고, 새로운 보조지방의용군(補助地方義勇軍, Auxiliary Territorial Service, ATS)으로 설립을 하여, 비행체 측정 장치・사격 관제 장치로서 계측(計測)을 하는 고사포 방공 임무를 맡았다.

당시 10대 후반이었던 영국 왕족인 엘리자베스 2세(현 영연방 왕국 여왕)도 여성 병사로 보조 지방의용군(補助地方義勇軍)에 입대해 군 차량 정비 등 영국군의 후방 지원을 했다. 1939년에는 부인보조공군(婦人補助空軍, Women 's Auxiliary Air Force, WAAF)이 조직되었다. 전후 1949년에 왕립부인육군(〜1992년), 왕립부인공군(〜1994년)이 편제되었다.

미국에서도 1942년에 부인육군부대(婦人陸軍部隊, Women 's Army Corps, WAC)와 해군 부인의용부대(海軍婦人義勇部隊, Women 's Accepted for Volunteer Emergency Service, WAVES) 등이 편제되었다.



이 밖에, 러시아에서도 제1차 세계 대전 시에는 부인지원병(婦人志願兵) 모집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소련에서는 제 46 친위 야간 폭격 항공 연대가 여성 공군 부대로 활약했다. 독일,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등에서도 여성병(女性兵)의 활약이 있었다.

중국에서는 1911년 신해혁명(辛亥革命) 때, 여자북벌감사대(女子北伐敢死隊) 등의 여자 군대가 조직되었으며, 1926년부터는 무한중앙군사정치학교(武漢中央軍事政治学校)에서 여성대(女生隊)가 조직되었다.


3 연혁(沿革)

일본에서 전시동원은 1938년에 국가총동원법(国家総動員法)이 제정되고 나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39년(쇼와 14년) 7월에 국민징용령이 시행된다. 7월 4일에 각의(閣議) 결정된 ‘쇼와 14년도 노무 동원 실시 계획 강령(昭和十四年度労務動員実施計画綱領)’에는 ‘여자 무직자’와 신규 소학교(초등학교) 졸업자, 이주조선인(재일조선인) 등을 ‘급원(給源)’이라고 명기했다 .

3.1 근로보국대 결성(勤労報国隊の結成)

1941년(쇼와 16년) 9월의 ‘쇼와 16년도 노무 동원 실시 계획에 관한 건(昭和十六年度労務動員実施計画ニ関スル件)’을 통해 미혼 여성의 동원을 강화하기로 결정했다. 11월 22일에 공포된 국민근로보국협력령(国民勤労報国協力令)에서는 14-40세의 남자 외에 14세 이상 25세 미만의 미혼 여성을 대상으로 한 근로보국대(勤労報国隊)를 편성하여 원칙적으로 연간 30일의 봉사가 요구되었다. 태평양 전쟁 개전 후에 국민징용령(国民徴用令)이 실시되었지만 여성에 대한 적용은 보류되었다.

3.2 여자근로정신대의 결성(女子勤労挺身隊の結成)
 
1943년(쇼와18년) 6월, 국민근로보국협력령(国民勤労報国協力令)이 개정되고 근로보국대(勤労報国隊)가 상시 조직화되면서 무직의 미혼 여자에게 3-6개월의 근로봉사를 요구했다(강제력은 없었음).

7월에는 후생성(厚生省)과 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 1940년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내각 당시 신체제 운동의 추진을 목표로 하여 결성된 정당 조직) 중앙협력회의(中央協力会議)에서 여자징용론이 나왔지만 실현되지는 않았다.

9월 13일, 차관 회의 ‘여자근로동원의 촉진에 관한 건(女子勤労動員ノ促進ニ関スル件)’에서 14세 이상의 미혼 여성을 동원 대상으로 여자근로정신대가 자주적으로 결성되었다. 항공공장·정부작업청·그리고 남자의 취업이 제한되는 분야(예를 들어, 보모(현·보육사)나 간호부(현·간호사)) 등에서 여성의 취업 확대를 도모했다.

신규 여학교 졸업자는 동창회 단위, 그 외 여성은 부락회, 부인회 단위로 공장에 출동시키는 것으로, 이것은 “징용=강제는 아니고 여자근로정신대의 이름으로 자주적인 여자의 동원”이 도모된 것이었다. 10월 6일, 후생성은 “무업(無業)의 일반 여자는 가급적 정신대에 출동할 것”을 지방 장관에 요청했다.

10월 중순, 조시카쿠슈인(女子学習院) 동창생이 ‘도키와회 근로정신대(常盤会勤労挺身隊)’를 결성하고 최초의 여자근로정신대가 결성되었다. 최초로 동원된 것은 야마와키(山脇) 고등여학교 졸업생 정신대이며 고니카(小西六, コニカ)에 입사했다. 오사카에서는 11월 30일에 정신대가 동원되었다. 

조선에서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毎日新報)’가 ‘유한 여자 적극 동원(有閑女子積極動員)’이라고 보도하게 되고, 내지(内地, 일본 본토)와 동일하게 여학교 출신자 중 가사(집안일) 종사자를 ‘실업방면(実業方面)’에 동원하는 것 등이 검토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11월 24일, 후생성은 학교 단위로 여자근로정신대를 결성한다고 발표했다.

1944년 1월 23일,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수상은 “여유(余裕)가 있는 여성의 근로 도피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발언하면서도 “여성의 징용은 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샤신슈호’ 2월 23일호에 나온 도조의 발언을 인용해 “그 신뢰와 부모 마음에 너희들은 거역해서는 안 된다”고 설명한 조선총독부는 1943년 12월에 노무과(労務課)를 설치했다. 그러면서 조선총독부는 “여자도 결전 태세로 증산(増産)의 전사로 공장에서 일을 시킨다”는 방침을 결정하고, 1944년(쇼와19년) 1월 17일, 경성부 용산에서 여자정신대 또는 ‘특별여자청년정신대(特別女子青年挺身隊)’를 결성했다. 하지만 이것이 근로정신대는 아니었다고 한다.

1944년(쇼와19년) 2월, 국민직업능력 신고령(申告令)의 개정에 따라 12세 이상이 노동력으로 간주된다. 당시 의무교육은 초등교육의 소학교 6학년까지이며, 이후의 취업이 자주 있었다.

1944년 3월 18일, 각의에서는 여자정신대 제도 강화 방책 요강을 결정하고서 교장이나 여자 청년 단장, 부인 회장에 의한 정신대 결성을 강화할 것이라는 내용이 확인되었다. 노동성은 “필요에 따라 정신대 조직에 의해서 필요한 업무에 협력할 것”을 명령할 수 있다고 했다.

1944년 3월 20일, 조선에서는 평양여자근로정신대가 군수공장에 2개월의 기간 한정으로 출동했다. 또한, 조선에서는 그때까지는 관 알선에 의한 ‘여자 (근로) 정신대’가 징집되었다.

1944년 4월에는 조선의 경상남도 부대 100명이 처음으로 일본(내지)에 파견되고, 시즈오카(静岡)의 도쿄(東京) 아사이토 방적(麻糸紡績) 누마즈(沼津) 공장으로 출동했다.

1944년 8월 8일, 내지로 한정되어 있던 국민징용령이 이때부터 면제되었던 외지의 조선의 남자에도 적용된다고 하는 ‘반도인 노무자의 이입에 관한 건(半島人労務者ノ移入ニ関スル件)’이 각의 결정이 이뤄졌다.

3.3 여자정신근로령 발령(女子挺身勤労令発令)

1944년 8월 22일, 일본 내지에서 12세부터 40세까지의 일본인 미혼 여자를 대상으로 군수 공장 등에 강제동원하는 칙령 제519호 ‘여자정신근로령(女子挺身勤労令)’이 공포되어 즉일 시행되었다. 학도동원령(学徒動員令)도 동시에 시행되었다 (중등학교 2년 이상).

이 법령에 의하여 12세부터 40세까지의 여성으로 구성되는 여자정신대는 근로봉사(고용관계 없음)에서 집단취직(고용관계 있음)의 형태로 이행되었고, 건강보험법이나 후생연금보험법 등의 법정부조(法定扶助)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샤신슈호’ 1944년 9월 13일호에는 “그동안 상류계급에 많다는 소위 정신대 도피”를 ‘일소(一掃)’한다는 내용이 나왔다. 게다가 “적격자라고 인정한 자에 대해서는 정신근로령서(挺身勤労令書)를 교부한다. 이것은 남자의 징용령서(徴用令書)와 마찬가지”라는 내용도 나온다. 출동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취업명령이 발동되고, 위반할 경우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천 엔 이하의 벌금을 부과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최초의 벌칙 규정이었다.

1944년 8월 26, 27일의 ‘매일신보’에는 여자정신근로령이 조선에서도 실시된다고 보도되었다.

조선에서는 1944년 9월에 국민징용령이 여자를 제외하고 시행되었으나, 1944년 10월에 조선총독부가 ‘국민징용의 해설(国民徴用の解説)’을 통해 여자정신근로령을 발동하지 않는다고 답변하였고, 조선에서는 여자정신근로령이 발령되지 않았다.

1945년 3월에는 동령(同令)은 국민근로동원령에 의해 흡수되었으며 여자정신대도 국민의용대(国民義勇隊)로 개조되었다.


4 조선에서의 관 알선에 의한 정신대(朝鮮における官斡旋の挺身隊)
 
1939년 7월에 내지 일본에서 남성에만 적용된 국민징용령이 시행되었지만, 외지(外地)인 조선에서는 그 후 1944년 8월에 시행되었다. 또, 1944년 8월, 12세부터 40세까지의 미혼 일본인 여성을 공장 등에 동원하는 여자정신근로령이 발령되었지만,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은 제외한다고 언명했다. 그리하여 조선에서는 조선인 여자에 대해 여자정신근로령 발령이 적용되지 않았다.

당시 내무성과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징용 기피 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었고, 또 조선 여성의 노동력 등기(登記)도 매우 적었다. 하지만 강제성이 없는 관 알선 여자정신대는 일본 내지의 공장으로 향했다.



1944년 6월 경부터 일본의 도야마(富山) 후지코시(不二越) 공장에 1,090명(그 중 약 420명은 1945년 7월에 조선의 사리(沙里) 공장으로 이동), 나고야(名古屋) 미쓰비시 항공기(三菱航空機) 도우토쿠(道徳) 공장에 약 300명, 도쿄 아사이토 방적(麻糸紡績) 누마즈(沼津) 공장에 약 100명이 학교의 교사에 의해 인솔되어 파견되었다 (종전 직후에 귀국).

- 1944년 10월, 조선총독부 광공국(鉱工局) 노무과(労務課)가 작성한 ‘국민징용의 해설(国民徴用の解説)'에는, 일문일답 형식으로, “여자에 대한 징용도 실시됩니까?”라는 질문에 “향후에 여자를 동원할 경우, 여자정신근로령 발동에 따른다, 라는 생각은 현재는 없습니다. 이제까지 여자정신대는 모두 관의 지도 알선에 의한 것이며, 내지의 … (생략) … 훌륭한 시설을 갖춘 비행기 공장 등에 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관의 지도 알선을 명분으로 할 심산”이라고 답했다.

4.1 파견장소(派遣場所)

조선인 여자정신대의 파견장소는, 지금까지 발견된 학적부 및 현지 공장 등의 문서에 의한 확실한 기록에 의하면 도야마 후지코시 공장, 나고야의 미쓰비시 항공기 도우토쿠 공장, 도쿄 아사이토 방적 누마즈 공장, 세 곳이다.

이 밖에 증언으로, 와카야마(和歌山) 현, 후쿠오카(福岡) 현 야하타(八幡), 그리고 미쓰비시(三菱) 중공업 나가사키(長崎) 조선소, 사가미(相模) 해군 공장에 파견되었다고 하는데, 상세한 것은 알려진 바가 없다.

4.1.1 도쿄 아사이토 방적 누마즈 공장(東京麻糸紡績沼津工場)
 
1944년 4월에는, 조선의 경상남도 부대 100명이 처음으로 일본(내지)에 파견되고, 시즈오카(静岡)의 도쿄 아사이토 방적 누마즈 공장에 출동했다. 이 여자근로정신대는 학교의 교사에 의해 인솔, 파견되었으며 종전 직후에 귀국했다.

1945년 7월에 공장이 공습으로 재해를 입으면서 후지보(富士紡) 오야마(小山) 공장(시즈오카(静岡) 현 순토(駿東) 군)으로 반도여자근로정신대 334명이 이동했다. 전후 9월 30일, 대원을 포함한 246명이 조선에 귀국했다.

1992년, 부산 종군위안부·여자근로정신대 문제에 대한 공식사죄 등 청구소송(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기각)에서의 원고 3명이 도쿄 아사이토 방적 누마즈 공장에 파견된 여자근로정신대였다. 1997년에 시작된 도쿄 아사이토 방적 누마즈 공장의 조선인 여자근로정신대 문제에 대한 공식사죄 등 청구소송(도아사 재판(東麻裁判))은 판결에서 사실인정이 이뤄지지 않았다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기각).

그 밖에, 당시 대원이었던 김문선(金文善)은 한 인터뷰에서 도쿄 아사이토 방적의 모집에 응모한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도쿄 아사이토(麻糸)에 한국인 감독이 있었고, 그 사람이 거제도에 모집을 하러 온 거예요. 예전부터 거기에 한국의 여자가 많이 일하러 갔었어요. 내 사촌 언니도 갔었고, 몇 년 후에 돌아왔습니다. 갔다 오더니, 예쁜 양복을 입고, 머리도 제대로 하고, 가죽 구두를 신었어요. 부러워서 ‘아, 나도 일본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일본에 가고 싶어서 감독을 만나러 성포(城浦)라는 마을까지 갔었어요. 거기에 있었던 여관 같은 곳에는 산속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모두들 여기에 숙박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뻐했고, 또다시 시골에 돌아가고 싶지 않다, 당장이라도 일본에 가고 싶다, 고 말했습니다.”


김문선과 합격자들은 250명 정도로서 누마즈 공장에서의 노동은 가혹했다고 한다. 또 도아사 재판에서는 원고 측이 “일하면서도 배울 수 있다, 또 휴가도 있다 등과 같은 사전 계약 내용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동시에 토요일과 일요일은 휴일이었으며 회사에서는 밤에 공부도 했다, 고도 증언했다.

4.1.2 도야마 후지코시 공장(富山不二越工場)

도야마 현의 후지코시 공장에는 1943년에 인천의 보고대(報告隊)가 파견되었고, 1944년 5월에는 경상북도 부대로 70〜100명의 반도 여자정신대가 도착했다. 6월 8일에는 경상남도 부대 100명이 도착했다. 1944년 6월경부터는 어림잡아 1090명(이 중 약 420명은 1945년 7월에 조선의 사리(沙里) 공장으로 이동)이 되었으며, 종전 직후에 귀국했다.

경성부에서의 응모는 ‘매일신보’를 통해 모집되고, 응모 자격은 국민학교 졸업생으로 나이 17〜20세, 계약은 2년으로, 지면에는 “이것은 결코 징용이 아니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지원”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쓰여 있었다.



또, 경성부에서는 여자중학교와 국민학교 교장이 사람들을 모았고, 정신대로의 희망자를 모집했다. 예를 들어 덕수(徳寿) 국민학교 고등과(高等科) 2학년에서는 반마다 6〜15명이 선발되었다. 방산(芳山) 국민학교 교사의 증언에 따르면, 학생들은 학교에서는 모두 “간다, 간다”고 손을 들지만, 막상 집에 귀가해보니 부모가 반대했기 때문에 선발된 것은 5명에 그쳤다고 한다.

모집은 교회에서도 이루어졌는데, 동대문의 감리(監理) 교회에서는 17세의 가난한 농부 여자가 두 명 파견되었다. 6월 27일의 경성부 선고회(選考会)에서는 150명이 선출되었다. 인천에서는 50명이 선출되었다. 

1944년 7월 2일, 경성 부대·인천 부대 장행회(壮行会)가 실시되고, 종료 후에 대원들은 조선신궁(朝鮮神宮)에 참배했다. 7월 6일에는 경기도 부대, 인천 부대가 도야마에 도착했다.

1945년 1월 24일 ‘매일신보’의 광고에는 “오너라, 직장은 여성을 부른다. 여자정신대를 모집한다”고 쓰여 있었으며, 13세 이상 21세까지의 여성이 모집되었다. 3월 2일에는 전라북도 부대 100명, 이 중에는 전주(全州) 상생(相生) 국민학교 5-6학년 10명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또한 개성 이남의 650명이 후지코시에 도착했다.

1945년 2월 24일에는 경성부, 인천부, 개성부로 이루어진 경기도 중대 150명이 출동했다. 제1진에서 제4진까지의 동원 수는 ‘후지코시 오십년 사(不二越五十年史)’에는 1090명이라고 쓰여 있다. 또 ‘도야마 현 경찰사(富山県警察氏)’ 하권(下卷)에는 현 내의 조선여성은 2800명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1945년 7월의 도야마 공습으로 조선인 정신대에서도 피해자가 나왔다. 8월 이후, 대원들은 따로따로 흩어져 귀국했지만 전라북도 부대의 일원의 증언으로는 8개월분의 임금 170엔이 지불되었다고 한다.

4.1.3 나고야 미쓰비시 항공기 도우토쿠 공장(名古屋三菱航空機道徳工場)

나고야의 미쓰비시 항공기 도우토쿠 공장에는 1944년 6월 15일,  전라남도 부대 150명, 다이코(大江) 공장에는 충청남도 출신에 150명의 반도 여자근로정신대가 동원되었다.

광주의 김복례(金福礼)는 도나리구미(隣組, 제2차 세계대전 하의 일본에서 각 마을에 조직된 관 주도의 후방 조직) 조장(組長)의 “근무하면서 공부하면 어떨까”라는 말을 듣고 입대했다. 나주(羅州) 국민학교 6학년에서는 반 전원이 모집에 손을 들고, 9명이 선출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7일에 기이(紀伊) 반도 동부에서 일어난 동남해 지진에 의해 전라남도 부대 6명이 사망했다.

나고야 미쓰비시・조선여자근로정신대 소송의 소장에는, 일본어가 능숙한 저연령 세대가 내지(일본)에 가는 일이 많았지만, 막상 공장에 가서는 야학의 꿈이 깨졌으며 군대식의 심한 취급을 받았다는 불만을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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