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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 (1)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그 첫번째 사업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일본의 위안부(日本慰安婦)’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18년 5월 7일판).

 

우리 한국인은 늘 한국인의 시각으로만 세상이나 사물을 보는데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우리가 정녕 산업화·민주화를 완성하고 이제 세계 탑10 순위를 당당히 지향하는 국가 대한민국의 구성원이라면, 편협한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벗어나 비록 불편한 내용이라도 한번쯤은 우리와 다른 시각, 반대되는 시각에서 세상, 사물을 바라볼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런 시각에 대한 실제 수용 여부, 비판 여부는 나중 문제거나 별개 문제로 하더라도 말이다.

 

사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 관계에 있어서 무척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민감한 문제이기에 더더욱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관련하여 일본인의 입장이 정확히 무엇인지부터 세세하게 알아둬야 안다. 이에 미디어워치는 온라인에서 관련 일본인의 입장을 가장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고 판단되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의 해당 항목 번역 프로젝트를 떠올리게 되었다.

 

이번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일본의 위안부’ 항목 번역은 전문(全文) 번역을 원칙으로 하였으며 원문 표현도 가급적 그대로 살렸다. 다만, 각주까지 모두 번역하지는 않았으므로 보다 자세한 분석은 원문을 참조해주기 바란다. 


미디어워치와 역시 같은 취지로 일본 자료들에 대한 번역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필명 쌀밥에스팸님의 ‘[일본 위키백과 번역] 위안부(慰安婦)’의 내용도 병행 참조해주기 바라며, 위키피디아한국어판 위안부 내용과도 팩트와 출처를 서로 비교해봐주기 바란다.

 

미디어워치는 필명 쌀밥에스팸님과 같은 분들을 좇아 차후 몇 년에 걸쳐 위키피디아 일본판에서 혐한론’, 독도(다케시마)’, 동해(일본해)’, 징용노동자’, ‘난징학살(난징사건) 논쟁’, ‘731부대’, ‘임나일본부설’, ‘일제시대사’, ‘독립운동’ 등 한국과 관계된 예민한 이슈가 담긴 항목들은 가급적 전부 번역 소개할 예정으로 있다.

 

본 콘텐츠의 번역은 포린미디어워치와 관련하여 늘 수고해주시는 박아름 씨가 맡아주셨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함을 전한다.

 

(관련기사 : 영화 ‘귀향’의 역사왜곡과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7가지 오해)


  

  

일 본 의    위 안 부

(日本慰安婦)

 

 

일본의 위안부본 항목에서는 구(旧) 일본군의 위안부, 소위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 및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개설한다.



목 차


1 개요


2 근대 일본의 공창 · 위안부의 역사

   2.1 일반적인 공창

         2.1.1 메이지 시대

                 2.1.1.1 조선의 유곽업과 청일 전쟁

                 2.1.1.2 창기 단속 규칙과 부녀 매매 국제 조약

                 2.1.1.3 일러 전쟁과 기생제의 붕괴

                 2.1.1.4 일본 통치 하의 조선

         2.1.2 제 1 차 세계 대전 이후

   2.2 군대에 의한 공창 (위안부)

         2.2.1 일청전쟁에서 만주사변까지

         2.2.2 일중전쟁(시나사변)

                2.2.2.1 난징사건과 일본군 위안소

                2.2.2.2 문제를 일으킨 일본 본토 위안부 알선 업체

                          2.2.2.2.1 위안부로 일본 본토에서 중국으로 도항하는 부녀에 대한 취급

                          2.2.2.2.2 일본 본토에서의 위안부 모집에 주의

                          2.2.2.2.3 일본 본토에서의 남부 중국에 위안부 요청

                2.2.2.3 조선 남부에서 다발하는 소녀 유괴 사건

                          2.2.2.3.1 조선 총독부 경찰의 중국에 양육 거래 금지

                2.2.2.4 만달레이 위안소

                2.2.2.5 시나사변(일중전쟁)의 경험에서 바라본 국기진작대책

         2.2.3 태평양 전쟁 (대동아 전쟁)

                2.2.3.1 조선에서의 ‘정신대’ 와 ‘위안부’의 혼동 및 유언비어

                          2.2.3.1.1 여자정신근로령 

                2.2.3.2 대만에서의 위안부

         2.2.4 종전기

                2.2.4.1 소련군과 조선보안대에 의한 전시 성폭력과 위안부

                2.2.4.2 미군과 위안부

         2.2.5 전후

                2.2.5.1 점령군과 위안부

                          2.2.5.1.1 특수위안시설협회(RAA)의 설치

         2.2.6 진주군의 성범죄

                2.2.6.1 GHQ 군의총감에 의한 위안부 알선 요청

                2.2.6.2 조선전쟁(한국전쟁)

                2.2.6.3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재일미군


(계속)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 (1)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 (2)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 (3)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 (4)

 


  

1 개요(概要)

 

위안(慰安)이란 일반적으로 마음을 위로하는 것, 또는 그런 사례’, ‘평소의 수고를 위로하고 즐거움을 주는 것을 의미하며안부(慰安婦)전쟁터에서 장병의 성을 상대하는 여성을 가리키며 성(性)의 상대가 되도록 강요당한 여성이란 의미다.

 

국가에 의한 관리매춘을 공창제도(公娼制度)라고 하며, 위안부 및 위안소도 공창제의 일종으로 간주되고 있다. 군인들에게 매춘을 한 부녀자들은 일본 뿐만 아니라 미국, 한국, 독일, 프랑스 등의 다수 국가에 존재했으나 국가관리형 위안부제도를 채용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시에 있어서는 일본과 독일, 두 나라 뿐이다. (위안부’(한국어 번역) 항목 참조)

 

하지만 한국, 북한, 중국, 유엔인권위원회, 일본의 일부 연구자들은 일본군 위안부를 성노예(性奴隷)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위안부제도를 만든 일본군과 위탁민간업자와의 관계성, 제도의 관리 및 운영, 위안부들이 놓인 환경, 경우 및 보수제도, 그리고 강제연행이나 강제성의 유무, 점령현지의 군령하 위안소에 있어서의 위안부 취급 등에 대해 다양하게 연구하여서 국제적인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대항(対抗)하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논점에 대해서는 기타 후술)

 


2 근대 일본의 공창 및 위안부의 역사(近代日本の公娼・慰安婦の歴史)

  

2.1 일반적인 공창(一般的な公娼)


근대공창제(近代公娼制)는 성병 대책과 군대 위안을 목적으로 프랑스에서 확립되어 그 후 유럽 각국 및 미국, 일본에도 도입되었다.

 

1802년 프랑스에서 경찰에 의한 공창 등록이 시작되어 1828년에는 프랑스 풍기국 위생과가 설치되었는데, 검진에서 성병을 진단 받은 창부는 병원으로 보내져 치료 후에 매춘업 허가를 받을 수 있는 제도가 생겼다. 18세기 말에 매독이 유행하여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대규모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성병이 전 유럽에 퍼져나갔는데 그와 동시에 의학연구도 발전했다


프러시아에서는 한번 폐지된 후에 1851년에 성병예방을 위해 공창제도가 군부에서 재개되어 풍기경찰이 특별히 설치되었다. 영국에서는 크림 전쟁 시, 성병문제에 대하여 영국군의 제안을 받아 1864년부터 1869년까지 전염병(성병)법에 의거한 공창제도가 도입되었는데 경찰이 창부로 간주한 여성을 체포하여 강제 검진을 받도록 하였으며, 성병에 감염되지 않은 경우에는 창부(공창)로 정식으로 등록되었다. 1873, 빈 국제의료회의에서 매춘통제를 각국 공통으로 하기 위한 국제법이 제안되었다.

 

1870년대에 조세핀 버틀러(ジョセフィン・バトラー, Josephine Butler)를 중심으로 한 매춘부 구제운동(폐창운동)이 활발화되었으며, 19세기 말의 영국이나 미국 본국에서는 공창제가 폐지되었으나 식민지에서는 계속 존재했다.

 

2.1.1 메이지시대(明治時代)


일본의 공창제는 연계봉공(年季奉公, 미리 햇수를 정하고 하는 고용살이)의 한 형태로 발전하여 도쿠가와 막부(徳川幕府)의 인가를 받은 유곽이 형성되었다. 메이지유신 후의 1873(메이지 6)에 공창에 대한 단속규칙이 제정되었다.

 

2.1.1.1 조선에서의 유곽업과 일청전쟁(朝鮮での遊郭業と日清戦争)

 

1876년에 이씨 조선에서는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条規)를 체결, 개국한 이후에는 부산과 원산에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어 일본식 유곽도 개업하기 시작했다. 188110월에는 부산에서 대좌부병 예창기 영업규칙(貸座敷並ニ芸娼妓営業規則)이 제정되었으며, 원산에서도 창기유사 영업단속(娼妓類似営業の取締)이 실시되었다. 1882년에는 부산영사가 대좌부 및 예창기에 관한 포달(貸座敷及び芸娼妓に関する布達)’을 발포하여 대좌부업자(貸座敷業者, 포주)와 예창기(芸娼妓, 매춘녀)가 과세 대상이 되었으며, 예창기에게는 영업감찰(영업허가증)의 취득을 의무화했다. 1885년에는 경성영사관에서 매음단속규칙(売淫取締規則)이 발표되어 서울(ソウル)에서의 매춘업은 금지되었다.

 

그러나 1894-1895년의 일청전쟁(日清戦争, 한국에서는 청일전쟁으로 표현) 후에는 식당에서의 예기(芸妓) 고용이 공인(영업허가제)되어 1902년에는 부산, 인천에서, 1903년에는 원산1904년에는 서울, 1905년에는 진남포(鎮南浦)에서 유곽이 형성되었다.

 

2.1.1.2 창기단속규칙과 부녀매매국제조약(娼妓取締規則と婦女売買国際条約)

 

1900년에는 창기단속규칙(娼妓取締規則)이 제정되어 창기의 연령을 18세 이상으로 정하여(종래는 15-16) 주거나, 또는 외출에 제한을 가했다. 1901, 군의관인 키쿠치 소우타로(菊池蘇太郎)군대에 있어서의 화류병예방법(軍隊ニオケル花柳病予防法)을 발표하여 공창 제도의 목적은 성병(花柳病) 예방과 풍속퇴괴방지(風俗頽壊防止)를 목적으로 했다고 기록했다.

 

(매춘부를 구제하기 위한) 폐창운동(廃娼運動)은 국제조약으로 결실을 맺어 1904년 5월에는 유럽 12개국에서 추업 종사를 시키기 위한 부녀매매 단속에 관한 국제협정(醜業を行わしむるための婦女売買取締に関する国際協定), 이어서 1910년 5월에는 13개국간에서 추업 종사를 시키기 위한 부녀매매 금지에 관한 국제조약(醜業を行わしむるための婦女売買禁止に関する国際条約)이 체결되었다. 유엔 규약 제23조에서 이 규약에 대한 일반 감시를 하기로 했으며 1921년 9월의 제2회 국제연맹총회에서는 부인 및 아동의 매매금지에 관한 국제조약(婦人及児童ノ売買禁止ニ関スル国際条約)으로 재체결되었다(23개국). 일본도 그 조약에 가맹했으나 기존의 창기단속규칙이 있었기 때문에 연령에 관한 조항(21세 미만은 금지)에 대해서는 보류했다.

 

2.1.1.3 일러전쟁과 기생제의 붕괴(日露戦争と妓生制の崩壊)

 

1905년의 일러전쟁(日露戦争, 한국에서는 러일전쟁으로 표현)의 승리에 이어 일본이 조선의 보호국이 된 이후로 일본의 매춘업자가 더욱 증가했다. 서울(ソウル) 성내 쌍림동(双林洞)에는 신마치(新町유곽이 형성되어 재원(財源)이 되기도 했다. 1906년에는 통감부가 설치되어 거류민단법(居留民団法, 한반도 거주 일본인에 관한 법)도 시행되었으며 영업단속규칙도 각지에서 적용되어 제도가 정비되었다. 1906년에는 용산(龍山)에 모모야마(桃山유곽(후의 야요이(弥生) 유곽)이 개설되었다. 일본인 거주지로 알려진 경성의 신마치(新町), 부산의 미도리마치(緑町), 평양의 야나기마치(柳町), 대전의 가스가마치(春日町) 등에는 수십개에서 수백개가 넘는 유곽이 설치되었으며 지방의 소도시에도 수십개의 유곽이 생겼다.

 

일본인 매춘업자의 영업이 활발해지자 조선인 업자들도 증가했는데 서울 경찰청은 시내에서의 창부영업을 금지시켰다. 1908년 9, 경찰청은 기생단속령, 창기단속령을 발포하여 조선의 전통적 매춘업인 기생을 당국의 허가제로 하여 공창제로 관리하기로 했다. 1908년 10월 1, 그 단속 이유를 발표했는데 매매인의 사기로 인해 본의 아니게 매춘업에 종사하게 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설명했다.

 

2.1.1.4 일본통치하의 조선(日本統治下の朝鮮)

 

1910년의 조선합병 이후에는 통감부 시대보다 단속이 강화되면서 1916년 3월 31일에는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령 제4대죄부창기단속규칙(貸座敷娼妓取締規則)’(1916년 51일 시행)이 공포되어 조선 전체에서 공창제가 실시되었으며 일본인 및 조선인 창부 모두 연령 하한이 일본 본토(내지)보다 한살 어린 17세 미만으로 설정되었다.

 

그러나 합병초기에는 일본식 성관리정책을 철저히 펼치지 못하였으며 1910년대 전반의 여성 매매 형태로, 꾀어낸 여성을 원래 자기 처라며 팔아넘기는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1930년대처럼 유괴하여 창기로 팔아넘기는 사례는 아직 많지 않았다. 당시 신마치(新町) 및 모모야마(桃山) 유곽은 노골적인 대좌부(貸座敷, 유곽)였지만 아이마이야(曖昧屋)’라고 불리는 사창(私娼)을 내보내는 작은 식당들이 서울시에 130여개 산재했다.

 

2.1.2 제1차 세계대전 이후(第一次世界大戦以降)

 

1차 세계대전 전후인 1915~1920년에는 전쟁 호황으로 조선 경성의 화류계가 전성기를 맞았다. 조선인 창기도 1913년의 585명에서 1919년에는 1,314명으로 증가했다. 1918, 경성 혼마치(本町)의 일본인 거류지와 종로서관내에서 실시된 임검(臨検)에서는 호적불명자나 13세 소녀 등이 검거되었다. 1918년 6월 12일의 경성일보(京城日報)에서는 “최근 경성에는 지방에서 상경한 여성들이나 꽃의 도시 경성을 동경하는 조선인 부인들의 허영심을 도발하여 불량배들이 교묘하게 부녀자를 유혹하여 경성으로 유인한 후, 실컷 농락하고 나서 아이마이야(あいまいや , 요릿집, 찻집, 여관의 간판을 걸고 매춘업을 하는 곳)에 팔아넘겨 도주하는 ‘모계의 덫(謀計の罠, 사기)’에 걸린 결과, 비참한 상황으로 몰락한 자들이 현저히 늘어났다”고 보도했다.

 

1910년대의 전쟁호황 이전에는 조선인 여성의 인신매매 및 유괴사건에서 아내로 사칭하여 팔아넘기는 경우가 많았으나, 1910년대 후반에는 길거리에서 감언이설에 속아 유괴되는 사례가 증가했다. 1920년대에는 매춘업체에 팔린 조선인 여성의 숫자가 연간 3만명을 넘었으며 매매대가는 500~1200엔이었다.

 

다이쇼(大正) 시대에서 쇼와(昭和) 시대에는 공창폐지운동이 활발해졌다. 종교인 다카시마 베이호우(高島米峰)1931년 4월 5일자‘호우치신문(報知新聞)’에 발표한 국제신의와 공창폐지(国際信義と公娼廃止)에서 현재 공창폐지는 세계적인 통념일뿐 아니라 일본 국내에서도 이미 일반적 여론이 되었다. 실제로 현회(県会)에서 폐창을 결의한 곳은 아홉개 현(県)에 이르며폐창을 단행한 곳은 두개의 현이다. 그리하여 중앙사회사업협회, 중앙교화단체연합회, 대일본종교대회, 오사카 사회사업연맹, 관동 동북의사대회, 이와테 현 의사회를 비롯한 가장 유력한 단체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공창제도 철폐를 이미 결의했다. 이제 내무대신(내무장관)이 메이지 33(1900)에 공포한 창기단속규칙을 철폐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라고 당시의 상황을 기술하고 있다.

  

2.2 군대에 의한 공창 (위안부) (軍隊による公娼(慰安婦))


강간은 전시에 한정된 일이 아니라 평소에도 발생하지만 전시 강간 등 성폭력에 관해서는 1990년대 이후 ‘전시 성폭력(戦時性暴力)’으로 연구되고 있다. 전시성폭력은 승자에 대한 포상, 패자에 대한 징벌, 또는 단순한 쾌락으로 행사되었다. 니혼(日本) 대학 하타 이쿠히코(秦邦彦) 교수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지에서의 성 정책은 자유연애형(사창중심. 영국군, 미군), 위안소형(일본, 독일, 프랑스), 강간형(소련, 조선)의 3가지 유형으로 크게 분류된다.


일본의 위안부 제도, 운용, 실태에 대한 연구는 전후 경위 및 주로 일중전쟁(한국에서는 중일전쟁, 일본에서는 일화사변(日華事変) 또는 시나사변(支那事変)이라고도 표현), 이후(특히 대동아전쟁기)에 한정된 연구이며, 그 논쟁 속에서도 이념적 의도가 나타났다 숨겨졌다 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서술이 곤란한 상황이다.


2.2.1 일청전쟁에서 만주사변까지(日清戦争から満州事変まで)


2.2.2 일중전쟁(시나사변)(日中戦争(支那事変))


2.2.2.1 난징사건과 일본군위안소(南京事件と日本軍慰安所)


1937년 7월 7일 루거우차오 사건(일본에서는 노구교사건(盧溝橋事件)으로 표현)이 발생하여 일중전쟁(시나사변(支那事変))이 시작됐는데, 일본군은 전면전으로 본격화되기 전에 ‘야전주보규정(野戦酒保規程)’을 개정하여 위안소를 설치하기 위한 법적 정비를 실시했다. 1937년 9월 29일의 육달 제48호 ‘야전주보규정개정(野戦酒保規程改正)’에는 ‘필요한 위안시설을 설치해도 된다’는 기록이 있는데 위안소는 군의 후방시설로 병참부가 관할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 후 1937년 12월의 난징공략전 이후, 난징시를 점거한 일본군에 의한 난징사건이 발생했다.


사건 당시 난징 시내의 안전구역(난민구역) 설치에 관여했으며, 피해를 피하려고 안전구역내 금릉여자문리학원(金陵女子文理学院)을 찾아온 여성 난민을 보호한 미국인 선교사, 미니 보토린(ミニー・ヴォートリン, Minnie Vautrin)의 일기에는 강간사건의 피해자 취조조사 내용이나 강간목적으로 금릉여자문리학원에 침입한 일본군과 관련하여 “(일본병사)를 쫓아냈다, (일본병사에 의해) 여성 난민이 납치되었다, 학교에서 강간을 시도한 (일본병사를) 제지했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 1937년 12월 24일의 일기에는 일본군 모 사단의 고급군사고문이 방문하여 피난민 1만명 중 매춘부 100명을 선별하고 싶다는 요구를 했는데, 그 이후로 여성들을 연행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선별을 용납하였으며, 결국 일본군이 21명을 데리고 갔다는 내용과, 병사가 이용하기 위한 정규 위안소를 개설하면 강간피해가 감소한다는 일본군 측의 설명을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일본군은 1937년말부터 대량의 군위안소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이이누마 마모루(飯島守) 상해파견군 참모장의 12월 11일의 일기에는 중시나(中支方) 방면 군부로부터 위안소 설치에 대한 지시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우에무라 도시미치(上村利通) 상하이 파견군 참모부장도 군부의 불법행위가 지나쳐 “난징 위안소 개설에 대한 제2과안을 심의한다”(28일)고 기록했다. 현지군 최고사령부였던 중시나 방면 군부에서 지시가 내려온 결과, 각 군에서 난징공략 후의 주류지에서 헌병에게 지시하고 위안부를 모집하여 위안소를 개설하였다. 일본 내지(본토) 및 조선반도에서 여성들을 데리고 온 기록도 있다. 1937년 12월 21일의 재상하이(在上海) 일본총영사관 경찰서장이 “황군장병을 위한 위안부 여성들의 도래와 관련한 편의 제공에 대한 의뢰(皇軍将兵慰安婦女渡来ニツキ便宜供与方依頼ノ件)”를 제출하여 전선에서의 위안부 설치가 보고되었다.


육군이 시찰을 의뢰한 정신과의사 하야오 도라오(医早尾乕)의 논문 ‘전장심리의 연구(戦場心理の研究)’에 의하면 1938년 상하이에서는 강간과 윤간이 빈발하였으며, 난징에서는 “황군한테 강간당하는 것을 행운으로 여겨라”고 고함을 친 대장이 있었다고 보고되었다. 강간의 다량 발생으로 위안소의 설치를 서두른 경위는 ‘이이누마 마모루 상하이 파견군 참모장의 일기(飯沼守上海派遣軍参謀長の日記)’, ‘우에무라 도시미치 상하이 파견군 참모부장의 일기(上村利通上海派遣軍参謀副長の日記)’ ‘북시나 참모장 통첩’(北支那参謀長通牒) 등의 사료를 통해서 파악할 수 있다. 또 오가와 세키지로(小川関治郎)의 진중일기(陣中日記) 1937년 12월 21일 부분에는 “호주(湖州)에는 병사들을 위한 위안설비가 개설되었는데 매우 번창하고 있다. 중국 여자 열몇 명이 있는데 점차 늘리려고 헌병에서 바쁘게 준비 중”이라는 기술이 있다.


일본군 위안소 설치는 주로 강간 대책을 위한 것이었으나, 강간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2.2.2.2 문제를 일으킨 일본 본토 위안부 알선 업체(問題を起す内地の慰安婦斡旋業者)


1937년부터 1938년까지 매춘알선업자 단속에 관한 통달 등이 다수 발포되었다. 1937년 8월 31일에는 외무차관통첩 ‘불량분자의 도래에 관한 건(不良分子ノ渡支ニ関スル件)’이 공포되어 알선업자 단속에 대한 주의 명령이 나왔다. 1937년 9월 29일 육달 제48호 ‘야전주보규정개정’에서는 ‘필요시 위안시설을 만들 수 있다’고 기록되어있다.


•1938년 1월 19일부 군마(群馬) 현 지사 발로 내무대신 및 육군대신 앞 ‘상하이 파견군 내륙군 위안소의 작부(酌婦) 모집에 관한 건(上海派遣軍内陸軍慰安所ニ於ケル酌婦募集ニ関スル件)’과, 같은 해 1월 25일부 고치(高知) 현 지사 발내무대신 앞 ‘시나도항 부녀 모집과 단속에 관한 건(支那渡航婦女募集取締ニ関スル件)’, 같은 날 야마가타(山形) 현 지사 발 내무대신 및 육군대신 앞으로 송부된 ‘북시나파견군 위안작부 모집에 관한 건(北支派遣軍慰安酌婦募集ニ関スル件)’ 등에서는 경찰한테 ‘황군의 위신을 크게 떨어뜨리는 일’이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고베의 대좌부업자 오오우치(大内)는 말한다. 오오우치는 상하이 전투가 일단락하여 주둔체제가 된 이후로 장병들이 현지 중국인 매춘부와 놀아나면서 성병이 만연했으니 3,000명을 모집했다고 말한다. 업자 오오우치에 의하면 계약은 2년, 전차금(前借金)은 500엔에서 1000엔, 연령은 16세부터 30세까지였다고 한다.


•1938년 2월 7일부 와카야마(和歌山) 현 지사발 내무성 경보국장 앞 ‘시국을 이용한 부녀유괴 피의사건에 관한 건(時局利用婦女誘拐被疑事件ニ関スル件)’이라는 문서가 있는데, 이 사건은 1938년 1월 6일 와카야마 현 타나베(田辺)에서 중국에 건너가서 위안부로 취직하지 않겠느냐고 부녀자에게 권유한 거동불신(挙動不審)의 남자들이 유괴용의(誘拐容疑)로 체포된 사건이다. 남자들은 군부의 명령으로 모집했다고 진술하여 와카야마 현 형사과장이 나가사키(長崎) 현 외사경찰과에 문의한 결과, 그에 대한 회신을 1938년 1월 20일부 문서로 받았다. 회답에는 “황군장병 위안부가 도래하기 때문에 편의를 제공해달라”는 의뢰문이 첨부되어 있었다. 이 공문 ‘황군장병 위안부녀 도래에 따른 편의공여 의뢰의 건(皇軍将兵慰安婦女渡来ニツキ便宜供与方依頼ノ件)’ (재 상하이 총령사관 경찰서발 나가사키 현 수상경찰서 앞, 1937년 12월 21일부)에는 “가업부녀(작부) 모집을 위하여 내지 및 조선방면으로 여행 중인 자가 있음”이라고 기록되어있다.


•1938년2월14일에는 이바라키(茨城) 현 지사가 내무대신 및 육군대신 앞으로 ‘상하이 파견군 내륙군 위안소의 작부모집에 관한 건(上海派遣軍内陸軍慰安所ニ於ケル酌婦募集ニ関スル件)’이라는 통달을 보냈으며,  익일 2월 15일에는 이바라키 현 지사발 내무대신 앞으로 동명의 통달이 송부되었다.


2.2.2.2.1 위안부로 일본 본토에서 중국으로 도항하는 부녀에 대한 취급(慰安婦として内地から中国へ渡航する婦女の取扱)


1938년 2월 18일에 기안되어 2월 23일에 내무성 경보국장이 각 청의 부현(府県) 장관(長官) 앞으로 보낸 ‘시나 도항 부녀 취급에 관한 건(支那渡航婦女の取扱に関する件)’ (내무성발경 제5호)이라는 통달이 있다. 이 통달에서는 중국으로 도항(여행)시키는 위안부는 만 21세 이상의 현역 창기 및 추업 종사자에 한하며, 신분증명서 발행 시, 부녀매매 혹은 유괴가 아닌지를 잘 확인할 것과, 모집시 군대의 이름을 사용하는 자, 모집 광고 선전시 허위 및 과대 광고를 하는 자를 엄중하게 단속하도록 명하고 있다.




2.2.2.2.2 일본 본토에서의 위안부 모집에서의 주의(内地での慰安婦募集上の注意)


1938년(쇼와 13 년) 3월 4일 시나 도항 부녀 취급에 관한 건(支那渡航婦女の取扱に関する件)에 따라 육군성 병무국 병무청과는 군 위안소 종업 위안부 등 모집에 관한 건(軍慰安所従業婦等募集に関する件)(육지밀(陸支密) 제745 호)을 발령했다. 이 통지는 베이징 근교에서 위안소를 설치하기 위해 일본 본토에서 위안부를 모집하는 자가 군의 명의를 이용하거나 납치와 같은 방법을 썼을 경우 경찰에 의해 검거 단속이 이루어지므로 앞으로는 파견군을 모집하는 사람의 인선을 적절하게 하여 군의 명성을 유지하고 사회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의뢰 한 것이다.


2.2.2.2.3 일본 본토에서의 남부 중국에 위안부 요청(内地から南部中国への慰安婦の要請)


1938년 11월 4일에는 남지파견군(제21군) 후루쇼 모토오(古荘幹郎) 부대참모육군 항공병 소좌와 육군성 과장이 내무성 앞으로 위안부요원 약 400명, 위안소를 경영할 신원이 확실한 인솔자(고용자)를 요구하는 신청을 보냈는데, 이 요구에 응하여 내무성 경보국(현재의 경찰청에 해당)이 오사카(大阪), 교토(京都), 효고(兵庫), 후쿠오카(福岡), 야마구치(山口) 각 지사 앞으로 총 400명을 할당하여 기밀로 중국 화베이로 도항할 수 있도록 명했다 


2.2.2.3 조선 남부에서 다발하는 소녀 유괴 사건(朝鮮南部で多発する少女誘拐事件)


1932년부터 1939년에 걸쳐 조선 남부에서는 매춘 알선업자가 10 대 소녀들을 길거리에서 강탈하거나 납치 사건이 빈발하고 중국 등에 이 소녀들을 양녀(養女) 등의 명목으로 팔고 있었다.

1938년 11월 15일에는 군산시의 소개업자인 전두한( 田斗漢 )이 부산에서 19살과 17살 소녀들에게 만주에서의 취업을 알선해준다고 속인 후, 유곽에 매각하기 위한 위임장을 작성하는 중에 체포된 일이 있었었다.


1939년 3월에는 하윤명( 河允明) 유괴사건이 발각되었다. 1939년 3월 5일 매일신보(毎日新報)에 의하면 체포된 매춘알선업자, 하윤명 부부는 1932년부터 조선의 농촌에서 약 150명의 빈농을 만주 및 중국에 좋은 직업이 있다고 속여 그들을 700엔 ~ 1000엔에 인신매매했다. 또한 경성(현재의 서울)의 유곽에 여성들 약 50명을 매각했는데 경찰수사가 시작되자 그 여성들을 중국 목단강(牡丹江)이나 산둥성(山東省)으로 전매(発覚)한 사실이 발각되었다. 같은 해 3월 9일 동아일보는 18세 여성이 산둥성 위안소에 전매된 사실을 보도했다. 3월15일의 동아일보에는 ‘유괴당한 100명이상의 처녀들(誘拐した百余の処女)’, ‘정조를 강제유린(貞操を強制蹂躙)’ 등의 표제로 수많은 ‘처녀’들이 하윤명 부부한테 유괴 당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는 같은 해 3월 29일 사설에 ‘유인마의 발호(誘引魔の跋扈)’를 게재하면서 이런 악질 업자가 조선에서 날뛰고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잡지 ‘조광 (朝光)’(조선일보사 출간) 은 1939년5월호에서 하윤명 유괴사건에 대하여 ‘색마유괴마 하윤명(色魔誘拐魔 河允明)’이라는 제목으로 처녀들의 정조가 유린 당했다고 보도했다.


2.2.2.3.1 조선 총독부 경찰의 중국에 양육 거래 금지(朝鮮総督府警察による中国への養育取引禁止)


조선총독부경찰(朝鮮総督府警察)은 종종 악성 소녀 알선업자를 체포하고, 1939년 5월 조선총독부경찰이 중국인의 조선인 양녀 인수와 양육을 금지시켰다.


비슷한 사건이 그 후에도 빈발하여 ‘처녀무역(処女貿易)’을 실행한 ‘유인마(誘引魔)’가 체포됐다는 보도(동아일보 1939년 8월 5일), 부산의 알선업자(특초회업자(特招会業者))에 유괴 당한 피해 여성들이 100명을 넘었다는 보도(동아일보 1939년 8월 31일)가 있었다. 하윤명(河允明)에 이어서 체포된 배장언(裴長彦, ペ・シャンオン)은 1935년부터 1939년까지 약 100명의 농촌여성을 화베이(華北) 및 만주에 팔아 넘겼고, 150여명을 화베이에 매각했다. 또한 하급공무원이 호적위조에 협력하는 부정행위도 발각되었다. 


2.2.2.4 만달레이 위안소(マンダレー慰安所)


구 일본군에는 버마(미얀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나, 필리핀, 오세아니아 등 다양한 방면군이 있었는데 최종배치로는 남방 8방면(南方 8方面)이 알려졌으며 1938년 5월 26일부 중부 버마의 만달레이(マンダレー) 주둔지 위안소 규정에 의하면 “위안부 타출 시 경영자의 증인도장이 있는 타출증을 휴대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요금시간은 하병(下兵)의 경우가 30분이며 “위안소에 있어서 군인군속 등의 사용자가 지켜야 할 주의사항”으로 “과도한 음주자는 유흥을 하지말 것”, “종업원(위안부를 포함)에 대하여 난폭한 행동을 하지 말 것”, “사크(サック, 콘돔)”를 반드시 사용하여 확실히 세정하여 성병 예방을 완전하게 할 것”, “위반자는 위안소 사용정지뿐만 아니라 회보에 실릴 것이며 그 부대 전체가 사용정지 될 수 있다”는 규정이 존재했다.


2.2.2.5 시나사변(일중전쟁)의 경험에서 바라본 국기진작대책(支那事変の経験より観たる軍紀振作対策)


1940년 9월 19일, ‘시나사변의 경험에서 바라본 군기진작대책(支那事変の経験より観たる軍紀振作対策)’을 각 부대에 배포. 그 속에서 병사의 설비개선과 위안시설을 요구. 특히 성적위안소는 ‘사기진흥, 군기유지, 범죄 및 성병 예방에 영향을 미친다’고 설득하고 있다.


“사변 발생 이후의 실정을 말하자면, 모범적 무훈이 있는 반면에 약탈, 강간, 방화, 포로참살 등 황군의 본질에 어긋나는 수많은 범행이 발생하여, 성전(聖戦)에 대한 혐악반감을 내외에서 초래하여 성전 목적을 달성하는데 곤란한 상황이 되어 유감이다.”


“범죄비행이 발생한 상황을 관찰하면 전투행동 직후에 다발하는 상황이 인정된다.”


“사변지에서는 특별히 환경을 정리하여 위안시설에 대한 세심한 고려가 필요하며 살벌한 감정 및 열정을 완화, 억제하기 위하여 유의해야 한다.”


“특히 성적위안소에서 병사들이 받는 정신적 영향은 가장 솔직하고 심각하며,  지도 및 감독의 적부가 사기진흥, 군기유지, 범죄 및 성병 예방 등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생각됨.” 

----- ‘시나사변의 경험에서 바라본 군기진작대책


주오(中央) 대학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교수는 이 자료에서 군부가 위안소 역할을 적극적으로 인정했다고 말한다.


2.2.3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太平洋戦争(大東亜戦争))


1941년 12월 8일, 일본군에 의한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 (대동아전쟁) 발발.


▪1941년 간행 (추정) 시미즈 이치로 (清水一郎) 육군주계소좌 (陸軍主計少佐) 편저 ‘초급작전급양백제 (初級作戦給養百題)’  (육군주계단 기사발행부 ‘육군주계단기사’ 제378호 부록) 제1장 총설에 사단규모의 부대가 작전 시 경리장교가 담당하는15항목의 ‘작전급양업무(作戦給養業務)’ 가 해설되어 있는데, ‘기타’ 항목 해설에 아래와 같은 임무가 열거되어 있다.


1. 주보(酒保) 개설, 2. 위안소 설치, 위문단 초대, 연예회 개최 , 3. 휼병품(恤兵品)의 보급 및 분배 , 4. 상인의 감시


◾1942년 9월 3일의 육군성 과장회보(課長会報)에서 쿠라모토 케이지로(倉本敬次郎) 은상과장(恩賞課長)은 “장교 이하의 위안시설을 다음과 같이 만들었음”이라는 결과를 보고했다. 그 내용에 의하면 설치된 군 위안소는 화베이(華北)에 100개, 후아중(華中)에 140개, 화난(華南)에 40개, 난방(南方)에 100개, 난하이(南海)에 10개, 카라후토(樺太, 사할린)에 10개로 총 400군데였다.


일본 본토에서는 1941년 등화관제(灯火管制) 하의 치안유지를 위하여 전시 범죄 처벌의 특례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성범죄의 엄벌화가 실시되었다.


2.2.3.1 조선에서의 ‘정신대’ 와 ‘위안부’의 혼동 및 유언비어(朝鮮における「挺身隊」と「慰安婦」の混同と流言)


그 당시 일본에서의 ‘정신대’(挺身隊)와 ‘위안부(慰安婦)’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정신대’는 ‘여자근로정신대’를 가리키며 주로 공장 등에서 근로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말하며, ‘위안부’는 전쟁터나 점령지 및 내외지에서의 공창을 의미했다. 하지만 조선사회에서는 이 두가지가 혼동되어 정신대동원 계획을 듣고 패닉에 빠지는 가족도 있었다.


2.2.3.1.1 여자정신근로령 (女子挺身勤労令)


태평양전쟁(대동아전쟁) 말기인 1944년 8월, 일본 본토에서 일본인 여성을 공장 등으로 강제동원하는 ‘여자정신근로령(女子挺身勤労令)’이 발포되어 12세부터 40세까지의 미혼여자가 대상이 되었다. 그와 동시에 학도근로령(学徒勤労令)이 발포되어 중등학교 2학년 이상의 학도들도 군수공장에서 근로했다. 남자는 1939년의 국민징용령(国民徴用令)으로 강제동원되고 있었으나 조선에서는 실시를 지연시켜 민간기업에 의한 자유모집, 1942년 1월부터는 관알선(官斡旋)(조선노무협회(朝鮮労務協会)가 실무)이 되어 1944년 9월에는 징용령(徴用令)이 발동되었다. 소위 ‘강제연행’은 이 징용령에 의거하여 일본 본토 등으로 노동력이 이입된 사실을 가리킨다.


이와 같이 조선반도의 여자들에게는 일본 본토에서의 징용령도 여자정신근로령도 발령되지 않았으나 알선을 통하여 정신대가 일본 본토로 간 사례도 있었기 때문에 정신대와 위안부가 혼동되어 “정신대로 동원되면 위안부가 된다”는 유언비어가 퍼뜨려졌다. 유언비어로 인해 패닉에 빠진 조선의 미혼여성과 부모들은 학교를 중퇴시키거나 결혼을 시켜 징용을 피하려고 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정신대=위안부’ 라는 인식을 퍼뜨린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韓国挺身隊問題対策協議会) 초대대표, 윤정옥(尹貞玉, 1925년생)도 부친의 충고를 따라 1943년 4월에 입학한 학교를 같은 해 9월에 퇴학했다.


그러한 유언비어에 대하여 정부도 인식하고 있었으며 1944년 6월 27일의 내무성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재되어 있다.


근로보국대 (勤労報国隊)의 출동을 모두 징용이라 하고 일반노무 모집에 대해서도 기피, 도주하거나 부정폭행을 저지르는 자도 있다. 미혼여자의 징용은 필연적인데 그들을 위안부로 일하게 한다는 황당무계한 유언비어가 기타 악질의 헛소문과 함께 전달되어 노무사정은 향후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예상된다.

- 내무대신청의 ‘조선총동부 부내임시직원 설치제 중 개정의 건(内務大臣請議「朝鮮総督府部内臨時職員設置制中改正の件)’ (1944년6월27일부)


‘황당무계한’ ‘악질의 유언’이라는 기재가 있는데 일본정부가 이러한 유언비어를 민족주의자에 의한 반일모략으로 간주했을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1944년 10월에는 조선총독부가 ‘국민징용의 해설(国民徴用の解説)’에서 여자정신근로령을 발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윤명숙에 의하면 노동력으로 국민등록하는 조선여자들이 너무나 적었기 때문에 학교에서 교사에 의한 권유가 추진되었으나, 조선 본토에 동원될 일이 많았기 때문에 유언비어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관알선(官斡旋)에 의한 여자정신대의 동원은 소학교(小学校, 초등학교) 및 여학교 교사가 지명권유하는 사례가 많았다. 일본 본토로 동원된 여자 정신대의 총수는 1만명으로 추계되는데, 확실한 기록이 존재하는 것은 1944년 6월쯤 일본 도야마(富山) 현의 후지코시(不二越) 공장에 1,090명 (그 중 약 420명은 1945년 7월에 조선의 사리원(沙里工) 공장으로 이동), 나고야(名古屋)의 미쓰비시(三菱) 항공기 도토쿠(道徳) 공장으로 약 300명, 도쿄 아사히토(麻糸) 방직 누마츠(沼津) 공장으로 약 100명이 학교 교사의 인솔로 파견되어 종전 직후에 귀국했다. (이 기록의 합계는 1490명)


또한 나고야 미쓰비시 조선여자 근로정신대 소송의 소장에는 일본어를 잘하는 저연령 세대들이 일본 본토로 가는 사례가 많았는데, 공장에서 야학의 꿈이 깨져 군대식의 참혹한 대우를 받았다는 불만을 토로한 사람도 있다. 단, 1960년대까지는 그런 소문을 사실로 인정하는 한국의 연구자는 없었다.


일본에서의 정신대의 결성율은 1944년 5월, 7%에 불과하며 정신대의 결성율이 너무나도 낮았기 때문에 1944년 8월의 여자정신근로령부터 정신대가 강제동원이 되었다. 1944년 이후 12세 이상의 학생 동원은 300만명이었다고 한다. (1940년 당시의 일본 인구는 7000 – 7500명)


2.2.3.2 대만에서의 위안부(台湾での慰安婦)


대만군(台湾軍)이 남방군(南方軍)의 요구에 응하여 ‘위안부’ 50명을 선정하여 그들의 도항 허가를 육군대신에게 요구한 공문서 ‘대전 (台電)제602호’ 가 있다.


2.2.4 종전기(終戦期)


2.2.4.1 소련군과 조선보안대에 의한 전시의 성폭력과 위안부(ソ連軍・朝鮮保安隊による戦時性暴力と慰安婦)


소련(러시아)에 위안소는 설치되지 않았으나 강간이 묵인되었다. 소련군은 만주나 조선반도 각지에서 일본인 여성에 대한 강간행위를 거듭하였으며 소련군에 의해 감금된 약 170명의 일본여성들이 강간을 당한 후, 23명이 집단자결한 돈화사건(敦化事件)이 발생하였다. 또한 삼강성 통하현(三江省 通河県)의 대고동개척단(大古洞開拓団)에서는 소련군에 의한 위안부 제공 요청을 받아 2명의 지원 위안부를 제공한 사례도 있다. 만주개척단(満州開拓団)에 소련군이 진주한 시기에는 병사의 아내로서가 아닌 단신여성(単身女性, 독신여성)이 위안부로 제공된 흑천개척단(黒川開拓団)이나 군상촌개척단(郡上村開拓団)의 사례가 있다.


또한 조선인(조선보안대)도 조선반도의 길주군이나 단천시 등에서 소련군과 함께 비전투원 여성 인양자(引揚者, 귀환자)에 대한 집단강간행위를 범하고 강간 후에 학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강간으로 인해 임신한 인양자 여성을 치료한 후츠카이치 보양소(二日市保養所)의 1946년 기록에는 상대 남성은 조선인 28명, 소련인 8명, 중국인 6명, 미국인 3명, 대만인 및 필리핀인 각 1명이며, 강간 장소는 조선반도가 38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만주 4건, 북지(北支) 3건이었다. 1947년에 폐쇄되기까지 후츠카이치 보양소에서는 4,500건의 중절수술이 실시되었다. 요코 카와시마 와트킨스(ヨーコ・カワシマ・ワトキンズ, Yoko Kawashima Watkins)의 자서전 ‘대나무숲 저 멀리 –일본인 소녀 요코의 전쟁체험기(竹林はるか遠く-日本人少女ヨーコの戦争体験記, So Far from the Bamboo Grove)’에서도 조선반도에서 소련군과 조선공산당군이 일본시민을 폭행, 강간한 피해가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중국공산당군에 의한 통화사건(通化事件, 만주 통화에서 중국공산당군과 그 휘하 조선인 의용군에  의해 상당수 민간인이 포함된 일본인 3,000명이 학살된 사건)이 발생하였고, 인양열차(귀환열차)에 탑승한 중국공산당군에 의해 납치된 여성들도 있었다.


2.2.4.2 미군과 위안부(米軍と慰安婦)


미군은 1941년 미육군 서큘러 170호 규정에서 “병사와 매춘부의 접촉은 어떤 경우에도 금지”라고 정했으나 실제로는 매춘이 묵인되었다. 태평양 전선에서는 버마 방면에서 인도 출신 매춘부들을 모아 일본군 위안소를 참고한 위안소를 설치했다. 그러나 위안소에 대한 미국 국내 논쟁이 발생하자 1944년 9월에 매춘숙(위안소) 폐지가 결정되었으며, 1945년 4월 24일부로 ‘해군작전방면에서의 매춘에 대하여(海軍作戦方面における売春について)’라는 통달이 미국 육군 고급부관명으로 발표되어 같은 해 9월 1일에 발령되었다.


조선반도에서는 연합군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어 위안소, 위안부는 모두 미군에 인수되었다.

2.2.5 전후(戦後)


2.2.5.1 점령군과 위안부(占領軍と慰安婦


2.2.5.1.1 특수위안시설협회(RAA)의 설치(特殊慰安施設協会(RAA)の設置)


(일본 본토) 점령군에 의한 일본인 일반여성에 대한 강간사건이 예측됨에 따라 일본 정부는 ‘일본여성의 정조를 지키기 위하여 희생하는 애국심이 있는 여성’을 모집하여 연합군을 위한 위안소(특수위안시설협회)를 설립했는데 총 55,000명의 여성들이  모였다.




점령군의 성대책에 대해서는 경시청이 8월15일 패전직후부터 검토하였으며 8월 22일에는 연합군 신문기자를 통해 “일본에 그런 시설이 있다고 하니 큰 기대를 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또한 좌관급 병사가 동경 마루노우치(丸の内) 경찰서에 나타나 “여자를 준비하라”고 명령한 적도 있었다. 8월 17일에 성립한 히가시쿠니노미야(東久邇宮) 내각의 국무대신 코노에 후미마로(近衞文麿)는 경시청 총감인 사카 노부요시(坂信弥)한테 “일본의 딸들을 지켜달라”고 청원하였다. 사카 노부요시는 일반부녀(一般婦女)를 지키기 위한 ‘방파제’로 연합군 병사들을 위한 전용위안소의 설영(設営, 막사와 같은 것을 설치함)을 기획하였으며, 익일 8월 18일에는 하시모토 마사자네(橋下政実) 내무성 경보국장에 의한 ‘외국군 주둔지의 위안시설에 대하여(外国軍駐屯地に於る慰安施設について)’ 라는 통달이 발표되었다. 하야카와 기요히데(早川紀代秀)에 의하면 당시의 위안소는 도쿄(東京), 히로시마(広島), 시즈오카(静岡), 효고(兵庫) 현, 야마가타(山形) 현, 아키타(秋田) 현, 요코하마(横浜), 아이치(愛知) 현, 오사카(大阪), 이와테 현(岩手) 등에 설치되었다. 또한 우익단체인 국수동맹(国粋同盟, 총재는 사사카와 료이치( 笹川良一))은 연합군 위안소 아메리칸구락부(アメリカン倶楽部)를 9월 18일에 개업했다. 이러한 위안소는 공식적으로는 특수위안시설협회라는 명칭으로, 영어로는 Recreation and Amusement Association (RAA) 라고 표기되었다.


2.2.6 진주군의 성범죄(進駐軍の性犯罪)


RAA는 8월 22일에 설치되었으나 8월 30일에 상륙한 진주군이 요코스카(橫須賀), 요코하마(横浜)를 비롯한 지역의 민가에 침입하여 일본인 여성을 강간하는 사건이 다수 발생했다. 8월 28일에는 9월 2일에 개업예정이었던 코마치엔(小町園) 위안소에 기관총으로 무장한 미군병사들이 쳐들어와 위안부 전원을 강간했다. 요코하마에서는 100명을 넘는 무장한 미군이 개업 전날의 위안소에 쳐들어와 위안부 14명을 윤간했다. 9월 1일에는 노게야마공원(野毛山公園)에서 일본인 여성이 27명의 미군에게 집단강간을 당했다. 5일에는 가나가와(神奈川) 현의 여자고등학교가 휴교했다. 19일에는 GHQ가 프레스코드(プレスコード, 보도지침)을 발령하여 그 이후로는 연합군을 비판적으로 다루는 기사가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다. 무사시노시(武蔵野市)에서는 소학생(小学生, 초등학생)이 집단강간을 당했으며, 오모리(大森)에서는 병원에 침입한 200~300명의 미군병사들이 임산부나 간호사를 강간했다. 미군에 의한 집단강간사건은 더글러스 맥아더(ダグラス・マッカーサー, Douglas MacArthur) 최고사령관 및 로버트 아이첼버거(ロバート・ローレンス・アイケルバーガー, Robert Lawrence Eichelberger) 장군도 파악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군은 강간으로부터 여성을 지키기 위해 설립된 자경단(自警団)을 전투차량으로 진압하여 자경단 간부들을 장기간 형무소에 감금했다. 진주군을 상대하는 일본인 창부(가창(街娼))는 ‘판판(パンパン)’ 등으로 호칭했다. 점령 직후의 성폭력 및 강간 건수에 관한 확정된 자료는 없으나 후지메 유키(藤目ゆき)에 의하면 상륙 후 한 달간에 적어도 3,500명 이상의 여성들이 연합군 병사들에 의해 피해를 입었으며, 그 후에도 1947년에 283명, 1948년에 265명, 1949년에는 312명의 피해가 확인되었으며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라고 한다. 후지메는 점령이란 “일본인 여성에 대한 미군의 성적 유린의 시작”이었다고 말한다.


2.2.6.1 GHQ 군의총감이 위안부 알선을 요청(GHQ 軍医総監による慰安婦斡旋の要請)


점령군은 RAA만으로 만족을 못했으며 GHQ 군의총감(軍医総監)과 공중위생복지국장 샘스(サムス, Crawford F. Sams) 대좌는 9월 28일, 동경 위생국 방역과장인 요사노 히카루(与謝野光)에게 도쿄 도내에 불타다 남은 유곽 5군데와 매춘가 17군데를 언급하면서 점령군을 전문으로 상대하는 여성들을 준비해달라고 요구했다. 요사노 히카루는 장교, 백인병사, 흑인병사용으로 여성들을 분류하는 상담에도 응했다. 또한 GHQ 는 “도지사의 책임으로 진주군 병대를 성병에 감염시켜서는 안된다” 며 검진을 명령하였으며, 요사노는 이에 따라 동경도령 제1호 및 경시청령 제1호에서 성병예방규칙을 제정하여 주1회의 강제검진을 실시했다.


1945년 12월 시점에서 재일연합군은 43만 287명이 주둔했다.


2.2.6.2 조선전쟁(한국전쟁)(朝鮮戦争)


1946년 2월 14일, 재조선아메리카육군사령부 군정청(在朝鮮アメリカ陸軍司令部軍政庁)이 남조선(南朝鮮, 현재 한국)에서 공창제를 폐지.


미국의 지원을 받아 1948년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에서는 조선전쟁(한국전쟁) 이후, 한국 정부가 한국군 및 미군을 위한 ‘특수위안대(特殊慰安隊)’를 설립했다.


조선전쟁 중에는 한국인 여성이 위안부로 모집되였으며(한국군 위안부), 일본인 위안부가 재일미군기지 주변과 조선반도로 연행되는 사례도 있었다.


2.2.6.3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과 재일미군(サンフランシスコ講和条約と在日米軍)


1951년 9월 8일에 연합국 제국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관계 각국과 청구권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재일미군(在日米軍)의 주둔이 용인되었다.


그 후에도 재일미군의 범죄는 계속되었으며 1952년 5월에서 1953년 6월의 경찰자료에 의하면, 살인 8, 과실치사 435, 강간 51, 폭행 704 등 총 4,476건의 범죄가 보고되었으며, 1954년 2월에는 우지시(宇治市) 오쿠보(大久保) 소학생(小学生) 4학년 여아가 강간 당한 후에 음부에서 항문까지 칼로 찢기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 외에도 4살 유아가 강간 당하여 위독상태에 빠진 사건, 갑자기 저격 당하여 사망하는 사건 등이 다발했다. 1952년 나라(奈良)의 위안시설 RR센터에는 2,500명의 위안부가 있었다.


일본의 (시민)운동(運動) 측에는 ‘추업부(醜業婦)’ 관(観, 담당관찰)이 있었는데, 예컨대 YWCA의 우에무라 타마키(植村 環)는 잡지 ‘부인공론(婦人公論)’(1952년 5월호)에서 “미국의 관대한 통치를 기뻐하며 감사하고 있다”고 하면서 위안부들에 대해서는 “비천한 업을 그만 둘 것”을 요구하면서 ‘판판(パンパン)’은 “대다수가 적극적으로 외국인을 쫓아다니며 진드기처럼 빌붙어 안 떨어지는 종류의 부인” 이라고 말했다. “그런 악성 판판들에 대해서는 백인들로 하여금 그 정도 난폭을 가하고 싶을 것” 이라며, 매춘 문제를 여자를 사는 남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몸을 파는 여자들의 문제로 삼았다.



다음기사 :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일본의 위안부(日本の慰安婦)’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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