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미야자와 수상의 사죄(宮沢首相による謝罪)
일본 미야자와(宮沢) 수상은 한국 노태우 대통령과의 수뇌회담에서, 사실관계 조사를 거치지 않은 채로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여러 번 사죄를 했으며, 또한 “진상규명을 약속한다”고 표명했다. 한편으로는 1992년 일본의 역사가 하타 이쿠히코 교수가 요시다 세이지의 책에 대한 제주도 현지조사 결과를 공표함으로써 요시다 세이지의 주장은 허위라고 확인되었다.
하타 이쿠히코 교수의 지적에 의하면 일본변호사연합회(日本弁護士連合会, 일변련)는 1992년에 도츠카 에츠로(戸塚悦朗 또는 戶塚悅郞) 변호사를 해외조사특별위원으로 임명하여 해외 운동단체와 연계한 유엔 로비활동을 시작하였다.
하타 이쿠히코 교수는, 1992년 2월 도츠카 에츠로 변호사가 NGO단체인 국제교육개발(国際教育開発, IED) 대표로 조선인 강제연행 문제와 ‘종군위안부’ 문제를 유엔인권위원회에 제기하여 국제사회가 ‘일본군 종군위안부’를 ‘성노예’로 인식하게끔 활동했다고 한다.
당시 일변련 회장이던 츠치야 코겐(土屋公献)도 일변련이 유엔에 대하여 위안부를 ‘성적노예(Sex Slaves, 또는 Sexual Slavery)’로 받아들이도록 활동했으며, 일본정부에 대하여 이를 보상하도록 유엔이 권유했다고 언명했다. 그 결과 1993년 6월에 열린 빈 세계인권회의에서 ‘성적노예제’가 처음으로 ‘유엔의 용어’로 채용되었으며, 1996년의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도 ‘군대 성노예제(military sexual slavery)’라고 명기하게 되었다고 일본 레이타쿠(麗澤) 대학 교수인 니시오카 쓰토무(西岡 力)는 주장한다.
5.5.1 중한국교정상화(中韓国交正常化)
1992년 8월 24일, 한국과 중국이 양국의 외교관계 수립에 관한 공동성명을 발표하여, 전후 처음으로 중한국교(中韓国交)가 정상화되었다.
1992년 12월 25일에는 부산 종군위안부 여자근로정신대 공식사죄 등 청구소송이 시작했다.(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 확정.) 1993년 4월 3일에는 옛 위안부 송신도(宋神道) 씨가 제소하여 재일한국인 옛 종군위안부 사죄 및 보상청구 사건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2003년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 확정.)
1993년 한국 정부는 일본 정부에 대하여 일본 교과서에 위안부에 대한 기술을 넣도록 요구했다.
5.6 고노 담화(河野談話)
위안부 강제연행에 관한 일본 정부의 제1차 조사에서 ‘군의 관여’는 인정했으나 ‘강제연행’을 입증하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하여 한국 정부는 강제성을 인정하도록 요구한다. 일본 정부는 재조사를 진행하여 1993년 8월 4일, 미야자와 내각에 의한 위안부 문제 조사 결과,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하여(いわゆる従軍慰安婦問題について)’를 발표했다. 여기에서도 강제연행을 증명하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명기했으나, 같은 날 정부 조사 발표시에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관방대신(장관)이 ‘고노담화(河野談話)’를 발표했다.
고노 담화에서는 “일본정부가 강요했다고 인정한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일본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에 의하여 여성들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되었다고 했다. 위안부 모집에 대하여 “관헌(官憲) 등이 직접 가담한 경우도 있었다”, “위안소 생활은 강제적 상황 속에서의 참혹한 것이었다”고 했으며 “일상생활에 강제성이 보여진다”고 해석하여 반성과 사과의 뜻을 표명했다. 또한 일본의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 한국 정부가 강하게 요청해 온 위안부 관련 기술이 들어갔으며 일본의 고등학교 및 중학교의 거의 모든 역사교과서에 종군위안부 내용이 기재되었다.
그 후, 고노 담화가 국내외에서 발표되는 대일 비난 결의의 근거로 제시되는 일도 있어 고노 담화에 대한 일본내 평가는 논의가 분열되었다. (후술)
1994년에는 나가노 시게토(永野茂門) 법무대신이 “위안부는 공창이다”라고 발언하여 이 발언이 그를 사임으로 몰아넣었다.
고노 요헤이 자신은 위안부 모집의 강제성(강제연행)에 대하여 요미우리신문, ‘시대의 증언자 (2012년 10월 8일)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문헌 증거는 없다”고 증언했다.
추후에 고노 담화의 기재내용과 관련, 한국 정부의 사전관여가 있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2012년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수상은 “강제연행의 사실을 문장(文章, 문헌)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고 일본 측의 증언도 없었으나, 이른바 종군위안부 본인들의 청취 조사를 토대로 담화를 작성했다”고 답변했다.
2014년 6월 20일, 고노 담화의 작성과정에 대하여 타다키 케이이치(但木敬一), 아키즈키 히로코(秋月弘子), 아리마 마키코(有馬真喜子), 고노 마리코(河野真理子), 하타 이쿠히코(秦 郁彦) 5명으로 구성된 검토팀이 작성한 보고서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한간 조정의 경위 ~고노담화 작성에서 아시아여성기금까지~(慰安婦問題を巡る日韓間のやりとりの経緯〜河野談話作成からアジア女性基金まで〜)’를 일본 정부 명의로 공표했다. 이에 대하여 한국은 격렬하게 비난했다.
5.7 무라야마 담화(村山談話)
1995년 8월 15일 발표된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내각 총리대신의 담화(무라야마 담화) 에서 이른바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이며 나는 이 기회에 다시 한번 마음으로부터 깊은 반성과 사과의 마음을 표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는 이 문제를 포함한 과거 역사문제를 직시하여야 하며, 올바르게 후세에 전달함과 동시에, 관계 각국과의 상호이해를 한층 증진시키기 위해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일본의 사과와 반성의 마음을 나타내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본 계획은 그러한 심정을 담은 것입니다”라는 반성의 발언을 했다.
5.7.1 제2차 하시모토 내각에서의 각의 결정(第2次橋本内閣での閣議決定)
1997년 1월의 제140회 통상(通常, 정기) 국회에서 제 2차 하시모토 내각의 히라바야시 히로시(平林 博) 내각외정심의실(内閣外政審議室) 실장은 “정부가 조사한 문서에 한해서는 위안부의 강제모집을 직접 나타내는 기술은 찾을 수 없었다”고 답변했다. 고노 담화 전에 이루어진 조사의 신빙성을 묻는 다카이치 사나에(高市早苗)의 질문주의서(質問主意書)에 대해 내각은 1997년 12월에 “군과 관헌에 의한 위안부의 강제연행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기술은 찾아 볼 수 없었다”는 답변서를 각의(閣議, 내각회의) 결정했다. 직접적인 증거는 존재하지 않지만 “증언 청취 등을 참고로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라고 발표했다.
5.8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 부정과 그 후의 일본 국내 동향(吉田清治による証言否定とその後の日本国内の動向)
요시다 세이지는 자신의 저작에 대한 허위 문제를 지적받은 후에도 한국에서의 사죄 행각 및 아사히신문에서의 증언을 계속하다가, 1995년에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면서 저서가 자신의 창작이라고 인정했다. 아사히신문은 1997년 “요시다 증언의 진위를 확인할 수 없다”는 기사를 게재했다. 2007년 아베 신조(阿部晋三) 수상은 “허위로 판명된 요시다 증언 이외에 관헌이 관여했다는 증언이 없다”고 답변했다.
1996년 6월에 문부성(현재 문부과학성)이 검정결과를 공표한 일본 중학교 교과서 중 모든 역사교과서에 위안부에 관한 기술이 있다는 사실을 문제 삼아, 동년 12월에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新しい歴史教科書をつくる会)’ (약칭 ‘만드는 모임(つくる会)’)이 발족하였다. 일본 교과서를 ‘자학사관(自虐史観)’이라고 비판하여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는 ‘역사인식 문제’, ‘역사교과서 문제’로도 변해갔다. 2001년 4월, ‘만드는 모임’의 중학교 역사교과서가 검정에 합격했으나 거센 반대운동이 일어나 실제로는 대부분의 중학교에서 채택되지 않았다. 한편으로, 같은 해 검정을 통과한 기타 교과서에 있어서는 정부 방침 및 여론의 고조된 관심을 배경으로 위안부 기술 부분이 감소했다. 1999년에는 일본 중학교 역사교과서에서 ‘종군위안부’라는 용어가 사라졌다.
여당인 자유민주당(自由民主党) 내에 있어서도 젊은 의원들이 ‘만드는 모임’에 동조하여 현재 일본의 역사인식은 ‘자학적’이라고 주장하면서 이를 수정하기를 요구하는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1997년에는 ‘고노 담화’ 발표에 이르기까지 조사과정에 관여한 정부관계자가 강제연행의 증거가 될 자료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으나 한국정부의 강경한 요청에 밀려 정치적 판단으로 강제성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이를 계기로 증거도 없이 일본을 불리한 입장으로 몰아넣었다는 ‘고노 담화’에 대한 비판도 일어나 강제연행의 유무를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언론에서 전개되었다.
이에 일본 정부가 ‘고노 담화’에서 강제성을 인정한 것이지만, 이후 종종 자유민주당 소속의원이 강제연행을 부정하는 발언을 하게 되고 이것이 대대적으로 보도되는 과정에서 중국, 한국의 강한 반발을 초래하는 일이 거듭되고 있다.
5.9 아시아여성기금과 한국정부에 의한 수령거부(アジア女性基金と韓国政府による受領拒否)
1995년 일본 정부는 의료복지 지원사업 및 민간 기부를 통한 ‘속죄금(償い金)’ 지급 등을 통하여 옛 위안부에 대한 보상사업을 진행하기 위하여 민간(재단법인) 기부 형식으로 ‘여성을 위한 아시아평화국민기금女性のためのアジア平和国民基金’(아시아여성기금(アジア女性基金))을 설립하여 운영경비 및 활동자금을 부담했다.
1996년에는 하시모토 류타로(橋下龍太郎) 내각 총리대신이 옛 위안부(아시아여성기금이 대상으로 하지 않은 일본인 여성은 제외)에 대하여 사과 편지를 보냈다. 동시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양국간 평화조약 및 제 조약(일한기본조약 등)을 통하여 위안부 문제는 법적으로 해결된 문제라고 밝혔다. 또한 고노, 무라야마 두 담화에서 위안부란 직업의 존재를 인정하여 명예를 훼손한 사실은 인정하였으나 강제연행했다는 견해는 표명하지 않았다고 발언했다. 하시모토 류타로는 여성의 명에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라는 인식 아래, 도의적 책임의 관점에서 아시아여성기금 사업에 대한 협력과 일본인 여성을 제외한 옛 위안부에 대한 의료복지 지원사업에 자금을 거출했다.
아시아여성기금은 1997년 1월부터 한국인, 대만인, 네덜란드인, 필리핀인 등 총 285명의 옛 위안부에 대하여 1명당 200만엔의 ‘속죄금(償い金)’을 지급했다. 옛 위안부 인정 사업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네덜란드에 대해서는 현지 위안부 관계자에 대한 생활개선 지원사업으로 지급했으며, 옛 위안부 특정이 곤란한 인도네시아에 대해서는 고령자 사회복지사업에 원조했다. 2001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수상이 사과 편지를 각 위안부 앞으로 보냈다.
하지만 한국과 대만에서는 일본 정부에 대하여 “법적 책임을 인정하여 국가적 보상을 하라”고 주장하는 운동이 일어나 아시아여성기금을 수령하려는 옛 위안부에 대하여 기금을 수령하지 말아야 한다는 압력이 가해졌다.
특히 한국에서는 한국 정부 및 민간단체가 “기금을 수령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면 300만엔, 200만엔을 지급하겠다”고 표명하여, 반 수 이상의 옛 위안부가 수령을 거부했다. 한국정부는 기금에 대하여 당초 환영하는 자세를 보였으나 반대운동에 의해 방침을 변경해버렸다. 1997년, 11명의 옛 위안부가 보상금을 수령했으나 1998년에 한국 정부가 아시아여성기금의 보상금 수령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이에 대하여 일본은 의료시설 건설 등 사업전환을 제안했으나 한국 정부는1999년 6월에 다시 한번 수령 거부를 통고했다.
이로 인해 한국 정부는 아시아여성기금의 보상금을 수령하지 않겠다고 서약한 옛 일본군 위안부들에게 생활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하고 한국 정부가 인정한 일본군 위안부 총 207명 중 아시아여성기금을 수령한 옛 위안부 및 이미 별세한 자를 제외한 142명에 대하여 생활지원금 지급을 실시했다.
한편, 미군을 상대로 매춘을 강요당한 여성들도 사죄와 보상을 요구했으나 정부는 그들에 대해서는 자발적 매춘부로 간주하여 사죄 및 보상은 일절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한국 정부 및 미국인에 의해 미군을 상대로 매춘을 강요당한 여성들은, 한국 정부가 일본에 대하여 끊임없이 배상을 요구하는 것은 한국 스스로 역사를 기만하는 일이라고 호소하고 있다. 필리핀 정부는 매춘을 강요당한 필리핀 여성을 위해 한국에서 소송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정대협과 한국 정부가 주최하는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世界韓民族女性ネットワーク)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활동을 세계 각지에서 벌이고 있다. 일본에서는 민주당의 오카자키 도미코(岡崎トミ子) 의원이 한국에서의 데모에 합류하였다.
5.10 일한위안부 문제에 관한 합의(日韓慰安婦問題に関する合意)
일본 정부에 의한 여러 번의 사죄 및 아시아여성기금의 급부(給付, 대가)를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은 일한관계를 수복하기 위하여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와의 협의를 거쳐, 2015년 12월 28일에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외무대신을 통하여 “당시 군의 관여 하에 다수의 여성의 명예와 존엄에 깊은 상처를 입힌 문제로서 일본정부는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고 강조하였으며 “아베 신조 수상은 일본국의 수상으로 다시 한 번 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심신에 걸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들에 대한 마음으로부터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명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옛 위안부 지원을 위하여 설립되는 재단에 일본 정부가 10억 엔을 거출하기로 했다.
한국의 윤병세(尹外相) 외교부 장관은 “양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합의에 이를 수 있었다. 이제까지 어려움을 겪었던 교섭에 종점을 찍고 이 자리에서 교섭타결 선언을 할 수 있는 것을 아주 기쁘게 생각한다”고 말하며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점을 확인했다. 또한 일본에 항의하기 위해 시민단체가 설치한 서울 일본대사관 앞 위안부 소녀상에 대해서는 “관련 단체와 논의하여 적절한 형식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하였다. 이 합의의 내용에 대해서는 일한간 공식 문서를 교환하지 않았으며 일한 양 외무장관이 공동기자회견을 열어 발표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이 합의의 파기를 요구하는 한국의 시민단체 등이 1년 후에 부산의 일본 총영사관 앞에 서울의 일본대사관과 동일한 위안부상을 설치했다. 일본 정부는 합의에 반하는 일이라며 일본대사를 귀국시켜 일한관계는 다시 악화되고 있다.
5.11 유엔인권위원회의 보고서(国連人権委員会の報告書)
5.11.1 쿠마라스와미 보고서(クマラスワミ報告)
한국의 운동단체 및 일본가톨릭교단(日本カトリック教団), 일본변호사연합회(日本弁護士連合会) 등의 조직이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위안부 문제를 다루도록 하기 위해서 적극적인 로비활동을 벌였다. 1996년 유엔인권위원회는 ‘여성에 대한 폭력’ 심의에서 라디카 쿠마라스와미(ラディカ・クマラスワミ, Radhika Coomaraswamy)를 특별보고자로 임명하였으며 보고서가 유엔인권위원회에 제출되었다. 이 보고서의 부속문서에서는 위안부제도를 국제법 위반으로 규정하여 일본 정부에 대하여 위안부에게 배상을 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하지만 이 보고서가 전거(典拠, 근거)로 참고한 요시다 세이지의 증언(앞서 ’요시다 증언과 위안부 논쟁’ 참조) 자체가 추후에 허위라고 밝혀졌으며, 조지 힉스(ジョージ・ヒックス, George Hicks)의 저서 ‘성노예(性奴隷, The Comfort Women: Japan's Brutal Regime of Enforced Prostitution in the Second World War)’도 2차 문헌을 정리한 것에 불과한 연구 가치가 낮은 자료이자 사실 오인과 왜곡이 다수 포함된 책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그 외에도 일본의 운동단체인 ‘일본의 전쟁책임자료센터(日本の戦争責任資料センター)’의 아라이 신이치(荒井信一), 요시미 요시아키(吉見義明), 하타 이쿠히코(秦 郁彦) 등 역사학자들은 이 보고서에 문제점이 많다고 비판하고 있다.
5.11.2 맥두걸 보고서(マクドゥーガル報告書)
1998년 맥두걸 보고서(マクドゥーガル報告書, McDougall Report)가 제출되었는데 그 서론에서 “1932년에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 정부 및 일본제국군은 20만 명 이상의 아시아 여성들을 강제적으로 아시아 각지의 강간센터에서 성노예로 삼았다”, “연일 이어지는 학대에서 살아남은 여성들은 25%에 불과하다고 한다”(아시아여성기금 측의 번역내용)고 기재했다. 이에 일본 아시아여성기금 측에서는 이 ‘20만’ 및 ‘25%’라는 숫자에 대하여 조사한 후에 출전의 신빙성이 없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맥두걸 보고서가 제출되자 보고서를 검증하지도 않고 일본의 가톨릭교회의 시라야나기 세이이치(白柳誠一) 추기경은 일본 정부에 사죄와 보상을 요구했으며 ‘응답하라! 유엔권고(応じよ!国連勧告)’ 100만 명 서명운동을 호소했다. 2000년에는 아사히신문 전 편집위원인 마쓰이 야요리(松井やより)가 주최하는 단체가 주최한 ‘여성국제전범법정(女性国際戦犯法廷)’이라는 민중법정이 열렸다. ‘법정’에서는 ‘쇼와(昭和) 천왕 및 일본국은 유죄’라는 ‘판결’이 내려졌다. 그 모습을 취재한 해외언론들이 “일본이 여성을 강제연행하여 성노예로 삼았다”고 보도함으로써 위안부 문제가 세계 각국에서도 알려지게 되었다.
2004년 8월 19일 도쿄조케이(東京造形) 대학 교수이자 유엔인권활동 일본위원회의 마에다 아키라(前田 朗)가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인권촉진보호 소위원회에서 20만 명에 이르는 조선반도 및 중국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로서 성노동을 강요당했으며 고문과 영양불량으로 살해되었으며 그들 중에는 폭격이 쏟아지는 참호에서 강간당한 여성들도 있었다며 ‘대량학살적 강간(大量虐殺的強姦)’이라는 개념을 제창했다. 마에다 아키라는 일본 정부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의지도 없고, 그들을 위해 한 일이 여태 아무 것도 없다고 비난하면서 범죄자인 일본을 처벌할 권리와 피해자 구제를 요청했다.
당시 위안소 영업자의 절반은 조선인이었으며 일본군은 위안부 모집의 과대광고를 금지했다. 동시에 도항(여행)하는 여성 본인 스스로가 경찰서에서 신분증명서를 발급받아 유괴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도록 통달했다. 조선에서도 일본의 관헌(官憲)이 일본인 및 조선인 여성을 유괴하여 매매한 자를 단속했으나, 전후 1993년에 일부 관헌의 관여를 인정한 고노 담화 이후에 해외에서 “일본 정부가 수십 만 명의 여성들을 강제연행하여 성노예로 삼았다”는 비판을 받게 됐다. 옛 위안부라고 스스로 밝힌 한국인 여성들의 증언에 대한 신빙성을 의문시하는 의견도 있어 증언의 허위 또는 창작 가능성에 대한 검증이 한국과 일본에서 진행되고 있다.
5.12 미국에서의 위안부 소송(米国での慰安婦訴訟)
5.12.1 헤이든법(ヘイデン法)
1999년 2월 26일 전 반전운동가이자 캘리포니아 주 상원의원인 톰 헤이든(トム・ヘイデン, Tom Hayden)과 로드 파체코(ロッド・パチェコ, Rod Pacheco) 하원의원, 마이크 혼다(マイク・ホンダ, Mike Honda) 하원의원이 제2차 세계대전 등 나치스 독일이나 일본에 의해 강제노동을 강요당한 피해자들이 주립 법원 차원에서 배상을 요구할 수 있다는 주법(州法)인, ‘전시강제노동 보상청구 시효연장법(戦時強制労働補償請求時効延長法)’ (아사히신문은 ‘제2차 세계대전 노예・강제노동 배상법(第2次世界大戦奴隷・強制労働賠償法)’이라고 표기)을 제안했다. (법안번호 SB1245, ‘보상-제2차 세계대전 노예・강제노동(補償- 第二次世界大戦奴隷・強制労働)’, 법률 216호, ‘보상에 관한 민사소송법에 제354조 제6항을 추가하여 즉시 발효시키기 위한 긴급성을 선언하는 법률(補償に関して民事訴訟法に第354条第6項[345]を追加し、即時に発効さすべき緊急性を宣言する法律)’)
이 주법은 7월 15일에 캘리포니아 주 의회 상하양원에서 전회(全会, 전원) 일치로 가결 및 시행되었다. 이 주법은 1929년에서 1945년까지 나치스 독일에 의한 강제노동 피해자 보상을 목적으로 한 법인데, 나치스의 동맹국이었던 일본의 책임도 추구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제소기한은 2010년말이며 기한까지 제소하면 시효는 적용되지 않는다.
5.12.2 대일비난결의(対日非難決議)
헤이든법 성립 직후의 8월에는 마이크 혼다 하원의원이 제2차 세계대전 시의 전쟁범죄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결의를 제안했는데 캘리포니아 주의회가 이를 채택했다. 마이크 혼다 의원이 제안한 ‘일본의 전쟁범죄’란 강제노동과 5만 명의 포로구류자의 죽음, 30만 명의 중국인을 학살한 난징대학살, 종군위안부의 강요를 포함한다. 캘리포니아 주의회에서는 조지 나카노(ジョージ・ナカノ, George Nakano) 하원의원이 “일본에 대한 오래된 적의를 부채질하는 것은 일본계 미국인에 대한 반발을 부추긴다”며 이 결의에 반대하였다. 한편, 원자폭탄의 투하는 잔학한 행위가 아니냐는 녹색당의 주장에 대하여 민주당 의원은 “원폭투하는 전쟁의 종결을 앞당겼으며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고 반론했다.
혼다 의원과 나카노 의원의 대립은 일본계 미국인 사회의 내분으로 이어져 다니엘 이노우에(ダニエル・イノウエ, Daniel Inouye) 상원의원이 나카노 의원을 지지했다. 마이크 혼다 의원은 중국계 반일단체인 ‘세계항일전쟁사실유호회(世界抗日戦争史実維護会)’에서 막대한 헌금을 수령하여 긴밀히 연계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나카노 의원은 혼다 의원이 대일 비난 활동을 벌이는 이유는 “선거 캠패인을 위한 정치헌금의 문제”라고 발언했다. 다만 결의에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
5.12.3 위안부 소송(慰安婦訴訟)
2000년 9월 18일, 제2차 세계대전시 일본군 위안부로 일했다는 재미 중국인, 한국인, 필리핀인, 대만인 여성 계 15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 손해배상 청구 집단소송을 워싱턴 연방지방법원에서 시작했다. 원고에는 미국시민이 아닌 여성들도 다수 포함되었으나 외국인 불법행위 청구권법에 의거해 소송이 시작됐다.
미국뿐만이아니라 국제민사소송에서는 외국의 주권국가에 대한 주권면제 원칙이 있어 외국 국가를 재판할 수 없다. 다만 미국법의 외국주권자 면책법(外国主権者免責法, Foreign Sovereign Immunities Act; FSIA)에서 국가의 상업행위는 예외로 규정하고 있는데 위안부 원고측은 “일본군 위안부 제도에는 상업적 요소도 있었다”며 소송을 시작했다. 일본 정부는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국가간 합의에 의해 이미 해결된 문제”라고 주장하여 워싱턴 지방법원에 소송 각하를 요구했다.
5.12.3.1 연방지방법원의 판결 ‘워커 판결’과 미국 정부의 견해(連邦地方裁判所判決「ウォーカー判決」と米政府見解)
2000년 9월 21일, 샌프란시스코 연방지방법원은 “일본국과의 평화조약으로 청구권은 이미 해결된 문제”, “추가배상을 요구하는 것을 이 조약이 막고 있다”고 하여 전 미국병사 및 전 연합군인들의 집단소송 12건의 청구를 기각했다. 집단소송의 청구내용이 일본과의 평화조약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에 샌프란시스코 연방지방법원의 본 R. 워커(ボーン・R・ウォーカー, Vaughn R. Walker) 판사는 “미국 연방법 및 조약과 관련된 소송은 연방법원이 재판관할권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27건을 일괄 처리했다.
본 R. 워커 판사는 전 군인에 의한 13건의 소송에 대해서는 연합국이 대일 배상청구권을 포기한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14조에 저촉되는 것이 명백하다고 말했다. 더욱이 원고가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26조에 대하여 “일본은 기타 6개국과의 협정에 있어서 배상책임을 인정하는 좋은 조건을 제시했기 때문에 연합국 국민들도 청구가 가능하다”고 주장한 건에 대해서는 “26조의 적용청구를 결정하는 것은 조약 당사자인 미국 정부이지 원고 개인이 아니다”고 각하했다. 한편 중국인, 한국인, 필리핀인들의 집단소송에는 기타 쟁점이 있기 때문에 심리를 계속하게 되었다.
2000년 10월 31일, 미국 상원은 “강제노동 피해자와 일본 기업의 배상문제에 대하여 정부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을 전회 일치로 가결했다.
2000년 12월 13일의 법정에서 워커 연방지방법원 판사는 5건의 청구를 기각하여 이로써 전 군인의 청구는 모두 기각되었다. 즉 “전후 보상은 평화조약으로 해결되었다”는 일미 양정부의 입장이 사법판단에 의해 확인되었다.
피고(일본) 측의 대리인인 마가렛 파이퍼(マーガレット・ファイファー , Margaret piper) 변호사는 “필리핀은 평화조약을 비준한 상황이기 때문에 배상청구권이 없다”고 하였으며, 조약체결국이 아닌 한국과 중국에 대해서는 일한기본조약과 일중공동성명이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틀안에 있기 때문에 청구권은 포기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미국 법무부 대리인도 “캘리포니아 주법 그 자체가 연방 헌법에 위반하고 있으며 미국과 일본, 한국, 중국, 필리핀의 국제관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클린턴 민주당 정권하의 미국 정부 의견서에는
“평화조약은 중국, 한국과의 배상문제를 양국간에 이루어진 조약을 통해서 해결하도록 요구한 것이며 일본은 이를 수행했다”
“이러한 각 조약의 틀이 무너진 경우, 일본과 미국 및 기타 국가간 관계에 중대한 결과를 초래한다”
라고 명기되었다.
2001년 5월, 공화당 부시 정권하의 미국 법무부는 워싱턴 지방법원에 법정조언(amicus curiae)을 하여 “일본국과의 평화조약 해석이 논점이 되는 소송의 관할권은 연방법원에 속한다”고 밝혔다. 또한 미국 정부는 외국주권자 면책법에 의거하여 일본 정부의 요청을 지지한다고 표명했다. 2001년 6월에는 미국 상원사법위원회 공청회에서 국무부, 사법부와 함께 “소송은 무효”라고 밝혔다.
2001년 9월 4일, 전 미국병사가 일본 정부에 대하여 1조달러의 배상금을 청구하여 제소했다. 9월 6일에는 미국무부 바우처(バウチャー, Boucher) 보도관이 대일 배상청구운동에 대하여 “평화조약으로 해결된 문제”라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8일에는 파웰(パウエル, Powell) 국무부 장관이 동일한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9월 10일에 미국 상원에서 법무부와 국무부가 대일배상소송에 관한 의견진술을 하는 것을 금하는 수정조항법안이 가결되었다. (제안자는 공화당 밥 스미스(ボブ・スミス, Bob Smith) 상원의원)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동시다발 테러사건이 발생했다. 10월에는 전 주일대사 토마스 폴리(トーマス・フォーリー, Thomas Foley), 월터 몬델(ウォルター・モンデール, Walter Mondale), 마이클 아마코스트(マイケル・アマコストが, Michael Armacost)가 수정법안은 “미국의 안전보장을 위해 긴요한 조약의 파기로 이어질 수 있는 법안”이라며 “소송의 근거를 제공하는 어떤 조치도 평화조약의 중요한 조항에 위반한다”고 하여 일본과의 평화조약은 미국의 태평양지역 안전보장의 요석(要石)이며, 독일은 연합국과 평화조약을 체결하지 않았지만 일본은 독일과 달리 명확히 매듭을 지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전 군인에 대해서는 일본이 이미 접수자산(接収資産)에서 1인당 3,000달러(23,000달러)를 보상했다고 비판했다. 11월 20일, 미국 의회는 상하 양원에서 가결한 수정법안을 최종심의인 의회양원협의회에서 말소했다.
2001년 9월 17일, 미국 연방법원의 워커 판사는 중국, 한국, 필리핀인에 의한 대일 배상청구소송에 대하여 “필리핀은 평화조약을 비준하여 배상청구를 할 수 없다”고 했으며, 중국과 한국에 대해서는 “헤이든법은 헌법위반이기 때문에 소송도 무효”라고 판결하여 소송을 각하했다. 원고는 항소했다.
2001년 10월 4일, 워싱턴 미연방지방법원은 위안부 소송에 대하여 일본측의 주장을 인정하여 청구기각했다. 원고측은 D.C. 순회구 항소법원(대법원)에 항소했다.
5.12.3.2 미국 연방대법원의 판결(米最高裁判決)
2003년 1월 15일, 캘리포니아 주 대법원은 1999년에 시행된 전시중 강제노동에 대한 배상청구를 인정한 캘리포니아 주법을 합헌이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1월 21일, 샌프란시스코 연방대법원은
“미국의 헌법은 외교권을 연방정부에만 부여하고 있어 전후보상에 관하여 캘리포니아 주가 소송할 권리를 주법으로 만들어 낼 수 없다.”
“개인의 배상을 해결하기 위하여 법원을 활용하는 것은 미국의 외교권에 반한다.”
라고 판결하여 캘리포니아 주법인 헤이든법을 헌법위반이라고 사법판단하여 일본기업에 대한 집단소송 28건을 모두 각하했다.
위안부 소송에 대하여 워싱턴D.C. 순회구(巡回区) 항소법원(고등법원)은 주권면제되는 상업활동의 예외는 법률불소급의 원칙에 의하여 적용되지 않는다며 2003년 6월 27일에 1심 판결을 지지하여 기각했다. 2003년 10월 6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했다. 2004년 6월 14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워싱턴 항소법원에 환송한다. 2005년 6월 28일, 워싱턴 항소법원은 평화조약과 청구권에 관해서는 사법부에 심사권이 부여되지 않은 정치적 문제라고 밝혀 1심 판결을 다시 지지했다. 원고 측은 대법원에 재심을 청구하여 2006년 2월 21일, 미국 대법원이 ‘각하’라는 최종사법판단을 내렸다. 이 미국 대법원의 판결에 의해 미국의 사법당국 및 법원이 일본군 위안부 안건에 대하여 재판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소송 당사자들이 미국에서 소송을 제기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러한 집단소송에 대하여 미국 정부와 국무부 및 법무부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으로 이미 해결되었다”는 일본 정부와 동일한 일관된 입장을 명언했다. 다만 입법부(의회)는 이에 그치지 않고 그 후에도 하원 등에서 비난결의를 발표하고 있다.
5.13 제1차 아베정권과 미국 하원 결의(第一次安倍政権と米国下院決議)
2007년 1월말 민주당의 마이크 혼다 하원의원 등이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서 일본에 대한 사죄요구 결의안을 제출했다. 과거에도 동종의 결의안이 제출되었으나 모두 폐안(廢案)으로 끝났다. 2월 15일의 하원공청회에서 이용수(李容洙), 김군자(金君子), 얀 루프 오헤른(ジャン・ラフ・オハーン, Jan Ruff O'Herne)의 3명의 옛 위안부가 증언했다. 2007년 2월 25일 후지TV 방송의 ‘보도2001(報道2001)’에서 마이크 혼다 의원은 “반일결의안이 아니라 화해를 의식한 것”이라고 말했다.
5.13.1 아베 발언(安倍発言)
아베 신조 수상은 2006년의 조각후, 2007년 3월 1일에 “구 일본군의 강제성을 뒷받침하는 증언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발언, 3월 5일에는 대일결의안이 “객관적 사실에 의거하지 않는다”고 발언했다. 아베 수상은 한편으로 당시 위안부의 경제상황에 대하여 고려할 것과 알선업자가 “사실상 강요한 사례도 있었다. 광의의 해석으로는 강제성이 있었다”라고도 발언했다.
이 아베 발언은 국내외에서 큰 파문을 일으켜 워싱턴포스트는 ‘일구이언(にまいじた , 二枚舌)’이라고 비판했다. 대일 비난 결의안의 움직임에 대하여 아소 다로(麻生太郎) 외무대신은 3월 11일의 후지TV 방송에서 북조선, 한국, 중국 등에 의한 일미이간(日米離間, 분단)의 반일공작이라고 지적했다. 3월 31일에는 옛 위안부에게 보상해온 아시아여성기금이 해산됐다. 또 알자지라(アルジャジーラ, Aljazeera) 방송은 “미국은 일본과 중국, 한국간에 문제를 만들려고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아베 내각은 2007년 3월 16일 “고노 담화를 앞으로도 계승할 것이다”라고 하면서 “관헌이 집에 쳐들어가 유괴하듯이 연행했다는 강제성 및 협의의 강제성을 뒷받침하는 증언은 없었다”고 하여, “정부가 발견한 자료 속에는 군과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연행을 직접 나타내는 기술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하는 정부 답변서를 각의결정했다. 또한 제2차 아베 내각에서는 총재선거에서 중의원선거를 거쳐 일관적으로 ‘고노 담화의 재검토, 개변(改変)’을 주장했으나 2013년 5월 24일, “아베 내각의 각의결정은 고노담화를 계승하고 있다”고 츠지모토 기요미(辻元清美)의 질문주의서에 대해 답하고 있다.
2007년 4월 3일, 미의회조사국 보고서에서 일본군은 조선반도에서 직접 징집을 하지 않았다는 점, 이제까지 일본은 사죄 및 배상 노력을 해왔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더 이상의 배상 요구에 대한 의문을 표명했다. 아베 수상은 4월 27일에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여 “나의 진의가 바르게 전달되지 않고 있다”고 하면서 위안부가 당시 괴로운 상황에 놓였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동정한다”고 말했다. 전날 4월 26일에는 워싱턴포스트에 재미한국인 단체가 “일본은 전면적 책임을 진 적이 한번도 없다”는 의견광고를 개재했다.
2007년 5월 4일의 AP통신이 종전 직후의 GHQ와 특수위안시설협회(RAA)에 대하여 보도했다. 마이크 혼다 의원은 RAA에 관해서도 의회조사국에 조사를 의뢰했다.
5.13.2 미국하원 121호 결의(米国下院121号決議)
2007년 6월 26일에 미국 하원외교위원회에서 진행된 미국하원 121호 결의는 찬성 39표, 반대 2표로 가결되었다. 이어서 7월 30일, 미국 하원 본회의에서 낸시 펠로시(ナンシー・ペロシ, Nancy Pelosi) 하원의장 아래 가결되었다. 하원 121호 결의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를 “과거에 없는 잔혹함과 규모면에서 20세기 최대 인신매매의 하나”라고 하여, “성노예가 된 위안부라고 불리는 여성들에 대한 공식 사죄, 역사적 책임, 모든 이론에 대한 명확한 논파 및 장래 세대에 걸친 교육을 할 것을 일본 정부에 요구한다”고 명기되었다.
이에 대해 일본에서는 요미우리신문, 니혼게이자이신문, 산케이신문, 마이니치신문이 미 하원결의를 비판하였으나, 아사히신문은 사설에서 아베 수상은 고노 담화와 같은 담화를 내야한다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반론도 항의도 하지 않았으며 아베 수상도 “아쉽다”는 코멘트에 그쳤다. 고모리 요시히사(古森義久)는 “일본의 순종적 태도가 높이 평가 받아 더는 같은 규탄을 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은 어림도 없다. 현실은 정반대다. 일본이 가만히 침묵하는 것을 꿰뚫어 보듯이 동종의 비난 화살이 더 격렬하게, 더 다방면에서 날아온다”고 지적했는데 실제로 이 미국 하원 결의 이후, 캐나다, 유럽, 아시아에서도 대일 사죄 결의가 이어졌다.
또한 2009년 9월, 미 하원 외교위원회는 대일 사죄 요구 결의를 유엔에서도 채택하도록 활동하고 있다.
5.13.3 한국계 및 중국계 주민에 의한 로비 활동(韓国系・中国系住民によるロビー活動)
재미한국인의 로비활동과 정치자금 제공(在米韓国人のロビー活動と政治資金提供)
대일 사죄요구 결의의 채택은, 재미한국인에 의해서 전미(全米) 각지에 위안부 사죄결의안 채택을 위한 범대책위원회가 설립되고 대일 사죄요구결의가 가결되도록 한국계 미국인들이 미국 하원의원에게 벌인 로비활동의 결과였다. 일본 정부도 채택 저지를 위해 4,200만엔을 들여 로비활동을 전개했으나 실패했다. 재미한국인이 미국 의원에 제공한 정치후원금은 2007년부터 2011년까지 총액 300만 달러에 달하며 정당별로는 민주당 179만 7,155달러, 공화당 114만 859달러이며, 연도별로는 2007년 70만 4,669달러, 2008년 101만 2,195달러, 2009년 86만 4,099달러, 2010년 36만 4,789달러였다. 의원별로는 마이크 혼다가 미국 의원 중 가장 많은 액수인 13만 9,154달러의 정치자금을 끌어모았다.
재외중국인 단체, 세계항일전쟁사실유호연합회의 로비활동(在外中国人団体・世界抗日戦争史実維護連合会のロビー活動)
마이크 혼다 의원은 재미중국인의 반일단체인 ‘세계항일전쟁사실유호연합회(世界抗日戦争史実維護連合会, 항일연합회(抗日連合会), Global Alliance for Preserving the History of WW II in Asia)’의 정치자금도 제공받았다. 항일연합회의 본부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구파나티노(クパナティノで, Cupertino)이며 이곳은 마이크 혼다 의원의 선거구내다. 그들의 대일전략 기본방침은 아시아에서 중국의 패권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의 힘을 어떻게든 저지하겠다는 것으로 공식 사이트에도 “과거를 망각하는 민족은 그 과오를 향후에 되풀이할 때마다 비난 받아야 한다” 등으로 명기되어있다.
이 단체는 1997년에 아이리스 장(アイリス・チャン, Iris Chang)의 저서인 ‘난징의 강간(レイプ・オブ・南京, rape of nanjing)’의 선전 및 판매촉진을 도왔고, 2005년에는 일본의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 가입에 반대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수천만 명의 서명을 모았으며, 일본 국내에서도 헌법 9조 개정의 저지, 종군위안부 문제 및 난징대학살, 야스쿠니 신사 문제 등 전쟁 책임을 일본에 거듭 호소하여 미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의 반일 프로파간다를 통해 일본과 미국을 분단시켜 일본의 고립화와 약체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2002년 2월에는 상하이에서 중국 정부가 개최한 ‘제2차 세계대전의 보상문제에 관한 국제법률회의(第2次世界大戦の補償問題に関する国際法律会議)’에도 참가하여 중국 정부와의 연계도 지적되고 있다. 캐나다에서도 항일연합회의 지부가 활동했으며 대일 사죄결의가 채택되었다. (후술)
하원 결의 채택 직후인 2007년 8월말에는 마이크 혼다 의원이 중국계 미국인 노만 슈(ノーマン・シュー, Norman Hsu)로부터 자금을 제공 받은 사실이 발각되어 사죄했다.
미국에서의 결의 채택을 계기로 정대협은 대일 사죄 요구 결의가 각국에서도 실현되도록 운동했고 민단(民団, 북한 추종 조총련과는 구별되는 상대적 친한국 재일한국인들의 모임)의 기관지인 ‘민단신문(民団新聞)’도 8월 29일 기사로 일본에 대한 사죄요구결의가 미국에 이어 세계 각국에서 결의되도록 활동할 것을 호소했다. 2007년 9월 20일에 호주 상원, 11월 20일에 네덜란드 하원, 11월 28일에는 캐나다 하원에서 대일 사죄 결의가 채택되었다.
세계항일전쟁사실유호연합회 캐나다 지부의 로비활동(世界抗日戦争史実維護連合会カナダ支部のロビー活動)
캐나다의 결의안에는 “일본군을 위한 ‘위안부’의 성적 노예화나 인신매매는 실재하지 않았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명확히, 공적으로 부정해나갈 것”이라고 명기되었다. 캐나다에서 대일 사죄결의를 추진한 사람은 야당인 신민주당(New Democratic Party) 중국계 여성의원인 올리비아 초우(オリビア・チョウ, Olivia Chow, 鄒至蕙)였다. 또 캐나다에는 세계항일전쟁사실유호연합회 지부인 캐나다 ALPHA (제2차 세계대전 아시아사 보존 캐나다연합)가 로비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2005년에는 캐나다 교과서에 난징대학살이 유태인 홀로코스트와 함께 기재되었고 이 대일 결의안도 추진했다.
캐나다에서의 결의 채택은 2007년 3월 27일에 국제인권소위원회에서 찬성 4표, 반대 3표로 가결된 후, 캐나다 하원외교위원회에서 5월 10일에 심의되었으나 캐나다 보수당 의원들이 “일본에 대한 내정간섭이다” “일본은 이미 사죄했다”라고 반대한 결과, 재조사하도록 반송되었다. 그 후 캐나다 ALPHA의 활동은 과격화하여 캐나다 전 지역의 중국계, 한국계, 일본계 주민을 동원하여 토론토 ALPHA, 브리티쉬 콜롬비아 ALPHA등의 조직을 편성하고 세미나 및 로비활동을 전개했다.
2007년 10월 4일부터 6일까지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항일연합회 주최 일본규탄국제회의에서 에니 팔레오마베가( でエニ・ファレオマバエンガ, Eni Faleomavaega) 미국 하원의원이 “앞으로는 여성과 인권 억압과 관련하여 일본의 위안부 문제에서 차원을 높여 국제적 조약과 협정에 대한 위반행위에 감시의 시선을 돌려야 한다. 일본만을 규탄해도 의미가 없다. 이제 와서 일본에 위안부 문제 등을 배상하도록 할 수는 없다”고 주장했으나, 캐나다 ALPHA 의장인 셀카 리트(セルカ・リットは, Thekla Lit)는 “일본 국민의 의식을 높이기 위해 일본 정부를 계속 비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반론했고, 동 회의 성명에서는 일본만을 대상으로 한 사죄배상이 요구되었다.
2007년 12월 13일에 EU의 유럽 의회 본회의에서도 대일 사죄결의가 채택되었다. 2008년 3월 11일에는 필리핀 하원외교위, 10월 27일에는 한국 국회가 사죄와 배상, 역사교과서 기재 등을 요구하는 결의채택을, 11월 11일에는 대만의 입법원(국회)이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 및 피해자 배상을 요구하는 결의안을 전회 일치로 채택하는 등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국을 다수 포함한 각국에서 일본만을 대상으로 하는 결의가 연이어 나왔다.
대일 결의안을 채택한 국가에는 한국전쟁시 유엔군으로 참전한 국가도 포함되었으며 그 국가들의 군은 전시중 한국의 위안소를 이용했다. 고모리 요시히사(古森義久), 와타나베 쇼이치(渡部昇一)는 도쿄재판 및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일본군의 전쟁책임과 배상은 끝났으며 강화조약 이전의 일을 꺼내는 것은 국제법 위반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일본 지방자치체의 결의(地方自治体による決議)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일본 정부가 성실한 대응을 하도록 요구한 의견서를 2008년 3월 28일에 효고(兵庫) 현 다카라즈카(宝塚) 시의회가 채택한 것을 시작으로 2010년 6월까지 민주, 공명, 공산계가 다수를 차지하는 25개의 시의회에서 채택되었으며 2009년의 민주당 정권 획득후에는 더욱 증가하여 도쿄 키요세(清瀬) 시, 미타카(三鷹) 시, 고가네이(小金井), 시 고쿠분지(国分寺) 시, 구니타치(国立) 시, 지바(千葉) 후나바시(船橋) 시, 오사카(大阪) 미노(箕面) 시, 센난(泉南) 시, 교토(京都) 교타나베(京田辺) 시, 나가오카쿄(長岡京) 시, 나라(奈良) 이코마(生駒) 시, 기타(ほか) 삿포로(札幌) 시, 후쿠오카(福岡) 시, 다가와(田川) 시가 채택했다.
또한 민주당은 2009년 일본인 여성을 제외한 옛 일본군 위안부에 대하여 새로운 사죄와 보상, ‘전시성적강제피해자(戦時性的強制被害者)’라는 새로운 호칭을 정하기 위한 전시성적강제피해자 문제의 해결과 촉진에 관한 법률안을 제출했다.
2009년 8월에는 한국 강원도지사의 초대로 마이크 혼다 미 하원의원이 방한하여 강원대학 명예박사를 수여받고 한국의 ‘나눔의 집’을 방문했다. 또한 한국 외교부는 마이크 혼다 의원의 대일 행동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명하고 FTA 비준에 대한 협력을 요구했다.
일본 국내에서는 2010년쯤 ‘재일특권을 용납하지 않은 시민의 모임(在日特権を許さない市民の会や主権回復を目指す会)’이나 ‘주권회복을 목표로 하는 모임(保守系住民団体)’ 등의 ‘보수계 주민단체’가 ‘일본군 종군위안부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단체와 격렬하게 대립하고 있다.
5.14 일한외교교섭과 한국행정법원의 판결(2009)(日韓外交交渉と韓国行政裁判所による判決 (2009))
한국의 배상청구에 대하여 일본 정부는 1965년의 일한기본조약 및 일한청구권, 경제협력협정 체결을 통해 1,000억엔 이상을 공여함과 동시에, 일본과 한국 및 양국 국민간 청구권에 관한 문제는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조문에 명기되어 있으며 그 당시 한국 정부와도 이를 함께 확인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법적으로 해결되었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히고 있다.
2005년 1월 17일, 한국에서 일한회담에 관한 자료가 공개되었는데 한국정부가 ‘일한기본조약’ 체결시 국민의 개인청구권 포기를 확인했다는 점이 처음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국 정부 측은 2005년 8월, “1965년 당시에 체결된 협정에는 반인도적 위법행위가 포함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
그 후, 2009년 8월 14일, 서울행정법원은 “1965년에 체결된 한일청구권 및 경제협력협정에 의하여 일본정부가 무상 지급한 3억달러(1965년 당시 환율로 1,080억엔)로 징용자에 대한 미지급 임금 대일청구는 완결했으며 대한민국 외교통상부의 입장은 “보상은 이미 해결된 문제”라고 밝혔다. 1966년에도 대한민국 대법원이 위안부 손해배상청구를 불법행위에 의거한 것이라고 기각했다.
5.15 한국 외무성에 의한 재청구와 한국헌법재판소의 판결(2011)(韓国外務省による再請求と韓国憲法裁判所判決 (2011))
그러나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2010년 3월 15일, 위안부에 대하여 “1965년 대일청구의 대상 외”라고 밝혀 “일본 정부의 법적책임을 추구하여 성의있는 조치를 취하도록 재촉하고 있다”라고 발표했다. 같은 해 3월 17일, 일본 정부는 “일한청구권 및 경제협력협정을 통하여 양국간 청구권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라는 견해를 발표했다. 2010년 4월 28일, 필리핀 최고재판소는 필리핀 정부가 일본 정부에 대한 사죄요구를 지지하도록 요구하는 호소를 기각했다.
2011년 8월 30일, 한국의 헌법재판소는 “한국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 청구권에 관해 구체적인 해결을 위해 노력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9월 15일 한국 외교통상부의 조세영(趙世暎) 동북아 국장은 “위안부와 원폭 피해자의 배상 청구권이 청구권 협정에 따라 소멸했는지 여부를 논의하기 위해, 한일 청구권 · 경제 협력 협정 제 3조에 따라 양국 간 협의를 개최하기를 희망한다”는 내용의 구상서(口上書, 외교상 상대국과 한 토의의 기록, 또는 질의·의뢰·통고·회신을 위해 상대국에 제출하는 외교문서)를 일본 측에 제출했고, 9월 24일에 뉴욕에서 일한 외상 회담, 10월 6일 서울에서 일한 외상 회담에서도 비슷한 요청을 했다. 그러나 10월 19일 서울에서 일한 수뇌(정상) 회담에서 위안부 문제는 의제가 되지 않았다.
2013년 5월 22일 이 건에 관해서 기시다(岸田) 외무대신은 국회에서 “구체적인 협의 등이 이루어 졌다는 것에 대해서는 알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답변했다
5.16 미국에서의 일본군 위안부 기념비 설치운동(アメリカにおける日本軍慰安婦記念碑設置運動)
2009년을 전후하여 미국에서는 ‘위안부 기념비’를 ‘유태인 학살 기념비’와 동등하게 취급하여 전국 각지에 기념비를 건립하는 운동이 한국계 주민에 의해 일어났다. 한국계 주민이 다수 거주하는 뉴저지(ニュージャージー, New Jersey) 주 버겐(Bergen) 군에서는 11명의 한국계 고등학생이 한국계 미국인 유권자평의회(韓国系米国人有権者評議会, the Korean American Voters’ Council)와 함께 일본군의 피해자인 조선인을 아일랜드인, 아르메니아인, 유태인,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고난에 비교하여 위안부 기념비 건설을 추진했다. 비한국계 주민을 설득하여 서명운동을 한 결과, 버겐 군은 도서관 등의 공공시설 입구에 기념비를 설치할 수 있도록 허가했다.
그 후 미국 국내에는 위안부 기념비 및 위안부상이 잇달아 세워지고 있다.
5.16.1 재미 일본인 사회의 ‘비명’(在米日本人社会の「悲鳴」)
‘유칸후지(夕刊フジ)’에 의하면 위안부 기념비의 설치가 미국 거주 재미 일본인들한테 악영향을 미치기 시작하고 있다. 자민당 의원인 야마타니 에리코(山谷えり子) 앞으로 여러 명의 재미일본인 여성들이 “남편의 일에 지장이 없는지” “아이들이 괴롭힘을 당하지 않은지” 등의 비명(悲鳴)과 같은 메일을 보냈다고 한다. 미즈마 마사노리(水間政憲)에 의하면 이미 재미일본인 아이들이 “죄없는 한국인 여성들을 강간한 일본인 자손”이라고 백안시 당하고 있다고 한다.
야마타니 에리코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위안부 기념비를 세운 뉴저지 주 펠리세이즈파크(パリセイズパーク) 시 시장에게 “일본 정부가 조사한 결과 일본군 및 경찰이 강제연행한 사실은 없었다. 20만 명을 납치하여 위안부로 삼았다는 사실은 없다”라고 당시 정부 문서 및 신문기사를 영어로 번역하여 설명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면회장에 한국계 단체가 밀어닥쳐 방해하듯이 큰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야마타니 에리코는 “세계를 향해 진실을 전하기 위하여 일본은 지금 다시 한번 제대로 된 견해를 발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2015년 2월, 산케이신문은 국회내 보고회를 개최한 지방의원단 및 아사히신문 ‘위안부 보도’에 대한 독립검증위원회의 보고에서 재미일본계 주민의 피해상황을 전달했으며 재미일본인 2,000명이 아사히신문 보도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는 등 정신적 고통을 받았다”며 도쿄지방재판소에서 위자료 등을 요구하는 소송을 일으켰다고 보도했다.
5.17 한국의 위안부상과 박물관(韓国の慰安婦像と博物館)
2011년 12월 14일, 주한 일본대사관 앞에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가 설치한 위안부상이 보도(歩道) 위에 불법적으로 설치되었다. 그 후 한국 국내에 50개 이상의 위안부상이 잇달아 설치되었다. 2015년 12월 28일에서 29일에 걸쳐 부산의 일본 총영사관 앞에도 시민단체들이 동일한 위안부상을 설치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 정부에 항의하고 대사를 귀국시키는 등 문제가 악화되고 있다.
또한 정대협은 2012년 5월 5일, 서울시 서대문구에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한 사립전시관 ‘전쟁과 여성의 인권박물관’을 3억 엔(약 35억 원)을 들여 건설하여 개관했다. 이 박물관 개관에 앞서 일본에서도 일본건설위원회(日本建設委員会)가 결성되었으며 다수의 운동가, 운동단체 및 연구자가 기부를 호소한 결과, 자치로(自治労, 전일본자치단체노동조합(全日本自治団体労働組合)), JR총련(JR総連, 전일본철도노동조합총연합회(全日本鉄道労働組合総連合会)), NTT노동조합 오사카 지부 등이 기부했다.
5.18 노다 내각에서의 답변(野田内閣での答弁)
2012년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수상은 “강제연행의 사실을 문장(문헌)으로 확인할 수 없으며 일본 측의 증언도 없었으나 소위 종군위안부 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청취조사를 통해 담화가 만들어졌다”라고 답변했다.
5.19 제2차 아베(安倍) 내각에서(第二次安倍内閣において)
2013년 6월 18일, 제2차 아베 내각이 구 일본군에 의한 위안부 강제연행을 나타내는 증거가 정부가 발견한 자료 속에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신문 아카하타(赤旗, 일본 공산당 기관지)가 전했다. 그러나 이것은 일부 군인의 행위로 전쟁범죄로 재판을 받은 시로우마 사건(白馬事件)의 ‘바타비아 임시군법회의의 기록(バタビア臨時軍法会議の記録)’이며, 아베 내각은 2007년 제1차 아베 내각에서 각의결정한 “(국가에 의한 조직적인) 강제연행 자료는 없다”라는 인식에 변함이 없다고 답변했다.
5.20 미국에서의 조사(米国における調査)
미국에서는 클린턴, 부시 양 정권하에서 8년간 독일과 일본의 전쟁범죄 재조사를 진행했다. (미국정부가 국방총성, 국무성, 중앙정보국(CIA), 연방조사국(FBI) 등에 미공개 공식문서를 점검시켜 제2차 세계대전시 독일과 일본의 전쟁범죄에 관한 자료를 조사한 것이다. ‘나치스 전쟁범죄와 일본제국 정부기록의 각성청 작업반(IWG) 미국의회 앞 최종보고(Nazi War Crimes & Japanese Imperial Government Records Interagency Working Group)’)
재미 중국계 반일조직인 ‘세계항일전쟁사실유호연합회(世界抗日戦争史実維護連合会)’는 위안부 문제에 대한 조사를 미국 정부에 재촉했다. 이 조사 결과, 일본군이 성적 목적을 위해 위안부를 조직적으로 노예화했다는 미국 측 자료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2014년에 밝혀졌다.
이 조사 결과에 의거하여 위안부 문제 분석가인 미국인 저널리스트 마이클 욘(マイケル・ヨン, Michael Yon)은 “이 정도 규모의 조사를 했는데 아무 자료도 나오지 않다는 것은 ‘20만 명의 여성을 강제연행하여 성적 노예로 삼았다’는 주장은 허구란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일본측은 이 조사를 재료로 미국 의회에서 대일 비난 결의 및 유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 등의 철회를 요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5.21 기타 근년의 동향(その他の近年の動向)
2012년 8월 14일에 일본 천황의 사과를 요구하는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이 있었다.
2013년 1월 16일, 뉴욕 주 상원 의회의 토니 아베라(ニー・アベラ, Tony Avella) 상원의원이 “일본군 위안부는 인도(人道)에 대한 죄이며 20세기 최대의 인신매매”라고 단정하여 일본에 사과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는데 미국 뉴욕 주 상원은 2013년 1월 29일에 이를 채택했다.
2013년 5월 13일,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 시장은 “역사를 들추어 보면 여러 전쟁에서 승리한 자가 패배한 자를 강간한 사례가 산더미처럼 많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하여 위안부와 같은 일정한 제도가 필요했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라고 발언하여 일본, 한국, 미국 등에서 화제가 되었다.
요미우리신문은 2013년 5월 14일의 기사에서, 1992년 1월에 아사히신문이 여자정신대 제도를 ‘위안부 사냥’이라고 오보한 기사 및 “일본군이 위안소 설치와 종군위안부 모집을 감독, 통제했다”는 기사를 발단으로 고노 담화(사죄)가 곡해됨으로써 일한간 외교문제로 발전했다는 견해를 밝혔다.
2015년 12월 28일의 일한간 합의에 대하여 대만의 외교부장(장관)이 익일 12월 29일에 기자회견하여, 대만과의 협의에도 응하도록 일본에 요구했다.
2017년 1월 31일에 한국교육청이 발표한 국정역사교과서 최종판에는 위안부가 ‘집단학살’ 당했다는 기술이 새로 추가되었다.
5.22 대한민국에 있어서의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 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大韓民国における『日帝下日本軍慰安婦被害者に対する生活安定支援および記念事業等に関する法律』)
대한민국에서는 ‘일제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생활안정지원 및 기념사업 등에 관한 법률’ (법률 제9932호, 2010년 개정)에 의거하여 일본에 강제동원되어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한 피해자에 대하여 국가가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보호 및 지원한다. 생활안정지원 대상자로 신청할 자는 여성가족부 장관에 등록신청한다. (제3조 제1항) 국가는 생계급여, 의료급여, 생활안정지원금을 지급하며, 간병인 지원을 실시한다. (제4조 제1항) 여성가족부 산하 심의위원회가 생활안정지원 대상자 등록신청사항에 관한 사실 유무 인정 등을 실시한다. (제6조 제1항)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1) 기념사업, 2) 역사적 자료 수집, 보존, 관리, 전시 및 조사, 연구, 3) 교육, 홍보 및 학예활동, 4) 국제교류 및 공동조사 사업을 진행할 수 있다. (제11조 제1항)
6 호칭(呼称)
6.1 일본에서의 호칭(日本における呼称)
일본에서는 예로부터 유곽에서 일하는 창부를 유녀(遊女), 여랑(女郎) 등으로 호칭했으며, 19세기 후반의 일본에서는 돈벌이를 목적으로 해외에서 나온 창부를 가라유키상(唐行きさん) 또는 죠시군(娘子軍)이라고 불렀다. 예창기해방령(芸娼妓解放令, 1872년), 조선의 ‘창기유사영업의 단속(娼妓類似営業の取締, 1881년)’, ‘창기단속규칙(娼妓取締規則, 1900년)’ 등에서는 그들을 ‘예창기, 창기’라고 불렀다.
관동국(関東局)의 ‘관동국 시정 30년사(関東局施政三十年史)’ (하라쇼보(原書房), 1974년)에 의하면 1909년 12월, 일본 정부는 중국(당시 청(清)나라)의 일본 조차지인 관동 주에 거주하는 일본인 및 중국인 여성들을 ‘창기단속규칙’에 의거하여 ‘창기(유녀, 창부)’로 관리해온 기존의 방침을 변경했다. 대외관계를 고려하여 일본인 여성에 한해서는 창기 가업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으며, 예기(芸妓), 작부(酌婦)의 공창행위는 묵인하기로 했다. 그 결과, 관동주 및 만주에서는 ‘작부’가 사실상 일본인 창기를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그 후 일본 본토 및 조선에서 ‘작부’라는 명목으로 여성들을 ‘만주’로 데려와 실제로는 ‘창기’와 동일한 ‘매춘’을 강요하는 사기 사건이 자주 발생했다고 한다. 위안부업 종사에 관한 계약서에도 업무내용은 가업부(稼業婦) 또는 작부(酌婦)라고 표기되었다. 1932년, 1938년의 상하이에서도 ‘작부’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1932년 4월 1일 상하이 파견군의 군오락장 단속규칙에서는 위안소를 ‘군오락장(軍娯楽場)’이라고 표기했으며, 성적 접객을 하는 여성종업원을 단순히 ‘접객부(接客婦)’라고 표기했다. 1937년에는 ‘가업부녀(稼業婦女)’로, ‘군위안소 종업부 등 모집에 관한 건(軍慰安所従業婦等募集に関する件)’에서는 ‘위안부’라고 호칭하기도 했다. 매춘을 ‘추업(醜業)’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1938년 1월 17일의 제11군 군의부장회의 지시에서는 ‘특수위안부(特殊慰安婦)’라는 호칭을 사용했디. 1939년 11월 14일의 재 중지(在中支) 모리카와부대(在中支森川部隊) 특수위안업무에 관한 규정에서는 ‘위안부(慰安婦)’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교수는 ‘위안부’란 말 자체는 순차적으로 퍼진 것이며 공식용어로 정착한 것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현지 군인들은 위안부를 흔히 ‘P (prostitute, 창부의 머리글자)라고 불렀으며 위안소를 ‘P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위안소라는 단어 외에도 ‘죠시군(娘子軍=가라유키=해외 엔벌이 창부)‘이라는 호칭도 있었다. 또한 해군에서는 ‘특요원(特要員)’이란 이름으로 전쟁터로 내보냈다고 한다.
전후 위안부 문제가 표면화한 시기에 ‘종군위안부(従軍慰安婦)’라는 호칭이 널리 알려졌는데 그 후 ‘종군위안부’라는 호칭에 의문이 제기되어 ‘이른바 종군위안부(いわゆる従軍慰安婦)’ 등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현재는 일반적으로 ‘위안부(慰安婦)’라고 부르고 있다.
6.1.1 ‘종군위안부’라는 호칭(「従軍慰安婦」という呼称)
‘종군위안부’라는 말은 전쟁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일반적으로 전후 1973년부터 위안부에 관한 저서를 출판한 센다 가코(千田夏光)에 의한 조어(造語)로 알려져 있으며, 대중잡지에서는 그보다 이전인 1971년 8월 23일호 ‘슈칸지츠와(週刊実話)’의 기사 ‘‘성전(性戦)’에서 ‘성전(聖戦)’의 희생, 종군위안부‘에서 사용되고 있다. 그 후에 위안부 문제가 사회문제화 되면서 이 호칭이 널리 쓰여지게 되었다.
‘종군’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후지오카 노부가츠(藤岡信勝)는 “‘종군’이란 단어는 군속(軍属)이라는 정식 신분을 나타내는 것이며 군이 급여를 지급했다는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종군간호사, 종군기자, 종군승려 등과는 달리 위안부에 사용되는 용어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또한 고쿠가쿠인(国学院) 대학 명예교수인 오오하라 야스오(大原康男)도 다이지린(大辞林, 일본국어사전)에서 ‘종군’이란 ‘종군간호사’처럼 군과 공적 관계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관사(冠辞)이며, 그러한 실체를 갖지 않은 사람들을 가리키는 ‘종군위안부’라는 호칭은 전후 일정한 시기에 사용되기 시작한 통속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공문서 및 학술용어로 사용하는 일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센다 가코(千田夏光)는 “종군이란 군대를 따라 전쟁터에 가는 것이며 그 이상의 의미도 그 이하의 의미도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종군간호부의 주력은 ‘일본적십자사 구호간호부(日本赤十字社 救護看護婦)’이며 급여는 일본적십자사에서 지급했다는 점, 일부 부장(婦長)을 제외하면 군속(軍属, 군무원)이 아닌 신분으로 간주되어 전후 군인 은급(恩給) 대상에서 제외된 사실을 소개했다.
한편 위안부 문제를 추궁하는 여성단체 중에서도 “종군이란 단어는 자발적 뉘앙스가 느껴진다”는 이유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와 동일하게 일본군 위안부(日本軍慰安婦)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당시 자료인 1940년 5월 7일의 각의 결정에 의거한 ‘외사경찰집행요람(外事警察執行要覧)’에는 ‘특수부녀(特殊婦女)’(위안부)는 군속이 아니라 민간인으로 취급할 것을 정하고 있다.
1968년 4월 26일 중의원 사회노동위원회에서 후생성 원호국장인 사네모토 히로츠구(実本博次)는 위안부에 대하여 “일단 전쟁터에서 시설과 숙소 등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신분이 있어야 했기 때문에 무급의 군속이라는 신분을 부여해서 숙소 및 기타 편의를 공여했다는 것이 실태입니다”라고 답했다.
‘이른바 종군위안부(いわゆる従軍慰安婦)’라는 호칭도 일본 외무성과 아시아여성기금 및 일부 언론에서 사용되었다.
6.1.2 일본에서의 기타 호칭(日本でのその他の呼称)
위안부 제도를 비판하는 측에서는 ‘위안부’라는 단어가 실태를 반영하지 않고 있다며 ‘일본군 성노예(日本軍性奴隷)’라는 용어를 사용하거나 위안부를 괄호 안에 표기해서 사용하는 사례도 있다. 또한 금전 수수가 명확히 있었다는 점에서 ‘추군매춘부(追軍売春婦)’라고도 호칭된다.
일본에서는 2000년대에 민주당 등에 의해 일본군 위안부(일본인 여성만 제외)는 ‘전시성적강제피해자(戦時性的強制被害者)’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민주당 등이 제출한 ‘옛 일본군 위안부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죄와 배상을 한다’는 내용의 법안명은 ‘전시성적강제피해자 문제의 해결 촉진에 관한 법률안(戦時性的強制被害者問題の解決の促進に関する法律案)’이라고 한다.
6.2 한국에서의 호칭 (‘정신대’와 혼동)(韓国での呼称(「挺身隊」との混同))
조선반도에서 ‘정신대(挺身隊)’란 일중전쟁시 남녀 할것 없이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의미로, 1940년부터 사용된 말이다. 조선의 미혼여성이 관리들의 알선 및 모집으로 일본 내지의 공장 등으로 향한 여자정신대의 사례가 있었는데 이것이 위안부 모집과 혼동되어 “젊은 정신대 여자들한테 위안부 일을 시킨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한국에서는 유엔군을 상대하는 위안부를 가리켜 한국 경찰 및 공무원들이 ‘정신대’라고 불렀던 적도 있다. 일본군을 대상으로 한 위안부 문제가 발생한 당초부터 위안부를 ‘정신대(挺身隊)’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으로 정착했다.
위안부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표면화된 1990년대 초반에도 일반적인 한국인은 ‘정신대’와 위안부를 동의어로 인식했다.
그 외에도 일본군 위안부만을 규탄하는 민간단체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은 “종군위안부라는 단어는 올바른 표현이 아니다”라며 ‘일본군위안부(日本軍慰安婦)’라고 호칭하고 있다.
다만 1966년의 대한민국 대법원 판결문은 위안부란 “일반적으로 일상용어에 있어서 매춘행위를 하는 여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다.
6.3 영어권에서의 호칭(英語圏での呼称)
영어권에서는 ‘위안부(慰安婦)’를 직역하여 Comfort Woman 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위안부 제도를 인권문제나 전쟁책임의 문제로 고발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성노예의 번역어인 Sex Slave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재팬타임스(ジャパンタイムズ, Japan Times)’ 등)
‘뉴욕타임스’는 일본군을 상대한 여성들을 Sax Slave (성노예, 性奴隷) 또는 Comfort Woman (위안부)라고 호칭하고 있다. 그러나 미군을 상대한 여성들에 대해서는 일본군 위안부와 다르게 매춘부라고 호칭하고 있다. 한편 미군 및 한국군을 상대한 여성들에 대한 당시의 한국정부 및 보도기관에 의한 공식호칭은 위안부이다.
6.4 유엔에서의 호칭(国連などでの呼称)
Sax Slave (성노예)라는 호칭. 1992년 NGO가 일본에 초대한 테오 판 보벤(テオ・ファン・ボーベン, Theo Van Boven, 네덜란드)은 옛 위안부의 증언을 듣고 그 실태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유엔 인권위원회 산하의 ‘인권위원회 차별방지・소수자 보호 소위원회(人権委員会差別防止・少数者保護小委員会, Sub-Commission on Prevention of Discrimination and Protection of Minorities)’에서 ‘전시 성폭력에 관한 연구’의 필요성을 제안했는데 그 다음해에 ‘무력분쟁하에서의 강간, 성노예제 및 유사관행에 관한 특별보고자(武力紛争下の強姦、性奴隷制および類似慣行に関する特別報告者)’가 설치되었다. 그 보고자였던 린다 차베스(リンダ・チャベス, Linda Chavez)가 준비 문서에 ‘성노예 제도(性奴隷制度)’라고 명기한 것이 추후에 맥두걸 보고서로 이어졌다고 한다. 다만 린다 차베스는 보고서를 끝까지 정리하지 못한 채 1997년에 사임했다.
1992년 2월 25일, 일본의 NGO 국제교육개발(IED) 대표이자 변호사인 도츠카 에츠로(戸塚悦朗)가 유엔인권위원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뤄주도록 요청했는데 이것이 유엔에서의 첫 위안부 문제 제기였다고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교수는 말한다. 도츠카 에츠로 변호사 자신도 당시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국제법상 검토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일본제국주의 성노예(性奴隷, sex slaves)라고 규정했다”며 자신이 ‘성노예’라는 단어를 발안한 경위를 회상하고 있다. 당초 유엔에서 ‘성노예’라는 호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도츠카 에츠로 변호사는 인권위원회 하위에 있는 차별방지 소수자보호 소위원회(인권소위원회)나 인권소위원회에서 활동하는 ‘현대노예제 작업부회(現代奴隷制作業部会, Working Group on Contemporary Forms of Slavery is the United Nations)’에서 이를 제의했다.
일본변호사연합회(일변련) 회장(당시)이며 ‘위안부 문제의 입법해결을 요구하는 모임(慰安婦問題の立法解決を求める会)’ (1996년 12월 설립)의 츠치야 코켄(土屋公献) 변호사도 1992년부터 일변련이 유엔에서 벌인 위안부 보상 요구 과정에서 ‘성적노예 (Sex Slaves 또는 Sexual Slavery)’라는 용어로 이 문제를 다루도록 활동했다. 그 결과 1993년 6월의 비엔나 세계인권회의에서 ‘성적노예제’가 처음으로 ‘유엔의 용어’로 채용되었다고 한다. 일변련의 기오이 아키오(鬼追明夫) 회장은 위안부를 ‘군사적, 성적노예’라고도 표현했다.
1996년에 유엔인권위원회에 보고된 쿠마라스와미 보고서에서는 일본군 위안부제도(공창제도)를 ‘Military Sexual Slavery (군용성노예제, 軍用性奴隷制)’ 또는 ‘성노예제’라고 명기했다. 니시오카 쓰토무 교수는 쿠마라스와미 보고서가 “요시다 세이지(吉田清治)나 조지 힉스의 저작(힉스는 요시다 증언과 당시의 소문을 역사적 진실로 기재)에 의거한 점, 그로 인해 위안부를 ‘빈곤이 원인인 인신매매 피해자’가 아니라 국가의 ‘권력에 의한 강제연행의 희생자’라고 일방적으로 단정지었다”라고 비판했다. 이어서 1998년의 맥두걸 보고서에서도 ‘성노예제’라고 표현되었다.
다만 전후에 구 일본군에 대하여 조사한 미국 정부 및 미군의 보고서 속에는 구 일본군이 위안부를 노예로 취급했다는 내용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세는 후술)
레이프(강간) 센터: 맥두걸 보고서는 일본군 위안소를 레이프 센터(rape centres)라고 표현했다. 하타 이쿠히코교수는 ‘레이프 센터’란 일본병 전범이 죄를 인정하는 과정에서 ‘위안소’를 ‘강간소’로 고쳐쓰도록 전범수용소측이 강요한 결과이며 ‘강간소’의 영어 번역일 수 있다고 했다.
맥두걸 보고서에 대한 일본 정부의 입장은 이는 게이 맥두걸(ゲイ・マクドゥーガル, Gay McDougall)의 개인보고서에 불과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위안부 문제를 유엔에서 다루도록 활동해온 일변련 해외조사특별위원의 도츠카 에츠로 변호사는 유엔 소위원회가 일본 정부한테 권고하지 않았던 점에 실망하여 로비활동의 한계를 호소했다. 나중에 도츠카 에츠로의 정치적 활동은 일변련 내부에서 목적외, 직무외 행위로 비판 받아 도츠카 에츠로는 1998년에 해촉당했다.
6.6 호칭 및 표현을 둘러싼 비난(呼称・表現をめぐる非難)
2015년 3월, 아베 신조(安倍晋三)가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위안부 문제를 ‘인신매매(human trafficking)의 희생’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하여 한국의 연합뉴스는 “20세기 최악의 인권유린이자 국제사회가 ‘성노예’ 사건이라고 규정한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흐리기 위한 계산된 발언이라는 지적도 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