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 전북도의사회지의 정기간행물인 <전북의사21>( http://www.jmain.or.kr )에 과학중심의학 소개 글이 편집되었습니다. 그간 한국 사회에서는 거의 소개되었던 적이 없었던 과학중심의학(Science-Based Medicine)의 새로운 개념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의사이자 과학중심의학연구원 학술특보, 사이언티픽크리틱스( http://www.scientificcritics.com ) 편집위원인 김현우님이 수고해주셨습니다.
환자에게 최선의 의료를 제공한다는 원칙은 의사들에게는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도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Primum non nocere)”고 나와있는 것처럼 고대 그리스 시절의 의사들에게도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 하겠다는 마음가짐은 확인할 수 있다. 의사는 환자의 치료에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의사라고 불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의사들의 최선의 진료라는 원칙의 최전방에 서있는 것이 바로 근거중심의학이다.
기실 현대의학의 개념이 나름 정립된 20세기 중후반까지도 의사들은 많은 경우 개인적인 경험이나 또는 귄위자의 주장 따위에 의존해서 임상적 의사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의사들이 최신의 의학적 연구결과에 접근할 기회부터가 많지 않았으며, 설령 접근할 기회를 얻었다 해도 쏟아지는 논문의 양들 때문에 제대로된 지식을 습득하기 어려웠다. 이렇게 의사들이 최신의 올바른 의학적 근거와 지식에서 소외되었다는 사실은 결국 환자 건강에 직접적으로 악영향을 미치는 결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근거중심의학은 바로 저 잘못된 현실을 타개하고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 1990년대에 일군의 의학자들에 의해 고안된 것이다. 근거중심의학은 ‘무작위배정 임상시험(randomized controlled trial)’, '메타분석(meta-analysis)‘, 또는 ‘체계적 문헌고찰(systematic review)’ 등의 전문 연구방법론을 통해 의사들이 가장 믿을만한 최신의 근거로서 올바른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개념으로서 정의된다. 이러한 근거중심의학은 잘못된 치료법은 퇴출시키고 올바른 치료법은 널리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함으로써 결국 현대의학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전세계 의료계의 중심 담론으로까지 자리잡았다.
근거중심의학의 한계
하지만 성공의 빛에는 항상 그림자도 있는 법. 한창 의사들과 과학자들이 검증되지 않는 치료법을 퇴출시키고 있을 때, 저 근거중심의학의 맹점을 이용하여 제도권으로 들어온 것이 있다. 바로 한의학을 비롯, 소위 대체의학(Complementary and Alternative Medicine, CAM)으로 통칭되는 그것이다. 알고보면 치료법으로서 모호한 근거를 갖고 있는 대체의학이 제도권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하는데 있어 저 근거중심의학이 역설적으로 커다란 도움을 주고 말았다.
사실 근거중심의학 이전의 의학에서는 개별 연구논문 결과의 중요성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모호한 결과가 나오거나, 위약(placebo) 수준의 효과가 떨어지는 치료법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근거중심의학은 여러 연구논문의 결과들을 하나의 큰 체계적 문헌고찰(systematic review)이나 메타분석(meta-analysis)으로 묶어 평가를 내리면서 모호한 연구결과에도 빈번히 큰 가치를 부여해버리는 문제가 있다. 한의학류의 대체의학이 파고들어간 지점이 바로 이것이다. 현대의학 분야와 달리 대체의학 분야에서는 긍정적인 결과의 논문만 발표되지 부정적인 결과의 논문은 사실상 전혀 발표되지 않는다. 이런 현실에서 미묘하게 효과가 있다고 제시되는 연구논문들만을 다 끌어모아서 근거중심의학적 검증을 시행하게 되면 실제로는 별로 효과가 없는 치료법도 얼마든지 긍정적인 효과가 있는 것처럼 착시가 나타날 수 있다.
과학중심의학의 출현
대체의학에 불필요하게 가산점을 부여해주는 근거중심의학의 이런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 국제 의학계에서 새로이 제시되고 있는 개념이 바로 과학중심의학(science-based medicine)이다. 사실 기존 근거중심의학에서는 어떠한 임상시험의 결과가 실제로 발생할 ‘과학적 개연성’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도, 여하튼 연구자체에서 통계적으로 유의한 의미(p-value)하다는 결과만 도출되면 무조건 그 결과가 유효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과학중심의학은 이와 다르다. 과학중심의학은 저 통계적 유의미성에 추가로 과학적 개연성, 사전확률(prior probability)이라는 개념도 치료법 평가에 있어 같이 고려한다. 아무리 통계적 유의미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전확률이 매우 낮은 경우엔 그 실험의 결과는 위양성(false positive)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과학중심의학의 개념은 모호한 실험결과를 들고서 근거중심의학이라는 이름으로 상아탑에서 위세를 높이려는 대체의학을 방어하는 중요한 지적 도구가 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예를 한번 들어보자. 한 젊은 남자가 복통으로 내원했는데 어느 의사가 그만 임신반응검사(hCG pregnancy test)를 해버렸다고 가정한다. 상식적으로 이 경우 임신반응검사가 양성(positive)이 나오리라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다르다. 남자라도 고환종양같은 드문 질환의 환자에게선 저 임신반응검사에서 양성 반응도 나올 수 있다. 또 검사기기의 오류 때문에도 역시 양성 반응이 나올 수 있다. 허나 역시 상식을 가진 이라면 그 누구도 설마 저 양성결과를 보고 내원한 남자 환자가 임신을 했다고 판정을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남자가 임신을 할 과학적 개연성, 사전확률 자체가 0 이기 때문이다. 과학중심의학은 바로 이런 과학적 상식을 치료법 검증에서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음양오행이나 기, 경혈, 경락같은 한의학의 개념은 올바른 과학적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존재부터가 도무지 믿기가 어렵다. 허나 여하튼 한의학계에서는 이렇게 과학적 개연성, 사전확률이 0 에 수렴하는 개념을 전제하는 치료법을 갖고도 대규모 임상시험을 설계하고 수행한다. 물론 수행된 임상시험에서는 으레 실험에 동반되는 여러 비뚤림(bias)의 결과인 노이즈가 섞여나오기 마련이고 그런 차원에서 아무리 과학적 개연성이 없는 치료법이었대도 효과가 있다는 결과는 얼마든지 나올 수 있다. 특히나 부정적인 결과의 논문들이 다 걸러지고 오직 긍정적인 결과의 논문들만 끌어모았을때는, 아주 엄격한 연구방법론인 체계적 문헌고찰이나 메타분석을 시행해도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결과가 도출된다. 그 다음 수순은 한의사들이 이런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하여 환자를 치료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렇다. 이게 바로 이른바 ‘근거중심의학적 한의학’의 거개 실체인 것이다.
사이비의학과 싸우는 최후의 보루, 과학중심의학
그렇다면 이 문제를 이제 과학중심의학적으로 고찰해보자. 솔직히 한의학의 이론대로 무슨 음양오행이나 기, 경혈, 경락같은게 존재한다는 얘기는 올바른 과학적 상식을 쌓은 사람에게는 마치 남자가 임신했다는 수준의 얘기 아닌가. 이 경우 관련한 연구결과가 설사 양성(positive)으로 나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단순히 과학적 상식에만 근거해서도 임신반응검사, 아니 근거중심의학적 검증절차에 애초 오류가 있었다고 바로 단정내릴 수 있는 것이다. 과학적 개연성을 부정하고 기존의 잘 확립된 기초과학적 지식까지 다 대체할(alternative) 치료법을 함부로 정당화해줄 이유가 없다.
우리 의사들은 앞으로 어떤 치료법의 효과유무를 함부로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해당 치료법이 과학적으로 검증된 치료법인지부터 먼저 확인을 해야 할 것이다. 현대의학이건 한의학이건 대체의학이건 어떤 의학의 치료법이건, 과학적 개연성을 생각하여 사전확률을 구한 다음 그 이후의 후속 결과가 타당한 것인지 종합적으로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의사들은 환자들에 앞서 엄숙히 선서를 했기 때문이다.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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