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2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하버드 등 30개 미 대학병원서 한의학치료"라는 제목의 기사가 전국의사총연합과 닥터플라자를 비롯 여러 의사단체들의 공분을 자아내고 있다. 기사 내용이 도대체 어떠했길래 의사들이 그토록 화가 난 것일까?
해당 <조선일보> 기사는 미국 <가정의학(Family Medicine)>에 실린 한 보고서의 내용을 인용보도한 기사이다. 기사의 출처인 원 보고서는 지난 5월 미국 가정의학교육자협회(Society of Teachers of Family Medicine)가 미국 30개 교육의료기관(academic health centers)의 ‘통합의학(integrative medicine)’ 시술자들에 대한 실태를 조사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인종, 학력, 교육기간 등 시술자들에 대한 정보와 함께 어떤 종류의 통합의학 치료법들이 사용되고 있는지가 자세히 소개된 이 보고서에서는 한국의 자랑이라는 한의학이 차지하는 위상도 확인해볼 수가 있다( Integrative Medicine at Academic Health Centers )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대상 의료기관에서 시행되는 통합의학의 종류로 호흡수련, 약초(herbal medicine), 명상, 기능의학, 침술, 심상유도, 동종요법, 마사지, 요가, 중의학(traditional Chinese medicine), 태극권을 들고 있다. 유감스럽게도 보고서에는 한국의 한의학을 지칭하는 'Korean'이라는 단어는 찾아볼 수도 없다. 우리나라의 한의사들은 한의학은 중의학과 다르다며 한의학의 우월성과 독창성을 주장하지만 조사대상인 미국의 30개 의료기관에서는 한국의 한의학은 안중에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한의학에 대한 자부심을 잠시 양보하고 침술과 중의학을 넓은 의미의 한의학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한의학의 위상이 초라하기는 마찬가지다. 보고서에 따르면 미국 의료기관에서는 침술, 중의학(한의학)을 호흡수련, 명상, 마사지, 요가, 태극권과 같은 단순 보조요법 중 하나로 취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정의학> 보고서를 아무리 살펴봐도 한국의 한의사들이라면 모를까, 한국의 의사들이 화를 낼만한 내용은 찾아볼 수가 없다.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조선일보>가 <가정의학> 보고서의 내용을 왜곡해서 인용 보도해버렸기 때문이다. <조선일보>의 기사에는 국내 독자들이 미국에서의 한의학, 중의학의 위상을 크게 오인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미국의 유명 병원에서 침술이나 한약 등 한의학적 처방을 적극 활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30개 미국 대학병원에서 일반 양의학과 함께 침술·한약 등 한의학 처방을 활용해 암(癌) 환자 등을 치료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조선일보>는 이와 같은 내용이 마치 <가정의학> 보고서에 있는 듯이 얘기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보고서에는 한의학적 처방을 적극 활용한다는 내용은 담겨있지 않다. 한의학이 암 환자 치료에 적극 사용되는 것도 아니고, 단지 통합의학이 사용되는 분야가 통증(29%), 종양학(19%), 여성의학(19%)이라고만 소개하고 있다. 통합의학 중에서도 침술과 중의학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대형 의료기관 30곳에서 통합의학을 다루는 전문가가 162명이었는데 그 중 마사지, 요가, 동종요법 등을 제외시키면 한의학 혹은 중의학 시술자가 의료기관 한 곳 당 몇 명이나 될까? 이것이 과연 "한의학적 처방을 적극 활용하는 것"일까?
<조선일보>는 "한약 처방을 내리고 있었으며"라고 적었는데 보고서는 한약이 아닌 전 세계의 모든 생약(약초)을 이용한 치료를 총칭하는 herbal medicine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동의보감> 따위와 관계없는 세계 각국에서 유래한 생약 처방을 한약이라고 부르는 것은 세계의 모든 무술이 대한민국에서 유래한 태권도라고 주장하는 것 만큼이나 황당한 해석이다.
또한 <조선일보>는 보고서를 직접 인용한 것처럼 "한·양 통합 치료가 기존 의료를 대체하는 새로운 방법으로 떠오르면서"라고 썼는데 보고서 어디에도 그런 표현이 없다. 일부 환자들이 현대의학적 치료에 덧붙여 단순 보조요법으로 '호흡수련, 약초, 명상, 기능의학, 침술, 심상유도, 동종요법, 마사지, 요가, 중의학, 태극권'을 사용하는 것을 두고 <조선일보>는 "한·양 통합 치료"라고 한의학이 마치 정통의학과 대등한 위치인 양 둔갑시킨 것이다.
<조선일보>는 심지어 숫자도 틀리고 있다. "155명이 암 환자의 상태 호전을 위해 '침술'을 추천했다"고 적고 있지만 보고서에서는 112명이 침술을 처방했다고 나온다. 보고서에는 침술을 어떤 환자에서 어떤 목적으로 처방했는지는 전혀 다루지 않고 있는데 <조선일보>는 “암 환자의 상태 호전을 위해 ‘침술’을 추천했다”라는 출처 불명의 주장을 실었다.
미국의 <가정의학> 보고서는 명상, 요가, 태극권 따위와 같은 보조적 수단의 하나로 인식되는 중의학의 보잘 것 없는 지위, 그리고 중의학에 밀려 존재감 조차 없는 한의학의 초라한 실상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보고서를 인용보도한 한국의 <조선일보>에서는 어찌된 영문인지 중의학, 한의학이 현대의학과 동등한 지위로 격상되고 있다는 식으로 둔갑했다. 인용한 보고서를 잠깐이라도 들여다 보았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이런 어이없는 기사가 어떤 경위로 유수지에 실린 것일까?
우리것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서 객관적인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할 지경에 이르면 부작용이 발생한다. 한방건강센터(경북 상주), 한방엑스포공원(충북 제천) 등등, 그간 한방산업의 가능성을 과대평가하고 투자한 지자체들이 엄청난 혈세를 쏟아부은 뒤 적자로 큰 곤욕을 치르고 있다. 현실을 객관적으로 전달하기는 커녕 해외학술지 내용까지 왜곡하고 과장해 한의학의 실상을 오도해온 언론들도 혈세 낭비에 책임이 없지 않다.
다음은 해당 <조선일보> 기사에 대한 조선닷컴 독자 반응 중 최고 추천을 받은 글이다. <조선일보>는 이런 잘못된 여론을 만든 자신들의 오보에 과연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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