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정대협 중심 위안부 문제, 진실은 무엇인가? (1)
- 위안부 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 위안부 개념의 해석과 논증의 딜레마
정대협 중심 위안부 문제, 진실은 무엇인가? (2)
- 위안부의 전개양상과 매춘사업
- 수치와 분노, 집단적 트라우마로서의 처녀 위안부론
- 조선인 위안부 20만명의 실체
정대협 중심 위안부 문제, 진실은 무엇인가? (3)
- 위안부 피해 증언 검토
정대협 중심 위안부 문제, 진실은 무엇인가? (4)
- 위안부 강제동원 관련 자료 분석
위안부 전개양상과 매춘 사업
군 위안부의 태동을 언제로 볼 것인가 하는 것은 학자에 따라 의견이 갈린다.
제1설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전용 매춘시설에서 위안부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제2설은 1932년 군에서 직영한 상해 해군위안소를 위안부의 기원으로 본다. 현재의 통설이다. 제3설은 "모집"에 의해 민간인 위안부가 조달되기 시작한 중일전쟁기 전후를 그 시작으로 본다.
세계 어딜가도 군인이 있는 곳은 매춘의 수요가 존재하기 마련인데, 러일전쟁 직후 일본 육군성이 작성한 『(軍事機密)明治三十七八戰役統計』에 따르면 1905년 9월 현재 관동주에 거류 중인 일본인 2명 중 1명이 매춘부로 조사되고 있다. (관동주 55.4%, 여순 49.2% 금주 78.9%가 매춘부)
사정이 이렇다보니 성병이 만연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막대한 전력손실로 이어지는 바,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당시에는 전사자가 1,378명인데 비하여 성병으로 전선에서 탈락한 자는 2,012명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연유로 군당국이 장병의 단속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 사료된다.
관련 논저를 살피건대, 군당국이 직접 개입하여 매춘시설을 통제하거나 감독, 관리하는 묘수는 러시아가 일본에게 전수해준 것으로 보인다. 러일전쟁에이 발발하기 전인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 만주에 주둔하였던 러시아는 주둔지 안에 허가받은 매춘업소를 설치하였는데 가옥의 무상대여는 물론 보초병을 세우고 민간인들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장병들이 매춘업소를 통과하려면 우선 소속 부대에서 군표를 구매하여 이것을 보초병에게 제시하고 들어갔다. 매춘부들은 수입한 군표를 현금으로 교환하는 대신 소정의 세금을 러시아 군에 바쳤는데, 이런 시스템은 일본 위안부 운영방식과 거의 유사하다 볼 수 있다.
이러한 매춘시설은 당시 연합군이었던 영국, 프랑스, 일본 주둔지에서도 설치되었고 매춘부의 채용 및 위생관리 등에 있어 상호협조하기로 했던 바, 이때 허용된 매춘부의 최저 연령은 13세라고 한다. 일본은 연합군으로 있으면서 러시아의 선진기법에 흠뻑 감동을 받고, 대동아 전쟁 수행시기에 중국과 남태평양에 이르는 광범한 지역에 위안소를 설치하기에 이른 것이다.
소결 : 일본군 위안부 제도는 러시아의 영향을 받았다.
1932년 일본은 상해에 해군위안소를 처음으로 시범설치하였는데, 1936년 말 상해영사관의「在留邦人의 特種婦女 狀況 및 단속」이라는 문서를 보면 해군위안소에 종사하는 전체 작부 131명 중 조선인이 29명이라 되어 있으니, 소위 강제연행으로 표방되는 중일전쟁기 이전에도 조선인 위안부가 존재했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소위 대좌부 출신의 위안부는 일본군 전용 섹스파트너로 종사하였지만, 오늘날 한반도에서의 흔한 위안부 인식과는 거리가 좀 있다. 이 부분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는게 논의의 진전을 위해 바람직 할 것 같다.
1933년 4월 관동군 혼성제14여단에서 작성한 「衛生業務旬報」에 따르면 평천(平泉)에 일본인과 조선인 창기(娼妓) 38명이 들어와서 개업했으므로 16일 이들의 검미(檢黴)는 앞으로 매주 1회 실시하기로 한다는 내용이 보인다. 즉, 중일전쟁기 이전 일본군 위안소에 등장하는 조선인 위안부는 대부분 창기(娼妓) 출신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중일전쟁 이후의 조선인 위안부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땅의 흔한 위안부 인식처럼 조선의 순결한 처녀를 인간사냥하듯 납치하여 군용트럭에 싣고 온 사람들일까? 물론 자의가 아닌 사기와 강요, 또는 인신매매에 의해 부득이 위안부를 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권번 출신의 기생이었다가 군과 결탁한 업자의 손에 매매된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가사의 궁핍을 면하기 위해 자원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어느쪽이 소수였다, 다수였다는 별로 의미가 없는 논쟁같다.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명징한 자료나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에 단순히 증언자의 사례를 취합해 통계를 산출하는 것은 표본의 오류일 뿐만 아니라 신뢰성이라곤 조금도 없어보인다. 그런 어설픈 논증으로 일본인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겠는가?
1940년 5월 삼천리라는 잡지에는 「武漢의 朝鮮 동포」라는 제하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무한(武漢) 삼진(三鎭)에 거주하는 동포의 수는 내지인 약 육천 명, 반도인 약 이천 명이다. 그 생활 상태는 대개 부유하며 또한 일지사변(日支事變)으로 의하여 반수 이상은 막대한 물질을 적립하고 있다. 각 人의 직업은 각색각종이나 주로 무역상 잡화상 여관업 음식점 위안소업 등이다. 그외에 과수원을 경영하는 인사도 있고 교육기관을 설치한 사람도 있다. 그런데 전지(戰地)인 것 만치 경기가 호경기이지만 각종 물가가 매우 빗싸다. 제일 경기 좋기는 위안소업이다. 여인 一人이 매일 수입금이 5,60원 이상이다.
위안부라 하면 흔히 포주에 의해 착취당하고 이동과 생활이 제약된 노예같은 삶을 살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일본군 육군대장의 1년치 연봉에 맞먹는 수입을 올리고 있는 위안부도 있었다는 게 놀랍기 짝이없다. 이게 단순히 만주의 일부지역에 국한된 일일까 하는 의심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역시 같은 잡지 삼천리(1941년 제13권) 「상해시보 총경리 최경수씨와 상해의 조선인 제문제를 語함」이라는 제하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이런 기사가 나온다.
기자 : 남경에는 얼마나 거주하고 있습니까.
최경수 : 남경에는 1,000명의 거류동포(居留同胞)가 있습니다.
기자 : 남경에 있는 1,000여명의 조선 동포는 대체로 어떠한 사업에 종사하고 있습니까.
최경수 : 부끄러운 말이지만 대부분은 위안소, 즉 유곽업(遊廓業)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위 기사에 따르면 상해의 위안소는 유곽업과 동종의 취급을 받고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거류동포라고 언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납치나 유괴된 자가 아닌 여권을 소지하고 영사관에 정식신고된 조선 국적자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사람들이 과연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위안부 이미지와 얼마나 일치하고 있을까?
이런 식으로 무리한 논리 확장을 시도한 후,
일본은 성병의 예방을 위해 조선의 미혼녀를 위안부로 집중 동원했다는 결론을 도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의관 아소 데츠오(麻生徹男)의 보고서에 등장하는 고작 80명 내외에 불과한 조선 여성들이 상해에 설치된 17군데 위안소를 대표하지도 않으며, 이러한 제한된 샘플의 표본만으로 일군 상층부가 조선여성의 "순결성"과 "상품성"을 인정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위의 주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조선인 위안부가 일본인 위안부보다 화대가 비쌌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천진(天津)의 육군병원에서는 아소 데츠오의 보고와는 정반대로 조선인 위안부의 성병이 심각하여 주의를 요한다는 자료도 보인다.
天津陸軍病院特設分院,, 杭州陸軍病院,, 蘇州陸軍病院에서 공동으로 성병에 감염된 장병들을 조사한 결과, 조선여성에게 성병이 감염된 경우가 4,403명, 일본여성에게 감염된 경우가 2,418명, 중국여성은 3,050명으로 조선여성로부터 성병이 감염된 경우가 가장 많았다는 것이다.
이 조사에의 비고란에는 '조선女들의 활약이 타지 출신을 압도하므로 장래 전지에 참고를 요한다'는 견해가 첨부되어 있다. 이 견해가 조선인 위안부들의 활약을 칭찬한 얘기인지, 아니면 성병의 감염에 유의하란 얘기인지 판단이 어렵지만, 적어도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인 위안부들에 비해 순결한 처녀들로 구성되었다는 식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비슷한 조사보고로 보병 제224연대본부 의무실의「1939~1942년도 위생관계 참고서류철(1/3)」중 1940년에 작성한 성병에 관한 제 통계표에 따르면, 일본인 위반부의 경우 1,427명 조선인 위안부의 경우 2,455명, 중국인 위안부의 경우 1,535명으로 조선인 위안부의 성병 감염률이 타지 출신을 압도하고 있다. 이 조사보고서에도 '이번 사변에서 반도 부녀의 진출이 활발하나 병원(病源)을 가진 자가 많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부 자료의 기록만을 가지고 일군 상층부에서 조선의 미혼처녀들에 눈독을 들이게 되었다는 식의 의도까지 간파하는 연구자의 놀라운 창작력에 머리가 숙여지는 바이다.
조선인 위안부 20만명의 실체
방선주 박사가 발굴한 일본군 암호전보문에 의하면 위안부 모집과 관련 적지 않은 돈이 오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안부 모집비용은 전차금 명목으로 소요된 비용이 가장 컸을 것이고, 그외에도 운임비, 식대, 숙박비가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암호 전보문 내용은「정신대연구소 소식 제30호, 2001」참조)
1945년 3월 14일 장가구(張家口)에서 일본 동경으로 보낸 비밀전보의 내용을 보면, 대략적인 1인당 모집비용을 산출해 볼 수 있는데,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하고 비용 부분만 간추려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송금액을 위안부 인원수로 나누면 적게는 5,000엔에서 많게는 15,000엔이 소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안부를 수입한 현지 군부대에서 직접 모집비용과 소정의 수수료를 업자에게 송금하고 있는데, 송금환의 거래취소나 위조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현지 은행에 3배 정도되는 보증금을 예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조선에서 중국이나 기타 해외 등지로 위안부를 내보냈을 경우 업자들에게 들어오는 송금액이 있었을 것이고 이 송금액은 고스란히 은행 송금환 계정에 잡혀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추적하면 국내 학자들이 추산하고 있는 최대 20만명의 위안부설은 "장군님 뻥치신다" 수준으로 간주해도 무방할 듯 하다.
1910년부터 1943년까지 조선의 각 은행에 잡힌 위체수불고 현황을 보면, 해외에서 국내로 송금한 거래 규모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다. 위안부 20만명이 10년에 걸쳐 해외로 송출되었다고 터무니없는 가정을 해볼때 중일전쟁 이후에는 위안부 수요가 증가해서 송출인원도 비례하여 급격히 증가했을 것이다.
그러면 상기 비밀전보문에서 추산된 1인당 모집비용을 5,000엔~15,000엔으로 계산했을 경우 송금환 수입금액은 급격히 증가하거나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어야 한다. 하지만 아래 도표에서도 볼 수 있듯이 중일전쟁기 이후 해외 위체 수입 증가율은 그 이전에 비해 두드러진 변화가 없다. 설령 위체수입 증가분의 전액이 위안부 모집비용과 관련되었다 가정해도 위안부 20만명은 택도 없는 주장이라 사료된다.
왜 이런 오류가 발생했을까 하면, 군인 몇명당 위안부 몇명이라는 아주 단순한 산수로 위안부 규모를 터잡았기 때문에 생긴 초보적 실수일 것이다. 일본이 운영한 위안소는 중국에서 남태평양에 이르는 각지의 모든 부대에 설치된 것이 아니라, 병참이 운영되는 거점 부대를 중심으로 설치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감안하지 않으면 저런 무리수가 나올 수 밖에 없다.
20만명의 위안부를 고용할 수 있는 천문학적인 돈을 대체 어떻게 일본 정부가 감당했을 수가 있겠나. 20만명설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설마 그 많은 인원을 돈도 안주고 그냥 납치나 유괴로 데려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음편 :
정대협 중심 위안부 문제, 진실은 무엇인가? (3)
참고기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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