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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의 國民 박근혜의 국민

日本人은 지도자를 존중하고 믿고 따르지만 지도자에게 천재적(天才的)인 능력을 가질 것과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일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 본지는 앞으로 조갑제닷컴(http://www.chogabje.com)의 역사, 외교, 안보 분야의 우수 콘텐츠들을 미디어워치 지면에도 소개하는기회를 갖기로 했습니다. 본 콘텐츠는 조갑제닷컴 회원토론방, 필명 '우리의 미래'님의 글입니다.



2011년 日本의 국민 MC로 불리는 한 사나이의 은퇴 기자회견이 있었다. 약 30년간 日本 예능계를 이끌다시피 한 인물로 매스컴은 그를 거물(巨物)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주인공은 시마다 신스케(島田紳助). 그때까지 30권 가까이 책을 발간했고 日本의 대표적 예능프로그램을 6개나 진행하고 있던 그가 돌연 은퇴를 발표한 것이다. 폭력단(야쿠자) 간부와의 교제설 때문이었다. 

日本의 경우 폭력단과 관련해서는 법적(法的)으로는 물론 여론도 매우 엄하게 취급한다. 폭력단 회원과 금융거래를 하는 것 자체가 위법(違法)이고 심지어 폭력단 회원은 골프장 출입도 금지되어 있다. 폭력배들이 차명(借名)으로 골프장에 출입하다 적발될 경우 사기죄로 형사 처벌받을 정도이다. 시마다 신스케는 폭력조직 간부와 가깝게 지냈는데 이것이 누군가에 의해 폭로되었다. 법률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여론의 비판이 일었고(우리의 매스컴처럼 요란하게 보도되지는 않았다) 그는 은퇴했다. 

비슷한 일이 그 이듬해 발생했다. 이번에 거론된 사람은 日本의 유력 정치인이었다. 2012년 10월 아베號 자민당(自民黨) 출범을 2개월가량 앞두고 한 장의 사진이 공개되었는데, 그 속에는 美國의 정치인 마이크 허커비(Mike Huckabee)와 아베 신조(安倍 晋三) 그리고 한 남성이 있었다. 촬영된 장소는 아베 씨의 사무실. 촬영 시점은 2008년 허커비 씨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였다(허커비는 美 공화당 대선후보, 아칸소州 주지사를 지냈고 現 트럼프 당선자의 측근으로 트럼프 행정부 이스라엘 대사에 내정되었다). 

사진 속의 남성은 日本 연예계와 스포츠계에선 유명한 인물로 2012년 초 대부업(貸付業) 등록을 하지 않고 금융브로커에게 7억 엔 상당을 빌려준 혐의로 입건되면서 널리 알려진 사람이었다. 당시 마이니치신문(毎日新聞)과 아사히신문(朝日新聞) 등은 이 남성이 폭력조직 야마구치구미(山口組)의 자금책이라 보도했다. 그런 이와 美日 유력 정치인이 자리를 함께 한 것이다. 

이 남성에 대해 아베 측은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며, 지역 후원자의 소개로 허커비를 소개받았는데 그때 따라온 모양이라고 해명했다. 언론은 문제의 남성에게도 찾아가 그 사진촬영의 경위에 대해 물었다. 남성 역시 아베 측 설명과 비슷한 대답을 하였다. 그러나 이를 곧이 믿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언론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놀랍게도 흐지부지 넘어가 버렸다. 

아베(安倍) 家門과 야쿠자(ヤクザ)와의 관계

시모노세키(下関) 시가지(市街地)가 내려다보이는 곳에는 ‘파친코(パチンコ) 집’이라 불리는 저택이 있다. 아베 총리의 집이다. 내각관방장관(内閣官房長官)을 지낸 아버지 아베 신타로(安倍 晋太郎)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1990년까지 이 저택은 지역의 유명한 파친코 그룹의 소유였다. 이 파친코 회사는 아베 신타로에게 집과 사무소를 매우 저렴한 가격에 장기간 임대하다가 아예 소유권 이전까지 해주었다. 

2000년 이 집과 아베 신조 씨의 사무소에 화염병이 날아드는 일이 있었다. 범행을 저지른 이들은 아베 사무소의 비서였던 T 씨와 가까운 현지 불량배들이었다. 이들은 법정(法庭)에서 범행 동기에 대하여 ‘시모노세키 시장 선거를 앞두고 아베 측이 상대 후보에 대한 비방을 해 줄 것을 부탁하여 실행하였는데, 그 대가를 주지 않아서였다’고 진술했다. 이 사건에 대해선 아베 씨가 2007년 처음 총리가 되었을 때 교X통신(共X通信)에서 심층 취재하여 원고까지 완성시켰으나 보도되지 않았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2007년 4월 24일 주간 아사히(週刊 朝日)는  야마구치구미 소속 수이신카이(水心會)와 아베 총리의 ‘관계’를 경찰청 간부 폭로라는 제목의 특집을 보도했다. 내용은 그 일주일 전 발생한 나가사키(長崎) 시장 피살(被殺) 사건 배후에 아베 당시 총리의 측근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베 총리는 즉각 기자회견을 열고 관련 의혹을 강력 부인했다. 희한한 것은 언론이 아베 총리의 해명을 미심쩍어 하면서도 더 이상 파고들지 않은 점이다.

주간 아사히의 보도는 신빙성이 있었다. 피살된 나가사키 시장 이토 잇초(伊藤一長)는 1995년 시장이 된 후 연속으로 3선을 한 인물로 각종 국제회의 등을 통해 ‘반핵(反核)·평화’를 강력히 주장해왔다. 그는 日本의 ‘핵(核)무기 보유론’에 대해서도 강력 비판하며 특히 아베 총리가 주도하는 평화헌법(平和憲法) 개정 움직임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이토 시장을 쏜 자는 우익(右翼)활동을 하던 인물로 폭력단 야마구치구미 직계 조직의 간부였다. 그런데 살해 동기가 석연치 않았다. 저격범은 피살된 시장이 건설관련 이권(利權) 청탁을 들어주지 않은 것과 그밖에 사소한 보상 요구를 시(市)가 들어주지 않아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분명히 이상했다. 그 정도의 일로 사람을 권총으로 죽인다는 것도 그렇고 야쿠자들의 생리에도 맞지 않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의심스러웠던 것은, 피살된 이토 시장의 전임(前任)인 모토시마 히토시(本島等)도 총격을 받은 일이 있었는데, 그 범인과 이토 시장의 저격범이 가까운 사이였다는 점이다. 전임 모토시마는 반전반핵(反戰反核)을 주장하는 좌경적(左傾的) 인물이었다. 그는 1988년 나가사키 시의회에서 공산당 의원의 질의에 답하며 “히로히토(裕仁) 天皇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했다가 이 일로 가슴에 총을 맞아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바 있었다. 이토 시장은 모토시마 시장과 성향이 비슷했고 좌경적이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토 시장 피살에 대해 우익세력에 의한 기획된 테러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저격범이 개인적 앙심에 의한 살해라 극구 주장하고 별다른 물증이 없어 그렇게 종결되었다. 

사실 아베 총리의 폭력단 연계설은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었다. 외조부(外祖父)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前 日本 총리도 야쿠자와 관계가 있다고 널리 알려져 있고 그의 아버지 아베 신타로도 97년 암살(暗殺)당한 야마구치구미의 2인자와 깊은 친분이 있었음이 전직 검사(檢事)의 자서전을 통해 알려졌다. 말고도 아베 총리와 폭력단에 관한 의혹은 많았다. 그런 과거의 사연들이 있는 가운데 2012년 미국 정치인과 아베, 폭력단 자금책인 인물이 함께 찍은 사진이 공개된 것이다. 

총리에 대한 日本人들의 관점

예부터 日本人들에게는 유능하지 못한 리더일지라도 잘 따르는 면이 있다. 日本의 리더는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이 원하는 일을 하려고 노력한다. 이 속에 日本 정치(政治)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해도 허언(虛言)은 아닐 듯하다.

우리 언론은 아베 총리에 대한 日本 내의 부정적인 목소리만 전달하는 편이지만 현재 아베 총리의 지지율은 높다. 인기가 많다. 재미있는 것은 日本 국민들이 개인 아베 신조의 능력 자체는 그다지 높게 평가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베 총리의 지지율이 높은 것은 침묵하는 국민이 실로 원하는 정치를 하여서이다. 특히 아베 총리는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보인다. 국민들이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다. 

日本人들은 아베와 같은 이를 가리켜 ‘세습 정치인’이라 부르곤 한다. 아베 총리의 측근 중 다수는 아버지 아베 신타로 씨와 함께 하던 이들이다. 아베 총리는 폭력단과의 관계 의혹 등 자신에게 곤란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측근에게 책임을 미루거나 모르는 일이라고 하였다. 日本 기자들의 취재력은 뛰어나다. 기자정신도 대단하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지구촌의 전장(戰場) 누비는 이가 많다. 日本 경찰의 수사력, 공정성, 청렴함도 매우 높다. 그런데도 아베 총리에 관해선 앞에서 보았던 이상으로 알려진 바가 없다. 그가 때로 무책임한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한 비판도 거의 없다.

日本 매체를 보다가 한 정치부 기자가 “총리의 불상사(不祥事)에 대해서는 형사사건이 되거나 지지율이 급락하고 있는 상황이 아니라면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는 보도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불문율 같은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여러 사정들을 보면 분명히 그런 기조(基調)가 있어 보인다. 

日本人은 지도자를 존중하고 믿고 따르지만 지도자에게 천재적(天才的)인 능력을 가질 것과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일 것을 요구하지 않는다. 日本 기자들은 그런 국민을 잘 대변한다. 시마다 신스케가 은퇴한 것과 비교하면 아베 총리에 대한 의혹에는 관대한데, 이는 정치인으로서 여러 사람을 만나야 하는 사정과 그가 국민이 원하는 정치를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國家의 명예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해서일 것이다. 

어느 나라이든 아무리 뛰어난 지도자가 훌륭한 정책을 내놓아도 언론이 반대 선동을 하고 거기에 국민이 춤을 추면 성공하지 못한다. 아베 정권의 이른바 ‘아베노믹스’의 경우 목적은 타당한 것이었지만 방법에 있어서는 비판도 많았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본 언론과 국민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日本의 저력(底力)이다(아베노믹스는 현재 성공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우리 현실

우리는 어떤 인물에 대해 평가하면서 공과(功過)를 나누어 보아야 한다는 말을 곧잘 한다. 그런데 여기에도 양비론(兩非論)과 같은 비겁한 평가방식이 자리 잡았다. 공(功)이나 과(過) 혹은 규탄과 칭송,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하는 사안에 功過를 나누는 일이 허다해진 것이다. 사회의 좌경화(左傾化)에 따라 생긴 현상이다. 

좌경세력은 대한민국의 위대한 인물들을 비난하고 반역자(反逆者)를 칭송한다. 그들의 눈치를 보느라 다수의 지식인들이 양심을 속이고 우리의 위대한 인물의 업적을 구태여 공과(功過)로 나눈다. 그 대표적 평가 대상은 박정희(朴正熙) 전 대통령이다. 좌경세력은 민주주의에 역행한 독재자일 뿐이라고 평가하는데, 자칭 중도보수(中道保守) 성향이라는 지식인들은 그가 이룩한 경제발전은 공(功)이라면서도 장기(長期)집권은 과(過)라고 한다. 좌경세력의 주장을 일정부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朴 전 대통령의 장기집권은 권력을 누리기 위해서가 아닌 좌경(左傾)세력을 물리치고 나라를 부강(富强)하게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우리 근·현대사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라면 대부분 인정하는 사실이다. 하나의 목적을 위한 통치(統治)행위로 발생한 현상을 공과(功過)로 나누어 본다는 것은 사실은 모순(矛盾)이다. 즉 朴正熙의 경우는 功이 곧 過이고 過가 곧 功이라고 할 수 있다. 

장기집권이 곧바로 절대악(絕對惡)은 아니며 민주주의가 그 자체로 절대선(絕對善)이 아니다. 모든 國家의 보편적 국민들은 자국(自國)이 경제적 곤궁함이 없고 군사적으로도 강한 나라가 되길 소망하며 이것을 최우선으로 여긴다. 朴正熙에 대한 평가는 그 통치와 결과를 긍정적으로 볼 것인지 부정적으로 볼 것인지로 이루어진다 할 것으로, 실은 순전히 평가하는 이의 이념적(理念的) 성향에 달린 것이다.  

예컨대, 원세훈(元世勳) 전 국정원장에 대한 평가도 그렇다. 그의 업적 중 北韓의 사이버 활동 대응에 관하여 야권(野圈)의 집권을 막기 위한 불법 정치활동이라는 평가도 있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기 위한 부득이한 조치였다는 평가도 있다. 적(敵)에게 매우 우호적인 야권을 악(惡)으로 보는 이라면 문제가 된 국정원의 사이버 대응이 설령 야권의 집권을 막기 위한 위법한 활동이었더라도 훌륭하다고 볼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建國)을 부정하는 이라면 北韓의 사이버 활동에 대응하는 그 자체를 비판하거나 그러한 활동을 법리적(法理的)으로 따져 위법하다고 할 것이다.

국정원 내부에서 야권에 정보를 제공한 것이 원인이 되어 결국 元世勳은 구속되었다. 심지어 그의 자택 주소가 알려져 거기 화염병이 날아드는 일도 있었다. 화염병을 던진 이들에게 무죄가 선고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에게 우호적인 이는 드물다. 검찰의 공안통은 조직 내부에서도 경원시(敬遠視) 되고 있다. 공안통을 미워하는 검찰 내 세력은 정권 초부터 언론과 박자를 맞춰가며 세월호 사고에서부터 각종 사안마다 反정부적이다. 우리의 현실이다. 

朴槿惠를 뽑은 國民

아베를 지지한 日本 국민에게는 그가 폭력배를 통해 美國 정치인과 교제한 의혹이 문제 되지 않았다. 트럼프를 지지한 美國 시민은 그의 음담패설, 천박한 행동, 엄청난 절세(節稅)에 관심이 적었다. 美日 국민은 그들이 원하는 정치를 해줄 사람을 기대했다.    

이명박(李明博) 전 대통령은 세계적 금융위기를 잘 넘기는 등 경제면에서 선방했다. 4대강 사업을 비롯해 잘한 일이 많다. 비록 정권 말 국무총리실 사찰 사건, 박희태 국회의장이 돈 봉투를 돌렸다고 폭로한 고승덕 사건, 최구식 의원실 수행비서관의 디도스 공격 사건, 친형인 이상득 의원 구속사건 등이 있었지만 정권 퇴진 압력을 받지 않고 임기를 원만히 끝냈다.

박근혜(朴槿惠) 대통령은 이명박 정권 말 악조건 속에서 야권연대에 맞서 새누리당을 제1당으로 만들었고 대선(大選)에서도 승리했다. 후보 시절 李明博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자제했고 덕분에 李 대통령은 탈당(脫黨)하지 않았다. 이 점을 높이 평가하는 이들도 당시에는 많았다. 朴 대통령은 집권 후 친북좌익(親北左翼)세력 척결 면이나 대북(對北) 문제에서 李明博 전 대통령이 하지 못했던 일들을 했다. 

지금 朴 대통령은 元世勳 전 국정원장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 그의 대통령 당선 자체가 적화(赤化)를 막은 것이라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등을 돌렸다. 언론은 朴 대통령을 깎아 내림으로써 그의 당선이 곧 ‘역사 속에서의 박정희 승리’라는 보수(保守) 세력의 자긍심을 허물려 하고 있다. ‘박근혜 말살’을 통해 보수 세력을 말살시키려 한다. 

20대 때 일부터 세종시 이전 문제에 이르기까지 그의 모든 과거 행적과 인간관계가 부정되고 손가락질 당하고 있다. 지적(知的) 능력과 인간성마저 공격당하고 있다. 朴 대통령을 옹호하는 이는 사실상 보수진영에도 거의 없다. 모두가 경멸한다. 단지 필요에 의해서만 하야(下野) 하지 말라고 할 뿐이다. 김대중, 노무현에게 보인 증오심보다 더 심한 증오를 보인 이들이 많다. 무엇이 그를 그토록 증오하게 만들었을까. 우리는 朴槿惠 대통령에게 어떤 것을 기대했을까. 씁쓸한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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