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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칼럼] 親日마녀사냥에 대한 도발적 질문

日帝시대는 과연 암흑시대이기만 하였나? 민족기업인에서 민족반역자로 몰린 ‘조선 제1재벌’ 金秊洙(김연수) 변론기. ‘親日마녀사냥’(엄상익著) 讀後記.

※ 본지는 앞으로 조갑제닷컴(http://www.chogabje.com)의 역사, 외교, 안보 분야의 우수 콘텐츠들을 미디어워치 지면에도 소개하는기회를 갖기로 했습니다. 본 콘텐츠는 조갑제닷컴 조갑제 대표님의 글입니다.



철 지난 親日마녀사냥에 대한 분노, 통쾌한 반론, 그리고 인간과 역사에 대한 따뜻한 시선(視線)이 때로는 문학적 표현으로 장대한 역사 드라마에 녹아 있었다.


공고판에 효수된 사람들

출판 편집자로서 嚴相益 변호사의 원고를 읽는 며칠 간은 행복하였다. 새로운 사실이 주는 흥미뿐이 아니었다. 철 지난 親日마녀사냥에 대한 분노, 통쾌한 반론, 그리고 인간과 역사에 대한 따뜻한 시선(視線)이 때로는 문학적 표현으로 장대한 역사 드라마에 녹아 있었다.

“문 옆의 벽에 공고판이 보이고 두툼한 서류뭉치가 마치 밧줄에 목이 매달린 사형수처럼 줄에 걸려 있었다. 위원회에서 친일파로 결정한 명단이었다. 누구든지 와서 그 이름들을 보라고 공고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 명단을 들춰 보았다. ‘서춘, 장덕수, 진학문, 모윤숙, 노천명’ 등 귀에 익은 이름들이었다. 서춘(徐椿)은 학생시절 동경에서 2·8 독립선언을 주도하였고 동아일보 기자를 했던 인물이다. 장덕수(張德秀)는 민족의 지도자로 인기가 높았다. 진학문(秦學文)도 기억에 떠올랐다. 일제시대 타고르를 만나 한국을 위한 시(詩)를 써달라고 조르던 문학청년이었다. 노천명(盧天命) 시인의 시 ‘사슴’은 국어교과서에 나와 있었다. 그는 외롭고 쓸쓸하게 죽었다. 맑은 영혼을 가졌던 그 사람들이 왜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어 그 이름들이 위원회의 공고판에 효수(梟首)되어 있는 것일까.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文明 개화의 주역들

대한민국 대통령 직속이었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을 적용하여 조사, 2009년 11월27일 국회에 보고한 戰時(中日·태평양전쟁) 기간 중의 反민족 행위자 705인의 명단에는 친숙하거나 존경받던 이름들이 많다.

尹致昊, 金錫源, 白善燁, 宋錫夏, 申應均, 申泰英, 申鉉俊, 李鍾贊, 洪思翊, 金秊洙, 金性洙, 朴興植, 金活蘭, 張德秀, 方應謨, 盧基南, 白樂濬, 申興雨, 崔麟, 李卯默, 崔南善, 金基鎭, 金東仁, 金東煥, 盧天命, 毛允淑, 徐廷柱, 兪鎭午, 李光洙, 李無影, 張德祚, 鄭飛石, 朱耀翰, 蔡萬植, 崔載瑞, 崔貞熙, 柳致眞, 李瑞求, 玄濟明, 趙澤元, 金基昶, 金殷鎬, 金仁承.

컴퓨터에서 漢字 이름을 찾으면 자동 검색이 되는 이들이다. 3·1운동 선언문 작성자 및 주동자, 대한민국 헌법을 기초한 사람, 낙동강 전선 다부동 전투의 영웅, 일제하에서 일종의 정부 역할을 하였던 조선일보 및 동아일보 사장, 이화여대와 연세대학 총장, 한국어를 아름답게 가꾸고 고난의 시기에 한국인의 마음을 감싸주었던 시인과 소설가들(최초의 현대 소설과 현대 시의 작가 포함), 교과서를 통하여 익숙해진 명문장가들, 작곡가, 극작가, 화가, 무용가, 대주교, 그리고 기업인들.

개화기, 식민지배기, 건국, 호국, 근대화의 시기에 이 나라의 주역 내지 조역이었던 그야말로 기라성(綺羅星) 같은 이름들이다. 가히 문명 개화의 주인공들이다. 민족기업, 민족언론, 민족대학으로 통하던 민족진영의 핵심인물들이 거의가 死後에 자기 변론의 기회를 얻지도 못하고 ‘反민족행위자’로 저격된 것이다. 이들은 우리가 오늘 누리는 근대 문명의 중요한 요소를 이루는 각 분야의 개척자들이다.

개척자들이란 처음 해보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시행착오가 유달리 많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산업혁명이 가장 늦었던 나라에서 그것도 日帝의 압제 속에서 주로 서구(西歐)에서 발전된 새로운 기술과 사조(思潮)와 예술을 받아들여 뿌리를 내리게 하는 일이 순리대로 소신대로 윤리대로 되었을 리가 없다. 이들 한국 근대화의 주역들은 나침반 없이 탐험에 나선 이들이었다. 이들의 개척과 탐험을 도와줄 국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장수는 이미 항복하여 적국(敵國)의 지배층에 편입, 안주하고 있었다. 장수를 따르던 백성들은 극지(極地)에 버려진 존재였다. 생존이 이들의 1차적 의무였다. 한반도를 벗어나지 않는 한 현존하는 권력과 제도를 떠난 생존은 불가능하였다.

“그들이 제일 미워하는 건 대한민국”

‘반민족행위자’는 쉽게 줄이면 ‘역적’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이런 ‘역적들’이 없었으면 공산화되었거나 경제적으로 일본에 종속적인 상태로 남아 있었을 것이다. 이들 反共과 克日의 공로자들은 왜 역적으로 몰린 것일까?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 위원이었던 역사학자 이명희(李明熙) 교수는 엄상익 변호사에게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위원회에서 나와 한 교수를 빼놓고는 모두 좌파죠. 그들이 제일 미워하는 건 대한민국입니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공을 세운 사람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몰아버렸죠.”


계급 투쟁론에 기초한 세계관, 역사관, 인생관

이유가 간단해진다. 대한민국을 미워한다는 말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하여 피, 땀, 눈물을 흘린 이들을 미워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체로 계급투쟁론에 기초한 세계관, 역사관, 인생관을 가졌다.

“(위원회의 주류인 좌파들은) 민중사관이나 운동사관에 입각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독립운동이나 혁명운동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다’ 이런 논리죠.”


엄 변호사가 위원회 조사팀장에게 물었다.

“구조론이 뭡니까?”

“사회주의 사상에서 비롯된 일종의 혁명론이죠.”

“개인적으로는 양심적이라도 상부구조에 있으면 친일파로 척결되어야 한다는 게 구조론 같던데….”

“맞습니다. 백정 출신들이 일제시대 순사보가 된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생계용 친일파라 봐준 겁니다.”


21세기의 마녀사냥

엄상익 변호사는 이 책을 통하여 한국 사회에 몇 가지 핵심적 질문을 던진다.

● 일제시대는 과연 암흑시대였나? 그때도 행복한 사람이 있었고, 역사는 발전하였으며, 문명은 건설되었다. 1930년대의 경성이 지금의 평양 같았단 말인가?

● 장수(고종)가 항복하였는데 졸병이 죽을 때까지 저항하지 않았다고 벌을 줄 수 있나? 초인(超人)이 못되었다고 단죄할 수 있나?

● 살아본 사람들은 김연수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민족기업인으로 칭송하였는데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도 지킬 수 없는 잣대를 들이대어 단죄하려는 것은 오만 아닌가?

● 그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훈장을 준 대한민국과 그를 민족반역자로 몬 대한민국은 다른 나라인가?

● 인간은 과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사는 게 생존의 목표인가?

‘親日’이란 말 앞에선 얼어붙는 知的 풍토에서 일찍이 어떤 지식인도 발설한 적이 없는 도발적 질문이다. 이 책은 이 질문만으로도 가치가 있을 것이다. 이런 질문은 60년 전에도 있었고(반민특위 검찰의 공소장), 그것에 대한 정답(반민특위의 판결)도 나왔다.

문제는 좌파정권이 들어서자 그 정답이 틀렸다면서 심판을 다시 하자는데, 피고석에 앉아야 할 사람은 죽었고, 심판자는 일제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었다. 역사를 체험이 아닌 관념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의 오만과 편견이, 항변할 수 없는 영혼을 심판하는 불공정 게임이 되고 말았다. 21세기의 마녀사냥인 것이다. 엄상익 씨는 그런 궐석 재판의 영혼 변호를 한 셈이다.

역사적 문서

이 책의 주인공인 김연수(金秊洙)는 동아일보 설립자이자 정치인인 형 김성수(金性洙)에게 가려져 대중적으로는 덜 알려진 기업인이다. 나는 그를 ‘한국 자본주의의 개척자’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데 60년 전 재판부도 그를 ‘민족기업인’이라 평가하였다. 이 책을 관통하는 가치관과 논리적 대결의 뼈대는 1949년 반민특위 재판부(단심제)의 무죄 선고 對 60년 뒤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의 ‘반민족행위자’ 결정이다.

1949년 8월6일 반민족행위처벌 특별재판소 제3부(재판장 徐淳泳)는 경성방직 전 사장 김연수 피고인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하였다. 이 판결문은 친일 행위를 어떤 기준으로 어떻게 단죄(斷罪)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갖게 하는 역사적 문서이다. 대한민국이 세워진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에서,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였을 日帝시대의 행위에 대하여 형사적 책임을 묻는 데 즈음하여 그 시대를 살았던 이들의 고민이 느껴진다. 이 판결문에는 인간의 숨결과 성숙된 역사관과 균형감각이 스며 있다.

‘反民族’ 개념은 超法的

판결문은 먼저 국가가 없던 일제시대 조선인의 행위를 반민족행위처벌법으로 단죄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는다. 재판장은 “反민족행위라는 것은 反국가행위와는 다소 이념을 달리하는 윤리적 관념으로서 19세기 이래 발전된 민족주의를 그 사상적 배경으로 한 것인 만큼 이것을 법률적 규범으로 파악하기는 자못 곤란한 점이 없지 아니하나(下略)”라고 서두를 열었다.

대한제국이 일본에 합병되어 없어진 상황에서, 더구나 그 지도부가 저항을 포기한 상태에서 비무장 상태의 조선인이 현존하는 권력인 日帝에 협력한 행위를 ‘反국가행위’, 즉 반역죄로 처벌하는 것은 논리상 불가능하다. 조국이 없는 조선인들은 일본이냐 대한제국이냐의 선택을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이다. 일본 지배에 순응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의 선택뿐이었다.
 
국가가 없던 시절의 행위를 처벌하기 위하여 ‘반민족행위’라는 개념을 만들었는데 이는 통상적인 법적 기준이 아니다. 서구에서 발전한 민족주의를 근거로 삼은 기준이다. 한국어엔 ‘민족’이란 낱말조차 없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서양문물을 도입할 때 영어의 Nation이나 독일어 Volk를 ‘민족’이라고 번역하면서 소개된 외래 개념인 것이다.

그렇다면 재판의 지침이 되어야 하는 민족주의의 가치는 무엇인가? 재판부는 이렇게 설명한다. “민족의 긍지와 순결을 위하여 그 단결을 공고히 하고 그 도의(道義)를 앙양하여서 정치적으로는 자주의 정신을 고취하고, 경제적으로는 자치의 기초를 확립하여 세상의 여하한 경우에 봉착하더라도 민족적으로 사생동수(死生同守)의 대의를 지키자는 것이 핵심”이라는 것이다. 3·1운동이야말로 이런 정신을 체현한 것이라고 예시(例示)하였다.

재판부는 여러 나라의 민족운동의 역사를 보면 상황이 악화될 경우 “결국 대중은 부지불식(不知不識)의 사이에 민족의 대의(大義)보다 自我의 구출에 급급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드물지 않다고 했다. 그렇다면 어떤 자세로 민족반역행위를 단죄할 것인가. 재판부는 엄격하되 신중하여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다.

“민족 전체를 죄인시하면 안 된다”

“우리는 모름지기 엄숙한 자기반성과 냉철한 사적(史的) 고찰에 입각하여 민족 전체를 죄인시하는” 자세를 피하고 世人이 입을 모아서 죽여도 좋다고 저주할 정도로 악질적인 행위를 한 자만을 가려내어 벌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처벌 대상자에 대하여 구체적 개념 규정을 내린다.

“敵의 세력을 필요 이상으로 이용하여 동족을 박해하였거나 자신의 영예를 위하여 직권을 남용하고 동족을 희생케 하였거나 민족적 비극이 목첩에 있는 무자비한 정책임을 알면서도 일부러 敵의 환심을 사기 위하여 자진 아부한 자”를 처벌 대상인 ‘악질적 反民族 행위’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또 “反民族 행위가 원래 법률 이전의 관념이지만 이것을 법률적 수단에 의하여 처리코자 하는 이상 모든 것을 법률적으로 이해하는 외에 다른 요구가 있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 有無罪를 판단함에 “형사책임의 일반이론을 좇”아서 할 뿐이고, 자구에만 구애 받아 그 해석을 멋대로 할 순 없다고 했다.

나라가 없는 상태에서 이뤄진 행위를 처벌하는 것은 초법적(超法的)인 면이 있으므로 인권유린이나 권력남용을 피하려면 오히려 형사소송법이 규정한 증거주의 등 사실 확인의 과정을 정확히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초법적인 역사 재판일수록 법치주의에 입각해야 무리가 없다는 이야기이다.

요약하면 인민재판 식 親日 斷罪論을 경계한 것이다. ‘민족’을 흉기화하여 대한민국 건설자들을 단죄하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로 써먹는 작금의 풍조를 예견한 것인가.

“직위가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해야”

판결문은 또 日帝시대에 어떤 직위에 있었는가 하는 것은 그 자체가 범죄를 저질렀다는 뜻이 아니고 “그러한 지위와 신분이었던 자는 反民族의 개연성이 있다는 개괄적 규정”으로 보고, 그러한 사람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하였는가를 따져서 판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日帝 때 활동하였던 사람들을 직위에만 근거, 획일적으로 범죄 유무를 판단하여선 안 된다는 경고이다. 형식보다는 내용, 즉 직위가 아니라 행동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뜻이다.

반민특위 검찰이 김연수(金秊洙)를 기소한 이유는, 피고인이 경성방직의 사장 등 15개 회사의 중역을 거쳐 조선 실업계에 상당한 권위와 존재를 보유하면서, 관선 도의원, 만주국의 京城 주재 명예 총영사, 중추원 칙임(勅任)참의 등에 임명되었고 청년학도의 출정을 권유하는 등 일본의 전쟁 수행에 적극 협력하였다는 것이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런 형식적인 면보다는 그가 무엇을 하였는지를 중점적으로 살펴서 판단하였다고 밝힌 뒤, 검찰 신문과 재판 증언에서 드러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김연수의 일제(日帝) 때 행위는 ‘이런 것’이었다고 요약하였다.

“피고인은 교토제국대학의 경제학부를 다닐 때부터 일생 실업인으로 종시(終始)하여 조국의 장래에 기여하겠다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연구를 거듭하던 끝에 기미운동의 자극을 받아 한인(韓人)의 손으로 설립 경영하던 경성방직이 재정난으로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이를 인수 경영하기로 하고 전무취체역으로 입사한 것이 효시(嚆矢)이다.”


민족자본으로 키운 근대 공업의 萌芽

여기서 판결문은 김연수가 일본의 대기업과 경쟁하면서 경성방직을 발전시킨 점을 높게 평가한다. “경방이야말로 민족적 자본과 민족적 정열을 근저로 한 근대적 경공업이 조선에 수립되던 맹아(萌芽)인 만큼” 일본의 큰 회사들이 눈엣가시로 생각하여 압박하는데도 “밖으로 강적과 싸우고 안으로 빈곤에 울면서” 회사를 파산의 위기에서 구하고, 오랜 신고(辛苦) 끝에 기술을 습득, 연간 생산 면사(綿絲) 200만 관(貫), 광목 80만 필의 대회사로 키웠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 방직 회사들의 대공세에 대항하기 위하여 경방을 능가할 정도의 남만방적을 봉천에 설립한 것 등 그 공적은 적다고 볼 수 없다”고 평가했다.

재판부는 경성방직을 키운 김연수의 역할을, 자본주의 불모지대에서 민족적 자본과 정열을 모아 한국 자본주의의 맹아(萌芽)를 만든 선구자로 그리면서, 일본 대자본의 위협에 직면하여 민족적 기술과 투자로 이를 극복해낸 민족기업인이라고 판단하였다. 김연수의 기업활동을 경제 부문에서 이룬 항일(抗日)운동으로 해석한 셈이다.
 
판결문은 김연수가 경영하던 경방이 ‘결코 민족정신을 버리지 않은 증좌(證左)’를 몇 가지 들었다.

● 정치적 경제적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만만(滿滿)한 투지(鬪志)로써 일본 자본에 매수되거나 타협하지 않은 점

● 경방 주권(株券)에 태극기 도안을 넣어 민족혼을 상징한 점, 생산광목 포스터에 태극기를 상표로 한 점

“일제 말기 戰時엔 자유 의사가 통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공직(公職)에는 나아가지 않는다는 신조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 와서 약간의 公職에 이름이 나게 된 것은 개인의 자유 의사가 용납되지 않은 日帝의 강제조치 때문이었다는 피고인의 변해(辯解)에 대하여 ‘수긍할 점이 없지 아니하다’고 했다. 판결문은 日帝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관직에서 김연수가 사퇴하기 위하여 노력한 사실들을 열거하였다. 조선인 청년들에게 출정을 권유하였다는 기소 사실도 인정하지 않았다.

“도쿄 출장은 당시 총독의 명령으로서 자의(自意)가 아닐 뿐더러 강연 당시에도 저성(低聲)으로 밑만 바라보고 학생출정의 필요성을 이론적으로 역설한 것이 아니요 오직 소위 유세단이 도쿄까지 오게 된 경위를 말한 정도이었으며 강연을 마친 후에는 즉시 순천향 병원에 입원하였다.”


판결문은 일제 말기 戰時 상황에서 빚어졌던 이른바 친일행위에 대한 판단에 기준이 될 만한 언급을 남겼다.

“요컨대 본건 공소사실은 모두가 피고인의 자유의사에서 결과된 사실이 아니요, 당시의 정치적 탄압(전쟁 말기의 정치 성격은 公知의 사실)과 사회적 협박으로 말미암아 항거키 어려운 주위 사정에 반사적으로 취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 점이 인정된다.”


지금 한국에선 中日전쟁과 태평양전쟁 시기에 일제의 통제가 강화된 가운데서 일어난 수동적 친일행위에 대하여 더 가혹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의 오만과 위선을 60년 전 반민특위 재판부가 미리 경계해 둔 것 같다.

판결문은 피고인 김연수가 일제 때 민족 교육 및 사회사업을 위하여 기여한 긴 목록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균형감각과 종합적 시각(視角)에서 한참 벗어나 日帝 협력 행위만을 집중적으로 들여다보려는 요사이 행태와 대조적이다.

잘한 점도 봐준 판결

● “기미운동의 책원(策源) 장소이며 광주학생 사건의 본영적 학교인 중앙중학교 및 보성전문(고려대학의 前身)을 운영하는 재단법인 중앙학원에 현금 250만 원과 田地 97정보를 기증하여 경영의 기초를 삼게 하고, 8개 중학교, 11개 소학교, 기타 교육단체 및 학생단체에 전지 629정보, 현금 370만 원 기부, 養英會를 통하여 학교에 수백만 원의 연구비 및 수백 명에게 장학금 지급, 李升基 공학박사 외 다수의 학자 배출, 경방 및 南滿紡績 출신 기술자로서 대한민국의 섬유공업회사(敵産)를 관리하는 이가 34명, 기타 재해 구휼(救恤), 체육보급, 종업원 복지증진을 위한 사회사업 등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

● 경방의 방계 회사로서 금융, 製絲, 정미, 농사 등 회사를 설립, ‘민족적 산업개발을 위한 선구적 역할’.

● 중앙 및 고려 두 학교를 졸업한 6000~7000명의 문화인, 그리고 “현 섬유공업계의 기술진영 편성이 가히 京紡의 독담장(獨擔場)이 되어 있는 사실 등은 피고인의 교육산업 및 사회방면에 끼친 공적으로서 특기할 가치가 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판결문은 김성수, 김연수의 선친인 김경중이 “조선문화와 민족사상의 발양에 이바지하고자 단기 4269년부터 전후 18년의 세월을 소비하여 비밀리에 조선사 17권 1질을 편찬, 이것을 사립학교, 향교 등에 무상 배부한 사실”도 기록하였다. 판결문은 이어서 “자녀와 질(姪) 십수 인에 대하여는 한 사람도 왜정의 관공리로 취직케 한 사실이 없음”도 적시하였다.

‘장려(推奬)할 공적뿐’

재판부는 결론 부분에서 법적 판단을 이렇게 정리하였다.

“피고인의 性行, 사업, 사상, 家庭이 이와 같을진대 우리는 피고인의 공적을 추장(推奬)할 무엇이 있을지언정 사리사욕(私利私慾)을 위하여 同族을 구박하고 명예와 지위를 위하여 독립정신을 방해한 반민족행위자로 규정할 논거는 없으며 피고인의 과거 공적을 보아 소위 장공속죄(將功贖罪)의 관용을 施할 수 있거든 하물며 본건 공소사실은 前段 인정과 같이 먼저 犯意의 점에 있어서 이를 肯認할 만한 자료가 없으니 그 악질 여부를 究明할 여지도 없이 결국 증거 불충분에 귀착되지 아니할 수 없으므로 형사소송법 제362조에 의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하노라.

단기 4282년 8월6일

반민족행위처벌 특별재판소 제3부
재판장 재판관 徐淳泳
재판관 李春昊
재판관 崔國鉉
재판관 申鉉琦
재판관 鄭弘巨“


재판장의 아들

엄상익 변호사는 故人이 된 서순영 재판장이 어떤 사람인가를 추적한다. 무죄 선고를 음모론으로 해석하기 좋아하는 이들을 의식한 것이다. 원로 법조인의 소개로 아들을 만났다. 교장 출신의 서주성 씨다. 그는 “아버님이 돌아가신 후 만든 것”이라며서 문집 두 권을 嚴 변호사에게 건네주었다.

“강직한 분이었습니다. 여론을 거슬러가면서 소신대로 판결하였습니다. 李承晩 대통령이 부산에서 장기집권을 위하여 정치파동을 일으켰을 때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가 법관직을 그만두셨습니다. 반민특위 당시 대법원장은 김연수 씨에게 유죄를 선고하라는 쪽이었는데 아버님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서순영 변호사는 아들에게 김연수에 대하여 이런 평을 남겼다고 한다.

“경성방직 제품에 태극성이라는 상표를 붙인 걸 보고 민족정신이 있는 분이구나 느끼셨답니다. 누구나 공부를 좀 하면 관직에 나가고 싶어할 때인데 김연수 사장한테서는 그런 것을 볼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일제 말기에는 일본으로 기울어진 행동을 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해방이 되자마자 독립운동을 했다는 애국자가 왜 그렇게 많은지 모르겠다며 악질적인 친일파만 처벌하는 선에서 그치는 게 좋다고 하셨어요.”


“인간의 생존 목표가 국가와 민족이어야 하나”


서순영 재판장과 대척점에 있는 이는 60년이 지나 김연수에 대한 무죄선고를 부정하는 결정을 내린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핵심 위원인 박연철 변호사이다. 엄상익 변호사는 경기고등학교 선배인 그를 찾아가 논쟁을 벌이고 그 기록을 이 책에 실었다. 위원회가 어떤 논리로 민족기업인을 민족반역자로 판단하였는지 잘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이 논쟁에서 엄 변호사는 주로 듣는 쪽이지만 간간이 하는 질문이 날카롭고 도전적이기까지 하다. 토론에서는 답보다 질문이 더 어렵고 중요한 경우가 많다.

“1910년 한일합병 당시 집에 일장기를 걸었다면 친일행위지만 1930년대 戰時의 일본 경축일에 걸었다면 달라지는 게 아닐까요?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출전한 걸 비난 못하지 않습니까?”

“저는 김연수 회장만한 민족기업인이나 경제 분야의 독립운동가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교육과 문화에도 엄청난 돈을 기부하였고, 민족에 현실적으로 그만한 도움을 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단죄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인간이 생존하는 이유가 민족과 국가를 위해서일까요? 개인을 희생해서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보전해야 한다는 국가주의 민족주의는 우리 헌법이나 특별법이 추구하는 논리가 아니라고 보는데요. 그건 또 다른 전체주의적 역사관이 아닐까 합니다.”


박연철 변호사의 다음 이야기는 경청할 만하다.

“우리가 조사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당대의 선각자, 지식인, 유산층 등 지도적 위치에 있던 사람들이야. 그들은 해방 후에도 지도자로 생활한 사람이 많아. 그들의 행적을 철저히 파헤치는 건 우리가 나라를 잃게 될 경우 우리나라의 동량(棟梁)이 되어야 할 인사들이 어떻게 변모했는가 그 비극적인 행태를 철저히 인식시키려는 데 있는 거지.”


우리가 나라를 잃게 될 경우를 타산해 보면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은 핵무장한 북한정권에 대한민국이 합병당하는 모양새이다. 위원회의 이념적 성향으로 보아 그런 경우를 상정(想定)한 것 같지는 않는데 누가 아는가, 親北派가 親日派보다 더한 규탄의 대상이 될 날이 다가오고 있는지를.

주홍글씨

엄상익 변호사는 김연수에 대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을 내린 국가기관을 상대로 한 행정 처분 취소 소송에서 이렇게 변론하였다.

“민족 공동체에는 이왕 받은 상처에 소금을 끼얹는 아픔으로 다가올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선 친일파로 낙인 찍히면 갈 곳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자손까지 주홍글씨가 새겨진 옷을 입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정부기관인 위원회가 편향된 목적을 설정하고 진실을 왜곡함으로써 역사의 권력화 현상을 초래하였습니다. 위원회는 과거를 현재의 목적에 맞추어 이용한 면이 있습니다. 과거는 과거라는 공간 속에 두고 보야야지 현재의 눈높이와 정치적 의도에 맞추어서는 안 됩니다.”


엄 변호사는 책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눅 들고 그 회한을 가슴속에 새기면서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산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사람들이 일제가 강요하는 일정한 활동을 하였다고 해서 민족을 잘못 인도한 민족반역자처럼 단죄하는 것은 후 시대인 오늘을 산다는 특권만으로 그들에게 돌을 던지는 행위 같았다. 그런 편견은 한 개인이나 학자의 의견이라도 지탄 받을 수 있다. 국가인 대한민국이 그런 행위를 하는 것은 지나친 것 같았다. 김수환 추기경은 “아이가 어른을 재판하는 것 같다”고 비판하였다. 노기남 대주교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에 대한 논평이었다.“


엄 변호사는 위원회가 모범으로 삼은 제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에서 있었던 부역자 단죄는 경우가 다르다고 지적한다.

“나치 치하 짧은 기간 벌어진 일들과 한 세대가 넘는 36년간이 이어진 일제 식민 상황 속의 절망적 행동과 맞비교하는 것은 무리이다. 이상과 당위라는 잣대로 당시를 보면서 조선 사람들에게 超人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이다. 프랑스에서도 9000명을 약식으로 처형한 데 대한 반성이 있다.”


‘아무리 자료를 내도 안 읽는다면…’

2010년 행정법원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 김연수에 대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을 유지하였다. 엄상익 변호사는 이렇게 개탄한다.

“재판을 시작할 때의 재판장 말이 떠올랐다. 다른 재판부에서 유사한 사안이 결론 나 있는, 간단한 사건이라고 그는 말했었다. 그는 역사문제에 대해 그리고 김연수라는 한 인물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 같았다. 솔직히 내가 낸 증거자료들이나 주장들을 그 판사들은 읽지 않았을 것 같았다. 아무리 자료를 제출해도 눈을 빤히 뜨고도 그걸 읽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며칠 후 판결문이 왔다. 60년 전의 무죄 판결을 뒤집는 행정법원의 논지는 이러하였다.

“식민지배 하에서라도 기업인이 자신의 기업 활동을 위하여 식민통치에 도움이 되는 행위에 가담했다는 것은 내심의 동기가 어떠하였는지에 불구하고 비난 받아 마땅하다. 중추원 참의 등 그 관직에 나아간 자체가 이미 적극적 주도적으로 日帝에 협력하혔다는 점이 추정되는 것이다. 김연수의 중추원 참의 등 임명과 활동이 본인의 의지와 관계 없이 강압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정은 보이지 않는다.”


이 판결의 논리라면 통일 후 북한에서 조선노동당 당원으로 활동한 약 300만 명 전원을 민족반역자로 처단할 수 있을 것이다. 권력적 강압에 의한 굴복이었다는 항변은 ‘내심의 동기가 어떠하였던지 간에 그런 강압에 의하여 이뤄진 것이라는 사정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로 간단히 무시될 것이다.

엄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일제시대라는 공기를 두르고 산 기업인으로서 그 시대를 지배하는 정권과 소극적 미온적으로 타협해야 하는 것이 현실이었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했다. 그런 행동은 법이 규정하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엄 변호사는 항변한다.

“기업의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지 抗日이 아니다. 抗日운동가에게 기업을 하지 않았다고 비판할 수 없듯이 기업인더러 항일운동하지 않았다고 단죄할 순 없는 것 아닌가.”


1949년 반민특위 재판부는 김연수가 기업활동으로 번 돈의 힘으로 한국인의 실력을 길러 일본을 이기는 방향으로 고차원의 抗日을 하였음을 인정하였다.

“당신들은 후퇴해 본 적이 있소?”

김연수라는 나라 잃은 조선인과 그가 살아갔던 비상한 시대의 명암(明暗)을 그려낸 엄상익 변호사의 글은 문학적 감동을 준다. 위원회와 재판부의 결정과 판결에서는 빠져 있는, 역사 속에서 숨쉬는 인간을 이 책에서 살려낸 덕분이다. 일제시대를 간단히 ‘암흑시대’로 규정하는 것은 이 시대를 치열하게 살면서 미래를 준비하고, 文明을 발전시켰던 우리의 先代에 대한 모독이며 역사 부정이고 무엇보다도 사실과 맞지 않는다는 점을 일깨운다. 그의 글을 읽다가 문득 생각 난 다른 글을 찾아내어 읽어 보았다. ‘인간의 심연(深淵)’을 쓴 영문학자 朴承用 선생이 노무현 정권 시절(2005년)에 조갑제닷컴에 기고하였던, 오래 여운이 남는 글이다.

“헤밍웨이의 전쟁소설 ‘무기여 잘있거라’의 주인공 프레데릭 중위는 전선에서 후퇴하던 중 이탈리아군 헌병들이 이탈리아軍 중령을 처형 직전에 심문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 심문자(헌병)들은 ‘사격은 하지만 사격은 받지 않는’ 이탈리아 군인들의 그 모든 능률성과 침착함과 통제력을 가지고 있었다.

“소속 여단은?”

그(중령)는 대답하였다.

“연대는?”

그는 대답하였다.

“연대에서 왜 이탈하였나?”

그는 대답하였다.

“장교는 부대와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나?”

그는 안다고 말하였다.

그것이 전부였다. 다른 헌병장교가 말하였다.

“너같은 놈 때문이다. 야만인들이 조국의 신성한 국토를 짓밟게 만든 것은 바로 너같은 놈들이다.”

“선처를 바랍니다”라고 중령이 말하였다.

“우리가 승리의 열매를 놓친 것은 네놈들의 반역 때문이다.”

“당신들은 후퇴해 본 적이 있소?” 중령이 물었다.

헌병은 총살집행을 위한 총은 쏘지만 전투에 참여하여 적으로부터 사격을 받지는 않는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니 총에 맞을 일도 없고 후퇴의 경험도 없다. 그들은 죄의 유혹을 받은 적이 없으면서 죄에 굴복한 자를 단죄(斷罪)하는 성직자와 같다. 헌병들이 사용하는 ‘신성한 국토’와 ‘승리의 열매’같은 애국적인 어구(語句)는 조개껍질처럼 공허한 것이어서 “후퇴해 본 적이 있는가?”라는 중령의 말 앞에서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헌병들의 용감한 말은 실제 상황과는 전혀 관계가 없지만 중령의 질문은 핵심을 찌르기 때문이다. 행동과 경험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추상적인 이론이나 명분은 객관적인 사실에 부딪히면 오판(誤判)을 가져오기 쉬우며 인류사는 너무나 많은 오판의 사례를 보여준다. 중령은 이러한 오판의 희생자이다.

盧武鉉과 그의 동류(同類)인 386은 일제시대에 살기는커녕 태어나지도 않았고 세계최빈(最貧)의 한국이 세계 10대 경제강국으로 변한 건설과정에 땀 한 방울 흘리지도 않았으면서 이승만과 박정희 등 시대의 짐을 지고 고난의 세월을 살아간 사람들에게 총질을 마구 해대는 미친 ‘헌병’들이다.“


대한민국이 딛고 있는 문명 건설의 주인공들을 주로 골라내어 주홍글씨를 새긴 듯한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은 저승에 있어 항변이 불가능한 영혼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중세의 마녀사냥보다 더 비열하다. 이 책을 다 읽으면 마녀사냥꾼들의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로베스피에르, 자베르, 일제 고등계 형사, 그리고 헤밍웨이의 헌병을 합성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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