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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진 목사 샌프란시스코 신학원 박사논문 표절 문제 해설 (I)

피표절문헌 ‘1970년대 노동현장과 증언’(1984)으로 정리해본 인명진 목사 박사논문 표절 문제

본지는 연구진실성검증센터와 함께 지난달 20일,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장 인명진 목사의 박사논문이 ‘표절’이라는 연구부정행위로써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고발한 바 있다.


본지 보도에 대해서 인명진 목사와 자유한국당 측은 ‘인명진 목사의 박사논문에는 표절 사실이 없다’면서 본지를 상대로 기사 삭제 가처분 신청은 물론, 형사고발, 언론중재위원회 조정신청까지 진행했다. 

물론 인 목사의 박사논문 표절 사실은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워낙 명백한 것이어서 인 목사와 자유한국당 측의 저런 조치들은 모두 무위로 그칠 것이 확실시된다. 이미 언론중재위원회 조정은 인 목사와 자유한국당 측이 본지의 기사에 대해서 아무런 구체적인 반박자료도 제출하지 못해  조정 불성립으로 결론이 난 바 있다.



본지와 연구진실성검증센터는 이번 기회에 ▶인명진 목사가 박사논문 작성 과정에서 표절을 한 사실이 명백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 또한 성직자인 인 목사가 자신의 비위 문제를 가리기 위해 거짓말까지 서슴치 않고 있는 문제와,  아울러 자유한국당 측이 정치공세의 일환으로 가처분 신청과 형사고발, 언중위 조정신청을 함부로 도구화하고 있는 문제까지도 폭로한다는 의미에서, 아래에 인 목사의 박사논문 표절 사실과 관련 해설 자료를 작성해 새로이 공개한다.

인명진 목사는 신학 문제, 노동 문제와 관련한 여러 한국어 문헌들을 짜깁기해서 이를 영어로 직역하는 식으로 미국 신학대학원 박사논문을 작성했다. 이런 편법을 동원해 논문을 작성하고 학위를 받을 수 있다면 한국보다 미국에서 학위를 받는 것이 훨씬 더 쉬울 것이다. 

본지와 연구진실성검증센터는 인명진 목사의 박사논문 전체에서 대략 20% 가 번역표절로 구성됐다는것을 확인했다. 물론 이는 현재까지 확보한 자료에 의한 것으로, 자료가 더 확보된다면 인 목사의 박사논문에서 더 많은 표절 사실이 발견될 것으로 예측된다.



인명진 목사  샌프란시스코 신학원 박사논문 표절 해설


인명진 목사의 박사논문은 ‘민중신학적 관점에서 본 대한예수교장로회 소속의 도시산업선교회 과업에 대한 고찰(Rethinking the work of urban industrial mission in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in the light of minjung theology)’이라는 제목이다.

해당 논문은 1986년도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원(San Francisco Theological Seminary)에 제출된 것이다. (인명진 목사의 박사논문은 이하 인명진(1986)으로 표기)

인명진(1986) 1장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 in Korea, 약칭 NCCK)가 발간한 ‘1970년대 노동현장과 증언’(1984)이라는 단행본 내용을 영작으로 표절해 작성됐다. (해당 문헌은 이하 NCCK(1984)로 표기)

인명진(1986) 1장의 제목은 ‘한국의 정치, 사회경제적 상황 분석’(An analysis of the political and socio-economic situaion in korea)이다. 1장 부분은 인명진(1986)에서 전체 내용의 기초를 이루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명진 목사는 한국어로 이미 출판된 타인의 문헌들을 영어로 편집·번역하는 식으로 손쉽게 박사논문의 1장을 작성했다.

인명진(1986) 1장에는 NCCK(1984)에 대한 출처표시가 일부 이뤄진 부분도 있다. 하지만 NCCK(1984)에 대한 출처표시가 분명히 이뤄졌어야 하는 부분들 상당수에서 이러한 출처표시가 생략되어 있음이 확인된다.

이런 문제는 인명진 목사가 인명진(1986) 1장 전체가 사실상 NCCK(1984)라는 출처 단 하나에만 의존하여 작성되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한 의도로 그리 했었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하기가 어렵다.

아닌게 아니라 인명진(1986) 1장의 각주 1번부터 각주 35번에서 제시한 NCCK(1984)을 제외한 5개 다른 출처들조차,  NCCK(1984)에서도 이미 제시되어 있는 출처들이다.  



말하자면 인명진 목사는 인명진(1986)의 1장을 NCCK(1984)라는 단 한가지 문헌에만 의존해 작성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사실을 은폐하고 마치 다양한 출처들을 연구해 작성하기라도 한 것처럼 위장을 한 것이다. 연구량을 부풀리는 이런 위장술에 동원되는 것이 바로 ‘2차 문헌 표절(재인용표절)’이다.
 
사실, 외국의 유수 대학의 경우는 직접인용이 20-25% 만 넘어가도 설사 적절하게 인용처리(인용부호 및 출처표시)를 다 하였다 하더라도 박사논문으로 인정하지 않는 학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 이는 독자성과 독창성이 박사논문의 기본적인 요건이기에, 적절하게 인용처리가 된 직접인용조차도 꼭 필요한 경우에 한정해서 활용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인명진(1986)처럼 특정 문헌 하나를 가져와서 그대로 한 챕터 분량을 요약해 정리한다는 것은, 설사 인용처리가 모두 정확히 이뤄졌다고 하더라도 외국의 유수 대학에서는 표절로 판정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참고로, 인명진(1986) 1장의 내용 중에서 번역을 해보면 그 해석상 피표절문헌인 NCCK(1984)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이는 기본 아이디어와 내용에 대한 변형 내지는 요약의 영향이자 이종 언어 간(한국어, 영어) 번역상의 뉘앙스 차이로 인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1. ‘1970년대 노동현장과 증언’(1984) 표절

(1) 번역표절 

아래는 인명진(1986)의 7페이지 부분과 NCCK(1984)의 17페이지 부분이다.



인명진(1986)에 있는 영어 내용은 NCCK(1984)에 있는 한국어 내용과 사실상 1:1로 일치한다. 이러한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이 출처표시와 함께, 완전히 동일한 내용이므로 인용부호(“”)를 통해 직접인용 처리까지 이뤄져야 한다. 번역을 통해 같은 내용을 그대로 베낀 표절이다.

The labour situation of korea immediately after the independence on 15th August 1945 inherited, like all other sectors of society, both 36 years of Japanese colonial, exploitative, rule and the feudalistic, absolute monarchy of Cho-Sun Dynasty, and hence reflected undemocratic and inhumane situation. 

(한국의 노동상황은/ 1945년 8월 15일 독립 직후의/ 물려받아 계승되었다/ 사회의 다른 부분들과 같이/ 36 년간의 일제 식민지 착취와 지배 그리고 봉건적이며 절대군주 체제/ 조선왕조의/ 따라서 반영했다/ 비민주적이고 비인간적인 상황을/.)



(2) 직접인용 미처리 번역표절

아래는 인명진(1986)의 8페이지와 9페이지 부분, 그리고 NCCK(1984)의 24페이지 부분이다.



인명진(1986)에서는 비록 NCCK(1984)에 대한 출처표시는 하였지만, 언급된 부분들은 완전히 1:1로 동일한 내용이므로 인용부호(“”)를 붙이거나, 들여쓰기(block quotation)와 같은 직접인용처리를 해야 한다. 아니면 간접인용으로서의, 단순 직역 이상의 말바꿔쓰기, 재구성 번역을 해야했음에도 이를 하지 않은, 직접인용 미처리 번역표절이다.

The scale of such US aid presented considerable effect to the Korean economy of that period. The percentage of US aid in 1957 and 1958 comprised 22.9% and 16.9% of Korea's GNP respectively and at total finacial scale it comprised more than 50%.

(이러한 미국 원조은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 기간에 한국경제에./ 1957년과 1958년 원조 비중은 차지했다/ 각각 22.9%와 16.9%를/ 한국 GNP의/ 그리고 총 재정규모에 있어서/ 50%를 넘었다/) 

However, such enormous aid was delivered in consumer goods such as cigarettes, food products, beverages and clothings and its scale has reached 44.9% and 52% in 1953 and 1961 respectively.

(그러나, 이러한 막대한 원조는 전달되었다/ 소비재로/ 담배, 식생산품, 음료 및 의류와 같은/ 그리고 1953년에는 52%, 1961년에는 44.9%에 각각 달했다./)



(3) 직접인용 미처리 번역표절

아래는 인명진(1986) 9페이지와 10페이지 부분, NCCK(1984)의 25페이지 부분이다.



출처표시는 이뤄졌지만, 해당 부분은 인명진(1996)과 NCCK(1984)가 1:1 로 완전히 동일한 내용이므로 인용부호(“”), 들여쓰기(block quotation)와 같은 직접인용 처리를 하거나, 또는 간접인용으로서의, 단순직역 이상의 말바꿔쓰기, 재구성 번역을 해야했음에도 이를 하지 않았다.

Under such labour situation the leader-centered and politically anti-communistic trade union, 'Daehan Independence Promotion Labour Confederation" has changed its name to 'Daehan Labour Confederaion' in September 1948, immediately after the establishment of the First Republic. However, instead of concentration on the expansion of its activities on the protection of workers' rights and its organization it was mainly involved with internal factional-fighting for the leadership.

(이러한 노동 상황 속에서/ 어용조합이며 정치적으로는 반공인 ‘대한독립촉성노동총연맹’은 변경하였다/ 그 명칭을 / 대한노동조합총연합회‘로/ 1948년 9월에/ 제1공화국 설립 직후에/. 그러나 노동자들의 권익보호와 그 조직화의 활동에 집중하기 보다는/ 주로 열중한 것은/ 내부파벌 다툼이었다. 권력장악을 위한./)



(4) 2차 문헌 표절(재인용표절)

아래는 인명진(1986)의 11페이지 부분, NCCK(1984)의 33페이지 부분, 김성진의 ‘한국의 노동조합’(노동문제연구소, 1982)(이하 김성진(1982)로 표시) 63페이지 부분에 있는 도표다.



인명진(1986) 11페이지에 있는 도표는 마치 김성진(1982) 63페이지에서 가져온 도표인 것처럼 출처표시가 되어 있다. 

하지만, 인명진(1986)에서의 도표는 실제로는 NCCK(1984)에서 김성진(1982)의 도표를 인용·가공한 것을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다. 

자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1차 문헌인 김성진(1982)의 도표에서는 숫자가 백단위, 십단위, 일단위까지 기록되어 있다. 이에 반해 2차 문헌인 NCCK(1984)는 김성진(1982)의 도표를 가공, 변형하여 천단위 선에서 숫자를 정리한 도표를 새로 만들었다. 인명진(1986)에서 활용된 도표는 김성진(1982)의 도표가 아닌, NCCK(1984)의 재가공 도표임이 명백하다.

이런 경우 출처표시는 당연히 2차 문헌인 NCCK(1984)만 하거나, NCCK(1984)와 김성진(1982)에 대해 전부 출처표시를 해줘야함에도 불구하고 인명진(1986)에는 1차 문헌인 김성진(1982)에 대해서만 출처표시가 되어 있다. 

명백한 ‘2차 문헌 표절’(재인용표절)이다.


(5) 번역표절

아래는 인명진(1986)의 11페이지 부분, NCCK(1984)의 34페이지 부분이다.



아래 번역을 보면 알겠지만 인명진(1986)에 있는 내용은 NCCK(1984)의 내용과 사실상 동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명진(1986)에서는 NCCK(1984)에 대한 출처표시와 같은 인용처리가 되어있지 않다. 번역을 활용해 같은 내용을 그대로 베낀 표절이다.

However, this second labour movement which was the democratic and autonomous labour movement which was the democratic and autonomous labour movement was oppressed by the Government from the time of its establishment. In this circumstances the First Republic concluded with the uprising of April Student Revolution in 1960.

(그러나, 이 두 번째 노동운동은/ 민주적이고 자율적인 노동운동인/ 억압당했다/ 정부에 의해/ 설립 초기부터/ 이러한 상황가운데 제1공화국은 막을 내렸다/ 1960년 4월 학생혁명으로/)



(6) 번역표절

아래는 인명진(1986)의 12페이지 부분과 NCCK(1984)의 35페이지 부분이다.



아래 번역을 보면 인명진(1986)의 내용을 NCCK(1984)로부터 사실상 1:1로 그대로 가져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출처표시와 함께, 완전히 동일한 내용이므로 인용부호(“”)나 들여쓰기를 통해 직접인용처리를 해줘야 한다. 아니면 간접인용으로서의, 단순직역을 넘어선 말바꿔쓰기, 재구성 번역을 해줬어야 한다.

In other words, the core of the protest against the authoritarian Rhee Administration was not the people whose interests were directly affected but were the students. Therefore, the demand of April Revolution only called for an abstract and ideal social justice and fell short of digging our the concrete contradictions in the society.

(다시 말해서/ 항의에 대한 핵심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대한/ 직접적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고/ 학생들이었다./ 그러하기에 4월 혁명의 요구는 단지 요구였다/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사회정의 요구/ 그리고 부족했다/ 구체적인 사회 모순을 드러내기에는/) 

Futhermore, in the April Revolution the initial understanding of people was very shallow and optimistic as to believe the resignation of Rhee Syngman from the Presidency would solve the complex problems of that society. 

(더구나, 4월 혁명의 사람들의 초기 인식은 매우 얕고 낙관적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사임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을 정도로/ 사회의 복잡한 문제들을/.)



(7) 번역표절

아래는 인명진(1986)의 13페이지 부분과 NCCK(1984)의 35페이지 부분이다.



인명진(1986)과 NCCK(1984)과 내용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누가 봐도 인명진(1986)의 내용은 NCCK(1984)의 내용에서 가져왔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우 출처표시가 있어야 한다. 거의 같은 내용을 번역을 통해 베낀 표절이다.

As the 8.15 independence did not automatically bring about the independent, democratic and united nation in the korean Peninsula, the resignation of the autoritarian Rhee Administation did not automatically solve all the problems of Korean society. In other words, the process involving the liquidation of all kinds of undemocratic factors in all parts of Korean society, re-establishment of self-reliant economy, adjustment of Korean attitude in order to achieve autonomous, democratic and peaceful reunification of Korea should have been the most important and necessary task to be attempted. However, the Democratic Party and Chang, Myun Administration failed to recongise the national tasks owing to their conservative orientation.

(8.15 독립이 자동적으로 한반도에서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통일된 국가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 아니듯이, 독재자 이승만 정권의 사임이 자동적으로 풀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한국사회의 문제들을./ 다시 말해/ 과정이/ 한국사회의 모든 부분에서 비민주적 요소들을 청산하는/ 자립적인 경제를 재건하는,/ 민주적이며, 평화적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 한국의 태도를 조정하는 / 시도되어야하는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과제였다./그러나 민주당과 장면정권은 인식하는데 실패했다/ 국가적 과제를/ 그들의 보수적인 태생으로 인해/.)



다음기사 : 인명진 목사 샌프란시스코 신학원 박사논문 표절 문제 해설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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