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전두환 전(前) 대통령이 아웅산 태러 즉시 북한과의 전쟁에 돌입하거나 복수를 선택했더라면, 대한민국 경제는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은 보복보다는 경제를 선택한다. 필자(筆者)가 전두환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두환은 어떤 문제를 만나거나 난관에 부딪혔을 때, 상황을 피해 우회적으로 돌아가거나 회피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직선적인 사람이며, 어떤 험로(險路)를 만나더라도 주저 없이 그대로 돌파해버리는 무인(武人)다운 추진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경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경제가 위기에 있음을 알자, 주저 없이 경제 돌파에 돌입(突入)하였다. 그것은 고지를 향해 온몸을 그대로 던져버리는 처절한 군인의 모습이었다. 몰려드는 잡다한 생각을 버리고, 오직 목표하는 한 점만을 바라보는 집중과 투지, 그리고 최선을 다하는 노력. 그리하여 전두환, 그는 최선을 다한 뒤 결과에 결코 후회하거나 자만하지 않는 대통령이었다.
전두환은 대통령직에 오르면서, 두 가지 목표를 세웠다. 그 첫째가 경제 발전이었다. 두 번째가 단임에 대한 약속을 실천하여 평화로운 정권 교체를 이루는 일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전두환은 경제라고는 봉급 봉투 한번 만져보지 않은 청맹과니 문외한이었다. 군인 출신의 전형적인 무인(武人)으로서 오직 군 전략과 전투로만 단련된, 그 외에는 아무런 지식도 능력도 취미도 없는 사람이었다. 다만 사람을 부릴 줄 아는 뛰어난 리더십의 소유자였을 뿐이다. 그는 그를 보좌하는 김재익(아웅산 테러에서 사망)을 비롯한 경제전문가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경제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여러분을 믿고 경제에 관한 한 모든 것을 맡긴다. 결과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니, 여러분은 소신껏 마음 놓고 일해 주시기 바란다.”
전두환은 이런 말로도 김재익을 비롯한 경제전문가들을 응원하였다.
“겅제는 당신이 대통령이다.”
고(故)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참으로 어렵게 시작해 놓은 경제였다. 경제발전에 쓸 씨종잣돈을 마련하기 위해 월남 파병 군인들의 월급까지 경제 건설에 동원될 정도였고, 한일회담을 통해 받은 배상금으로 겨우겨우 경부고속도와 포항제철을 만들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아주 어렵게 마련한 아주 적은 재화(財貨)를 어디에 집중하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위대한 지도자의 꿈과 결단에서 시작되는 일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 일을 해낸 위대한 지도자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경제라는 이 어려운 목표를 이루어 나갈 때, 나는 야당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사진 하나가 있다. 비록 진위(眞僞)가 불분명한 사진이지만, 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하고자 경부고속도로 공사판 위에 누워있던 김영삼과 김대중의 사진이다. 김영삼 김대중 측 둘 다 부정하는 사진이지만, 그러나 이 사진은 경제건설 반대를 의미하는 상징성에서만큼은 의미가 분명한 사진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전두환 시대에 이르러서도, 아직도 부족한 것이 많았고 야당의 반대도 극심한 시절이었다. 전두환은 1980년 9월에 김재익을 경제수석으로 등용한다.
김재익은 "제가 생각하는 경제 정책은 인기도 없고 기존의 세력들이 환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 일을 해내야 합니다. 그래도 저를 쓰시겠습니까" 라고 말한다.
전두환은 김재익의 다짐을 받아들이고 김재익을 신뢰할 것을 약속했다. 전두환이 '경제에 관해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 라고 한 말은 바로 김재익에게 한 말이었다. 전두환은 김재익에게 경제정책 전반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다. 그리하여 경제에 관한 한 그 누구도, 심지어 3허(허삼수 허문도 허화평)조차도 김재익을 방해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그들로부터 김재익이 괴로움을 당하자, 전두환은 격노하면서 허화평·허삼수 두 허씨를 청와대에서 내보냈다는 일화(逸話)가 있다. 그만큼 전두환은 경제를 최우선 절대선의 과제로 삼았다.
김재익은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입각한 뒤, 전두환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까지 했다.
전두환은 자신이 경제학, 경영학 관련 지식이 부족함을 스스로 인정하고 김재익의 건의를 받아들여 경제학자들과 경영학자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새벽까지 강의를 들었다. 김재익은 하얀 종이에 경제 자율화와 안정화의 그림까지 그리면서 전두환을 가르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전두환은 김재익의 경제, 경영학 강의를 통해서 나름대로의 경제관을 갖게 됐고, 사람들을 만나면 자신의 경제에 대한 소견을 밝히고 토론하기를 좋아했다.
그 결과 우리 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시대, 5공 초기 벼랑 끝에서 시작한 경제는 전두환 집권 불과 몇 년 사이에 유례없는 호황으로 발전하였다. 각종 경제전망은 기분 좋게 어긋났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던 물가까지 안정되었다. 성장·물가·국제수지라는 이른바 ‘3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았던 것이다.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30년 전(前) 전두환 통치시대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모든 성과에도 불구하고, 그 김재익은 아웅산 테러 현장에서 산화(散華)하고 말았다.)
전두환은 경제를 물가 안정부터 시작하였다. 그리고 김재익의 의견을 받아들여 중화학공업 통폐합 등 각종 개혁 작업을 강행했다. 오일쇼크에 심한 흉작이 겹쳐 물가가 폭등하고 민심은 흉흉한 시절이었다. 한 자릿수 물가안정정책을 군사작전 하듯 밀어붙이다보니 무리한 일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강압정책에 따른 부작용도 많았지만, 한 자릿수 물가는 달성되고 경제 체질은 강화되었다. 때마침 도래한 3저(低)의 기회를 살려 한국경제는 살아나고 88올림픽을 전후(前後)해서 우리나라는 최대의 호경기를 누릴 수 있었다.
그리고 88서울 올림픽을 향한 강력한 지도력이 발휘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자행되는 북한의 도발은 강력한 반공통치로 막아내고, 전두환은 나라경제 회복과 도약에 집중하였다. 그렇게 대한민국은 전두환의 강력한 리더십으로 인해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되어가고 있었다. 국민의식도 날로 개선되어갔다. 교육은 그 목표를 잃지 않았고, 시민들의 질서의식도 향상되어 갔다.
그러므로 경제의 번영은 실로 전두환 통치시대의 백미(白眉)로 보아야 한다. 물론 19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 같은 세계사적인 업적도 있으나, 경제의 발전과 완성이야말로 민족사적인 업적이라 보아야 한다.
그 결과로 대한민국의 국위선양에 이바지 한 점이 크다. 오늘날 우리가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이루고 세계인의 존경을 받으며 G20에 가입하게 된 것은 전두환 전(前)대통령의 공이 가장 크다고 보아야 한다.
다시 전두환 경제의 진행과정을 살펴보자.
고(故) 박정희 대통령 시대 경제발전 5개년 계획이 3차에 걸쳐 성공리에 끝나고 있을 때, 우리는 10.26을 겪게 된다. 그 사건으로 우리는 박정희라는 위대한 지도자를 잃고, 망망(茫茫)한 대해(大海)를 표류하고 있었으며, 대한민국 정치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다.
경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가는 치솟고 있었고, 어렵사리 구축해온 중화학공업마저 경제 위기를 촉발시키는 골치덩어리로 전락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 집권 3년 후 1983-1984년 GNP 성장률은 10.2%, 도매물가 상승률은 0.5%, 저축률 26.6%를 기록한다.
중화학공업은 성장주도 산업으로 부상했고, 반도체, 컴퓨터 등 신기술 제품이 양산체제로 돌입하며 국제경쟁력을 확보해 나가게 되었다. 1986년 현대자동차 포니, 엑셀이 미국으로 수출된 것은 우리나라가 자동차산업에서 선진국과 어깨를 겨루게 되는 첫 신호탄이었다.
수출호조에 힘입어 국민총생산이 급속히 성장하여 매년 평균 성장률이 10% 내외를 유지하게 되었으며, 1인당 GNP가 1987년 현재 3천 달러를 넘어서서 중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게 되었다. 1980년부터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것도 경제성장의 한 징표였다.
필자(筆者)가 교단에 발을 들여놓을 때가, 전두환 집권 2년째인 1982년의 일이었다. 경제가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게 되자, 사회전반에 걸쳐 고급인력에 대한 수요가 늘게 되었다. 이에 각 기업들은 인력을 충원하고자 취업박람회를 여는 등 대학가는 말 그대로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고 있었다.
교단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학교가 세워지고 교사들이 부족하게 되자, 단기 양성 과정을 거친 비사범계 출신들도 교단에 서게 되었다. 먼 섬마을이나 벽촌으로 발령을 난 교사들은 아예 부임조차 하지 않고 기업으로 나갈 때였다. 한마디로 대한민국 역사에서 ‘부흥’이라는 말이 실감날 때였다.
그야말로 ‘단군 이래 최대호황’을 구가했던 전두환이 이끈 5공시대의 경제는 전두환 리더십의 결과였다고 본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전두환 시대 경제를 한 눈에 알 수 있게 자료를 요약해 본다.
* 소매물가상승율
1980년 29%, 1982년 7.1%, 1983년 3.4%, 1985년 2.5%
* 외채 및 외채잔액
1979~1981 3년 간 외채 2배 증가, GNP의 50% 넘음, 세계 4위 채무국이 됨.
1986년 24억불 감소되어 468억불이 되었고, 1987년 356억불로 외채가 줄어듦.
* 경제성장율
1980년 -5.6%, 1981년 6.6%, 1982년 5.4%, 1983년 11.9%, 1984년 8.4%, 1985년 12.3%, 1986년 12.92%, 1987년 12.97%, 1988년 12.42%
* 국민저축율
1980년 20.8%, 1985년 28.4%, 1986년 32.5%, 1987년 37%
*국민총생산
1980년 630억불, 1987년 1,360억불
(오스트리아, 벨기에, 그리스, 노르웨이, 스웨덴의 국민총생산을 넘어섬)
1988년 1,800억불
*1인당 소득
1980년 1,600불, 1987년 3,218불, 1988년 4,300불
*무역
1982년 국산승용차 pony 미국에 수출, 1984년 엑셀(프레스토) 미국 대량 수출, 1987년 세계 12대 무역대국으로 성장
* 경상수지
1980년 -53억불, 1981년 -45억불, 1982년 -26억불, 1983년 -16억불, 1984년 -14억불, 1985년 -9억불, 1986년 +46억불!
이렇게 경제가 호조를 보임에 따라, 전두환 시대에 드디어 국민연금과 의료보험 등 복지정책을 본격적으로 시행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풍요로운 복지정책이 누구로 인해 시작되었는지를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런 경제성과에 대해, 후일 전두환은 이렇게 담담하게 술회(述懷)한다.
"나는 내 일생을 통틀어 1986년이 가장 행복했던 때로 기억된다. 취임 초에는 나라 형편이 어려워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었는데 6년 만에 국제수지가 흑자라니 꿈만 같았다. 나는 당장 대통령을 그만둬도 여한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또 물가를 한 자릿수로 정착시킨 가운데 12.5% 라는 고도성장을 이룩했고 또 사상 처음으로 국민저축률이 투자율을 상회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동안 긴축정책 등으로 어려움이 많았는데도 잘 협조해준 모든 국민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경제는 우연(偶然)이 있을 수 없다. 저축을 우연히 했다는 말이 있을 수 없듯이 경제는 부단한 노력의 산물이다. 전두환의 노력과 투지, 불굴의 집념은 대한민국의 경제를 선진국 수준으로 발전시켰다. 남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엄청난 국방비를 부담하면서도 그와 같은 성과를 이루었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이라고 해야 할 놀랍고도 위대한 성취라 할 것이다.
2017. 9. 25
전라도에서 시인 정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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