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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말, 한 일본인 탄광직원의 증언을 전한 산케이신문

당시 탄광직원 다나카 씨, "내가 아는 한 출신지에 따른 차별 같은 건 없었다‘ 증언

[편집자주] 민족주의 좌파 세력을 중심으로 용산역에 징용노동자상이 세워지면서, 일제시대 징용노동의 진상에 대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첨예한 입장대결이 펼쳐지고 있다. 한국 측은 당시 징용노동의 수준이 명백한 노예 수준이었음을 역설한다. 반면 일본 측은 일제시대에 징용노동을 실시한 기간은 전쟁 말기의 짧은 기간에 불과했으며 임금의 면에서 일본인과 한국인의 차이가 없었고 처우도 나름 좋았음을 주장한다. 이런 첨예한 대립 상황에서 우선 필요한 것은 상대방의 입장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파악이다. 이에 본지는 얼핏 한국의 국익과 다소 맞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일단 징용노동과 관련 일본의 관련 입장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는 콘텐츠를 제시해 한국 측의 보다 정교한 대응을 촉구할 계획이다.



2년전 일본의 자유보수 매체인 산케이신문은 일제시대 탄광에서는 조선인들에 대한 차별은 없었고 활기 넘치는 생활도 있었다는 내용의 당시 직원 증언을 인터뷰한 기사를 내보냈다.


산케이신문은 당시 일본에서 하시마섬을 비롯한 근대문물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한국 등이 반발하는 상황 가운데, 비록 등재 유산목록은 아니지만 일제시대말 호죠(方城) 탄광에 직접 근무했던 한 여직원의 증언을 들려줬다. 산케이신문은 이를 통해 일제시대 통상적인 탄광생활의 일면은 물론, 일본인과 조선인의 실제적 차별이 그리 크지 않았음을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산케이신문은 “증언자인 다나카 씨는 89세(2015년 현재)로 당시 후쿠오카 현에 있던 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회계부문 사무원으로 미쓰비시광업 소속 호죠 탄광에 근무하고 있었다. 그녀가 했던 일은 광부의 업무량에 따라 급여를 계산하여 회계사에게 전달해 주는 것이었다“라고 증언자를 소개했다. 

다나카 씨가 언론에 당시 탄광생활을 증언하게 된 이유와 관련, “한국정부가 광부에 대해 한반도 출신자의 피해만 강조하고 나가사키 앞바다의 하시마(일명 군함도) 탄광 등 세계유산 군(群)의 가입에 반대하고 있는 것에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에 “자신이 젊은 세대에 (당시 상황을) 구전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호죠 탄광은 미쓰비시 광업의 전신인 미쓰비시 합자회사가 1902년에 만든 탄광으로 후쿠오카 현에 있었다. 1914년 일본 최대의 탄광 폭발사고가 발생한 곳이기도 하다. 일제시대 말 에너지 생산의 최전선에서 일제는 석탄 생산에 사활을 걸었다. 탄광은 1964년에 폐광되었다. 

다나카 씨는 산케이신문을 통해 “가혹한 노동환경이었던 만큼 수익성도 높았다. 한반도 출신 노동자들도 일본인 못지않게 돈을 벌었고, 내가 아는 한 출신지에 따른 차별 같은 것은 없었다”라고 증언했다. 

다나카 씨는 산케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차별이 없었던 상황을 이야기하며 6가지 사례를 들었다. 

첫째, “직장이나 사택에서 동료끼리의 호칭”이다. 다나카 씨는 “한반도출신을 가리키는 경우 그냥 ‘조선사람’이라고 불렀다. 만약 차별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조센징’으로 불렀을 것이다. 동북 출신은 ‘동북사람’, 간사이 출신인 경우에는 ‘간사이 사람’이라 불렀다. 한반도 출신에 대해서도 일종의 그와 같은 방식으로 호칭한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둘째, 일본인, 조선인 할 것 없이 근무시간과 채굴량에 따라 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다나카 씨는 “근무시간이나 채굴량을 나타내는 전표에는 한눈에 한반도 출신자와 아는 이름이 적혀 있었으며, 그 중에는 일본인의 1.5배를 일하던 사람도 있었다”고 밝혔다.

셋째, 사택 구조에도 차별이 없었다는 것이다. 다나카 씨는 “사택의 구조는 4조반, 6조 규격이 있었는데 한반도 출신도 일본인도 동일한 대우로 입주해 있었다”고도 말했다.

넷째, 가족도 함께 생활했다는 것이다. 다나카 씨는 “사택에 사는 한반도 출신 중에는 가족도 있었다. 그들이 강제 연행되었다고 한다면 어떻게 가족이 함께 살 수 있었겠는가”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다섯째, 아이들끼리도 서로 섞여서 잘 놀았다는 것이다. 다나카 씨는 “아이들끼리도 한반도냐 열도냐 출신지에 상관없이 같이 놀고 있었다”고도 증언했다.

여섯째, 일본인이건 조선인이건 동일한 문화생활을 누리는게 가능했다. 다나카 씨는 “거리에는 현재 슈퍼마켓에 해당하는 구매부서가 2개 있었고 일상 용품들이 진열대에 진열해 있었다. 또한 인근거리에는 요정이나, 극장, 영화관도 있었다”고 밝혔다.

이어 다나카 씨는 “당시 탄광에서 석탄 광산은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는 일본의 에너지 정책의 생명선이었다. 사고가 나면 채굴량의 감소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회사 측은 폭발 사고에 신경이 예민했고, 안전 대책을 철저히 했다"라고 증언했다.

끝으로 다나카 씨는 “한국 정부는 일본이 하시마섬을 세계 문화 유산에 등록 신청하는 것에 대해서 불만을 갖는데, 당시에 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피해자는 한반도 출신만이 아니다. 호죠 탄광의 경우를 본다면 차별없는 활기 넘치는 생활도 있었다. 한국 정부는 이러한 측면도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했다.  



[기자수첩] 일제시대 징용노동 현실에 대하여


우리가 민족차별에 대해 생각할 때, 통념적 차원에서의 차별이냐, 직장 등에서의 실제적 차별이냐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이는 동남아 출신 노동자들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통념적으로 그들에게 차별의식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면 실제 직장에서 한국인에 비해 그들에게 급여 면에서 얼마간의 차별을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생각해 보건대 당시에 제국이 식민지에 대하여 아무런 차별의식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일본과 한국은 민족이 또한 다른 만큼, 출신지(한반도냐 열도냐)에 대한 차별이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당시 여러 증언과 자료를 보면 직장에서의 급여, 대우 등은 현재 한국인의 동남아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비교했을때도 나름 양호한 상태였음도 확인되는 실정이다.


또 하나 생각해 볼 것은 ‘국가총동원령’이 식민지인들(조선인)에게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본국인들(일본인)에게도 해당된 사항이었다는 것이다. 중일전쟁(1937년)이 발발하면서 다급해진 일본은 1938년 4월 1일 일본에 ‘국가총동원령’을 공포한다. 일본인들에게 일차적으로 총동원령에 적용된 것이다. 이것이 5월 5일부터 조선에도 적용된다. 그리고 이듬해 일제는 1939년 7월 7일 ‘국민징용령’을 제정하며 10월 1일부터 조선 등 식민지에도 시행하게 된다.


‘국민징용령’ 등이 식민지인들에게만 적용된 것이 아닌, 전쟁의 광란 속에 빠져든 일제하 본국이건 식민지이건 동일하게 적용되었으며, 한편으로 이러한 징집, 징용에 참여하는 것이 당시 식민지인로서는 본국 국민의 의무에 동참함으로써 권리를 획득하고자 하는 불가피한 노력의 일환인 측면도 있었다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조선에서는 1930년대 초반에 노동파업 등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30년대 중, 후반부터는 일제하 나라 전체가 전쟁의 광풍에 휩싸이면서 사회 전체가 경직된 분위기로 쏠리게 된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마치 한국인들만 당시 가혹한 징용에 희생된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일본인들 역시 그러한 징용의 희생자였음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물론 외견상으로만 모두 알 수 없는, 차별의식에 근거한 징용상황에서의 한국인들만의  억울한 삶은 있었을 것이다. 이를 부각, 직시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다만, 징용상황 하에서 마치 한국인들만 고대시대나 중세시대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았다는 식 과장만 난무하는 것은 한일간 건전하고 이로운 관계 설정 등에 있어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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