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을 반대하는 모임’(이하 강반모)이 지난 22일,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공론화가 없이 진행되고 있는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 문제를 비판하는 논평을 발표했다.
강반모는 논평에서 먼저 최근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 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 측의 제주도 학술세미나와 국회 토론회에서 다뤄진 쟁점들에 대해서 시비했다.
관련해 강반모는 징용노동자상 건립에 우호적인 인사들만 모여서 논의를 했던 결과, 전혀 엉뚱한 결론만 도출됐다고 비판했다.
첫째, 추진위 측의 한 인사는 제주지역 학술세미나에서 제주도 지역에선 조선인이 일본군의 군인과 군속으로 활동한 경우도 강제동원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강반모는 이를 넌센스라고 지적했다.
강반모는 1930년대 후반부터 조선적(朝鮮籍) 일본군 입소 경쟁률이 무려 30대1, 또는 50대 1에 달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저간의 사정을 떠나 조선인의 일본군 지원율이 마치 오늘날 공무원 지원율을 연상케할 정도였던 것을 어떻게 ‘강제동원’이라는 단일한 이미지로 묘사할 수 있겠냐는 것이 강반모의 입장이다.
둘째, 추진위가 강제징용노동자상을 굳이 북한 평양에까지 설치하려고 하는 것도 강반모는 납득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는 한일관계만이 아니라 일북관계도 망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추진위 측의 한 인사는 국회 토론회에서 북한 측 주장을 인용해 강제연행 피해자를 860만명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추진위의 기본 입장인 강제연행 피해자 780만명설보다도 훨씬 더 나간 것이다.
강반모는 당사자가 자원한 조선적 일본군도 모두 강제징용노동자에 포함시키자는 식, 또 심지어 북한과 연대해서라도 강제징용노동 문제를 풀자는 식이라면 차라리 1965년 한일협정 파기부터 외치는게 순서라고 꼬집었다.
강반모는 추진위에 다시 한번 이 사안과 관련 강반모와의 공개토론을 요구하며 논평을 마무리했다.
아래는 강반모의 논평 전문이다.
[논평] 강제징용노동자상 설치가 미치는 <역사•정치적 함의>에 대하여
최근 강제징용노동자상 설치와 관련한 행사가 두 곳에서 열렸다. 지난 15일 제주도의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주지역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 기념 학술세미나」 와 16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강제동원 노동자 사회배상의 전망 및 남북공동 대응의 방향 마련을 위한 토론회」가 그것이다. 두 행사에서 다루어진 내용 중에서 주요 쟁점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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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제주지역 일제 강제징용 노동자상 건립 기념 학술세미나」에서 조성윤 교수(제주대, 사회학과)가 “제주출신자들의 인원을 다른 지역과 비교해 볼 때 일반노무자로 동원된 인원수는 제주도가 인구 1000명당 10.6명으로 전국 평균 16.2명보다 적지만, 군인과 군속으로 동원 됐다가 사망한 명단이 포함된 명부에서는 오히려 제주도 인원수가 전국 평균을 3배정도 웃돈다. 이는 제주도 사람들이 일반 노무자보다는 군인 군속으로 동원된 경우가 훨씬 많았음을 말해준다”고 강조한 점이다.
그는 원인으로 “제주도 출신들의 사망자 비율이 크게 높다는 것은 일반 노무자가 아닌 군인이나 군속으로 강제 징집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라며 제주 출신 강제동원자 가운데 사망자를 사망한 장소를 중심으로 분류, “남양 방면 407명, 일본 119명, 중국 39명, 기타 38명”을 언급하면서, 특히 “사망자가 남양 방면에 집중된 이유는 1942년 이후 집중 동원된 시기에 미군과의 태평양 전쟁 무대가 됐던 지역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는 일제하 강제징용노동자 규모를 논함에 있어, 제주지역의 강제동원위원회 신고자 총 320명에 제주지역 군인•군속이었던 600여명의 사망자까지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1937년부터 시작된 중일전쟁과 특히 진주만 공습 직후인 1942년 당시 조선적(朝鮮籍)으로 일본군인이 되었던 역사적 사실관계를 살펴봐야 한다. 즉, 일제하 우리의 선조들은 어떤 시기에 어떤 형태로 일본군에 참전하게 되었던가. 이 모든 과정을 ‘강제동원’이라는 단일한 이미지로 설명할 수 있을까.
개념상 조선적 일본군 병사들은 1910년 대한제국과 일본 사이의 합병조약에 의거, 일제의 이익을 위해 싸우려 한반도에서 모집된 일본인 신병들을 말한다. 따라서 일본군이나 군속으로 일하게 된 조선인은 종전 후 ‘적국에 부역한 신민’으로 간주되어 일본인으로서 재판을 받게 된다. 즉 조선적 일본군은 일본군이었다.
그럼에도 만약 ‘강제동원’이라는 전제가 성립하려면 일제는 지속적으로 신병 모집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드러난 역사적 사실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간단히 해체시킨다. 다음은 조선적 일본군 특별지원자와 입소자 현황(괄호 안은 지원배수=경쟁률)이다.
1938년 2496명/406명(6.2배), 1939년 12,348명/613명(20.2배), 1940년 84,443명/3,060명(27.6배), 1941년 144,743명/3,208명(45.1배), 1942년 254,273명/4,077명(62.4배), 1943년 303,394명/6,000명(50.6배) [위키] *1944년부터는 징병.
1943년까지 6년간 지원자가 모집인원의 평균 35.4배에 달할 정도로 조선인들이 일본군이 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치루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특히 태평양전쟁이 본격화되는 1942년부터 56.5배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일본군에 지원했는데, 이를 두고 일제의 세뇌에 의한 결과이거나 혹은 구조적인 강제로 끌고 간 것이라고 강변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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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위 제주 세미나 및 「강제동원 노동자 사회배상의 전망 및 남북공동 대응의 방향 마련을 위한 토론회」 등에서 거론된 바 있는 강제징용노동자상을 평양에 설치하는 것이 북•일 외교(수교) 관계에 미칠 파장에 관한 문제다.
실제로 북한은 지난 8월 12일 서울 용산역광장에서 열린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 제막식을 맞아 양대노총 앞으로 보낸 축하 전문에서 "조선직업총동맹 중앙위원회는 조국 해방 72돌을 맞으며 지난 반세기 이상 우리 민족에게 온갖 불행과 고통을 들씌워온 일제 침략과 전대미문의 반인륜적 범죄를 만천하에 고발하는 강제징용노동자상 제막식을 성대히 개최하는 귀 단체들에 굳은 연대성을 보낸다"며 강제징용노동자상의 평양 설치 추진에 화답한 바 있다.
만약 평양에 강제징용노동자상이 설치될 경우 북•일 관계는 어떻게 될까. 북•일은 1980년대 후반부터 관계 개선 및 수교를 위해 2006년 초까지 노력해왔지만, 몇 가지 쟁점에서 엇갈린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장 큰 걸림돌은 북한이 경제협력과 별도로 일본에게 식민통치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배상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론회에서 이만열 명예교수(숙명여대)는 북한의 주장을 인용하여 “일제 강제연행 피해자수가 840만 명이라고 하는 바, 남북한이 공동대응할 경우에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으로 본다."며 사실상 연대투쟁을 촉구했는데, 이러한 수치는 강제징용노동자상건립추진위가 주장하는 780만 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다.
또한, 겨레하나 이연희 사무총장은 한반도 내 강제동원 유적지 8,438개소에 대한 순례사업을 제안했고, 이신철 연구교수(성균관대 동아시아 역사연구소)는 “최소 100억 달러 규모의 대일 배상금이 합의된 북한과 일본의 수교를 한국 정부와 시민사회가 지원하고, 식민지 피해사실에 대한 남북 공동의 조사사업, 기념사업 등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기염을 토했다.
“조선적 일본군인도 강제징용노동자에 포함시키자!”, “남북한 공동대응으로 강제징용 관련 대일 배상금 받아내자”.. 이런 식의 주장이 괜찮은가? 이럴 바엔 차라리 1965년 한일협정(한일기본조약)부터 파기하자고 나서는 게 순서 아닌가?
역사교과서와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에 등재된 3장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12명 모두가 일본인으로 확인된 지금 양대노총이 설치하고자 하는 강제징용노동자상의 모델은 누구인가?
정말 이대로 공개토론 한번 없이 계속 추진해도 괜찮은 사업인가 다시 한번 묻는다.
2017. 11. 22
강제징용노동자상 건립을 반대하는 모임
(김영선, 류재운, 심경자, 유재일, 이석호, 이우연, 임진현, 최덕효, 최영묵, 한세희 등 158인)
연락처: 010-9191-5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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