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반공우파 매체인 산케이신문은 올해 4월, 일제시대 징용노동자 관련 한국 MBC 방송사의 사실왜곡 문제를 지적한 기사를 내보냈다.
MBC 의 하시마섬 관련 사진자료 왜곡 보도
산케이는 “(해당 뉴스는) 같은 날, 산케이신문이 올 여름 공개예정인 한국영화 ‘군함도’ (감독: 유승완)의 예고편을 소개하면서 조선인 소년들이 몸을 구부린 채 채굴작업을 하는 모습을 ‘사실과 다르다’고 보도한 내용에 대해서 반론을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고 서두를 시작했다.
문제는 한국의 MBC 방송사가 하시마섬(군함도)과 관련 일본의 산케이신문에 반박을 하겠다며 사용한 근거가 하나같이 오류가 있거나 불확실한 내용이라는 것이다. 산케이는 관련 이렇게 단언했다.
“MBC 방송은 ‘극우경향의 산케이신문’이란 말로 시작됐는데, 반론은 커녕 MBC 방송에서 사용된 사진이 군함도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촬영되었다는 사실이 전문가의 조사로 밝혀졌다.”
일단 산케이는 MBC 가 하시마섬이라는 식 공개했던 사진[1]이 실은 하시마(端島) 탄광(나가사키(長崎) 현)의 지하가 아니라, 카이지마(貝島) 탄광(후쿠오카(福岡) 현)에서 지상 노천채굴을 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임을 밝혔다. 규슈 대학의 미와 무네히로(三輪宗弘) 교수는 “(MBC 가 공개한) 거의 모든 사진이 하시마 탄광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MBC 가 공개한, 한 남성이 옆으로 누워서 채굴하는 사진
[2]도 하시마 탄광이 아닌 치쿠호우(筑豊) 탄광이다. 미와 교수에 따르면 이 사진은 심지어 일제시대(1910년~1945년)도 아닌, 그보다 한참 이전인 메이지시대(1868년~1912년) 중기의 사진이라고 한다. 원 사진출처는 ‘눈으로 보는 치쿠호우(筑豊)의 100년(目で見る筑豊の100年)’(향토출판사(郷土出版社))이다. (
편집자주 : 이 내용은 사진의 시기 문제와 관련해서는 미와 교수와 산케이의 오류로 보인다.
[2]의 사진은 사이토 고이치가 찍은 것으로
치쿠호우(筑豊) 탄광 사진은 맞지만, 1950~60년대에 한 가난한 일본인이 폐탄광에서 석탄을 채굴하는 장면으로 확인됐다.
[군함도논란③] 사진 조작의 진실…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다")
산케이는 니혼(日大) 대학의 타나카 나오키(田中直樹) 명예교수도 인용해 “기계화가 진행된 하시마섬에서 수작업 채굴이라니 황당무계하다”고까지 지적했다. 사실, 해당 남성이 조선인이라는 증거도 전혀 없다. 징용노동부터가 1944년 9월부터 1945년 4월까지 8개월간 실시되었던 일이기도 하다.
MBC 가 하시마 탄광을 지옥과 같은 현장이라면서 검게 그을린 사람들을 공개한 사진[3]은, 실은 1926년 9월에 홋카이도(北海道)에 소재한 아사히카와(旭川) 신문이 도로건설 공사현장에서 일어난 학살치사 사건을 보도했던 사진이다. 역시나 시대와 장소, 경위, 소재가 한참 다르다. 산케이는 아사히카와 신문 원 기사에서도 사진 속 인물들을 조선인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고 전했다.
한편, MBC 는 해당 방송에서 “하시마 탄광의 내부 벽에서 ‘배가 고파요’, ‘고향에 가고싶다’, ‘어머니 보고 싶어’ 라는 한글 낙서가 발견됐다”[4]고도 밝혔다.
하지만 산케이에 따르면 “(문제의) 해당 ‘낙서’는 1965년에 조총련 산하 단체가 제작한 영화 속에서 치쿠호우 탄광에서 일하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흔적을 따라가면서, 영화의 연출성을 높이기 위해 제작진이 새겨 놓은 글씨”에 불과하다.(영화 제목은 ‘을사년의 매국노’)
‘낙서’ 경위와 관련 정확한 사실관계는 2000년 1월 3일자로 니시닛폰(西日本) 신문에 보도된 바 있다. 당시 영화 제작에 관여한 관계자는 “강제연행과 관련된 영상자료는 별로 없잖아요? 그래서 감독이 ‘(연행된 사람들의) 느낌을 넣는 게 좋을 것 같다’ (고 말했어요)”라고 증언한 바 있다.
산케이는 이와 같은 사진자료 왜곡 문제에 대해서 MBC 방송사에 질의서를 송부했다고 한다. 그러자 MBC 보도국 주간뉴스 부서는 4월 11일부로 회신을 보내와 하시마섬과 상관없는 사진을 사용한 사실은 일단 인정하며, 유감의 뜻도 밝혔다고 한다.
그러나 MBC 는 유감의 뜻과 함께 “비록 장소는 달라도 조선인들이 강제동원되어 피해를 입었다는 맥락에서 역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라는 입장도 동시에 산케이에게 전했다고 한다.
징용노동자라며 찍힌 사람들이 조선인들이라는 증거도 없는 사진이 도대체 일제시대 역사의 어떤 면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것인지 MBC 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국립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의 자료들은 믿을 수 있는가
산케이는 해당 기사를 통해 부산에 있는 2015년 12월에 설립된 ‘국립 일제강제동원역사관’(이하 역사관)에 취재를 다녀온 소식도 같이 전했다.
산케이는 “(역사관은) 7층 건물의 4층, 5층이 전시관이다. 4층에는 ‘기억의 터널’, ‘일제강제동원의 개념’, ‘일제강제동원의 실정’, ‘끝나지 않은 일제강제동원’, ‘해방과 귀환’으로 분류된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며, “5층에는 ‘조선인노무자 기숙사’, ‘일본군 위안소’가 있으며 ‘피해’ 상황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고 전했다.
산케이는 “(역사관)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한국의 MBC 방송 이브닝뉴스에서도 소개한 시커먼 모습의 남자들이 나란히 서있는 사진(징용노동 사진이 아니라, 홋카이도에서 있었던 도로건설 공사현장에서 일어난 학살치사 사건 관련 사진)이다”면서 “이 사진은 2015년에 하시마섬을 포함한 “메이지산업혁명유산”의 세계문화유산 등록을 둘러싸고 한국측이 유엔교육과학문화기관(UNESCO) 세계유산위원회 소속위원 전원에게 배포한 책자에도 사용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산케이는 “탄광의 ‘가혹한 노동’을 소개하는 자료로서는 ‘사갱에서 몸을 옆으로 누인 채 채탄작업을 하는 조선인 노무자’라는 제목의 사진이 있으며 일본어, 영어, 한국어로 설명문이 붙어있다”면서 “하지만 이 사진을 자세히 보면 MBC 방송이 사용한 사진과 똑같은 장소에서 촬영된 듯하다. 여러명의 석탄산업사 전문가들은 ‘메이지시대 중기, 치쿠호우 지역에 조선인은 거의 안 살았다’ 고 증언한다“고 전했다.
역사관에서는 징용에 동원된 일제시대 조선인들은 가혹한 노예노동에 시달렸으며 살아돌아온 사람들도 거의 없었다는 듯 묘사하는 자료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관련 분야 전문가인 미와 무네히로 교수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사망율에는 거의 차이가 없었으며 조선인이 대부분 사망했다는 식 얘기는 명백한 거짓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산케이는 앞선 기사에서는 한국의 이우연 박사도 인용해 징용노동을 노예노동처럼 묘사하는 것은 왜곡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산케이에 따르면 해당 역사관에는 그밖에도 여러 왜곡이 있다. 가령, 4층 전시관에는 원폭과 관련 조선인 피폭자 문제를 거론한 오카 마사하루(岡正治), 그리고 ‘오카 마사하루 기념 나가사키 평화자료관’의 이사장이며 최근 타계한 나가사키대학 명예교수인 다카자네 야스노리(高實康稔) 및 관계자들의 사진을 걸어놓고 이들을 징용노동의 문제를 폭로한 사람들인 것처럼 소개해놓기도 했다. 산케이에 따르면 해당 사진에는 심지어 ‘수용소’라는 표현까지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일본의 강제노동수용소의 존재를 명백히 밝히고, 일본정부 및 기업을 상대로 한 소송 등의 방법으로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전세계가 갈채를 보내고 있다”
역사관의 팜플렛에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글이 적혀있다고 한다. 하지만 산케이는 역사관을 시찰한 미와 무네히로 교수가 월간지 ‘역사통(歴史通)’ (2017년 4월호)에서 밝힌 입장이 더 적절하다는 듯, 마지막에 미와 교수의 입장을 전하며 기사를 마무리했다.
“역사를 ‘속이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 본 기사에서 산케이 기사 내용 번역은 박아름 씨의 도움을 받아서 이뤄진 것입니다.
한국의 역사왜곡 문제를 지적한 산케이 기획 기사들 :
日 산케이, “위안부 관련 한국의 역사왜곡 문제, 배후에 북한 있다는 의심”
미디어워치의 일제시대 징용노동 문제 관련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