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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주의의 변화: 마르크스주의에서 인종/성별 간 투쟁으로

“개인을 자신이 결정하지도 않은 범주와 분류에 옭아매려는, 그리고 개인을 옥죄고 도덕적으로 규탄하는 와중에 그야말로 억압하려는 집단주의자들에 의해 집단적 동일시/일체감이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 본 글은 미국경제교육재단(the Foundation for Economic Education, FEE)에 게재된, 리처드 에벌링(Richard M. Ebeling) 더 시타델 윤리/자유기업리더십 BB&T 특임교수의 Collectivism’s Progress: From Marxism to Race and Gender Warfare을 번역한 것이다. 번역은 영미권에서 공부하는 한 대학원생의 온전한 재능기부로 이뤄졌다.

'미국경제교육재단(FEE)'도 '미국미제스연구소(MI)'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 경제사상의 확산, 계몽을 위해 연구소의 콘텐츠를 CC 라이선스 4.0에 따라 자유롭게 번역하여 소개하는 것을 장려하고 있다. 




집단주의의 변화: 마르크스주의에서 인종/성별 간 투쟁으로
(Collectivism’s Progress: From Marxism to Race and Gender Warfare)

- 집단주의자들의 투쟁노선 교체: “계급 갈등”을 인종/성별 간 투쟁으로 -
(- Collectivists have replaced “class struggle” with race and gender warfare -)


여러 객관적 지표들로 볼 때, 이 세상은 물질적 측면에서 굉장히 풍요로워지고 있다. 지난 삼십 년 동안,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 각지에서 수천만의 사람들이 가난에서 벗어났다. 동시에, 새로운 기술들이 커뮤니케이션(의사소통)과 일상생활의 편의성을 변혁시켜왔다. 

그런데 현재 미국과 세계의 정치적 추세는 이와 상당히 동떨어진 것 같다. 어느 정도 시장의 자유가 존재하는 곳은 지구상 어디에서나 부와 기회의 창출, 선택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든 성취는 다수의 지식인들과 가부장적 이상주의자들에 의해서 오히려 경멸의 대상이 되고, 개인적/경제적 자유를 질식시키려는 시도들에 맞닥뜨리게 됐다는 것이다.

미국을 포함한 세계적인 국가통제주의 추세

예를 들면, 중국 정부와 공산당 지도부는 중국 특유의 권위주의 체제를 전 세계의 정치적 모범으로 자랑스럽게 떠들고 있는데, 이는 반대파 탄압과 “위대한 중화(中華)”의 재건을 향한 정부의 경제개발 지침에 기초한 주장이다.

유럽연합은 브뤼셀 본부의 중앙 계획 관료제와 정치 엘리트 집단에 반대하는 각 회원국 내 자국중심주의 및 포퓰리즘 득세로 균열이 계속되고 있는데, 실은 이런 균열은 어차피 비슷한 정책들을 각 회원국 정부의 통제/명령 권한으로 집행하고자 하는데서 나온다.

미국에서는 소위 진보 “좌파”와 “트럼프류” 보수주의 간 정치적 분열이 더욱 심화되는 가운데, 양쪽 모두 국가권력을 사용해 미국을 각자 바라는 모습대로 변형시키려고 각축을 벌이고 있다. 

진보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른(Politically Correct)” 어휘, 행동, 태도를 강제하기 위해 정부권력을 사용하려 한다. “트럼프류” 보수주의자들은 세계의 경찰국가라는 자신들만의 미국상을 추종하며 사람들과 물자의 유입을 차단하는 벽을 쌓고자 한다. 

그러는 와중에 미국 정부는 적자를 부채질하는 국내 및 군수 지출 확대를 노린 민주-공화 양당의 국회 내 “타협”에 힘입어 무책임한 재정운용을 계속하는 중이다.

필자는 이러한 모든 추세들이, 21세기의 20년이 끝나가는 지금 전 세계가 다시 한번 반-개인주의, 반-자본주의 광풍에 휩싸여 있다는 사실을 예증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는 19세기 고전적 자유주의의 성취를 뒤엎으려고 지난 100년 이상 매진해온 반동혁명 추세의 연속선일 뿐이다. 새로운 정치/문화의 병(부대)에 담긴 이전과 꼭 같은, 집단주의의 포도주다.(필자의 이전 글을 참조: “Before Modern Collectivism: The Rise and Fall of Classical Liberalism”)

자유에 맞선 집단주의의 반동혁명

고전적 자유주의와 자유, 개방, 경쟁을 기치로 하는 시장경제의 이상은 이미 1950년대와 1990년대에도 보수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국가주의자 세력들로부터 공격받고 있었다. 비록 표현들은 달랐지만 모든 반동혁명운동은 개인보다는 집단을, 집단에 대한 개별자아의 흡수와 복종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집단’이라 함은 귀족정 사회 내 위계질서라든지, 아니면 전 인류에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관철시키기 위한 “만국의 노동자 연맹”이라든지, 혹은 선조에게 물려받은 종족적 혈통과 언어에 호소하는 “민족” 등 무엇이든 상관없다.

이들 중 가장 혐오스럽고 폭력적이며 잔인했던 집단주의 – 소비에트 공산주의, 이탈리아 파시즘, 독일 나치즘 – 들은 20세기 말 모두 사라졌다. (다만 소비에트의 후예들이 아직 중국, 북한, 베트남, 쿠바, 베네수엘라 지역을 통치하고 있지만) 

하지만 집단주의 ‘속(genus) – 공산주의, 파시즘, 나치즘은 단지 집단주의 ‘속’에 속한 ‘종(species)들에 불과하였다 – 은 살아남아 어쩌면 다시 한 번 창궐할지도 모른다.

자유, 폭압, 그리고 전후 간섭주의 국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합중국과 소련의 대립은 자유사회와 전체주의 사회를 명백히 구분짓는 특질들을 드러냈다. 이같은 대조는 특히 1961년 베를린 장벽이 건설된 후 서독과 동독에서 뚜렷하게 나타났다. (필자의 이전 글을 참조: “The Berlin Wall and the Spirit of Freedom”)

서독인들은 나치정권에 적극적/수동적으로 굴종한 결과 경험했던 사회가 붕괴된 이후, 활기찬 시장경제에 기초한 물질적/문화적 회복과 널리 존중받는 시민적 자유를 누렸다. 

베를린 장벽 반대편 동독에서는, 사람들이 전쟁의 잔재 속에서 스탈린과 모스크바 내 추종자들이 움켜쥔 비밀경찰조직을 대동한 너저분하고 불투명한 독재정권 아래 살고 있었다.

어느 누가 베를린 장벽 양쪽 세계의 극명한 대비를 부정할 수 있을까? 그 장벽이 사람들을 공산주의의 인질로 잡고 외부에 존재하는 자유의 이상과 희망을 차단하기 위해 세워진 것인데도.

그런데 서구에서도, 1945년 이후 냉전체제 수십년 간 ‘시장지향형’을 추구한 국가들의 경제체제조차 실은 고전적 자유주의 전통의 관점에서 진정한 자유시장은 아니었다. 각종 정부규제간섭과 소득/부의 재분배를 위한 복지국가주의에 꽁꽁묶인 채 훼방을 받고 있었다는 말이다.

아마 미국보다는 다수의 서유럽 국가들에서 간섭주의 복지국가의 성향이 보다 널리, 깊게 퍼져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들 모든 국가가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틀 안에서 관리, 간섭을 받는 일부 계획경제 사회였다.

소비에트 사회주의 내 범죄와 체제붕괴에 좌파들이 받은 충격

그래도 1989년의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의 소비에트 연방 해체는 수많은 서구세계 정치적 좌파들의 이상과 정념에 충격을 준 사건었다. 1917년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후 근 70년 간 사회주의자, 진보주의자, 그리고 현대 미국 “리버럴”들은 정부계획에 의한 “보다 나은 세계”에 대한 희망을 품은 채, 위대한 실험인 “현실에 구현된 사회주의”의 성공을 갈망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들 중 다수는 사실 20세기 중반의 수십년 동안 레닌과 스탈린이 통치하던 러시아의 변호인이자 대변인이었다. 공산국가의 공포정치, 폭압, 그리고 대중학살에 대한 보도와 목격담들은 반-사회주의 “빨갱이 사냥” 혹은 “새로운 러시아”에 반감을 품은 반대파의 거짓 선동으로 부정되거나 조롱을 받기 일쑤였다.

소비에트 모델에 대한 좌파들의 꿈이 완전히 산산조각 난 것은 1953년 스탈린의 사후에 드러난 그의 범죄행각들과, 1956년 헝가리에서 일어난 반-사회주의 봉기에 대한 무참한 진압, 그리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내 “온건” 사회주의 개혁을 짓밟으려는 무력침공이 폭로된 이후였다.

물질적 번영은 커녕 자유도 가져다 주지 못한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의 중앙계획 실패를 목도한 유럽의 민주적 사회주의자들과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은 가슴으로 열망했던 자본주의 종식이라는 이상을 포기하는 대신, 이를 계획경제라는 목표로 대체하였다. 1970년대에 그들의 2차 전선은 바로 “사회정의”를 확보하기 위한 과중한 규제와 재분배 제도 강화였다.

소비에트 연방 및 동구권의 공산주의 체제 종말과 중국 등지의 시장지향형 개혁조치들은 마치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 패권이 체현된 자본주의만이 유일한 대안처럼 보이게 했다.

정치적/문화적 진보좌파는 이전보다 더 깊숙하게 후퇴하여 속세와 격리된 고등교육제도 속으로 들어갔다. 지성의 상아탑에 또아리를 틀고, 자본주의는 악이고 공동체주의가 정의이며 “억압받는 자”, “착취당하는 자”들이 여전히 해방되어야 한다는 주문을 되뇌면서 자신들의 이상향에 새겨진 상처를 핥으며 삐죽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각종 대학의 수업을 거쳐가는 학생들에게 보다 나은 집단주의 사회에 대한 그들의 변치 않는 믿음을 전파함에 따라, 젊고 순진한 영혼들은 사회정의에 대한 “고양된 의식”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낡은 마르크스주의 포도주가 집단주의자들의 새 술병 – 인종/성별 - 속으로

하지만 21세기는 더이상 19세기 산업혁명 시대의 “악조건” 하에 있지도 않았고 1930년대 대공황기 “고난의 시기”도 아니었다.  특히 미국과 서유럽은 극빈층의 생활수준마저 이전 시대의 왕족들조차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된 고도의 “중산층” 사회가 되어 있었다.

인구 다수가 대체로 상당한, 적어도 괜찮은 수준의 급여를 받고, 새로운 기술들이 끊임없이 일상을 편리하게 만들어주면서 안락한 삶을 누렸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광범위한 영역에서 개인적/시민적 자유를 향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누가 자본주의의 불의로부터 해방되고자 했던 억압받는 자, 착취당하는 자, “소외계층”, 그리고 “신음하는 민중”이란 말인가? 이 대목에서 낡은 공산주의 테마의 새로운 변종이 등장한다.

지난 거의 200년간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은 인류 갈등의 핵심이 “사회적 계급”(계급투쟁)이라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대다수 사회성원들이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인식하고, 소득분위의 저층에 속한 사람들마저 중산층 – 심지어 어쩌면 부유층 – 이 되는 것만을 원한다면, “계급투쟁”의 구호를 어떻게 팔아먹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기존 사회주의 “계급투쟁노선”은 폐기되고 그 자리를 새로운 인종/성별 간 투쟁이 대체하게 되었다. 옛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프롤레타리아(무산노동자 계급)들이 사적소유권에 기반한 생산체제 (사유재산제) 의 “임금 노예”로써 얼마나 희생당하고 있는지도 모른채, 자본주의 하에서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착각하는 “허위의식” 때문에 자본가들에 의하여 착취당하는 현실을 깨닫지 못한다고 주장하곤 했다.

인종/성별에 기반한 새로운 “허위의식”

이 새로운 “허위의식”은 서구 사회에서 인종차별이 완전히 뿌리뽑힌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바보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므로) 과거에 비해 극적으로 줄어들었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을 ‘개인’으로 바라보고 대한다는 미국의 이상과 잘 부합하는 대다수 사람들의 태도와 행동도 포함해서.

그러나 사실은, 인종차별이 사회에 만연하여 “유색인종”을 단지 “피부색이 하얗다는” 이유만으로 “특권을 누리는” 자들의 이익을 위해 깔아뭉갠다는 주장이 시종일관 제기되었다.

같은 논리가 성별(gender)과 성적 지향성(sexual orientation)에도 적용되었다. 여성 근로자 수 및 여성의 고위직 (그에 상응하는 고임금을 받는) 진출 증가 현상이 “진짜로” 여성들을 유리천장 아래 두고 온갖 종류의 신체적/심리적 학대에 노출시키는 가부장적 태도의 맨얼굴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법률이 동성결혼과 동성애에 관대한 것이 사회 구석구석에 팽배한 동성혐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짓말을 양산했다는 것.

인류학자와 심리학자들은 마술의 힘이 객관적으로 그렇지 않은 것을 사람들이 믿게끔 만드는 것이라 말한다. 어떤 사람에게 주술사가 자신을 닮은 부두 인형을 바늘로 찌르면 고통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설득해 보라. 아마도 자기암시에 걸리면 마치 스스로 고통받는다고 느낄수도 있다. 1960년대 히피들이 말하던 것처럼, “전부 네 상상에 불과해 임마(It’s all in your head, man)”

뭇 사람들에게 그 모든 실망의 경험과 개인적 실패, 혹은 아주 작은 모욕(의도되었건 아니건 간에)이라는 것이, 모두가 구석구석에 스며들어 벗어날 수 없는 인종/성 차별, 혹은 성적 지향성에 대한 편견과 관행의 결과라고 믿게 만들면, 정말로 그중 일부는 자신들을 매일 모든 공간에서 백인, 남성, 이성애자들의 억압에 시달릴 수 밖에 없는 희생양이라고 인식해버리게 된다.

인종/성별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에 함몰된 “개인”들

게다가 이 새로운 집단주의 변종은 모든 사람의 정체성이 성별, 인종, 성 정체성(sexuality) 분류에 달려 있다고 주장한다. 이 세 요소들이 한 사람을 정의하고 누구인지 결정하며, 삶의 의미와 맥락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고서 자기 자신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단지 하나의 개인으로서 이해하는 사람에게 이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아니면 특정 인종, 성, 혹은 어떤 성 정체성이 출생과 환경의 우연적 소산임을 이해하고 스스로의 자아정체성과 삶의 목적에 그런 것들은 단지 부차적인 요소들일 뿐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그럴 경우 이는 교정되고 해방되어야 마땅한 “허위의식”에 불과할 뿐이다. 이들은 인류를 억압하는 백인, 남성, 이성애주의 압제자들의 이익에 봉사하기 위해 세뇌받고 조종당해 “진정한 자아”를 스스로 혐오하는 “적”이다.

거기에 “상호교차성(intersectionality)”이란 개념도 있다. 이는 아마 복잡다단한 온갖 종류의 성/인종 차별과 압제가 있다는 말 같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억압받거나 흑인이라서 차별당할 수 있다. 흑인 여성이라서 그럴 수도 있다. 혹은 신체적 장애로 인해 타인들로부터 “소외”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신체적 장애가 있는 흑인 여성이라면 억압받거나 차별당하거나 소외될 위험이 있다. 아니면 동성애자여서 조롱당하고 놀림거리가 될 수도 있다. 그런고로 신체 장애가 있는 흑인 여성 동성애자라면 이 모든 학대와 공격의 희생자가 되는 것이다.

이같은 “상호교차” 하나하나는 각기 고유한 정의와 경험, 억압, 차별, 학대, 그리고 “소외”의 범주(category)를 내포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신체 장애를 가진 흑인 여성 동성애자(혹은 이성애자)라면, 다른 상호교차 부류에 속하는 사람들, 심지어 학대당한 “흑인 여성들”마저 그 사람이 겪었던 고난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당연히, 백인 여성은 그 사람의 고통을 일부분만 이해할 수 있을 뿐인데,  왜냐면 여성이긴 하지만, 백인 여성은 유색인종이 아니므로 일정한 “특권”을 누리기 때문이다.

이토록 많은 학대, 압제, 차별의 조합들을 파악하려면 자세하고 복잡한 무슨 점수표 같은 것이 필요하다! 더구나 백인특권의 종류와 형태를 파악해내는 일도 어떤 사람이 백인으로써 부지불식간에 누려왔던 불공정한 기회와 이득을 기록한 점수표 같은 것이 없이는 쉽지 않다.

흑인 여성 동성애자라면 5점. 신체 장애가 있고 동성애자이지만 백인 여성이라면 3점. 말을 좀 더듬긴 해도 백인 이성애자라면 언어장애 부문에서는 1점을 받겠지만 그 이외에는 전적으로 백인특권을 가졌으므로 -9점을 받게 될 것이다. 잡다한 “상호교차성” 가능성과 계산을 따지다 보면 현기증이 온다.

“상호교차성” 논의의 맥락에서, 집단주의적 그룹과 “권리”에 초점을 집중하는 것은 사회적 분석에 있어 개인이라는 “그룹”에 대한 시선, 관심, 그리고 상대적 중요성을 함몰시킨다. 이는 한 개인이 타인과 자신의 타인에 대한 행동의 본질과 의미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방식과, 스스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분류하는지를 무시하거나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여기게끔 한다. 사회적 환경 속에서 선택하고 행동할 때 무엇이 중요하고 적절하며 의미가 있는지에 대한 판단도 마찬가지다.

정체성을 강요하는 담론 검열

과거에 공산주의자들이 인종, 언어, 국적을 불문하고 자본가들의 사슬을 끊어버리기 위해 만국의 노동자들에게 일치단결을 부르짖었던 것처럼, 새로운 인종/성별 집단주의자들은 일체의 백인/남성 “특권”의 희생자들에게 저항/해방군으로써 뭉쳐 일어나라고 주창하고 있다.

단 하나의 억압받거나 소외된 그룹에 대한 공격이라 할지라도 곧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공격당한 그룹의 구성원이 다른 그룹 사람들을 전혀 모르더라도 그렇다. 이것이 바로 보다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개념의 “압제”에 대한 모든 하부조직들의 경험과 감정에 “개인적 판단을 금지”하고 “공감”할 것을 요구하는 이유다.  각 하부조직들은 각기 입맛대로 이러한 “판단”과 “감정”을 규정한다.

공산주의 국가들은 “사회주의 낙원”에 허락되지 않은 모든 서구 사상의 유입을 차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자본가들의 선동선전이 “사회적 생명”의 우월성을 (재)교육받은 소비에트 인민들의 정신을 타락시키는 것을 막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인종/성별 집단주의자들이 만든 새로운 버전은 바로 모든 “악의적이고” “공격적이며” “파시스트적인” 사상들이 공공장소에서 들리지 않게끔 검열되고 억제되어야 한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금지된 표현과 사상을 발설하는 자는 신체적으로 처벌받거나 축출될 수도 있다. 자, 가장 최신 버전의 이념 깡패단에 온 걸 환영한다. (필자의 이전 글을 참조: “Campus Collectivism and the Counter-Revolution Against Liberty” 과 “Tyrants of the Mind and the New Collectivism”)

집단주의 목적달성을 위한 용어혼란전술

게다가 진보주의자들과 인종/성별 집단주의자들은 어휘의 의미와 용례 조작, 그리고 다른 개념들을 동의어처럼 보이게 하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차별”은 “압제”의 동의어로 변질되었다.

“차별(discrimination)”은 “어떤 것과 비교되어”(distinguish between) 특정 그룹이나 사물의 집합을 선호하는 것, 그 가치를 높게 평가하는 것, 혹은 그에 대하여 다르게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나는 로맨스 소설을 전혀 구매하지 않음으로써 로맨스 소설가들을 “차별”할 수 있고, 따라서 로맨스 소설가들의 소득은 내가 로맨스 소설을 구매했을 경우 벌었을 돈 만큼 줄어든 것이다. 또 나는 일부러 나치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을 교우 관계에서 배제함으로써 그들을 “차별”할 수 있는데, 이는 내가 그들이 나와의 관계에서 원했을지도 모르는 이득을 “제한”한 것이다. (필자의 다른 글을 참조: “Discrimination in Indiana: Private or Political?”)

한편 “압제”(억압, oppression)는, 보통 어떤 특성들로 분류되는 개인이나 개인들의 집단에 대한 폭력이나 법적 금지조항의 사용 혹은 그러한 위협을 의미한다. 노예제도와 인종차별법은 압제였다. 상호 동의하의 동성 간 성관계를 처벌하는 법도 압제였다. 압제의 종식은 타인에 대한 사적 무력사용 혹은 위협의 금지, 그리고 어떤 집단적 특성들로 규정되는 개인들이 평화적으로 타인들과의 자발적인 협조를 통해 각자의 목적을 추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과 법적 제한의 철폐를 수반한다. 

“압제”의 종식은 교육과 법적 행위(즉 제한적, 금지적 법률의 철폐)가 필요하다. “차별”의 종식은 개인들의 선택과 행동에 적용되는 기준들이 온당치 않고 잘못된 것이라는 교육과 논리, 설득이 필요하다.

“차별금지법”은 단지 사람들을 다른 방향으로 강제할 뿐이다. 타인에 대한 특정 행동양식을 금지하거나 강제함으로써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스스로의 평화적인 선택과 행동을 제한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내가 굳이 내키지 않는 사람과 어울리도록 강제하는 것은, 내가 개인적, 상호적 이해를 위해 어울리고 싶은 사람들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압제적이다.(필자의 이전 글을 참조: “The Case for Liberty; Through Thick and Thin”)

미국 개인주의 뿌리의 회복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이는 우리가 개인의 권리와 자유라는 미국의 건국사상으로부터 꽤 먼 길을 떠나왔기 때문이다. 개인들이 스스로를 인식하고, 삶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다양한 목적을 위해 타인들과 관계를 맺으며 어울리는 방식을 포함해 각자 다르게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사회로부터. 우리가 “사회”라 부르는 모든 것들의 기초는 여전히 사유하고 선택하며 깨어있는 “개인”이다.

우리는 발걸음을 되돌려 철학적, 사회적, 정치적 개인주의의 뿌리로 돌아가야만 한다. 또한 왜 개인이 중요한지, 그리고 어떠한 집단적 동일시/일체감(associative identifications)도 반드시 개인 스스로의 숙고와 판단으로부터 발원해야만 하는가에 대한 이해와 성찰을 회복해야 한다. 

개인을 자신이 결정하지도 않은 범주와 분류에 옭아매려는, 그리고 개인을 옥죄고 도덕적으로 규탄하는 와중에 그야말로 억압하려는 집단주의자들에 의해 집단적 동일시/일체감이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또다시 인류사의 어두운 질곡으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 (현) 더 시타델 윤리/자유기업리더십 BB&T 특임교수
- (전)
o (2009 – 2014) 노스우드 대학 경제학 교수
o (2003 – 2008) FEE대표
o (1988 – 2003) 힐스데일 칼리지 경제학 교수 (Ludwig von Mises Professor of Economics)
o (1984 – 1988) 댈러스 대학 경제학 조교수
o (2008 – 2009) 미국 경제연구소 연구위원
o (1990 – 2003) 자유의 미래 재단 부대표

- 저서
o Monetary Central Planning and the State
o Political Economy, Public Policy, and Monetary Economics: Ludwig von Mises and the Austrian Tradition
o Austrian Economics and the Political Economy of Free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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