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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⑧] 역외로 진출한 조선의 매춘업… '위안소도 직접 경영했다'

“군을 뒤따라 혹은 군보다 빨리 진출하여 위안소를 개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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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훈 이승만학당 교장(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조선의 매춘업은 일찍부터 만주, 중국 관내, 대만, 나아가 일본으로 진출했다“(조선의) 가난한 아버지가 인신매매 업자로부터 전대금(轉貸金)을 받고 딸의 공창 취업을 승낙하는 (형태의) 인신매매는 조선 매춘업의 역외 진출 과정이라고 역설했다.

 

그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 8회차 동영상 강의 '매춘업의 역외진출'(417)에서 조선의 매춘업이 1916년 조선총독부의 공창제 시행 이후, 근방의 나라로 진출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이같이 말했다.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 100만명 넘어매춘업 종사 여성 10명 중 1명은 조선인

 

먼저 이영훈 교장은 일제시대에 만주로 진출한 조선인 매춘업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우선 당시 만주로 건너갔던 조선인들의 숫자부터 파악했다. 이 교장에 따르면 1910년대 초중반에는 연간 평균 1만여명, 1910년대 후반에는 6만명을 전후한 조선인들이 만주로 건너갔다.

 

특히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조선총독부가 조선인들의 만주 이민을 장려하면서, 이민자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1931년부터 1937년까지는 약 30만명이 만주로 이주했다. 또한 중일전쟁이 본격화된 1938년부터는 일본이 조선인들의 이민을 적극 유치하면서, 1938~1940년엔 36만명 이상이 만주로 건너갔다. 이를 종합하면 1911~1940년 만주로 건너간 조선인은 102만명으로 추산된다.

 

이영훈 교장은 “1931년이후 만주사변과 더불어 조선인 사회가 만주에서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만주에서 100만명 이상의 조선인 사회가 형성됨과 더불어 조선인의 매춘업도 발생했다고 설명했다.

 

이 교장은 만주로 진출한 조선인 매춘업의 규모가 어느정도였는지도 분석했다. 그에 따르면 1940년을 기준으로 만주국에는 매춘업소가 총 6716곳이었다. 이중 조선인 업소는 599(요리점:488, 요정:0, 카페:111)이었다. 중국인 업소는 4569(요리점:4470, 요정:3, 까페:96), 일본인 업소는 1522(요리점:749, 요정:132, 카페:641)이었다.


같은해(1940) 만주국에서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총 38607(예기 5556, 작부 25259, 여급 7459, 댄서 323)이었다. 이들 중 11.6%(4476)는 조선인이었다(예기 126, 작부 3586, 여급 736, 댄서 28). 중국인은 255(예기 662, 작부 19059, 여급 331, 댄서 3), 일본인은 13649(예기 4778, 작부 2264, 여급 6336, 댄서 271)이었다.

 

이 교장은 그는 만주에서 시행된 공창제는 성매매를 전업으로하는 창기 대신, 요리점의 작부들이 사실상 창기의 역할을 대체했다고 설명하면서 만주에서 조선인이 영위한 사업은 농업, 무역, 일반 상업, 음식점, 요리점, 여관, 전당포 등 여러 가지였는데, 그 중 가장 번창해서 조선인 사회의 경제를 지배한 것은 작부를 둔 요리점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요리점이 번성했던 이유에 대해 대부분 다른 영업은 조선인 사회를 시장으로 한 것에 비해조선인의 요리점즉 매춘은 영업전략(소비층)이 초민족적이었기 때문이라며 “(조선의 요리점들은하층 일본인을 주요 고객의 타켓으로 삼았다조선인 매춘부는 화대가 쌌고 일본어가 가능했기에 하층 일본인을 고객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이라고 피력했다.

 

이어 만주에 진출한 조선인 매춘업은 만주 매춘시장 전체에서 제 2급의 시장이었다며 최상급 시장은 일본인 사회를 무대로 한 일본인 매춘업그 다음이 조선인과 하층 일본인을 고객으로 한 조선인 매춘업그 다음이 중국인 매춘업이었다고 부연했다.

 

이영훈 교장은 당시 만주로 진출한 조선인 매춘업의 실태를 묘사하는 춘원 이광수의 발언도 소개했다.


도회지에 있는 사람들의 생업은 대부분이 인육시장과 밀수업자이고... 참 나는 이번 걸음에서 조선인의 인육시장에 참으로 놀랐습니다봉천길림하얼빈신경 등 곳곳에 조선인 요리업자가 없는 곳이 없어요요리업을 개시만 한다면 성공한다니까그것은 중국 여자는 더럽고그래서 모두 조선여자를 환영한다는데 그런 까닭에 어떤 여자는 하루 서른 다섯 명의 남자를 접하였다고 합니다그러니 돈을 남()지 않겠습니까봉천서는 인육장사를 하여 이십만원 돈을 모은 부자도 있고 다른 곳에서도 수삼만원십 여만윈씩 모은 성공자들이 있다고 해요” 

-이광수, 1933년 재만동포문제좌담회(在滿同胞問題座談會)에서의 발언-


대만으로 건너간 조선인 여성의 90%가 매춘업 종사

 

이어 이영훈 교장은 대만으로 진출한 조선 매춘업을 살폈다. 대만총독부의 국세 조사에 의하면 대만에 체류한 조선인 여성은 1920‘1에서, 1930‘458으로 증가했다. 이들의 90% 이상은 매춘업에 종사했다는게 이 교장의 설명이다.

 

그는 “1921년 대만에서 주요 금광지대가 활발하게 개발되면서 조선루(朝鮮樓, 조선인 매춘업)가 출연했다“1930년대에는 대만 각지에서 조선루가 우후죽순 생겼다고 강조했다. 이어 “1935년에는 창기와 작부가 각각 200, 카페에 종사하는 여급이 400, 800명이었고, 1941년에는 (조선인 매춘녀가) 940명에 달했다“1941년 만주에서는 창기가 없었던데에 비해, 대만에선 조선인 창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4분의 1정도였다고 부연했다.

 

대만에서 조선인 매춘업이 성행한 이유에 대해선 “1930년대에 들어 일본에서 공창제 폐지 운동이 일어나면서, 일본인 창기의 물결이 억제되기 시작하자 틈새 시장이 발생했다그 틈새를 메운 것이 바로 조선의 창기들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조선에서는 공창제 폐지 운동이 없지는 않았지만 세력이 크지 않았고, 또 국제적 비판의 대상이 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공창제 폐지 운동의 국제적 사각지대였다고도 덧붙였다.

 

당시 대만에서 일하던 창기들 역시 일본인들을 상대로 영업을 펼쳤던 것으로 보인다. 이 교장은 조선루 업자들은 처음엔 대만인과 일본인을 상대로 아리랑을 부르는 등 이국적 풍정을 호소하는 영업 전략을 취했는데, 점차 일본풍으로 돌아서기 시작했다일본인이 주요 고객이었기 때문에 작부들은 기모노를 입고, 일본어를 하고, 일본 노래를 불렀다고 말했다. 게다가 “1927년의 경우 조선루를 찾은 유객의 7분의 6은 일본인이었다일본인들은 말도 통하고 일본옷도 입고 노래하는 조선루를 더 선호했다고 강조했다.



일본군 따라 중국 관내에 자리잡은 조선인 매춘업위안소도 직접 경영

 

이영훈 교장은 다음으로 중국 관내에 진출한 조선의 매춘업을 파헤쳤다. 그에 따르면 중국 관내에서 조선인 매춘업이 번창하기 시작한 것은 1931년부터다. 이때부터 일본군이 중국 곳곳을 점령하기 시작하면서 일본군의 뒤를 따라 조선인 매춘녀들도 진입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는 “1931년 일본군의 뒤를 따라 중국 상해에 들어간 조선인 여인은 139명이었는데, 이 여인들의 수는 1936년까지 913명으로 증가했다그들의 90% 이상은 매춘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상해에서 매춘업이 번성한 것은 일본군의 상해 점령 이후 일본군 부대 주변에서 군인을 주요 고객으로 하는 매춘 시장이 열렸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이후 1937, 일본군이 중국 깊숙이 진격하면서 매춘시장이 열리자 많은 조선인들은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 중국 관내로 진출했다. 이 교장은 이를 뒷받침하는 한 가지 사료를 제시했다.

 

조선인의 직업은 관공리, 회사영업원, 점원 등 봉급 생활자가 가장 많고, 노태(蘆台)모범농촌의 농민이 다음이고, 군 위안소, 사진관, 양복점, 잡화상, 곡물판매업, 토목건축정부업 등이 주를 이룬다. 일본인에 비해 훨씬 적은 자본으로 상당한 업적을 이루며, 특히 득의의 어학과 강인한 생활력으로써 군의 진격과 더불어 군을 뒤따라 혹은 군보다 빨리 진출하여 군대가 필요로 하는 잡화를 운반하고, 혹 특수부녀자(特殊婦女子)의 일단을 이끌고 군의 위안소를 개업하고, 혹은 시계점, 사진점으로 군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등, 치안이 불안정한 지방에서 거대한 이익을 노리고 전선으로 진출한다. -1941년 조선총독부북경출장소 재북지조선인개황(在北支朝鮮槪況)’-

 

그는 이 사료에 대해 영민하고 활발하게 일본군의 뒤를 따라서 중국으로 진출하는 조선인의 모습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조선인들은) 군이 진출하면 그 뒤를 따라서, 또는 군보다 더 빨리 앞서가서 위안소, 시계점, 사진점, 음식점을 개설했다고 말했다.

 

이 교장은 이어 1941년 화북 지역 일대에 정착한 조선인들의 직업 현황을 살폈다.

 

이 교장이 정리한 자료에 따르면, 화북 지역으로 건너간 조선인(52072)40% 가량(21000)은 무직이었다. 이들은 아편장사에 종사하거나 국제 건달로 활동했다는 게 이 교장의 분석이다. 뒤를 잇는 직업은 농업(4613), 식료품잡화상(3080), 은행원(1730), 점원(2196), 요리옥(1573)이었다.

 

눈 여겨봐야 할 것은 매춘업 종사자들의 숫자다. 당시 매춘업 관련 종사자들은 총 2944(요리옥 1573, 군위안소 38, 카페 41, 창기 219, 작부 513, 예기 373, 여급 187)으로 전체 조선인(52072)의 약 5.6%를 차지했다. 이중에는 요리옥을 직접 경영한 조선인(224), 군 위안소를 경영한 조선인(11)도 존재했다.

 



일본에서도 조선인 매춘업 번성

 

뒤이어 이 교장은 일본으로 진출한 조선인 매춘업도 조명했다. 그는 “1930년대에 (일본의) 주요 도시주변에서는 조선인 사회가 형성됐다그러한 조선인 사회를 무대로 매춘업이 성장하는데, 1935년 일본에 거주한 조선인 성매매 종사자 여성의 수는 1735명이나 된다고 말했다.

 

이어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에서는 조선인 사회가 크게 팽창했다면서 조선인 남성들이 모집, 관알선, 징용의 형태로 일본의 주요 공업도시나 탄광으로 들어가면서 조선인 매춘업도 번성했다고 덧붙였다.





다음기사 : [이승만TV 위안부의 진실⑨] "위안부 숫자 턱없이 과장… 3,500명 가량이 합리적 수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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