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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번역] ‘쇼와 천황 전쟁 책임론(昭和天皇の戦争責任論)’

한일 상호 이해를 위한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 번역 프로젝트 (11)



※ 본 콘텐츠는 ‘위키피디아 일본어판(ウィキペディア 日本語版)’에 게재된, ‘쇼와 천황 전쟁 책임론(昭和天皇の戦争責任論)’ 항목을 번역한 것이다(기준일자 2019년 12월 26일판, 번역 : 황철수).

본 항목을 포함하여 ‘난징사건( 南京事件)’ 항목 등 일본의 전쟁 책임 문제와 관련 일본 위키 항목들은 내용이 빈번히 변경되거나 출처, 중립적 관점, 정확성 등과 관련 일부 논란도 있는 만큼 독해에 주의를 요한다. 

한편, 일본 위키백과 전문 블로그인 karankoron 에도 일본의 전쟁 책임과 관련한 항목들이 다수 번역돼 있다. 내용이 본 항목보다 훨씬 상세한 만큼 관련 사안 이해에 참고하길 바란다.




 
‘쇼와 천황 전쟁 책임론(昭和天皇の戦争責任論)’이란, 1931년(쇼와 6년) 9월 18일 만주사변 발발부터 1945년(쇼와 20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 수탁(受託)에 의한 일본의 항복까지 ‘14년 전쟁’(만주 사변 · 지나사변/일중전쟁 ·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에 대한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에 대한 논의이다.

이에는 패전 후 연합군 점령 하에서 연합국에 의한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 재판)에서의 대외적 책임에 대한 소추 문제와, 일본의 국내에서의 패전 책임, 전쟁에 의한 희생에 대한 책임의 논의 등이 있다.

그 책임 여부를 둘러싸고 긍정론, 부정론이 있다.




목차


1 개요


2 책임의 종류

   2.1 긍정론

   2.2 부정론

   2.3 부정론에 대한 긍정론의 반론


3 전쟁 책임을 긍정하는 입장의 주장


4 전쟁 책임을 부정하는 입장의 주장


5 전쟁 재판에서의 천황의 면죄


6 터부화

   6.1 ‘나가사키 시장에게 보낸 7300 통의 편지’


7 국내와 외국에서의 반응


8 참고문헌


9 관련문헌




1 개요(概要)

종전 직후에 도쿄대학 교수인 난바라 시게루(南原繁)는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론에 대해 구체적으로 법률적, 정치적, 윤리적인 범주를 구분해서 발언했다. 국제일본문화연구센터(国際日本文化研究センター) 소장인 야마오리 테쓰오(山折哲雄)에 따르면, 전쟁 직후에는 천황의 전쟁 책임이 거론되고 또 퇴위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었다.

21세기에 들어서 니혼(日本)대학 교수인 하타 이쿠히코(秦郁彦)는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론에는 법률적, 정치적, 도덕적, 형이상학적 구분이 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도쿄 재판에서는 쇼와 천황이 대일본제국 헌법에서 대일본제국 육군과 대일본제국 해군의 통수권을 소지할 수 있는 국가 원수 및 대일본 제국 육해군 최고지휘관(대원수. 군의 계급으로서는 육해군 대장)이었기 때문에, 이로써 침략 전쟁을 지도한 국제법 위반을 쇼와 천황이 저질렀다고 하는 법적 책임이 있다고 하였으므로 소추 대상이 될 수도 있었다.

한편, 입헌군주제 하에서의 일본 국민에 대한 정치적, 도덕적 책임, 즉 국민 국가에 대한 막대한 인적·물적 손해와 영토 실지(失地) 등의 패전 책임을 어떻든 져야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논의가 있었다. 후자에 대해서는 하타 이쿠히코에 따르면, 쇼와 천황은 퇴위할 의사가 있었지만, 이것이 실현되지는 않았다.
 
그 후, 동맹국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 패전 후 독일혁명(제정붕괴)과 달리, 점령 정책을 원활히 하기 위한 GHQ(SCAP,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의도도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패전국임에도 황실 제도(천황제)는 유지되었다. 

쇼와 천황은 1947년(쇼와 22년) 5월 3일, 일본제국 헌법 개정에 의한 일본국 헌법 시행에 따라서 이른바 ‘상징 천황(일본국 헌법 제1조)’이 되었고, 1989년(쇼와 64년) 1월 7일에 사망할 때까지 제124대 천황으로 계속 재위했다.


2 책임의 종류(責任の種類)

2.1 긍정론(肯定論)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측이 주장하는 설에 따르면, “전쟁으로 불행을 겪게 된 피해자 전반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하는 입장이 있다. 이 피해자에는, 일본의 민간인 피해자뿐만이 아니라 군인, 병사 피해자, 그리고 일본이 진출한 중국(전후 중화인민공화국) 및 기타 아시아 국가의 군인과 민간인 피해자, 일본의 잔학한 취급으로 희생된 미군 등 구미 제국의 군대의 전쟁 포로를 포함한 연합군의 군인 등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에 대해서 천황이 책임을 져야한다는 입장이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미국 등 구미 열강의 피해자에 대한 책임은 무시하고, 아시아쪽의 대일본제국 피해자에 대한 책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이, 정서적이지만, 비교적 다수의 국민에게 공유되고 있다는 입장이 있다.

또, 비슷한 의견으로 전쟁 시 적국의 피해자는 완전히 제외했지만, 결과적으로 일본이 전쟁에 패하면서, 또 일본의 군인과 민간인에게 많은 희생자를 낸 것에 대한 책임만을 한정하여 인정하려는 입장도 있다. 이러한 생각은, 도쿄 재판에서 심판을 받았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 태평양 전쟁 개전시 총리)의 진술 등에서 볼 수도 있으며, 지금도 많은 일본인의 공감을 얻고 있다는 입장이 있다. 단, 도쿄 재판의 피고인으로 유명한 도조 히데키는 연합국 측에 준 피해를 무시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다. 또한, 도조 히데키는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2.2 부정론(否定論)

쇼와 천황 전쟁 책임 추궁에 부정적인 측이 주장하는 설에 따르면, “쇼와 천황은 입헌 군주로서 ‘군림하지만, 통치하지 않는다(君臨すれども統治せず)’를 관철해왔으며, 전쟁 책임은 쇼와 천황에 대하여 ‘호히쓰(輔弼, 천황의 행위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 혹은 이루어지면 안되는 것에 대해 진언하는 것)’, 또는 ‘이아크 죠소(帷幄上奏, 군부가 군사에 관한 사항을 천황에 말씀 드리는 것)’를 했던 정치가, 군인들에게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 쇼와 천황 전쟁 책임 추궁에 부정적이면서 동시에 정치가, 군인들의 전쟁 책임까지도 부정하는 측이 주장하는 설에서는 “쇼와 시대의 전쟁은 일본이 독립국가로서 존속하기 위한 자위 전쟁, 또는 서양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주의와 싸우고 가혹한 지배하에 있던 아시아 식민지를 구미 열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었다”면서, “전쟁은 천황이 아시아 국가의 침략을 목적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2.3 부정론에 대한 긍정론의 반론(否定論に対する肯定論の反論)

이에 대해,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측은, 전후 국제적인 냉전 체제에 의해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자유주의 진영의 서방 제국이 일본의 공산화를 저지하기 위해서 침략 전쟁에 가담한 일본 지도층에 전쟁 책임을 추궁하지 않고 정재계에 복귀시킨 역 과정을 통해 천황에 대한 전쟁 책임 추궁이 지금도 막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측은 1990년대 무렵에 현저해진 ‘자유주의 사관(自由主義史観)’ 등의 논의와 운동이 이 흐름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 편집자주 :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자유주의 사관’은 일본의 교육학자인 후지오카 노부카츠(藤岡信勝)가 주창한 역사관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들어 알고 있는 정치사상으로서의 자유주의나 리버럴과는 무관하다. 후지오카 노부카츠에 따르면, 여기에서 자유란 좌익적 사관, 또 자학 사관이 지배적이었던 일본의 전후 역사학이나 전후 교육학에서의 자유’를 뜻한다.  일본 좌익에서는 이를 역사수정주의’라고 칭하고 있으며 한국 언론들도 일반적으로 이렇게 칭하고 있다.]


3 전쟁 책임을 긍정하는 입장의 주장(戦争責任を肯定する立場の主張)

전쟁 당시 일본에서는 먼저 일본의 국가주권이 천황에 귀속되고, 일본 국내에서는 물론, 외국에서도 천황은 일본의 원수이며 최고 권력자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전쟁을 비롯한 모든 정치적 결정이 천황의 이름 하에서 수행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고 하는 입장이 있다.

극동국제군사법정(도쿄 재판)에서 천황은 기소되지 않았다. 하지만, 재판장인 윌리엄 웹(ウィリアム・ウェブ, William Flood Webb)은, 개인적 의견으로서 천황의 전쟁 책임 문제를 언급했다.

1, 천황의 권위는, 천황이 전쟁을 종결하였다는 점에서, 의문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증명되었다. (이하 생략)

1, 천황에 대하여 재판이 면제된 것은, 국제군사법정이 형을 선고함에 있어, 당연히 고려해야 할 것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1, 천황은 항상 주위의 진언에 따라 행동해야 했다는 의견은, 증거에 반하거나, 또 만일 그렇다고 해도 천황의 책임이 경감되는 것은 아니다.

1, 나는 천황이 처형되어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이것은 내 관할 이외의 문제이고, 천황이 재판을 면한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모든 연합국의 최선의 이익에 따라 결정된 것이다.


윌리엄 웹은 이렇게 말하고서,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지만, 정치적 배려에 의해 기소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또, 천황 자신도 전쟁 책임을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각종 증언과 수기에서 확인되고 있다. 가령, 포츠담 선언 수락시의 1조건(국체수호)을 둘러싼 답변이나, 전후에 퇴위를 원하는 뜻을 나타낸 것 등이다.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목소리는 패전 직후부터 이미 느슨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문학평론가인 미요시 다쓰지(三好達治)는 인간선언을 한 천황에 대해 “신이 아닌 폐하는, 사람의 아들로서 세상의 도리에 따르는 것이 좋다”면서, 인간으로서의 책임을 물었다. 미국에서 귀국한 사회운동가이자 정치학자인 오야마 이쿠오(大山郁夫)도 천황의 퇴위를 논했다.

1948년 ‘주오고론(中央公論)’ 쇼와 23년 7월호에서 오야마 이쿠오가 기고한 ‘전쟁 책임과 천황의 퇴위(戦争責任と天皇の退位)’는, “그것(=전쟁에 대한 천황의 책임)은 단순히 개인 도덕적 책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정치 도덕적 책임도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히고 있다.

일본근대사 전문가인 메이지(明治)대학 교수 야마다 아키라(山田朗)는 “전쟁 지도자의 책임을 추궁하는 시기와 체험으로서의 전쟁을 말하는 시기를 거쳐, 침략성에 대한 고발을 동반하는 가해성 관련 책임이 추궁되기 시작했지만, 이 시대에는 아직 천황의 책임은 추궁되지 않았고, 천황의 책임을 추궁한 것은 이노우에 기요시(井上清)의 ‘천황의 전쟁 책임(天皇の戦争責任)’이 최초였다”고 썼다.

이노우에 기요시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 쇼와 천황은 제국 헌법 제1조, 제3조, 제4조에서, 통치자, 신성(神聖), 원수로 규정되어 있으며, 대일본제국의 유일한 최고 통치자였다. 만약 히로히토 개인이 전쟁을 원하지 않았고, 신하에 의해서 전쟁이 벌어졌다고 해도, “결국은 천황이 직접 전쟁을 결의하는 것 외에는 전쟁을 할 수가 없다.

- “천황은 일본 군대 유일 절대의 통수권자였다” 천황은 헌법 제11조 및 ‘쵸쿠유(勅諭, 메이지 헌법 하에서 천황이 직접 내린 말씀)’에 의해서 군 통수권자인 동시에 충군(忠君)의 도덕이 강조되었고, 상관의 명령은 곧 천황의 명령으로서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정당화되었다. 참모본부 등은 천황만의 명령을 받는 기관이며, 규정, 명령 등은 모두 천황에게 보고되었고, 재가를 받아 천황의 명령으로 전달・실시되었다. 통수권자인 천황이 명령 지휘하지 않는 전쟁은 없었고, 이것만으로도 “그 책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 또한 천황은 헌법 제1조 및 제3조에 규정된 신적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1868년(양력의 메이지 원년) 천황이 통치자가 된 때부터, 정부는 “천황은 신의 자손이며, 정당한 통치자이고, 일본 국민은 천황을 무한으로 존숭하고, 반드시 따라야 한다는 사상・신앙을 헌법과 교육 칙어(教育勅語)로 경유(経由)하고, 3대(메이지 천황, 다이쇼 천황, 쇼와 천황) 동안 이를 국민들에게 심어놓았다. 이렇게 ”천황의 권위가 일본 국민을 그 전쟁으로 몰고 갔던 것“이다. 1931년부터 1945년까지의 전쟁은 ‘범죄적 침략전쟁’이며, 천황은 책임을 져야한다.


쇼와 천황이 사망한 1989년 1월 7일, 일본공산당이 “천황 히로히토는 침략 전쟁의 최대 및 최고 책임자”라고 하는 중앙위원회 성명을 발표했다.

2005년 5월 8일에 간 나오토(菅直人, 당시 민주당 전 대표, 후에 총리 역임)는 출연한 TV 프로그램에서 “천황은 ‘천황기관설(天皇機関説, 주권은 법인인 국가에 있으며, 천황은 그러한 국가의 최고 기관으로서 다른 기관의 도움을 얻어 통치권을 행사한다는 논리)’ 차원에서 움직였기 때문에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상징적인 측면에서 전쟁 책임이 있고, 퇴위함으로써 전쟁 책임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보다 구체적으로 쇼와 천황의 구체적인 의식과 판단을 포함하여 책임을 추궁하는 목소리도 있다. 쇼와 20년 (1945년) 2월 14일에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종전 후 전범 지명에 의해 자살) 전 총리는 패전을 확신하고 천황에 ‘죠소분(上奏文, 천황에 의견이나 사정 등을 말씀 드리는 문서)’을 내고, 패배에 의한 조기 종결을 결단하도록 요구했지만, 천황은 “다시 적과 대응하고, 일본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고 난 후에”라는 것이 좋다고 판단해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이것은, 최소한 어느 국면에서는 천황이 능동적 판단으로서 전쟁의 계속을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고, 또 이때의 판단에 따라서는 그 이후 적과 아군의 손해는 없었을 가능성도 드러낸다. 즉, 이때 천황이 종전을 수용했다면 적어도 오키나와 전쟁과 히로시마·나가사키의 피폭은 없었을 것, 이라는 것이다. 

외교평론가 가세 히데아키(加瀬英明)도 종전시의 쇼와 천황의 태도에 대해 “결국 천황 이하, 당시 지도자들은 국민에 대한 책임감이 전혀 없었다. 이 무책임한, 인간으로서의 마음을 잃은 모습이, 전후 일본 오류의 최초였다고 생각한다. 괴로운 상황을 맞이해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타인에 책임을 전가하며, 자신의 생존을 우선한다. 폐를 끼친 사람들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이 무책임 체제가 오늘날의 일본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라고 말했다.


4 전쟁 책임을 부정하는 입장의 주장(戦争責任を否定する立場の主張)

대일본제국 헌법에서는, 천황에게는 거부권만이 존재하고, 실제 의사결정 및 정책 입안은 내각(내각 관제 하)과 제국의회(일본국헌법 하의 국회)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하는 의견이 있다.

단, 천황을 신격화하고 교육·관습에까지 침투시켜, 천황을 ‘아라히토가미(現人神,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로 두고, ‘고신엔이(ご真影, 천황의 초상 사진이나 초상화를 받들어 부르는 말)’를 꾸미고, 또 ‘가미카제(神風, 신의 위력에 의해 부는 강한 바람을 의미한다)’까지 만들어 신국 불패라는 거짓의식을 제국 군인들에게 의식화시켰던데 대해서 (적어도) 정부의 책임은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또 당시 일본제국헌법에서는 “천황의 정치적 무답책(無答責)이 규정되어 있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군주 무답책’의 규정에 의한 전쟁 책임에서의 도피를 주장한다고 하더라도, 일찍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비록 퇴위 이후지만 ‘전 황제’로서 전쟁 책임을 추궁 당했던 적이 있기도 하여서, 국제법상 소추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 도쿄 재판에서도 '군주 무답책'론이 공식적으로 활용된 일은 없었다.
 
또한 상기에 열거한 전쟁 책임에 대해 “일본은 전쟁에 대해 책임져야할 사실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천황의 전쟁 책임을 묻는 것은 설문으로서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또 “국가에 대한 손실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당시 일본의 주권자는 천황이며 그렇다면 그 최대 피해자는 천황 자신이었다”고 하는 의견도 있다.

또, 천황은 일미(日米) 전쟁의 개전을 논의한 ‘고젠 카이기(御前会議, 어전 회의)’ 에서, 개전에 반대했다는 의견도 있다. 쇼와 천황은 더글러스 맥아더와의 회담에서, “전쟁 책임은 일본 국민이 아니라, 모두 내게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다만,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천황이 자국의 전쟁에 대해 책임져야 할 것이 있음을 승인한다”는 조항은 없다.


5 전쟁 재판에서의 천황의 면죄(戦争裁判における天皇の免罪)

전후에 일본의 전쟁 범죄를 재판한 도쿄 재판에서 쇼와 천황을 소추하자는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러한 움직임은 곧 철회되었고, 천황에 대해서는 재판을 하지 않기로 했다. 또, 전쟁 직후에 쇼와 천황이 퇴위한다는 선택 사항도 전혀 고려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는 전후의 민주적인 선거에 의해 구성된 국회에 의해 일본국 헌법이 제정되고 대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은 후에 쇼와 천황은 천황의 지위에 머물러 전후의 ‘상징 천황제’가 시작되었다.

이에 대해,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측은,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미국에 의해 실시된 비민주적인 조치로서, 이것이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 문제를 역사적인 연구 과제로서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남긴 결정적 원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조치는 전쟁 책임에 대한 논의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냉전으로 향하는 전후 정치에서, 일본을 서방 진영에 끌어 들이려고 하는 미국 등 서방 연합국의 정치적 동기에 의해 채택된 것이라고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측은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한편,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지 않는 측은, 쇼와 천황에게 책임을 묻지 않은 것은 미국에 의해 실시된 합리적인 조치이며, 전후 일본의 민주화로의 이행을 원활하게 이끈 요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한 조치는, 일본 국민에 뿌리내리는 천황의 전통 문화적 가치와 자부심을 파괴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상당한 악영향과 혼란을 피할 수 있도록 했고, 또한 민주화 달성 후 일본 국민 스스로가 그 가치관을 상징 천황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의식 개혁에 있어서 적절한 사고 기간을 줬던 성공 사례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만일 쇼와 천황이 전범으로 처형되었다면 과연 그만큼 일본 국민이 미국의 점령 정책에 협력했을까 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런 조치를 취했을 경우 현재 일본인의 가치관, 사고 등 다양한 측면에서 이질적인 민족성을 낳았을 가능성이 지적되고 있다.


6 터부화(タブー化)

이처럼,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측은, 천황의 전쟁 책임은 전후에 해명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이러한 주장을 하는 측은, 전후 일본에서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금지되어서, 누군가의 강한 압력에 의해서 이 문제가 터부(taboo)로 간주되고, 그 경향은 더욱더 강해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근거로, 1988년에 천황의 전쟁 책임에 대해 시의회에서 답변한 나가사키 시장인 모토지마 히토시(本島等)가 총격을 당한 사건(‘나가사키 시장 총격 사건’) 등이 바로 그 증거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일본에서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토론 등을 하는 것이 법률 등에 의해 규제되는 것은 아니다. 즉, 일본인이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 추궁을 터부시하고, 또 터부가 있다고 주장하는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는 측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실제로 대부분의 일본인이 천황의 전쟁 책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라는 증거로 간주하는 논자도 있다. 한편, 이러한 터부가 천황의 권위를 높이는 것에 이용되고 또 그 권위가 이러한 터부를 강고히 하는 토톨로지(동어반복)가 되고 있다고 지적하는 논자도 있다.

6.1 ‘나가사키 시장에게 부친 7300통의 편지’(『長崎市長への七三〇〇通の手紙』)

1988년 12월에 나가사키 시의회에서 모토지마 히토시 나가사키 시장이 “천황에게 전쟁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발언한 것이 큰 파문을 불러 일으켰다.

관련해 일본 전국에서, 또 해외에서도 많은 봉서, 엽서 등이 보내지고, 그것들을 정리한 서적도 출판되었다. ‘나가사키 시장에게 부친 7300통의 편지(長崎市長への七三〇〇通の手紙)’라는 책에는, 1988년 12월 8일부터 1989년 3월 6일까지 시장의 집에 도착, 거기서 편집부에 보내진 엽서, 봉서, 전보, 전자우편 총 7323 통이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시장을 격려하는 것이 6942통, 비판·항의하는 것이 381통으로, 압도적으로 시장을 지지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모토지마 시장을 ‘지지한다’는 내용은, 즉 “천황의 전쟁 책임을 인정”한다고는 말하지 못하고, 예를 들어 “그 용기에 감동했다”는 논지의 것이나 반대세력의 폭력적이고 협박적인 행동에 비판을 표명하는 것 등도 많이 발견된다. 하지만, 자신의 경험 등을 언급하면서 시장의 발언에 지지를 표명하는 것도 역시 많이 수록되어 있다.


7 국내와 외국에서의 반응(国内や他国からの反応)

연합국인 영국, 호주, 소련, 중화민국은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추궁하고, 일부에서는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었지만, 맥아더의 정치적 판단으로 소추를 면했다. 또한 영국도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추방한 것이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 총통의 탄생과 나치의 대두를 초래했다면서 쇼와 천황을 점령 관리의 도구로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체적으로는 쇼와 천황을 미군의 포로로 관리하고 게다가 포로를 통해서 내각총리대신 및 최고재판소 장관의 임명에 관여하고, 내정 간섭한다는 계획서가 책정되었다.

한편, 영국, 네덜란드, 중국 각국 여론의 대다수는 쇼와 천황을 증오의 대상으로 봤다. 1971년(쇼와 46년)에 쇼와 천황이 유럽을 방문했을 때, 벨기에, 프랑스에서는 환영받았지만, 과거 일본과 교전국이었던 영국(일영 동맹의 구 동맹국), 그리고 네덜란드에서는 쇼와 천황에 대해 증오심을 가진 재향군인들의 항의가 있었다. 영국에서는 마차에 타고 있을 때 “천황은 돌아가라!”는 항의가 있었다.

영국의 경우 대중지 ‘더 선(The Sun)’은 “피로 물든 독재자”라고 하면서 쇼와 천황의 사진을 게재했는데, 쇼와 천황을 “버킹엄궁에서 VIP대우를 받은, 피로 물든 독재자”라고 하면서 특집으로 다뤘다. 다이소노 레이(大喪の礼, 천황의 국장)때도, 영국 미디어에서는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을 묻는 보도가 있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쇼와 천황이 승차한 차량에 계란, 보온병이 던져졌음은 물론, 식수를 했던 모종(苗)이 뽑혀질 만큼 반일 감정이 강했고*,  쇼와 천황이 재위중인 1986년 베아트릭스(ベアトリクス, Wilhelmina Armgard Beatrix) 여왕의 일본 방문은 네덜란드 국내에서 반대에 직면했다.

[* 편집자주 : 쇼와 천황이 왕립식물원에서 식수한 삼나무의 모종이 뽑혔던 사건. 네덜란드가 아니라 정확히는 영국 방문시에 일어났던 사건이다.]

태평양전쟁 종결 직전인 1945년 6월 29일에 실시된 미국인 여론 조사에 따르면, “쇼와 천황을 처형해야 한다”는 의견이 33%, “재판해야 한다”는 의견이 17%, “종신형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이 11%였다.

시종장(侍従長, 천황을 모시고 심부름하는 시종의 우두머리)인 이리에 스케마사(入江相政)에 따르면, 1975년(쇼와 50년), 천황이 방문했던 미국에서는 “천황에 대한 격렬한 증오를 드러냈던 미국인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관계자를 시달리게 한 경우도 있었지만, 미국은 일단 환영 분위기였으며, 천황은 후에 디즈니랜드도 방문했다. 또한 쇼와 천황은 미군 병사 희생자의 위령비를 방문하여 미국인들을 기쁘게 했다.

그러나 후에 허버트 빅스(ハーバート・ビックス, Herbert P. Bix)는 저서 ‘쇼와 천황(昭和天皇)’에서는 “쇼와 천황이 전쟁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는 주장이 제시되어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8 참고문헌(参考文献)

- 고미치 쇼뵤(径書房) 편집부 (편) '나가사키 시장에 부친 7300 통의 편지  천황의 전쟁 책임을 둘러싸고(長崎市長への七三〇〇通の手紙 天皇の戦争責任をめぐって)‘ 고미치쇼뵤(径書房) 1989년.

- 미야라 사쿠(宮良作) ‘오키나와 전의 기록 일본군과 전쟁 말라리아(沖縄戦の記録 日本軍と戦争マラリア)’ 신닛폰슈판(新日本出版) 2004 년.


9 관련문헌(関連文献)

- 이노우에 키요시(井上清), ‘천황의 전쟁 책임(天皇の戦争責任』 現代評論社)’ 겐다이효론샤(現代評論社) 1975년.
 
- 데라사키 히데나리(寺崎英成), 마리코·데라사키 밀러(マリコ・テラサキ・ミラー), ‘쇼와 천황 독백록·데라사키 히데나리 고요가카리 일기(昭和天皇独白録・寺崎英成御用掛日記)’ 분게이슌주(文藝春秋) 1991년.

- 하타 이쿠히코(秦郁彦), ‘히로히토 천황 다섯 가지 결단(裕仁天皇 五つの決断)’  고단샤(講談社) 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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